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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16)] 소설 '모비 딕'으로 보는 기름과 석유개발 

미친 듯 확산하던 포경업, 석유가 멈춰 세웠다 

기름·뼈·용연향 등 비싸게 팔리자 19세기 중반 미국 포경업 종사자만 7만명
하와이 거점으로 태평양 곳곳으로 포경선 뻗어나가… 지리학 발달에도 기여


▎2015년 영화 [하트 오브 더 씨]의 한 장면. 배경이 된 19세기 미국에서는 고래 기름을 얻기 위한 포경업이 성행했다. / 사진:[하트 오브 더 씨] 스틸컷 캡처
한국 땅을 처음으로 밟은 미국인은 누구일까? 1866년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따라 평양까지 들어왔던 제너럴셔먼호의 선원들일까, 아니면 1871년 강화도에 쳐들어왔던 미국 해군의 병사들일까?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그 주인공은 1명이 아닌 4명이라는 것이다. 이름도 분명히 기록돼 있다. 멜빌 켈시, 토마스 맥과이어, 데이비드 반즈, 에드워드 브레일리로 모두 20대 전후의 젊은 청년들이었다. 이들이 함경남도 원산 인근에 나타난 것은 1855년 6월 26일. 이들은 조선의 한 마을에서 한 달 가까이 융숭한 대접을 받고 중국 상하이의 미국 영사관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이때 왜 조선에 나타나게 된 것일까?

지금은 전 세계 주요 산업을 주도하는 최강대국 미국이지만, 200~300년 전만 해도 산업 후진국에 불과했다. 당시의 주력 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철강이나 해운은 영국에 한참 밀리는 처지였고, 미국이 기댈 수 있는 것은 면화나 포경 같은 농수산업에 불과했다. 그중 고래를 잡는 포경업은 영국과의 무역에서 발생하는 거대한 무역 적자를 메워주는 중요한 산업이었다.

콕 찍어서 포경업을 언급한 이유가 있다. 당시 포경업은 지금으로 치면 석유 산업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고래 기름은 당시 각 가정과 밤거리를 밝히는 램프의 연료로 쓰이고 있었을 뿐 아니라 양초, 비누, 윤활유 등 산업적 용도로 다양하게 사용됐다. 특히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기계를 돌리기 위한 윤활유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고래 기름의 가치는 점점 뛰었다.

미국에서 발달한 포경업


▎18세기에 네덜란드 포경업자들이 북극에서 북극고래를 포획하는 장면. / 사진:위키피디아
그러니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주인공 이슈메일이 “세상 사람들은 우리 고래잡이들을 업신여기면서도 사실은 자기도 모르게 깊은 경의를 바치고 있다. 실로 어마어마한 흠모를! 지구 전역에서 타오르는 심지와 들불과 촛불은 수많은 신전 앞에서 타오르는 불빛처럼 우리에게 감사하며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자부심을 드러낸 것도 허세는 아니다. 고래 기름이 없다면 산업혁명의 사회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여기에 더해 고래의 입속에 수염처럼 돋아나 있는 고래 뼈는 열처리를 통해 모양을 변형시킬 수 있어서 마치 오늘날의 플라스틱처럼 활용됐다. 그러니 지금 석유에서 각종 연료와 플라스틱을 얻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 고래의 복부에서 발견되는 용연향은 고급 향수의 원료로 사용됐는데,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게 팔렸다. 그래서 이때는 포경을 하는 이유에서 고래고기의 가치는 매우 낮았고, 심지어 버려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넓은 바다와 해안선을 확보하고 있었던 미국이 이 황금 산업에 뛰어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의 포경업이 시작된 곳은 미국 북동부의 대서양 연안이다. 세계 경제의 중심지 미국 뉴욕의 맨해튼도 이때는 고래 사냥에 나선 뱃사람들이 모이는 작은 항구에 불과했다. 또 미국의 포경업이 시작된 매사추세츠 주의 낸터킷이나 이후 새로운 중심지가 된 뉴베드퍼드 등이 유명한 포경선의 집결지였다. 뉴베드퍼드의 경우 1830년 3000명에 불과했던 인구가 불과 20년 뒤인 1850년에는 2만명으로 성장했으며, 포경업에 종사하는 선원이 1만명이나 됐을 정도였다.

