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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92)] 한말 의병장 척암(拓菴) 김도화 

“땅과 백성은 폐하의 사사로운 소유물이 아닙니다” 

류치명 문하에서 공부하고 명성황후 시해 후 안동의진 창의해 의병장 활약
의병 해산당하자 칩거하며 후학 양성, 한일합방 반대 상소 올리며 절개 지켜


▎김동호 주손이 이산정에 앉아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5대조 척암 김도화는 의병을 해산당한 뒤 이산정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 사진:송의호
"폐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행동하시는 것입니까. 오백 년 조종의 큰 보물과 삼천리 강토는 선황제가 폐하에게 주셨습니다. 보옥(寶玉)과 보기(寶器)는 폐하께서 사사로이 소유한 것이 아니고 땅 한 평, 백성 한 명도 폐하의 사사로운 물건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어찌 독단으로 주고받기를 필부가 밭이나 농산물을 팔고 사듯 하실 수 있습니까?”

의병장을 지낸 선비가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대한제국 황제에게 올리는 ‘합병하지 말 것을 청하는 상소(請勿合邦疏)’의 내용이다. 1910년 8월 대한제국 국권은 마침내 일제에 넘어갔다.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한 상태였다. 우국지사는 망국에 비분강개하다 이윽고 한일병합에 반대하는 상소를 써 내려갔다. 그는 나라 잃은 책임을 먼저 황제에게 돌리면서 이를 추궁한다. 폐하를 향한 신하의 결기가 예사롭지 않다.

명성황후 시해 이후 안동의진(安東義陣)을 이끈 의병장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 선생의 상소다. 선생은 다시 대문 위에 ‘合邦大反對之家(합방을 크게 반대하는 집)’라 붙이고 스스로 유폐 생활을 하면서 울분의 나날을 보냈다.

9월 16일 척암이 의병을 해산당한 뒤 후학을 양성한 강학소인 경북 안동시 일직면 이산정(泥山亭)에 들렀다. 김동호 5대 주손이 함께한 날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이산정이 본래는 건너편 귀미마을 팔용산 아래 있었습니다.” 정자를 지은 지 70년이 지나 무너질 지경이 돼 현 위치로 옮겼다는 설명이다.

이야기는 먼저 의병 시기로 넘어갔다. 1895년(고종 31)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다. 민심은 극도로 들끓는데, 다시 단발령이 내려진다. 비밀리에 ‘일제 토벌’ 사발통문이 돌고 마침내 의병이 조직된다. 그때 척암에게 고종으로부터 밀지인 ‘애통조(哀痛詔)’가 내려졌다. 거병(擧兵)을 독려하는 뜻이다. 선생이 당시 의대(衣帶)의 밀조(密詔)를 받은 것으로 보아 선생이 조야(朝野)에서 차지한 명망을 짐작할 수 있다.

드디어 안동의진이 결성된다. 척암은 ‘창의진정소(倡義陳情疏)’를 올려 거병 동기를 밝힌다. “나라 원수를 갚지 못하고 군주의 치욕을 씻지 못한 채 떳떳한 도를 지니지 못한다면 사는 것이 죽음만 못하기 때문에 동지를 일으켜 대략 군오(軍伍)를 이루었습니다.” 선생을 비롯해 곽종석·권보연 등이 중심이 된 의병은 권세연을 대장으로 추대, 한때 안동부를 점령한다. 하지만 친일 정권이 파견한 경군(京軍)에 패하고 만다. 유림은 다시 의병진을 결성하고 이번에는 72세 척암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병력은 수백 명. 패전 뒤 새로 의병장을 맡은 척암의 심경은 어땠을까.

