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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의 지구촌 인문기행(5)] ‘아드리아해의 보석’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활력 

나폴레옹도 감탄한 ‘유럽의 응접실’ 

서로마제국 멸망 계기로 탄생한 바다 위의 도시, 해상 무역으로 번영 누려
연 550만 명 관광객 찾는 문화 유산, 인근 돌로미티 산맥에서 알프스 만끽


▎흔들리는 곤돌라를 타고 미로 같은 길을 이동하면 왜 베네치아가 ‘물의 도시’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 사진:고혜련
일상이 시들해져 눅진하게 가라앉아 있을 때, 그 마음의 심연에 파도를 쏟아붓는 공간이 있다. ‘세계인의 놀이터’라고 해도 손색없는 그곳. 도착하자마자 우왕좌왕하며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곳. 바로 미로(迷路)의 수상(水上) 도시, 베네치아다. 지구촌의 여행객들이 시도 때도 없이 밀어닥쳐 원주민들이 못 살겠다고 항의시위를 하는 ‘오버투어리즘(over tourism)’의 현장이기도 하다.

400여 개의 다리가 120여 개 섬을 이어주는 바다 위 도시, 베네치아는 색다른 풍광으로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광활한 알프스 계곡의 물이 흘러내려 아드리아해에서 만나는 지점에 콕 박혀 영롱하게 반짝이는 ‘아드리아해의 보석’이다. 게다가 운치 넘치는 수상 도시 위를 떠도는 갈매기 무리와 함께 바다를 종횡무진 질주하고, 북쪽의 알프스 돌로미티에서 봄에도 활강을 즐기는 스키어들은 아마 이곳을 지구촌 ‘최상의 멋진 놀이터’로 손꼽으리라.

베네치아 본섬은 이탈리아 반도 북부 오른쪽 해안가 육지에 자리한 베네치아 메스트레 기차역에서 10여 분 기차를 타고 산타루치아역에 내리면 닿을 수 있다. 물론 버스나 일반 자동차로도 이동이 가능하다. 육지의 땅을 놔두고 그들은 왜 천년세월을 마다치 않고 바다 위에 떠서 살고 있는 걸까. 게다가 다른 주변 도시민들보다 더 부유해서 분리 독립을 요구할 정도인데 신기할 지경이다. 이런 사연의 발단은 멀리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맥이 닿아 있다.

바다의 도시 이야기


▎베네치아의 랜드마크인 산마르코 광장.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의 유해를 모신 산마르코 대성당과 두칼레 궁전을 품고 있다. / 사진:고혜련
서기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주인 없는 땅이 된 이탈리아 반도는 동고트족, 롬바르드족, 프랑크왕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게 된다. 이때 이들에게 쫓긴 이탈리아인들이 바다 한가운데로 도망가 숨어든 곳이 지금의 베네치아 본섬이다. 온통 습지인 석호(Lagoon)에 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 여러 개 섬에서 각기 떨어져 살게 된 것이다. 석호는 산호초에 의해 외해(바깥쪽 바다)와 분리된 얕은 수역에 모래·해초·부유물 등 퇴적물이 이동해 쌓여 생긴 지역이다.

한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통치를 받았지만, 11세기 이후부터는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고 지방영주들이 통치하는 도시국가들이 잇따라 출현한다.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르네상스까지 약 1000년 동안 황제 아닌 교황에게 권력이 집중됐던 시기를 통칭해 우리는 중세시대라고 부른다. 기독교의 교리와 위세가 인간의 생각과 문화, 생활을 지배하던 시기다.

도시국가 베네치아 공국은 지리적 이점으로, 중세 말기에는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부유한 도시로 거듭났다. 비잔티움제국으로도 불리는 동로마제국과도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어 여러 지방의 상인들과 섞여 교역하다 보니 해상 무역의 강자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넉넉한 재정을 바탕으로 섬과 섬 사이 수로(水路)에 400여 개의 다리를 놓아 연결하니 왕래에 별문제가 없게 됐다. 오히려 그 독특한 자연환경이 매력적이어서 전 세계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유명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베네치아의 자체 인구는 5만5000명인데 그 100배에 달하는 550만 명이 해마다 이곳을 찾고 있을 정도다.

