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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12)] 위기의 고려와 조선 구해낸 최무선 

국내 최초로 화약 개발해 왜구 물리쳐 

함포 처음 사용한 진포해전… 이후 화약 무기 제조기술 크게 발전
조선 성리학 대가 권근, 목화 들여온 문익점보다 최무선을 높이 평가


▎전북 군산시 금강시민공원에 설치된 진포대첩 기념비. 최무선은 이 해전에서 자신이 개발한 화약 무기로 왜구선 300여 척을 침몰시키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어진 육상 전투인 이성계의 황산대첩 승리로 고려말에 극성을 부린 왜구 침략의 기세가 꺾였다. / 사진:연합뉴스
"문중용(文中庸)을 뽑아서 사헌 감찰로 삼고, 최해산(崔海山)을 군기 주부로 임명했다.”

[태종실록] 1401년 윤3월 1일자 기사 내용이다. 여기서 문중용은 목화씨로 유명한 문익점의 아들이다. 최해산은 국내 최초로 화약 무기를 개발한 최무선의 아들이다. 문익점과 최무선은 고려 말 커다란 공을 세웠으나 왕조가 바뀌면서 자신의 공적에 걸맞은 음서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음서는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관직 생활을 했거나 공훈을 세웠을 경우 그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특별히 서용하는 제도다. 당시로서는 너무도 당연했던 혜택이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의정부 참찬 권근이 태종에게 상소를 올린 것이다. 상소 내용을 조금 살펴보자.

“고 간의대부 문익점이 처음 강남에 들어가서 목화 종자 두어 개를 구해가지고 왔습니다. 이를 진양 시골집에 보내 심게 했으며 (중략) 이후 온 나라에 널리 퍼지게 돼 모든 백성이 위아래 없이 목면을 입게 됐으니 이는 모두 익점의 공입니다. 하지만 큰 공덕에도 응보를 받지 못하고 일찍 죽었고, 아들 중용은 (중략) 상을 마친 뒤에도 그대로 진양에 숨었으니 성품이 쓸 만한 선비입니다. 고 지문하부사 최무선은 처음으로 화약을 제조해 능히 해구를 제압하였으니 실로 국가에 공이 있습니다. 그의 아들 해산도 또한 마땅히 등용해야 합니다.”

고려 말 일어난 사상 최대 규모 왜구 침입

권근은 고려 말 조선 초에 활약한 문신으로, 필명이 중국에까지 알려진 시인이자 조선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한 유학자다. 그의 상소는 문익점에 대한 설명이 보다 길고 상세하지만, 정작 권근이 더욱 높게 평가한 인물은 최무선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무선에 대한 설명이 더 간략했던 이유는 뒤에 설명하기로 한다.

권근은 아비의 공덕에 보답하기 위해 자식에게 벼슬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최무선의 활약에 크게 감동했던 듯하다. 최무선을 칭송하는 시까지 쓸 정도였다.

“명공의 재략이 때맞추어 일어나니(明公才略應時生)

삼십 년 왜환이 하루만에 평정됐네(三十年倭一日平)

전함은 바람 받아 나는 새를 앞지르고(水艦信風過鳥翼)

화차는 진 갖추며 우레 소리를 토하네(火車催陣震雷聲)

주유가 갈대 불지른 게 가소로울 뿐이고(周郞可笑徒焚葦)

한신이 배다리 건넌 것도 자랑이 못되네(韓信寧誇暫渡甖)” - ([양촌선생문집] 제4권 ‘시’)

‘진포에서 왜선을 쳐부순 최무선 원수를 치하하다(賀崔元帥茂先破鎭浦倭船)’는 시의 앞부분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함포를 실전에 사용했던 진포해전에서 최무선의 활약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명공(관리를 높여 부르는 호칭)은 최무선을 일컫는다. 권근은 이 시에서 “능연각에 초상이 걸리고 그중에서도 으뜸이리(凌煙圖畫冠諸卿)”라고 노래했다. 능연각은 당 태종과 그를 도와 창업과 수성에 힘을 쏟은 공신 24명의 초상화를 걸어둔 누각을 말한다. 다시 말해 최무선이 조선 왕조를 세우고 그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한 바가 다른 누구보다 크다는 뜻이다. 이것 역시 권근이 상소에서 최무선보다 문익점을 앞세운 이유와 관계가 없지 않으니 후술하겠다.