고종의 밀지 받고 의병 일으켜


현실은 실망스러웠다. 나라 망하는 것을 수수방관만 할 테냐고 핏대 올리던 사람들은 선생을 의병장으로 추대한 뒤 형세가 불리해지자 태도가 달라졌다. 당시 고뇌는 [척암문집] ‘별집 상권’에 나온다. “창의하던 날은 온 고을이 뜻을 같이해 노소가 다투어 마음 있는 자는 창검을 잡고 재산 있는 자는 재물을 기울여 군비를 도왔다. 위로는 나라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부모의 유체를 보전하자고 맹세했다. (그러나) 한번 패한 뒤로는 흩어져 막중에는 부서를 맡을 자가 없고 불러도 오지 않았다. 심지어는 한가로이 쉬면서 비웃는 자도 있었다. 내 고향 충의의 풍속이 그 박하기가 이에 이르렀는가.”

척암이 이끈 안동의진은 어려운 여건에도 안동부를 다시 점령한다. 부사 김석중은 깃발을 내리고 변복(變服) 도주한다. 이어 경상좌도 여러 의병부대, 제천의 류인석·서상렬 부대 등과 연합작전으로 상주 태봉에 있는 일본 병참기지를 공격한다. 그러나 일본 정예부대와 총포의 화력 앞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쯤에서 김동호 주손이 서글픈 질문을 던진다. “선생이 오로지 나라 안위에 힘쓰는 동안 집안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의병을 이끄는 동안 가정은 풍비박산이 난다. 손자를 비롯한 가족은 삶의 터전인 안동을 떠나 영천시 화남면으로 옮겨 30년 타향살이를 했다. 거기서 1100장 목판이 만들어진다. “1940년쯤 현손은 안동 종가 옆집을 구해 겨우 돌아옵니다. 목판은 그 뒤 안동 이산정에 있다가 정자를 옮기면서 처분됐어요. 그중 90%는 반출돼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에 있는 것으로 압니다. 또 한국전쟁 직후인 7월 25일쯤 국군 비행기 폭격으로 집은 물론 많은 유물이 잿더미가 됐습니다. 그리고 선생은 네 자녀와 부인, 며느리 넷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었지요.”

군주·사직보다 백성이 더 중하다


▎이산정 뒤에 있는 자운정. 김도화의 증조인 귀와 김굉이 후학을 양성했던 공간이다. / 사진:송의호
패퇴한 의병은 다시 안동부에서 선생 막하로 모여든다. 다소의 전과도 올렸다. 그 무렵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다. 관군은 압력을 가해 오고 고종은 의병 해산을 종용하는 윤음(綸音, 타이르는 내용)을 거듭 내린다. 결국 척암은 1896년 의진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김도화는 의병 해산 뒤 자명소(自明疏)로 고종을 통박한다. “앞서는 거병을 촉구하시더니 이제는 의병 해산을 급선무로 하고 적의 우두머리 보호를 상책으로 여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엔 의병 해산 당일 참담한 정황도 적혀 있다. “전하의 백성을 전하의 병기에 죽도록 만들어 원통한 호소가 하늘을 뒤덮고 있습니다.” 친일 내각이 파견한 관군들이 왕명을 내세워 살육과 형벌을 일삼은 것이다.

[척암전집] 해제를 쓴 이완재 전 영남대 교수는 “명성황후 시해 후 고종은 유림의 힘으로 의병을 봉기시켜 국권을 회복하려고 밀조를 내린 듯하다. 그러나 이듬해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의병을 해산하라는 칙령을 내려야만 했을 것”으로 분석한다. 그때부터 선생은 세상일을 사절하고 후학 양성과 유학을 진작시키는 일에 힘쓴다. 그러면서도 나라를 근심하는 우국 일념만은 잊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 소식을 접하자 선생은 분연히 말한다. “이는 임금이 욕을 당한 것만 아니라 군주보다 중한 것이 사직이요, 사직보다 중한 것이 백성인데 백성이 장차 오랑캐의 노예가 되려 한다.”

