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JOA의 핫피플 & 아트(19)] 실험미술 운동의 선구자, 화가 김구림 

“미술관 또 못 묶었다. 50여 년째 변한 게 없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전시관서 2월까지 실험미술 1세대 김구림 개인전
실험적 전위예술로 해외서 명성… 관념 초월 퍼포먼스로 국내서도 화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세대 실험미술가 김구림을 재조명하는 개인전이 2월 12일까지 열린다. / 사진:김구림
"이번 전시에 전위적 작품은 없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장례를 치르는 퍼포먼스 [현상에서 흔적으로(1969)]를 이번에 다시 재현하고자 했는데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못 하게 되었다. 아직까지 변한 게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이번 전람회를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작가라고 얼굴 내밀기가 부끄럽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위예술가 김구림의 말이다.

‘최초’ 따라다니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선구자


▎김구림은 다양한 전위적인 퍼포먼스로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을 개척해왔다. / 사진:조정화
국립현대미술관(이하 MMCA)은 올여름,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라는 전시를 진행했다. 이때 소개된 1세대 실험미술작가들 중 김구림을 재조명하는 개인전이 현재 MMCA 서울 지하 1층 6, 7전시실에서 2023년 8월 25일부터 2024년 2월 12일까지 열리고 있다.

1936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김구림은 정규 미술을 거부하며 미술 대학을 중퇴했다. 이후 1959년 대구 공회당화랑에서 개인전을 시작으로, 점차 앵포르멜 추상 작업을 본격화했다.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 메일아트, 실험영화, 대지미술 등 한국의 아방가르드 예술의 선구자로 굵직한 발자취를 남겨왔다. 2017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번 MMCA의 [김구림] 전은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작품세계를 아카이브 자료와 함께 총망라했다. 한국전쟁 이후 실존적 문제의식을 다룬 초기회화 작업에서부터 1960~70년대 한국 실험미술 중심에서의 퍼포먼스와 설치작품, 1980년대 중반부터 이어온 [음과 양] 연작, 국외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던 [태양의 죽음](1964)과 [전자예술](1969), [1/24초의 의미](1969),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 [걸레](1974) 연작 등 주요한 의미를 지닌 엄선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별도 행사로 지난 9월 7일 김구림이 직접 연출한 영화, 무용, 음악, 연극을 한데 잇는 대규모 공연을 통해 총체 예술을 추구해 온 거장의 저력을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

‘우리나라 최초’라는 수식어가 김구림만큼 많은 작가가 또 있을까? [1/24초의 의미]는 우리나라 최초의 실험영화로, 분주한 교차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 등 도시화로 가속화한 서울의 양면성을 1초 당 24개의 프레임으로 보여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 [공간구조](1968) 연작은 구멍난 플라스틱 반구를 사용했는데, 자신이 근무한 섬유회사의 산업 부속품으로 조형적 옵아트를 시도한 작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지미술 [현상에서 흔적으로-김구림의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1970)는 ‘쥐불놀이’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100여m 경사면에 삼각형 7개 모양으로 잔디를 부분적으로 태우는 퍼포먼스였다. 역사적인 이 퍼포먼스는 2016년 과천관 MMCA 30주년 기념으로 재연됐다. [현상에서 흔적으로] 연작은 세 개의 빨간 플라스틱 통에 얼음덩어리를 넣고 트레이싱 페이퍼를 얼음 크기로 잘라 놓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고체인 얼음이 액체 상태의 물이 되고, 다시 기체가 되어 증발되는 물성(materiality)과 시간성(temporality)에 관해 탐구한 작품이다.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아카이브 구축되기도


▎김구림 작품은 소재와 형식 등 예술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 사진:김구림
김구림은 ‘회화68’(1968),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1969), ‘제4집단’(1970) 등 한국 미술계의 주요 예술집단을 김구림 주도로 결성하고 다양한 매체의 실험미술로 사회현상을 반영하며 전위적인 활동을 펼쳐왔다. 197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판화, 비디오 아트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1981년 동판화 메조틴트 기법을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등 국내 판화 역사에도 한 획을 그었다. 198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작품세계를 확장시켰는데, 1992년 미국에서 백남준과 2인전을 개최하고 백남준의 작품 [피아노 위의 정사](1970)를 직접 연출했다. 이후 2000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초대전 《현존과 흔적》 개최를 계기로 한국에 돌아와 [음과 양] 연작을 통해 그 개념을 지속하면서 여전히 새로운 신작들을 발표해오고 있다.

