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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11)] 이예(李藝)가 세종의 신뢰와 애정을 독차지한 까닭은 

조선에서 믿고 맡길 수 있는 유일한 대일 외교관 

일본 중앙 정치권 동향은 물론 지역 간 국지적 대립관계까지 꿰뚫어
국가 안위 위해 목숨 걸고 철제 화통·대완구 등 첨단 무기 구해오기도


▎국립외교원에 세워진 충숙공 이예의 동상. 그는 일본의 복잡한 권력관계를 제대로 파악해 대마도를 조선의 외교질서 속에 편입함으로써 조선 전기의 안정적인 대일 관계를 유지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조선 최고의, 아니 우리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왜인이 신라 혁거세(赫居世) 때부터 이미 우리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어 왔고 (중략) 영묘 계해년(1443, 세종 25)에 제주를 침탈하다가 붙잡히고 나머지 적은 대마도로 도망갔다. 이에 이예를 파견해 대마도주에게 그들을 잡아 보내라고 회유하니, 도주가 감히 숨기지 못하고 13명을 붙잡아 이예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을 조사하니 조선에 앞서 중국 연안을 침범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영묘께서 신인손에게 호송케 해 황제에게 바쳤다. (후략)”(신흠[상촌집] 제34권 ‘비왜설(備倭說)’)

조선 인조 때 영의정까지 지낸 신흠의 기록이다. 조선 중기 한문학 4대가 중 하나로 일컬어지기까지 했던 뛰어난 문장가였지만, 임진왜란 초 명운을 가른 전투였던 탄금대 전투에 참가하고 정묘호란 때는 세자를 수행해 전주까지 피란가기도 했던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이다. 그렇게 산전수전을 다 겪은 신흠이 대일 전문 외교관 이예의 활약을 첫째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왜란을 반복해서 겪어야 하는 현실을 개탄한다.

“20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겨우 네 차례 들어와 노략하였으나 그때마다 모두 패하여 물러갔거나 제 스스로 물러갔으므로, 조정이 항상 이길 수 있다고 여겼고 또 안일과 오락에 젖어 별로 대비하지 않았다.”

왜구 동향과 권력 관계 제대로 파악한 이예

신흠의 계산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200년 동안 큰 왜침이 네 차례 정도에 불과했던 데는 그의 평가대로 이예의 공이 크다. 앞선 호에서 설명한 대로 1443년 이예가 조선을 대표해 대마도주와 맺은 계해약조(癸亥約條) 이후 100여 년 동안 왜구가 한반도 연안을 얼씬거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또다시 왜구가 준동하고 기어코 임진왜란까지 겪게 되는 상황의 가장 큰 원인은 조선이 제2, 제3의 이예를 키우지 못했다는데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내친김에 신흠의 기록을 좀 더 살펴보자. ‘왜란 초 장수들이 무너져 패한 이유(諸將士難初陷敗志)’라는 글이다. 임진왜란 최초의 대규모 야전이었던 탄금대 전투 때의 일이다. 당시 삼도순변사였던 신립의 오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종사관 김여물 등이 “적의 세력이 대단히 강하므로 그 예봉을 직접 상대하기 어렵다. 조령에 군사를 매복하고 적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양쪽 언덕에서 활을 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립은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로 짓밟으면 성공하지 못할 리 없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적은 이미 조령과 죽령 두 고개를 거쳐 몰래 군사를 잠입시켜 충주 성중에 이르렀는데 신립은 이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적이 민가를 불태운 뒤에야 이미 조령을 넘어왔다는 것을 군사들이 알고 놀라며 두려워했다. 왜적들이 조령의 큰 길을 통해 산을 뒤덮으며 내려오는데 칼빛이 번쩍번쩍했다. 신립이 군사를 진격시켰으나 길이 비좁고 논밭이 많아 말을 달릴 수 없어 지체됐다. 그 사이 적이 우리 군사의 좌측으로 돌아 나와 동쪽과 서쪽에서 끼고 공격해 오는 바람에 우리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적에게 난도질을 당했다.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군자와 군기가 일시에 결딴나고 말았다.”([상촌집] 제56권)