이탈리아는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외세의 지배를 받아오면서 분열돼 도시국가들의 연합체 상태로 지내왔다. 정작 1300년 이상은 통일이 안 된 상태였다. 드디어 1861년, 비록 분열된 상태지만 이탈리아 왕국을 형성했다. 9년 후인 1870년에는 통일국가를 이루고 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6년에서야 현재의 이탈리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8000㎞가 넘는 해안선을 자랑하는 장화 모양의 반도 국가인 이탈리아 인구는 5800만 명. 반도 오른편을 길게 감싼 아드리아해는 이탈리아와 발칸반도 사이에 있는 좁고 긴 해역으로 길이 800㎞, 너비 95~225㎞이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도시공국으로서 존재하다 보니 지역색이 강해졌다. 도시민들은 국가에 우선해 자신들이 지켜온 지역에 대한 강한 애착심을 보이고 있다. 28개의 지역 언어가 이를 입증해준다. 현재 이탈리아 표준어로는 [신곡]을 집필한 단테 문학의 영향으로 그가 활동하던 피렌체의 방언이 통용된다. 지역별로 발전상이 다르다 보니 지금도 ‘따로 각자 살자’는 의견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특히 베네치아 등 북부 지방의 경우, 1인당 소득 평균치가 4만 달러 이상으로 남부 지역의 두 배 정도라 그런 주장이 강하다.

카사노바가 노닐던 곳


▎부라노섬은 가수 아이유가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선택했을 정도로 색감이 다채롭다. / 사진:고혜련
해상무역과 관광업의 강자인 베네치아 본섬에 가면 그래서인지 여유와 활기가 느껴진다. 연일 관광객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들을 겨냥한 관광 상품들이 도시 전체를 들뜨게 만든다. 아름다운 섬 곳곳에 여행객을 태운 날렵한 쪽배인 곤돌라와 장거리 운송수단인 수상 택시, 수상 버스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니 그 풍경만 봐도 절로 활력이 솟게 돼 있다. 겉보기에는 매일의 삶이 마치 축제처럼 펼쳐지는 현장 같다.

베네치아에 가면 제일 먼저 발을 딛게 되는 곳이 산마르코 광장과 그 가운데 자리 잡은 산마르코 대성당이다. 산마르코는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 이집트에 그리스도를 전파한 인물이며 신약 마가복음의 저자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한 그의 유해를 모시기 위한 납골당으로 건축한 것이 바로 비잔틴양식의 이 대성당이다. 5개의 돔과 화려한 모자이크 그림들로 장식돼 ‘천국이 이곳에 재현됐다’고 할 정도다.

광장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에워싸고 있는 듯 보이는 건물들이 산마르코 성당과 두칼레 궁전, 아케이드와 각종 카페 등이다. 광장은 베네치아 본섬의 여행 출발점이면서 종착지이다. 사람들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몰리자 한때 이곳에 들렀던 프랑스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며 감탄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광장의 인파에 밀려 들뜬 마음에 사방으로 통하는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정신을 못 차리기 십상이다. 떠나기 전에 지도로 대충 여행코스의 윤곽을 확인하지 않으면 수많은 골목길에서 길을 잃는다. 중간중간 곤돌라가 휘돌아다니는 수로도 겹겹이 있고 바닷가 쪽으로는 다른 섬으로 가는 수상 택시 정류장이 있다 보니 본섬의 윤곽을 파악하지 못하면 혼란스럽다. ‘미로의 수상 도시’라는 말이 그야말로 딱 들어맞음을 도착하자마자 피부로 느끼게 된다.

두칼레 궁전은 도시국가 베네치아를 다스리던 도제(Doxe)가 머물렀던 궁전. 위아래 층 회랑이 모두 수십 개의 아치형 문과 역시 우아하게 도열한 원형 기둥이 조화를 이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또 궁전 외관 여기저기에 세워진 인물 석상들과 계단, 벽, 천장을 장식한 화려한 부조물도 이에 가세하고 있다. 두칼레 궁전에서 바다 한쪽 건너편에 보이는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은 페스트가 만연한 17세기, 국민을 보호해달라는 뜻에서 수호성인인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할 목적으로 지어졌단다.

광장을 거닐다 보면 광장 한편의 여행객들로 소란스러운 한 노천카페에 주목하게 된다. 이탈리아 최장수(1720년 개업) 커피숍으로 소문난 ‘카페 플로리안’이다. 한국에서도 바람둥이의 전설적인 대명사로 알려진 ‘카사노바’가 자주 드나든 곳으로 소문이 난 곳. 아름다운 바다와 북적이는 인파들, 하늘과 바람이 축제하듯 춤추는 이곳에서 살다 보면 정신 못 차리는 그런 인물 몇몇쯤은 생겨나리라.

그래도 ‘탕아’라는 오명으로도 이 도시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이 됐으니 ‘카사노비스트’를 꿈꾸는 남성 동지들은 여전히 그가 부러울지도 모른다. 1725년 이곳 태생인 조반니 카사노바는 단지 희대의 난봉꾼에 그치지 않고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에는 성직자·군인·바이올린 연주자로도 활동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탈리아 명승지, 대부분의 장소에서 그렇듯 야외 테이블에 앉으면 자릿세용으로 음료 가격이 훨씬 비싸지는 게 상례처럼 돼 있다. 때에 따라서는 생음악 연주를 곁들여주는 곳도 있으니 그냥 넘어가게 된다. 한국인 여행객이 많아지면 한국 유행가도 슬쩍 끼워 넣으니 더 그렇게 된다.

