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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17)] 소동파의 ‘동파육’과 송나라 음식 이야기 

온난기로 음식 재료 넘쳐나 누구나 ‘미식가’ 

송나라 때부터 석탄 본격적으로 사용해 음식에 ‘불맛’ 입혀
화력 견디는 ‘웍(Wok)’ 등장, 일본에서 무쇠 수입해 만들어


▎일류 셰프로 인정받았던 소동파가 굳이 고급 재료가 아닌 돼지고기를 이용한 동파육(東坡肉) 레시피를 남긴 것을 두고 애민정신의 발로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손님은 기뻐하며 빙그레 웃고서 술잔을 씻고서 다시 따르니 안주는 어느새 없어지고 잔과 쟁반이 어질러진 채 서로 베고 배 안에 누워 자니 어느새 동녘이 훤히 튼 것도 모르고 있었네.’

소동파로 더 잘 알려진 송나라의 시인 소식(蘇軾, 1037~1101)이 쓴 ‘적벽부’의 한 구절이다. 소동파는 시인이기도 했지만 정치가이자, 뛰어난 요리사이기도 했다. 그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동파육(東坡肉)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한국에서도 사랑받는 요리다. 동파육은 돼지고기 삼겹살 덩어리를 ‘소흥주(紹興酒)’에 담가 삶은 뒤 간장과 갖은 향신료 등을 넣고 조려서 만든 음식이다. 기름투성이일 것 같지만 한 입 베어 물면 의외로 담백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느껴진다.

동파육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관련된 이야기도 다양하다. 그는 여가 시간에 요리를 즐겼는데 하루는 돼지고기를 찌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가 찾아오자 바둑을 두기 시작했고, 돼지고기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 나중에 돼지고기가 타는 냄새에 헐레벌떡 찜통을 열었는데 의외로 적당히 조리된 삼겸살찜이 나왔고 이것이 동파육이 됐다고 한다. 또 그가 항저우의 관리로 있을 때 양쯔강이 범람했는데 이때 소동파가 수천 명의 인부를 데려가 제방을 쌓아 백성들이 근심 없이 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자 백성들은 감사의 표시로 돼지고기를 보냈는데, 소동파는 이를 자신만의 ‘레시피’로 요리해 백성들과 나눠 먹었고 이때부터 동파육이 인근에 널리 퍼지게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화가 사실이든 아니든 모든 스토리가 그와 연관된 것을 보면 소동파가 만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중화요리의 시작, 송나라


▎시인이자 정치가인 소동파는 동파육(東坡肉)을 만든 뛰어난 요리사이기도 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요즘이야 일본, 베트남, 타이, 이탈리아 등 다양한 국적의 음식을 동네에서도 쉽게 맛볼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한 세대 전만 해도 동네에서 접할 수 있는 ‘외국 음식’은 중국 요리가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짜장면과 짬뽕은 정통 중화요리가 아니라 지극히 한국화된 중화요리지만 말이다. 특히 짜장면은 한국인의 소울푸드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결정적인 이유는 짜장면을 만드는 방식에 있다. 짜장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면보다는 춘장과 각종 야채와 고기를 섞어 식용유에 볶는 과정이 중요한데, 이때 화구와 웍(Wok)이 만들어내는 중국 요리 특유의 불맛을 따라가기 어렵다고 한다. 웍은 중화요릿집에서 사용하는 거대하고 무거운 철 냄비다. 무쇠를 사용하기 때문에 매우 무겁고 이를 다루는 데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앞에서 소동파를 소개했는데, 그가 요리사로서도 명성을 떨친 이유가 사실 이것과 연관이 있다. 바로 송나라 시대부터 웍이 사용됐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이전 시대, 예를 들어 한나라나 당나라 때는 유명한 술은 무수히 등장했지만, 전해지는 요리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기록이 없어서라기보다 송나라 시대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음식이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 접하는 거의 모든 중화요리의 시작점은 바로 웍을 사용한 송나라다.