최무선에 대한 권근의 높은 평가는 두 말 할 필요 없이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 무기와 그것을 처음으로 선보였던 진포대첩의 쾌거에서 비롯된다. 그것의 성능이 얼마나 뛰어났기에 권근을 그토록 감동시킨 걸까. 고려 말 우왕 6년인 1380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고개 숙인 벼이삭이 들판을 누렇게 물들이던 어느 가을날 금강 하구 진포 주변 강물이 수백 척의 배들로 빽빽이 뒤덮였다. 고려시대에는 양광도, 오늘날로 보자면 충청남도 서천과 전라북도 군산의 금강 하구 양안의 백성들은 흰 돛과 검은 깃발 사이에서 번쩍거리는 빛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그것은 강물 위에서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윤슬이 아니라 배마다 빼곡히 세워져 있는 긴 창들의 금속 칼날이 햇빛에 반사된 것이었다.

왜구들이었다. 왜구의 배는 300척이 넘었다고 [태종실록]은 전한다. [고려사]에는 500여 척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임진왜란~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의 적선이 400척을 넘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300척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단연 역사상 최대 규모의 왜구 침입이었다.

국운 다한 고려는 왜구 침탈에 속수무책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최무선 표준 영정. 1987년 신영상 작. / 사진:전통문화포털
고려 조정에 비상이 걸렸음은 물론이다. 당시는 왜구의 준동이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여서 이틀이 멀다하고 왜구의 상륙 보고가 올라오는 상황이었지만 이처럼 대규모 군사행동은 전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운이 다한 고려의 조정은 왜구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왜구를 저지할 군사력과 경제력 모두 한계상황에 달해 있었다. 특히 귀족과 환관들이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해 국가가 세금을 거둬들여야 할 토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들 소수 권문세가는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은 채 땅을 경작하는 백성들을 최대한도로 수탈했다.

국가 재정이 파탄 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며 군사력에 구멍이 뚫리는 것도 필연적인 일이었다. 2년 전인 1378년에는 왜구가 승천부(경기도 개풍 지역. 오늘날은 개성특별시로 편입됐다)에 쳐들어와 개경까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왜적이 승천부의 흥천사(興天寺)에 들어와서 충선왕과 한국공주의 초상화를 떼어 가지고 갔다.”([고려사] ‘세가’)

그럼에도 고려 조정은 왜구를 근절시킬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수도를 내륙 쪽인 철원으로 옮길 궁리나 하는 처지였다. 이런 천도 계획은 왜구 따위 탓에 수도를 옮길 수 없다는 최영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한다. 이처럼 딱한 당시 고려의 사정을 [고려사절요]가 전한다. 그것을 편의상 대화체로 엮으면 이렇다.

우왕: 그대가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도 맡아주어야 하겠소.

최영: 신이 맡은 일이 이미 많은데 해도도통사까지 맡기시면 신이 감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또 지금 전함이 겨우 100척밖에 안 되며 수졸이 겨우 3000명입니다. 만일 군사를 출동시킨다면 1만 명은 있어야 하는데 창고가 모두 비었으니 어떻게 공급한다는 말입니까?

우왕: 방비하고 막는 일이 급하니 어쩌겠소. 달리 방도가 없어 부득이 경으로 겸하게 하는 것이니 사양하지 마시오. 우리나라의 군수로써 1만 명의 군사를 먹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오. 그러니 경은 3000명의 군사를 써서 1명이 100명을 감당하게 하시오.