척암은 결연히 붓을 들어 늑약 파기를 청하는 상소문을 짓는다. “천지가 뒤집히더라도 폐하께서는 나라를 남에게 독단으로 넘겨줄 수 없습니다 (…) 승냥이나 범도 저 다섯 역적은 더러워서 먹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셋이니 첫째는 나라를 멋대로 팔아먹은 죄요, 둘째는 외부의 도적들과 몰래 결탁한 죄요, 셋째는 군주를 협박한 죄입니다.”

이 늑약이 있은 지 5년 뒤 국권은 일제에 넘어갔다. 선생은 여러 날 통곡하며 실성한 듯했다. 김동호 주손은 “합방 이후엔 지은 글이 거의 없다”며 “술로 세월을 보내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다가 선생은 대한제국 황제에 이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 앞으로 합방하지 말 것을 청하는 ‘격고통감문(檄告統監文)’을 보낸다. 그 무렵 총독의 밀명을 받은 관학자 다카하시 도루(高橋亨)가 선생을 찾는다. 그는 척암을 만나 뜬금없이 유학을 진작시켜 달라는 청을 한다. 선생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망국의 신하가 무슨 말을 하랴. 내 뜻은 격고문으로 다 피력했으니 다시 말할 것이 있겠는가. 아침저녁으로 죽고자 하는 마음뿐이다.” 다카하시는 합병 직후 삼남지방 유생의 동향을 살피며 순회하고 있었다. 다카하시는 이때 영남에서 척암 등 여러 의병장의 책상 위에 하나같이 [퇴계집]이 놓여 있음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는 “퇴계 사상이 조선 말기 의병운동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봤다.

1912년 8월 선생은 망국의 한을 품은 채 88세로 서거했다. 이산정을 찾은 날 앞서 선생의 묘소를 답사했다. 이산정에서 20㎞쯤 떨어진 안동시 송천동 안동대학교 정문 인근이다. 묘소는 원룸에 둘러싸여 있었다. 예를 표했다. 비석에는 ‘조선징사척암김선생’이라 새겨져 있다. 징사(徵士)란 절행이 뛰어난 선비에 붙여지는 존칭이다. 묘소가 멀리 떨어진 이유가 궁금했다. 주손이 답했다. “선생의 상여는 본래 집 가까운 곳으로 나갔으나 일본 순사의 개입으로 되돌아와 가매장했다가 조부가 묻힌 송천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망국의 한을 품은 채 88세로 서거


▎김도화의 시와 편지, 상소문 등이 수록된 55권 29책인 [척암집]. 일제에 저항하는 내용이 담긴 글은 광복 후인 1947년 간행됐다.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김도화는 1825년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에서 태어났다. 8세에 [소학]과 [통감]을 배우며 한번 읽으면 능히 암송했다. 한동안은 책을 닥치는 대로 탐독했다. 그는 20세를 전후해 이것이 위기(爲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후 ‘夙興野處(숙흥야처,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溫故知新(온고지신)’ 여덟 글자를 써서 벽에 붙이고 사서와 태극도, [근사록] [주자서절요] 등에 침잠했다.

김도화는 25세가 되던 1849년 아버지의 분부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을 찾아가 천인성명(天人性命) 강의를 듣고 질정한 뒤 [배문록(拜門錄)]을 지었다. 정재는 학문을 더욱 넓히라는 뜻으로 김도화에게 ‘展拓(전척)’ 두 글자를 써 주면서 크게 기대하고 인정했다. 김도화의 호 ‘척암’은 여기서 비롯된다. 주손이 문을 열자 이산정 마루 위에 걸린 ‘전척’ 두 글자가 보였다.

척암은 이후 10여 년간 정재를 찾아 배우고 질문하면서 학문은 더욱 다져졌다. 그는 조카뻘인 서산 김흥락과 함께 류치명 문하의 양대 제자로 꼽혔다. 척암은 스승의 일생과 학문을 [정재선생서전]과 [기문록]에 담았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과거 공부와 문장 공부를 일찍부터 시작했다. 그러다가 1866년 부친을 여읜 뒤에는 둘 다 버리고 도학에 전념했다. 1876년 큰 흉년이 들자 제전(祭田)을 팔아 궁핍한 일가와 이웃을 구휼한다. 1890년 그의 학문이 널리 알려져 제자들이 모여들자 자운정 인근에 강학 공간인 이산정을 창건했다.