[모비 딕]의 이슈메일이 “마지막으로 우리 미국의 고래잡이들은 왜 오늘날 전 세계의 고래잡이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수가 많아졌을까? 미국의 포경선은 700척이 넘고, 포경선을 타는 사람은 1만8000명에 이르고 해마다 400만 달러를 소비하고 출항할 때 2000만 달러의 가치를 갖는 배가 해마다 700만 달러의 수익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단언하거니와 지난 60년 동안 이 넓은 세계에 이 고상하고 강력한 포경업만큼 큰 잠재력을 가진 것은 없다”고 말했을 만큼 당시 미국에서 포경업은 자본과 노동력을 빨아들이는 가장 강력한 산업이었다.

하지만 이런 산업이 대개 그렇듯이 시간이 지나자 ‘고갈’이라는 문제와 마주하게 됐다. 고래 기름에 대한 수요가 폭증한데다 오랫동안 남획이 거듭되다 보니 더 이상 대서양에서 잡는 고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들은 미국 서부에 펼쳐진 태평양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처음에는 안전한 항해를 위해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경유해 인도양을 거쳐 태평양으로 가는 방식을 택했다. 예컨대 1791년 처음으로 태평양으로 갔던 포경선 7척이 이런 방식을 택해서 낸터킷과 뉴베드퍼드로 돌아왔다. 하지만 지도에서 그어보면 알겠지만, 이것은 지구의 3분의 2 정도를 돌아가는 굉장히 먼 바닷길이다. 그래서 이후 항해술이 발달한 뒤로는 남아메리카의 케이프혼을 돌아 남태평양으로 진출했다.

먼바다로 가야 하니 포경선의 크기도 대폭 확대됐다. 이전에는 30톤 정도였는데 이제는 10배 가량 커진 300톤 규모가 됐고, 4척 정도의 포경용 보트를 탑재했다. 사실 포경선에서 고래고기가 버려진 것도 이때 무렵부터다. 기름이 있는 지방층보다는 가치가 낮기도 했지만, 워낙 먼바다로 떠나다 보니 고기를 보관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먼바다까지 대규모 선단을 몰고 갈 가치는 있었을까?

고래 고갈로 위기… 석유가 고래 구하다


▎아름다운 ‘고래의 노래’를 부르기로 유명한 혹등고래. 19세기 포경업의 확산으로 멸종 위기에 처했던 고래는 석유의 등장으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 사진: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국제자연보호연맹·국제포경위원회·세계자연기금
당시 큰 북극고래 한 마리에서는 275배럴의 기름과 3500파운드의 고래 뼈를 얻을 수 있었는데 가치는 약 5000달러였다. 당시 1달러는 현재의 40달러 가량의 가치가 있었다고 하니, 지금의 20만 달러(한화 약 2억6000만 원) 정도 되는 셈이다. 참고로 향유고래 한 마리는 약 3500달러 정도, 참고래는 약 3000달러 수준의 가치가 있었다. 당시 한 기록에 따르면 미국에 매년 포경업으로 들어오는 기름은 40만 배럴에 달했고, 매년 500만 달러 가량의 수익을 올렸다. 한 번 뉴베드퍼드나 낸터킷을 떠난 포경선들이 다시 돌아오는 데는 보통 3~4년, 길게는 6~7년의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사이에 포경선이 중간에 머무르면서 장비를 정비하고, 필요한 물품을 구할 수 있는 중간 어업기지의 필요성이 대두하게 됐는데, 그렇게 해서 주목받게 된 곳이 바로 하와이의 호놀룰루다. 포경선의 선원들은 항해 중 이곳에 들러 집으로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그동안 항해에서 얻은 고래 기름을 미국으로 운반선에 실어 보내기도 했다.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이 섬을 통하면 미국은 태평양 전 지역으로 포경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미국이 하와이의 가치에 주목하게 된 것은 국가 산업인 포경업의 발달과 안전 측면이었던 것이다. 19세기 중반 포경업은 미국 산업 규모에서 5번째였고, 종사자만 7만명에 달하는 거대 산업이었다. 매년 하와이에 정박하는 포경선만 해도 600척에 달했다.