사실 김구림이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회화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실험미술 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는데도,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경험할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반면 해외에서 그의 선구적인 전위예술 작품들은 제7회 파리비엔날레, 제12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제2회 국제 임팩트 아트 비디오-74(스위스 로잔) 등에서 활발하게 소개됐다. 뿐만 아니라 2012년 영국 테이트 모던의 초대로 잭슨 폴록, 이브 클라인, 쿠사마 야요이, 앤디 워홀 등과 함께 «A Bigger Splash Painting after Performance» 그룹전을 통해 [보디페인팅](1969)을 선보였고, 2016년에는 독일 뭔헨에서 [전후의 미술](1945~1965) 하우스데어쿤스트에서 열린 전시도 참여했다.

영국, 테이트 모던과 테이트 라이브러리 스페셜컬렉션, 미국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등 권위 있는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고,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김구림의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외에서 먼저 주목을 받게 되자 한국 화단에서 관심을 보이며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김구림은 반(反) 미학, 탈(脫) 매체를 최초로 이끈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이다.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전방위적 활동은 시대의식에 따른 반응이었고, 관습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평생 독자적인 작품을 구축해온 김구림을 평창동 작업실에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현대미술관 개인전, 작품 세계관 충분히 못 보여줘”


▎김구림의 예술성과 그의 작품 세계관의 독창성은 해외 미술계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다.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는 김구림의 아카이브가 구축돼 있다. 런던에서 진행한 ‘걸레 퍼포먼스’. / 사진:김구림
어릴 때부터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나?

“자주 바뀌었다. 집안 대대로 의사 집안이라 어릴 때 외과의사가 되려고 했다가 집에 있는 기계들을 분해하고 놀면서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소설가가 되겠다고 소설만 읽다가 열여섯 살에 소설도 썼다. 그러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모두 그만뒀는데, 어느 날 생각해 보니 번역도 통역도 필요 없고, 외국에 안 가도 보여주고,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이 그림이었다. 그래서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실, 어느 분야를 해도 잘할 자신은 있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70여 년 평생 해온 작품들을 총망라하는 대규모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소회 한 말씀 듣고 싶다.

“제약이 많아 충분히 나의 작품 세계관을 보여주지 못했다. 연대별로 작품을 진열하지 못해 아쉽고, 국립현대미술관을 묶는 퍼포먼스도 거절당해 많이 아쉬웠다.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미술전에 초대작가로 선정돼 전람회가 있는 경복궁 현대미술관을 흰 광목으로 칭칭 묶은 다음 남은 천을 현관 앞마당에 파묻어 미술관 전체를 작품화했다. 그런데 26시간 만에 철거당했다. 그 뒤 몇십 년이 지났는데 국립현대미술관을 묶는 작업을 결국 또 못했다. 그나마 이번 전시가 ‘김구림’이라는 사람을 좀 더 알려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 위안으로 삼고 있다.”

현재 전시 중인 [문명, 여자, 돈](1969~2016), 22분 10초 작품이 매우 인상적이다.

“당시 미디어 작품은 8㎜ 필름으로 작업했다. 해방 이후라 굶어 죽는 사람이있던 시절이다. 서울역에 가면 처녀들이 밥이라도 먹으려고 시골에서 보따리 하나 들고 상경해 창녀촌으로 가는 것을 보고 시대의 아픔을 담고, 고발하기 위해 만들었다.”

대표작품 중 하나인 [태양의 죽음]은 어떻게 제작하게 되었나?

“군 생활 도중 군병원에 입원했는데 열악한 환경 때문에 며칠 만에 가깝게 지낸 병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계속 보게 되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한 생명이 허무하게 죽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제대 후 [태양의 죽음], [묘비명] 등 ‘죽음’에 대한 시리즈를 많이 했다. 참담했던 그 시대를 반영한 것이다.”

“미대 안 나왔다고 한국 화단서 인정 못 받아”


▎한국에 돌아온 뒤 발표한 [음과 양] 연작은 다양한 매체의 실험미술로 사회현상을 반영하고자 했다. / 사진:김구림
[태양의 죽음]은 영국 테이트 모던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했다.

“[태양의 죽음] 작품뿐 아니라 [보디페인팅]과 경복궁 현대미술관을 묶는 것 등이 소장되어 있다. 백남준 다음으로 많다. 테이트 스페셜 라이브러리에 우리나라 최초로 아카이브가 구축되어 있다. 현재까지도 예술가로서 최초이다.”