이것은 중국의 4대 기서 중 가장 많이 읽히는 [삼국지]와 [수호지]를 비교해봐도 확연히 드러난다. 후한 말엽부터 삼국시대를 다룬 [삼국지]에서 요리가 등장한 대목을 말해보라고 하면 아마도 거의 떠오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제갈량이 남만 정벌 당시 풍랑을 멈추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강에 사람 머리 대신 띄운 만두 정도 아닐까.

하지만 북송 시대를 다룬 [수호지]에는 무수히 많은 음식 이야기가 나오고 음식점이 주요 무대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양산박의 우두머리 송강이 강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만 해도 잉어를 쪄서 만든 매운탕이나 ‘마라’로 추정되는 두부 요리 등 구체적인 음식과 식재료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그것은 이 시대에 실제로 송나라에서는 음식 열풍이 불었고 어느 정도 경제력만 갖추면 누구나 미식가가 될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몇 년 전부터 ‘셰프’가 셀럽으로 대우받고, 1인분에 몇만원에서 몇십만원까지 하는 오마카세 스시집을 비롯해 맛집마다 긴 줄을 서는 한국의 분위기와도 유사한 면이 있다.

송나라의 수도 개봉(開封, 카이펑)은 우리에게 사극 ‘판관 포청천’의 무대로 유명하다. 포청천은 개봉부의 부윤, 즉 오늘날의 한국으로 치면 서울시장 같은 인사였다. 공명정대한 일 처리로 명성이 높았지만, 이 시기의 개봉은 요리의 천국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개봉에는 1000년 전인 당시에 이미 70여 곳의 전문 식당이 성업 중이었으며, 24시간 영업을 내건 음식점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요즘도 딤섬 전문점에 가면 수십여 가지의 딤섬 종류에 놀라게 되는데, 하나의 요리를 이렇게 다양하게 만들어낸 것이 바로 송나라의 음식점들이었다. 유통업 발달과 함께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농산물과 해산물 등 요리 재료를 새롭게 재해석해 내놓은 요리들이 인기를 얻었으며, 설탕과 꿀을 이용한 과자나 빙과류 등 디저트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가게들도 호황을 누렸다.

그렇다면 왜 송나라였을까? 이전의 당나라도, 이후의 명나라도 아닌 왜 하필 송나라 때 이런 음식 혁명이 일어났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봄직하다.

수도 ‘개봉’은 요리의 천국


▎송나라의 화려한 궁중생활과 미식문화를 묘사한 ‘문회도(文會圖)’. / 사진:교양인
첫 번째 비밀은 연료에 있다. 어떤 음식평론가는 중화요리의 비결이 ‘불맛’이라고 하는데, 높은 화력을 이용해 굽고, 찌고, 볶는 특유의 맛과 향이 다른 음식을 압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낮은 화력으로는 중화요리 특유의 맛을 내기 어렵다. 그런데 송나라 때 중국은 에너지 혁명을 맞이하는데 바로 석탄의 사용이었다. 석탄을 사용하면서 이전에 나무 땔감을 이용할 때보다는 압도적인 고온을 일으켜 음식을 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중화요리는 일본 요리보다 3배가량의 화력을 요구한다고 한다. 어쨌든 이런 환경 때문에 중국인들은 이때부터 요리를 날로 먹기보다는 찌거나 볶아 먹는 쪽을 선호하게 됐다. 물도 마찬가지. 차가운 생수를 마시기보다는 뜨거운 차를 마시는 쪽이다. 물론 한국을 방문한 중국 관광객들의 인기 코스가 노량진수산시장이라고 하는데, 관광지의 별미일 뿐 실제로는 생선회를 별로 먹지 않는다고 한다.