이렇듯 미친 듯이 확산하던 포경업을 멈춰 세운 것은 석유였다. 19세기 중반 스코틀랜드의 화학자 제임스 영이 석유를 정제하는 방법을 발견해 등유와 가스, 나프타 등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고래 기름이 없어도 석유를 이용해 등불이나 가로등을 밝힐 수 있게 됐고, 나프타에서 얻는 화합물은 플라스틱이나 합성 섬유의 원료가 됐다. 고래를 완벽하게 대체할 물질을 찾은 것이다. 공장에서도 가격이 싼 등유를 선호하게 됐다. 1850년대 고래 기름은 갤런 당 1.3~2.5달러 수준이었으나, 석유에서 추출한 석유는 60센트로 2~4배 가량 저렴했다. 다만 품질은 여전히 고래 기름 쪽이 나았다. 고래 기름은 비쌌지만 태울 때 등유처럼 냄새가 나지 않고 그을음도 없었다. 빛도 밝았다. 그래서 포경도 계속됐다. 하지만 고래의 수량은 한정돼 있었고 이미 품귀현상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인류가 석유에 주목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특히 1885년 독일의 기술자 G.다임러와 C.F.벤츠가 내연기관 자동차를 발명하면서 획기적인 전환을 맞이했다. 자동차 내연기관에 석유가 연료로 쓰이면서 석유의 시대가 본격화된 것이다. 지금은 탄소 발생으로 환경 파괴의 주범처럼 꼽히고 있는 화석연료의 대표격인 석유가 고래를 구원했으니 아이러니컬하기도 하다. 고래 입장에서는 인간이 계속 석유를 사용해주길 바라지 않을까.

해도에 없는 섬 다수 발견하기도

한편 포경업은 지리학의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오랫동안 포경선은 지구에서 가장 덜 알려진 외진 곳을 찾아내는 개척자였다. 포경선은 쿡이나 밴쿠버도 항해한 적이 없고 해도에도 실려있지 않은 바다와 군도를 탐험했다. 지구 반대쪽의 아메리카 대륙이라고 할 수 있는 오스트레일리아가 문명 세계에 알려진 것도 고래잡이의 공적이다. 어떤 네덜란드 선박이 실수로 그 대륙을 처음 발견한 뒤, 다른 배들은 모두 오스트레일리아 해안을 전염병이 만연하는 미개지로 생각해 오랫동안 접근조차 하지 않았는데 포경선만은 그곳 해안에 닿았던 것이다.”

[모비 딕]이 설명하는 포경선의 지리적 업적이다. 실제로 그랬다. 18세기 후반 태평양으로 진출한 미국의 포경선들은 고래를 찾아다니며 바다를 동서남북으로 헤집고 다니면서 탐험가나 해군을 대신해 지도에 없는 섬들을 발견했고, 이것을 통해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다. 광대한 미지의 세계였던 태평양이 포경선에 의해 인류에게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게 된 것이다. 이들이 발견한 대표적인 섬들을 꼽자면 스타벅, 캐롤라인, 보스톡, 피지, 솔로몬 군도 등인데 아마도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눈에 번쩍 띄는 이름이 있을 것이다. 바로 스타벅(Starbuk)이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커피 브랜드 중 하나인 스타벅스는 [모비 딕]의 선원의 이름인 스타벅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그것은 또한 포경선이 발견한 이 섬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그리고 실제로 19세기 포경업의 고장인 낸터킷에는 스타벅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고래를 찾아 태평양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던 미국의 포경선이 어느덧 도착한 곳이 태평양 서쪽 끝에 있는 동해였다. 사실 동해는 예로부터 고래가 많이 발견되고 비교적 쉽게 잡을 수 있는 바다였다. 신석기시대 새겨진 것으로 알려진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도 고래사냥이 그려져 있었을 정도니까 말이다. 1855년 6월 위에서 언급한 포경선원이던 네 명의 청년들이 조난을 당해 원산항 인근의 마을에서 구조되는 일이 벌어졌다. 훗날 미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투 브라더스(Two Brothers)’라는 배에 타고 동해에 왔는데, 선장인 존 차일드의 가혹한 대우에 견디지 못하고 배를 탈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어쨌든 이때 한 달간이나 조선에 머무른 포경선원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311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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