흔히 탄금대 전투에서 패전한 것을 신립의 오판 탓으로 지적하지만 그것은 반만 맞는 사실이다. 가장 크고 직접적인 패인은 무엇보다도 정보전의 실패였다. 신립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을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은 이미 조령을 넘고 있었으며, 조선군의 허를 찔러 병력을 셋으로 나눠 들어와 충주성을 점령한 것이다.

뒤늦게 사실을 안 신립이 충주성으로 말을 돌렸지만 전열이 정비되기 전에 왜군의 전면공격을 받아 우왕좌왕하다가 대패할 수밖에 없었다. 적의 진군 속도만 제대로 파악하고 대비했다면 조령에서 매복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무참하게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보의 중요성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는 [손자병법] 얘기가 다른 게 아니다. 조선 전기에 왜구를 잘 다스릴 수 있었던 것도 이예처럼 일본 사정에 정통한 전문가가 있었기 때문이며, 중기 이후 왜구가 다시 골칫거리로 떠오른 것도 이예 이후 왜구의 동향과 권력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던 전문가가 없었던 까닭이다.

일본에 관한 한 세종의 가장 확실한 참모


▎일본 교코대 다니무라 문고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회도’ 중 부분. 부산포 왜관 모습으로 추정된다. 문 밖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왜관 안에서 열리는 시장에 들어가려는 행렬이다. / 사진:교코대 타니무라 문고
이예의 현역 시절에도 일본에 가서 의사소통을 할수 있는 외교관은 이예 외에 역관 윤인보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윤인보의 경우 지난 호에서 말한 대로 사행 과정에서 횡령과 기밀 누설 등으로 몇 차례 처벌받았던 점을 고려하면, 조선 조정에서 믿고 맡길 수 있는 대일 외교관은 이예 한 사람뿐이었다. 일흔이 넘은 이예가 험한 파도를 넘어 대마도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제 정보와 관련해 이예의 활약상을 살펴보자. 세종 20년인 1438년 9월 의정부에서 소를 올린다.

“이번에 대마도에 파견된 이예가 종정성(소 사다모리)과 이미 약속을 했으므로 이제부터 대마도의 종언칠·종언차랑·종무직과, 만호 조전·육랑차랑, 그리고 일기도의 지좌전·좌지전과, 구주(九州)의 전평전·대우전과, 살마주·석견주 등 각처에서 사자로 보내 온 사람이라도 종정성의 문인(文引)이 없으면 접대를 허락하지 말도록 하옵소서.”

먼저 우리는 상부의 허가 없이도 대마도주와 약정을 맺을 만큼 이예의 외교 전권이 크게 상향됐음을 알 수 있다. 이예와 소 사다모리의 약속은 그해 4월 이예의 대마도 방문 때 이뤄진 것이다.

당시 이예의 직급은 첨지중추원사였다. 정3품 당상관이라고는 하지만 국방자문위원이라 할 수 있는 자리여서 정책 결정의 실권이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대마도주와 그런 약속을 했다는 것은 사전에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얘기가 된다. 임금의 어지간한 신뢰가 있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이예는 일본에 관한 한 세종의 가장 확실한 참모였던 것이다.

일본에 관한 그의 전문성과 식견을 세종과 신하들이 인정했다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세종 10년 임금은 중국에 보내는 공물로 쓰이는 금·은의 조달 문제를 신하들과 논의한다.