두 번째 비밀은 무쇠였다. 이러한 고온을 견딜 수 있는 조리도구는 무쇠만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런 무쇠가 충분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은 일본에서 무쇠를 대량으로 수입했고, 이 시기 일본에서는 무사들이 쓰던 칼이 대량으로 수출됐다. 일본인들은 중국에서 무기를 수입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대부분이 웍을 만드는 재료로 재활용됐다. 사실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군사력이 약했던 국가로 평가되는데, 일본도를 수입해 음식을 만드는 도구로 썼다니 확실히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였다는 생각도 든다.

세 번째 비밀은 기후였다. 송나라 시대는 삼국시대부터 당나라 때까지 이어진 긴 소빙기를 마치고 온난기로 접어든 시기였다. 농작물은 잘 자랐고, 숲이 되살아났으니 동식물도 풍부해졌다. 음식 재료가 다양해지니 요리가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역사학자는 이런 송나라의 분위기가 음식에 집착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송나라는 거란(요), 여진(금), 몽골(원) 등 이민족의 침입에 끊임없이 시달렸던 나라였다. 나중에는 금나라에 화북 일대를 내주고 양쯔강 일대로 수도를 옮겨 남송을 세우기도 했다. 이런 현실의 불안감과 좌절이 탐미적인 인생관을 만들었고, 그 대상 중 하나가 음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동파 같은 정치가도 미식가이자 요리사가 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고려를 싫어한 소동파

다시 소동파 이야기다. 사실 그가 활동했던 북송 시대만 해도 돼지고기는 그다지 인기 있는 음식 재료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보다는 양고기가 주된 재료였다. 돼지고기는 양고기보다 하급의 음식 재료로 인식됐으며, 가격이 저렴했는데도 일반인들조차 잘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류 셰프로 인정받았던 소동파가 굳이 고급 재료가 아닌 돼지고기를 이용한 ‘동파육’ 레시피를 남긴 것을 두고 애민정신의 발로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백성들이 저렴하게 좋은 고기 음식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것이다. 전혀 꾸며낸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은 것이 그는 100여 가지에 달하는 요리법을 개발해 [동파주경(東坡酒經)]이라는 책을 남겼는데 여기엔 야채 요리 레시피도 있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 그는 화려한 명성과 달리 유배를 밥먹듯이 다녔는데, 그의 요리 실력의 배경을 두고 유배 시절 어려운 형편 속에서 식사를 스스로 챙겨야 했던 환경과 연관을 짓기도 한다. 좋은 재료를 구하기 어려우니 유배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제대로 만들어 먹는 법을 연구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송나라의 백종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소동파는 고려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었다. 당시 고려는 송나라의 주요 교역국이었다. 고려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그에 대한 답례품 등으로 너무나 많은 세금이 낭비되고 있으며, 고려가 송나라의 허와 실을 정탐해 거란 등에 넘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고려와 교류하는 것은 “이익은 없고 다섯 가지 손해만 있다”고 말했을 정도다. 고려가 거란의 스파이는 아니었지만, 그가 분개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송나라는 군사력이 약해 이민족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런 송나라에 고려는 소중한 이웃이었다. 송나라가 고려의 사신이 올 때마다 비싼 선물을 한 보따리씩 내렸던 것도 고려와 연합작전을 벌여 거란이나 여진을 물리치고자 했던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고려는 군사 작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딴청을 부렸다. 고려의 입장에서 송나라는 무역으로 이익을 낼 수 있고, 선진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이웃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위해 전쟁이라는 불구덩이에 같이 뛰어들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실리 외교라 할 수 있겠지만, 송나라 입장에서는 당연히 화가 날 만한 일이었고, 그런 정서를 대표하는 인사가 소동파였던 것이다.

하지만 소동파가 고려를 천시하든 말든 그의 명성과 문학 작품은 고려에서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 그래서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이름에서 ‘식’은 소동파의 본명 소식의 ‘식’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소프트파워는 정치를 능가하는 것 같다. 중국에서 제아무리 한한령(限韓令)을 앞세워도 K팝(K-POP)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312호 (20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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