최영: 신이 이미 늙어 제때에 배알하지 못했는데 이제 다행히 나와 뵈었으니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조심하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소서. 백성이 편안하고 위태한 것이 모두 주상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백척간두 운명에도 엽색에 빠져 지낸 우왕


▎조선 전기부터 사용한 유통식 화포인 대장군포. 육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대장군포는 최무선이 화약국을 설치하고 만든 화포 중 하나지만 당시에 사용한 포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명칭이 동일한 화포다.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듣기만 해도 인절미를 먹다가 목에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갑갑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는데 임금이란 자가 일당백 같은 현실성 없는 얘기만 하고 있다.

최영이 아무리 왜구들이 두려워하는 명장이라고 하더라도 100척의 전함과 3000명의 수군 병력이라는 보잘것없는 전력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최영이 이미 수년 전부터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는 사전(私田)을 혁파해 군사력 확충을 위한 재원으로 사용하라고 촉구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우왕은 들은 척도 안 했었다. 그보다는 귀족·환관들과 어울려 사냥이나 놀이에 빠져 도끼자루가 썩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우가 석전(石戰) 놀이를 구경하려 하자 지신사 이존성이 그것은 주상이 볼 것이 아니라고 간했다. 화가 난 우가 애들을 시켜 존성을 구타했는데 존성이 달아나자 우가 탄환으로 쏘았다. 나라 풍속에 단오 때가 되면 시정의 무뢰배들이 큰거리에서 떼를 지어 왼편 오른편으로 나뉘어 기왓장과 돌을 들고 서로 치거나 뒤섞여 몽둥이를 휘두르며 승부를 겨뤘는데 이것을 석전이라고 한다.”

“우가 애들을 시켜 후원에 구덩이를 파놓고, 지신사 이존성을 속여 빠지게 했다. 날마다 이런 놀이로 오락을 삼았다.”

“우가 성 남쪽에서 사냥을 무려 6일 동안이나 하였는데 (중략) 지신사 이존성이 홀로 활과 화살을 차지 않으니 우가 노하여 벌을 주었다.”([고려사절요] 제31권 ‘경신’)

모두 왜적선 300여 척이 금강 하구를 뒤덮기 직전, 같은 해 궁궐에서 일어난 일들의 기록이다.

지신사란 왕명의 출납과 궁궐의 경호 등을 담당한 관리다. 오늘날 비서실장 격이니 왕의 주변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녀야 하던 자리다. 이처럼 철없이 어리석은 젊은 왕을 곁에서 모시려니 당시 지신사 이존성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수없이 봉변을 당하면서도 왕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 애쓰는 흔적이 역력하다. 최영도 일당백을 빈대떡 뒤집듯 쉽게 말하는 왕에게 에둘러 고언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리석은 왕은 한쪽 귀로 흘려들을 뿐이었다. 최영은 직접적인 쓴소리도 많이 했다. 왕이 길을 가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하면 아무 민가나 들어가 겁탈을 하는 등 엽색을 저지르자 최영은 왕에게 이렇게 지적했다.

“충혜왕(우왕의 할아버지)께서 색을 좋아하신 건 사실이나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했고 충숙왕(우왕의 큰아버지)께서 놀기를 좋아해도 때를 골라 하셨는데 전하께서는 법도가 없습니다.”([고려사] ‘최영열전’)

홍건적과 왜적을 물리치는 데 수많은 공을 세운 원로 명장 최영이기에 그냥 넘어갔지 다른 신하들이 했으면 그 자리에서 맞아죽었을 불경한 언행이었다.

절대적 열세 속에서 고려 구해낸 신병기


▎최무선 아들 해산이 참여해 만든 화차 모형과 발사대에 꽂힌 신기전 모형. / 사진:최무선 박물관
어쨌거나 왜구의 대규모 침략 보고를 받은 고려 조정은 있는 배 100척을 탈탈 털어 보냈다. 고려 수군이 진포 가까이 다가가 보니 왜구의 배들은 밧줄로 서로 묶어 정박한 뒤 육지에 상륙해 노략질을 벌이고 있었다. 단단히 연결한 배들은 일체의 흔들림 없이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해상요새 같았다.