척암은 1893년(고종 30) 69세에 천거로 의금부 도사(都事)에 임명된다. 그러나 2년 뒤 명성황후 시해로 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격랑의 삶을 산 것이다. 김도화는 평생 [춘추] 공부를 남달리 했다고 한다. 혹자는 선생을 두고 도학자라기보다 문장가로 평하기도 한다. 이는 한말 이건창·김윤식·김택영·황현 등에 필적할 정도로 척암의 글이 회자했기 때문이라고 이완재 교수는 분석한다. 그래서 빛나는 문장에 묻혀 도학적 측면이 우뚝하게 드러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제 저항 내용은 광복 이후 발간


▎안동시 송천동 안동대 앞에 자리한 김도화 묘소. 원룸에 둘러싸여 있다. / 사진:송의호
그의 문집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처음 간행된다. 그러나 일제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은 시문과 상소문, 격문 등의 글은 당시 수록하지 못하다가 광복 이후인 1947년 별집 2책으로 처음 빛을 보았다. 별집에서 눈길을 끄는 글에는 ‘최익현·민영환 전’ ‘안중근·이준 전’ 등 전기 4편이 있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순국한 지사를 다루었으며 선생 만년의 사실상 마지막 저술이다. ‘안중근·이준 전’ 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두 분은 충렬이 격동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았다. 어떤 분은 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다가 세상을 떠났고, 어떤 분은 내장을 꺼내어 간절히 호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공자가 ‘뜻을 품은 선비는 자신의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고 했다. 두 분은 이것을 실천한 것이리라.”

전체 문집은 총 55권 29책 분량이다. 그동안 국역을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던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이 난제에 뛰어들었다. 국학진흥원은 자체 한문교육원이 양성한 청년 번역가 20명과 연구지도 교수 8명을 투입해 최근 3년 동안 국역을 추진했다. 자그마치 원고지 2만2000매 분량이다. 이후 다시 국학 전공 청년 10명을 참여시켜 1년간 편집과 교정을 거쳐 4년 만에 [척암문집] 국역이 완료됐다. 우리 유학사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국역 문집은 올해 전자책으로 발간됐다.

[박스기사] 우리 유학 정맥 이으며 의병항쟁 이끈 민족 지성 - '착암전집' 제자 명부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보고(寶庫)

척암 김도화는 성리학을 천착하며 개항 이후 의병 항쟁, 상소 투쟁 등 자신의 길을 걸었다. 1983년 발행된 [척암전집] 제자 명부인 ‘급문록(及門錄)’에는 문인 350여 명이 올라 있다.

강윤정 안동대 교수에 따르면 척암의 문하에는 1860년대부터 사람들이 찾아왔다. 문단이 형성된 것은 1895년 의병항쟁 이후였다. 문도는 1900년대 꾸준히 증가했고 1912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문인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가까이는 안동·영주·봉화·영양·청송 등 경북 북부를 비롯해 멀리 영천·경주·울산·진해·함안 등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출신 문중은 척암과 같은 의성 김씨가 50명으로 가장 많았다. 제자 중 관직에 임명된 사람은 56명이다. 문도 중 안동·선성 의진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의병은 김홍락 척후장, 류창식 소모장 등 9명이 있고 의성·청송 의진에도 김상종 창의장 등 3명이 있다. 안동 유림은 1905년을 전후해 애국계몽운동으로 전환한다. 이를 주도한 인물에도 척암의 제자가 적지 않다. 이상룡·김병식·송기식·류인식 등이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은 급문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유년기 척암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일제강점기 구국 계몽에 나선 이들은 만주 망명을 통해 서간도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국내에 남아 3·1운동 등을 이끌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311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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