산마르코 광장을 둘러본 다음은 쪽배처럼 보이는 곤돌라의 유혹에 빠진다. 바다에 지은 집들 사이, 좁은 수로를 누비는 곤돌라를 보면 안 타고 못 배긴다. 날아갈 듯 날렵하고 늘씬한 곤돌라를 긴 장대로 노 젓는 곤돌리에(뱃사공)들은 경쟁적으로 쪽배를 단장해 흥취를 더한다. ‘흔들린다’는 이탈리어(Gondole)의 의미를 내포한 곤돌라는 불안정한 요동으로 긴장하게 만든다. 승객이 마음에 들면 잘생긴 뱃사공들이 즉석에서 칸초네를 불러주는 행운도 찾아온다. 그냥 뱃사공이라 하기엔 마땅치 않다. 곤돌라를 젓는 장대에 버금가게 늘씬하고 출중한 외모가 마치 이탈리아 영화 속 어느 두목의 조직원들 같다. 그래서인지 분위기는 더 쫀득해진다. 자리를 안배하면 억지로 4~5명까지 탈 수 있는 구조다. 조금의 무게 불균형도 불안한지 뱃사공은 앞뒤 승객들의 몸무게를 가늠해 안배한다. 때론 탑승자의 몸무게도 물어본다.

흔들림, 곤돌라의 매력


▎베네치아의 화가 티치아노가 그린 ‘전원의 콘서트’는 훗날 명품 브랜드 루이뷔통에도 영감을 줬다. / 사진:루이뷔통
곤돌라를 타고 수상가옥들을 가까이 살피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육지에 세운 정식 시멘트 건물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우선 이곳 습지 아래에 물속에서도 잘 썩지 않는 나무 기둥들을 모래를 버무린 진흙 속에 굳게 박은 후 점토를 부어 단단하게 고정시킨다. 그 다음 다시 그 위에 평평한 석회암돌판을 까는 게 순서다. 견고한 돌판이 안정된 상태가 되면 그 위에 건물을 지어 문제가 없다는 것이 뱃사공의 설명이다.

이론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곤돌라를 타고 건물에 바짝 붙어 들여다보면 이건 거의 기적에 가깝다. 날이 맑고 바람이 없는 날도 수상가옥의 현관 입구와 바로 앞에서 출렁이는 바닷물 높이의 차이가 불과 30㎝도 안 돼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풍랑이 몰아치거나 비가 거세게 내리면 온 집들이 물에 잠겨 무너지고 인명 피해는 상당하리라는 추측이 든다. 물론 퇴적물로 인해 바다와 일정 거리로 분리된 석호에 자리한 집들이긴 해도 말이다. 높은 습기에 항상 노출된 가옥과 가재도구들이 과연 괜찮을까? 왜 그들은 이런 불안과 불편함을 감수하고 구태여 이곳에서 살아갈까?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모두 다 육지로 도망가 살 수 있을 터인데도 신기했다. 11월에는 물이 넘치기도 해 수로 위에 산책용 나무 길을 임시로 설치한다고 한다.

부라노섬의 알록달록한 색채의 집들


▎이탈리아 북부는 알프스 산맥과 맞닿아 있다. 돌로미티 산장은 천혜의 자연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 사진:고혜련
그 다음은 아드리아해를 본격 질주하는 바포레토(Vaporetto)라 불리는 수상 버스를 타고 섬 여행을 떠날 차례다. 무라노 섬과 부라노 섬으로 향한다. 수상 버스는 10여 명의 여행객이 함께 탈 수 있는 모터보트 같은 것으로, 뱃머리에 운전기사가 서게 된다. 좁은 수로에서 벗어나 넓은 바다를 전속력으로 달리면 일행들은 약속이나 한 듯 저마다 환호하며 소리를 지르게 된다.

본섬에서 가까운 무라노섬은 유리 공예로 유명하다. 상점마다 갖가지 예쁘고 귀여운 유리 공예품을 실컷 감상할 수가 있다. 그 다음 20여 분 달려 도착한 부라노섬은 프레스코 벽화처럼 갖가지 페인트로 단장한 가옥 수십 채가 바다 안개 속에 잠겨 있다. 잠시 동화 속 별세계에 와 있는 착각이 든다. 일부러 설치한 영화 제작용 세트장 같다. 세상과는 절연한 듯한 수십 명의 어려운 노인들과 여성들이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 수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초기에는 고기잡이를 끝내고 돌아온 어부들이 물안개에 가려진 자기 집을 쉽게 찾기 위해 알록달록하게 집을 채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2~3층 모든 집이 초록·분홍·연두·보라색 칠을 한 채 어깨를 맞대고 수로를 따라 도열해 있다.