그것이 당시 왜구들의 전략이었다. 보잘것없는 고려 수군은 두려울 게 없으니 전함을 안전하게 묶어두고 소수 병력만으로 지키게 했으며, 나머지 대부분의 병력은 육지에 올라 고려의 육군을 제압한 뒤 인질을 잡고 재물을 약탈했다. 따라서 왜구가 상륙한 육지는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고려사절요]는 그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왜적의 배 500척이 진포 어귀에 들어와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일부 군사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해안으로 올라 각 주와 군으로 흩어져 들어가 마음대로 불사르고 노략질했다. 시체가 산과 들에 덮이고 곡식을 그 배로 운반하다가 땅에 쏟아 흘린 쌀이 한 자 부피나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왜구들이 모르는 게 있었다. 고려의 전함 수가 왜구의 배에 비해 절대적인 열세였지만, 고려의 전함에는 신병기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火砲)였다. 고려의 전함들은 왜구 전함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다. 왜구 화살의 사거리 밖에서 정렬해 진을 갖춘 고려의 전함들에서 고막을 찢는 우레 소리와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다.

수십 개의 불기둥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적함에 떨어졌다. 그것은 불화살이었다. 고려의 화포는 돌이나 포탄을 쏘는 것이 아니라 ‘주화(走火)’ 즉 불화살을 발사하는 것이었다. 불화살은 왜구의 배에 박혔으며 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덮었다. 배들을 모두 밧줄로 묶어 놓았기에 달아날 수도 없었다. 배를 지키던 왜구들이 절망적으로 밧줄을 풀려고 애쓰다 불화살을 맞고 타죽었다. 배에 붙은 화염이 거침없이 커지자 우왕좌왕하던 왜구들이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중 소수만 해안으로 헤엄쳐 나왔고 대부분 바다에 빠져죽었다. 왜구의 전함이 거의 대부분 불에 타 침몰했음은 물론이다.

당시의 불화살은 고려판 미사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미사일 같은 정확도는 갖추지 못했지만, 왜구가 배들을 묶어 놓았기 때문에 맞히기가 어렵지 않았다. 만약 왜구가 배를 묶어놓지 않았다면 고려 수군이 아무리 화포를 가졌다 해도 3분의 1에 불과한 전력을 가지고 진포해전을 승리로 이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대승이었다. 진포해전에서 돌아온 상원수 나세와 도원수 심덕부, 부원수 최무선에게 각각 황금 50냥의 포상을 한 것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큰 승리였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미 육지에 상륙한 왜구가 많았기 때문이다. 왜구들은 자기들이 타고 온 배들이 침몰하는 것을 보고 독기가 올라 더욱 잔혹해졌다. 그야말로 본의 아니게 배수진을 친 상황이었다.

“왜적이 포로로 잡은 인질들을 모조리 죽여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지나는 곳마다 피의 물결이었다. 330여 명만이 겨우 탈출해 왔다. 가까스로 해안에 기어오른 적은 옥주(오늘날 옥천)로 달아나서 육지에 있던 적과 합세해 이산·영동현을 불태웠다.”([고려사절요] 제31권)

궁지에 몰린 왜구들은 지리산 일대의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닥치는 대로 노략질을 하고 불을 질렀다. 그들은 남원산성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자 분풀이로 운봉현을 불살랐다. 이어 인월역까지 나아가 진을 쳤다.