미술뿐 아니라 연극, 무용, 음악, 영화 등 많은 장르를 아우르며 왕성하게 활동해왔다. 한 마디로 어떤 예술가라고 생각하나?

“나는 지금까지 예술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아무도 개인전을 불러주지 않았다. 어느 날 아주 작은 갤러리에서 연락이 왔고, 어렵게 개인전을 할 만큼 힘든 시기였다. 남을 따라하는 것을 싫어했다. 살면서 가장 하고 싶은 게 그림이었고 영화, 무용, 퍼포먼스, 오브제 등의 작업을 하게 되었다.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내가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을 때론 화면에, 때론 퍼포먼스로, 때론 영화, 연극, 음악, 무용 등 어떤 매체나 장르를 한계 짓지 않고 메시지를 잘 전달할 수 있다면 선택해 표현할 뿐이다.”

미국에서 15년을 살았는데 2000년도에 돌연 한국으로 들어왔다.

“문예진흥원에서 한국에 들어오라고 여러 번 연락이 왔고, 아이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 들어왔다. 당시 셋방살이를 했는데 학벌이 없어 일을 구하기 힘들어 쌀이 떨어질 때가 많았다. 신문사 문화교실이나 학교 강사를 하면서 생활했다. 그런데 테이트 모던에 작품이 소장되고, 한국보다 오히려 외국에서 알아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2013년 시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하게 되었고, 점차 전시 기회가 많아졌다. 내 조국이란 곳을 왔는데 미술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화단에서 많은 아픔을 겪었다. 힘들어서 이 나라를 떠나려고 했다. 내 가슴속에 눈물이 흐른다.”

70여 년 평생 예술 활동을 해왔다. 특히 애정이 가는 작품은?

“늘 불만이다. 하나도 애정 가는 작품이 없다. 완성된 작품은 늘 아쉽고 불만이 많아 새로운 작업을 자꾸 하게 된다. 라디오 시대, 흑백 TV 시대, 컴퓨터 시대를 거쳐 오면서 나의 사고도 변해왔다. 시대가 변하면 내 사고도 변하고 작품도 바뀐다. ‘진정한 예술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 시대가 요구한 작품들을 할 뿐이다.”

불타버린 앨범에서 유일하게 남은 흑백사진


▎김구림이 꼽는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은 네 살 때 찍은 사진이다. 전처와의 불화로 사진첩이 불타 없어지면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어릴 적 사진이다. / 사진:김구림
전위미술의 선구자 등 우리나라 작가들 중 ‘최초’라는 수식어가 가장 많이 따라다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설치미술, 일렉트릭 아트, 대지미술, 메일아트 등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했고, 화가 중에 명동, 광화문, 이대 앞에서 거리 패션쇼를 처음 시도했다. 실험영화, 실험음악, 실험무용 외에도 판화를 보급했고, 판화 역사와 판화 감상 책을 냈다. [서양판화가 100인과 판화 감상] 책은 이론과 함께 판화가 100인의 작품을 만날 수 있어 판화사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책이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이 안 하는 것만 해왔던 게 사실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사진 한 장이 있다면.

“전처는 예술을 몰랐다. 예술을 해도 팔 수 있는 그림만 그리지 잔디를 불태우고, 얼음을 쌓아 놓는 게 무슨 예술가냐고 하더니, 어느 날은 100호 사이즈 작품이 칼로 그어져 있었다. 내 일생에서 가장 슬픈 시기였다. 나는 이혼을 싫어한 사람이다. 그런데 외출해 돌아오니 아파트 문이 잠겨 있고, 연락이 두절됐다. 계속 집에 들어갈 수 없어 혼자 생활하다가 결국 미국으로 가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이혼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전처가 앨범을 비롯해 영화콘티·무용·작곡 외 중요한 자료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내 생에 가장 뼈아프다. 다행히 사진관에서 찍은 어릴 때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어 애틋하다.”

※ JOA(조정화) -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순수사진으로 석사 학위를, 조형예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몇 차례 개인전을 열고, 광주비엔날레 등 다수 국내외 그룹전에 참여했다. 단국대, 상명대 등에서 20여 년간 강의하면서 [포토닷], [디지털카메라매거진], [미술세계], [월간중앙] 등에 예술 관련 연재와 기고 글을 써오고 있다. 저서로는 [그래서 특별한 사진 읽기](2020년)가 있다.

202401호 (2023.1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