본섬에 되돌아오면 여전한 분위기에 취해 기분도 낼 겸 근처 괜찮은 식당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게 된다. 관광객이 몰리는 이곳의 ‘바가지 씌우기’는 전 유럽으로 번져 있다. 알아 둘 것은 메뉴에 쓰여 있는 일부 식당의 스테이크 가격이 최종 가격이 아니라 소고기 100g당 가격이라는 것. 영어메뉴판이 거의 부재한 이탈리아 관광지에서 가격만 보고 주문했다가 계산대 앞에서 당황하게 된다. 항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실수가 된다. 와인 역시 잘 모르는 상태에서 웨이터에게 추천을 의뢰할 경우, 이름도 모르는 고가의 와인이 등장해 바가지를 흠뻑 뒤집어쓸 수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베네치아 본섬을 벗어나려면 20~30분 거리에 있는 ‘마르코 폴로’ 국제공항을 이용하게 된다. 어디서 익숙해진 이름이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는 이곳에서 태어난 상인으로 이미 700년 전 [동방견문록]을 펴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 책은 동방세계의 13~14세기 역사와 문화·지리·민속 등을 담은 것으로, 서양인들이 동쪽 세상을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무려 24년간 중국·몽골·이란 등 동방국가들을 여행하거나 체류했으며 중국 원나라에서 17년 동안 관직생활까지 했다.

돌로미티를 봐야 알프스를 본 것

그 밖에 ‘베네치아 인물’로 꼭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있다. 신성로마제국 시절, ‘왕의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린 불세출의 화가 티치아노(1488~1576)다. 높이 7m에 달하는 유채화 ‘성모의 승천’이 그중 유명하다. ‘개를 데리고 있는 카를 5세의 초상’, ‘우르비노의 비너스’ 등 3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중세 화가다. 티치아노는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대표주자이자 모든 장르의 그림에 탁월한 ‘회화의 군주’로 손꼽히고 있다. 올해 10월 9일까지 4개월간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주최한 ‘영국 내셔널 갤러리 명화 전’에서도 티치아노의 ‘여인’이 전시됐었다.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북쪽에 거대하게 자리 잡은 알프스산맥의 돌로미티 산자락을 가기에 딱 좋은 중간 기착지이기도 하다. 만년설이 덮여 있는 ‘희고 높은 산’이란 의미가 내포된 알프스는 언제 봐도 마음을 일순간에 빼앗는다. 태곳적 눈이 축적돼 만년설의 장관을 이루는 하얀 협곡 사이로 스키어들이 질주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최고의 청량제다. 지중해 가까이에서 시작된 이 산계(山系)는 북쪽으로 뻗은 다음 활모양을 이루며 동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스위스·슬로베니아 등 7개국에 산자락을 펼쳐놓은 셈이다.

이탈리아의 알프스, 돌로미티 산맥은 여태 경험한 다른 지역의 알프스를 능가할 정도로 압권이었다. 필자가 들른 2023년 3월 하순, 예기치 않은 춘설이 마구 쏟아져 일부 도로가 통제되긴 했지만 눈 가득 쌓인 설경은 더더욱 경이로웠다. 그동안 스위스 융프라우, 마터호른, 프랑스의 몽블랑 근처 산간 마을 등을 여행하면서 알프스 분위기를 대충 감 잡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리프트를 타고 산등성이에 올라가 트레킹을 하고 난 뒤, 돌로미티를 보지 않으면 알프스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님을 실감했다.

깎아지른 알프스 스키슬로프에 올라가 보니 그 광활한 백색 벌판을 종횡무진 급강하하는 스키어들의 젊음과 몰입, 열정의 세계가 짜릿하고 아름다웠다. 쌓인 눈발이 대수냐며 아랑곳하지 않고 산길에 피어 있는 천진한 야생화들은 또 얼마나 순결하고 정겨웠는지. 저녁에는 산정 산장에서 바비큐와 와인,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에 취한 후 장작불로 데운 커다란 나무 욕조에서 입욕도 하니 세상이 참 다채롭고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내게 주어진 여건이 고맙고 황송하다는 기분과 함께!

※ 고혜련 - 칼럼니스트. 자연과 함께하기, 온 세상 여행하기가 요즘 주요 관심사다. 중앙일보 등 국내외 주요 일간지에서 기자·문화부장·런던특파원을 지냈다. [어머니, 당신은 내 운명], [힘내! 이제 다시 시작이야] 등 7권의 저서가 있다. 이화여대를 거쳐 미국 뉴저지주립대, 영국 런던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저널리즘을 전공했다. 현재 출판사(주)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로 일한다.

202311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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