‘황산대첩’ 이성계도 진포대첩 성과 없었다면…


▎최무선 박물관에 전시된 현자총통. 앞에 장착된 발사체는 차대전 모형이다. 차대전은 조선 전기부터 현자총통에 장전해 사용한 화살로 사거리가 2000보에 이르렀다. 최무선이 만든 장군전도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 사진:최무선 박물관
이 구간은 오늘날 지리산 둘레길의 일부로 전북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와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약 10㎞의 길이다. 오른쪽으로 바래봉, 고리봉을 잇는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하며 걸을 수 있다. 과거 한양과 삼도수군통제영을 잇는 길이었던 ‘통영별로’를 지나게 되며 인월에 이르면 황산대첩비도 볼 수 있다. 오늘날이야 여러 가지 역사·문화적인 요소들을 두루 즐기며 낭만적으로 걸을 수 있지만 그때는 지옥이 따로 없었음은 물론이다.

“왜적이 진포에서 패한 뒤로 여러 군·현을 쳐서 함락시키고 살육과 약탈을 멋대로 하여 왜적의 기세는 더욱 치성해지고, 3도(양광도·전라도·경상도) 연해의 땅은 쓸쓸하게 텅 비었다. 왜란이 있은 이래로 이같이 참혹한 일은 없었다.”

“왜적이 사근내역에 진을 쳤는데 배극렴 등 9명의 원수가 왜적을 공격했으나 패해 원수 박수경과 배언이 죽고, 죽은 장교와 군사가 500여 명이나 되었다. 왜적이 드디어 함양을 도륙하였다.”([고려사절요] 제31권)

기세가 오른 왜구들은 “장차 광주의 금성(전남 담양)에서 말을 먹여 북으로 올라가겠다”고 큰소리쳤고, 소문이 퍼지면서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 당시 왜구의 기세가 그토록 크고 강했던 이유로 일본 남조의 정규군이나 사병(私兵) 집단이 용병으로 해적의 무리와 합류했다는 분석이 있다.

당시 일본 정세가 남조와 북조의 대결이 극심해진 상황이어서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조 세력이 군량미와 전비 등을 마련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조선을 침략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원래 규슈의 다이묘들은 왜구들을 사병처럼 부리며 비호하고 그들의 해적질을 용인해왔는데, 이번에는 아예 자신들의 정규 병력을 합류시켜 대규모로 조선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설득력이 없지 않은 분석이다.

하지만 전세는 왜구들이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고려에는 이제는 늙어버린 최영 외에 또 하나의 명장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성계였다. 고려 조정은 왜구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3도순찰사로 임명했다. 왜구토벌군의 수장으로 출전한 이성계는 사근내역 전투의 패배로 풀 죽은 군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려 마침내 적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하는 쾌거를 이룬다.

이른바 ‘황산대첩’이다.

해상과 육상 대승 통해 왜구 정책도 전환


▎2012년 군산에서 열린 ‘제6회 진포대첩 재현행사’에서 진포대첩 중 전투 장면이 재연되고 있다. / 사진:군산시
“노획한 말이 1600여 필이며 노획한 병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적의 수가 처음에는 우리의 열 배였으나 겨우 70여 명이 지리산으로 달아났다.”([고려사절요] 제31권)

황산대첩 당시 고려 군사나 왜구의 병력 규모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말 1600여 필과 달아난 왜구 70여 명이 기록된 숫자의 전부다. 게다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모두 조선시대에 편찬된 사서인 만큼 태조 이성계의 활약을 과장되게 기록했다고 봐도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노획한 말의 숫자 등을 고려할 때 고려군은 5000~1만 명, 왜구는 그 2배인 1만~2만 명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이때 이성계를 미화한 기록의 백미가 그 유명한 적장 아지발도(阿只抜都) 이야기다. 아기발도(阿其拔都)라고도 불리는 이 소년 장수는 나이가 겨우 16세 정도에 불과했는데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면 감히 당할 자가 없었으며, 그를 두려워하는 고려 군사들이 다퉈 피했다고 한다. 게다가 얼굴까지 온몸을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있어 화살이 뚫고 들어갈 틈 하나 없었다. 이에 태조가 부하 장수 이두란에게 말한다.

“내가 투구의 꼭지를 쏠 테니 투구가 떨어지면 네가 곧 쏘아라.”

“드디어 말을 달려나가며 쏘니 바로 투구 꼭지를 맞혔다. 투구 끈이 끊어져 기울자 아지발도가 급히 바로 썼다. 태조가 다시 쏘아서 또 꼭지를 맞히니 투구가 드디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쏘아 죽이니 그제야 적의 기운이 꺾였다.”([고려사절요] 제31권)

왜구의 병력에 상당한 규모의 기병까지 포함된 점, 아지발도가 갑옷으로 완벽하게 무장한 점 등도 당시의 왜구에 규슈 지역 다이묘 소속의 정규 군병력이 가세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대목이다.

어쨌거나 진포대첩과 황산대첩, 해상과 육상에서의 연이은 대승은 고려의 왜구 정책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됐다. 단순한 해적 이상의 군벌집단으로 한 국가의 존속마저 위협했던 고려 말의 왜구는 이후 급격하게 위축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왜구의 침범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치고 빠지기 전략으로 해안가 마을을 급습해 식량을 빼앗는 해적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380년 왜구의 대규모 침략은 200여 년 뒤 임진왜란의 예행연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에까지 세력을 확대하려는 일본의 야심은 진포와 황산에서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접히지 않았다. 전국시대를 마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할 때까지 기다렸을 뿐이다.

대를 이어 화약 병기 발전시킨 권근의 상소

풍전등화의 고려를 위기에서 구한 황산대첩은 이성계 개인의 입장에서도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는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이성계는 이때의 공에 힘입어 최영을 누르고 최고의 군사 실력자로 부상했다. 새로운 왕조를 일으키는 기틀이 됐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황산대첩의 승리는 분명 진포대첩의 성과에 힘입은 것이다. 왜구의 해상 지원이 계속됐다면 그토록 강하던 왜구 세력을 보다 적은 병력으로 물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서두에서 유보했던 설명을 해야 할 시간이다. 권근이 최무선의 활약에 크게 감동해 찬시까지 바치면서도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했던 이유 말이다. 조선의 사가들이 태조의 위업을 찬양하기 위해 황산대첩을 서술할 때, 그것이 진포해전의 그늘에 가려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었다. 이성계의 후손들이 운봉에 황산대첩비를 세워 태조의 전공을 기리면서도 금강 하구에는 진포대첩비를 세울 생각을 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 화약 무기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최무선이 귀하게 대접받지 못한 것도 다른 까닭이 아니다.

“무선이 화포를 발사해 그 배를 다 태워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육지에 올라와서 (중략) 태조가 병마도원수로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구를 한 놈도 빠짐없이 섬멸했다. 이로부터 왜구가 점점 줄고 항복하는 자가 잇따라 나타나 바닷가 백성들의 생업이 회복되었다. 이것은 태조의 덕에 하늘이 응한 까닭이나 무선의 공이 역시 작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개국 후 늙어서 쓰이지는 못했으나 임금이 그 공을 생각해 검교 참찬에 제수했다.”([태조실록] 1395년 4월 19일자 기사)

최무선의 졸기인데 마치 이성계 열전을 읽는 듯하지 않은가. 최무선은 조선 건국 3년 후에 죽는다. 나이가 든 것은 사실이지만 늙어서 쓰이지 못했다는 것은 조선 조정이 화약 무기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화약 무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면 화약을 최무선만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최무선을 중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다. 그런 의미에서 권근의 상소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국운 상승에 기여하는 선견지명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그의 상소로 아버지에게 화약 제조의 비법을 전수받은 최해산이 조정에 나올 수 있었고, 뒷날 군기시소감이라는 화약 제조 책임자가 되기 때문이다. 자칫 묻혀버릴 뻔했던 조선의 화약 병기 제조 기술이 이후 세종, 세조대에 이르기까지 60여 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다.

다음 호에서 최무선의 활약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보겠다.

※ 이훈범 -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지난해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2023년 초 첫 소설 [화살 끝에 새긴 이름]을 발표했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을 펴냈다.

202312호 (20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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