왕은 물론 신하들도 전문성과 식견 인정


▎대마도와 일기도(이키섬), 그리고 규슈 지역은 왜구의 본거지였으며 각각의 실력자들이 복잡한 권력관계를 유지하며 통치하고 있었다. / 사진:부산일보
중국이 금·은 매매를 금지하는지, 민간에서 통용되는지, 값이 싼지 비싼지 물어도 대답하는 신하가 없었다. 그러자 세종은 중국에 가는 진하사로 하여금 알아오게 하고 금·은을 일본에서 구매하는 대안을 제시하는데, 이때도 이예의 의견을 구한다.

“일찍이 들으니, 일본국에는 금만 생산하고 은은 생산하지 않는다고 한다. 회례사 이예를 불러 그런가 아닌가를 묻고, 만약 금을 생산한다면 금값을 회례사에게 부쳐 보내어 사오게 하는 것이 좋겠다.”([세종실록] 1428년 6월 26일자 기사)

나중에는 신하들마저 전적으로 이예의 판단에 맡기는 사례가 잦아진다. 세종 20년 조선에 내왕하는 왜인들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 골칫거리였다.

대마도가 기근에 시달리는 봄·여름 두 철에 포구에 체류하거나 서울로 올라오는 왜인의 수가 3000명에 이르게 되는데, 이들은 다른 목적 없이 오로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조선을 찾은 것이었다. 입항한 왜인들에게 조선 정부가 무기한 음식을 제공하는 제도를 악용한 것이다. 이들은 체류 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갖은 꾀를 동원했다.

“서울에 올라온 왜인들이 물품 매매를 핑계로 오랫동안 관에 체류하면서 시일만 연장해나가고 있으며, 포구에 머물고 있는 왜인들도 서울 간 사람들을 기다린다는 핑계로 머물고 있어 (중략) 경상도 관찰사의 보고에 따르면 공급할 쌀과 장이 다 떨어졌다 하오며, 포구에 머물러 있는 20명은 10인분 식사를 나누어 먹고 남은 10인분은 본도로 가지고 돌아간다 하오니(후략)”([세종실록] 1438년 6월 13일자 기사)

이 같은 폐단을 없애기 위해 신하들이 왜인들의 체류 기한을 10일 또는 20일로 못 박고 하루 전에 통보해 떠날 준비를 하게 하라는 의견을 냈다. 그러자 세종은 고민에 빠진다.

“그대들의 말을 좇으면 약소한 무리를 사랑해야 하는 대의에 어긋날 것이요, 저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려고만 힘쓴다면 국가의 재원이 부족할 것이 염려되니 어쩌면 좋겠는가.”

이에 신하들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이예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다시 숙의하게 하옵소서.”

일본 국내 상황을 알아야 현명한 판단을 내릴 텐데 그렇지 못하니 아무도 현실과 명분 사이에서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듬해 이예가 귀국하자 다시 논의가 되는데 이예가 해법을 제시한다.

“신이 살펴보니 서계(書契)를 받아서 오는 자들이 모두 대마도 사람은 아니며, 농민도 아니고 도둑질을 업으로 삼다가 대마도의 배에 부탁해 오는 자도 있습니다. (중략) 종정성과 소이전(小二殿)에게 후사해 폐단을 금하게 하시고 대내전(大內殿)에게도 사절을 보내 (문인 위조 등을) 금하도록 하소서.” ([세종실록] 1439년 4월 18일자 기사)

종정성은 대마도주인 소 사다모리이며, 소이전과 대내전은 규슈(九州) 지역을 지배하는 씨족들이었다. 이들 외에도 일기도주 좌지전, 지좌전·살마주·석견주·대우전 등 군소 실력자들이 존재했다.

이예는 이들 사이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파악하고 있었으며, 대마도주하고만 교섭한다고 해서 왜인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예는 또 대내전과 소이전이 지역 패권을 다투자 그 전후관계를 자세히 파악해 보고했다. 그리고 그 여파가 조선에 미칠 것을 걱정하고 대비할 것을 건의한다.

“일본의 대내전이 일찍이 소이전과 싸워서 소이전의 축전주 땅을 빼앗았습니다. 교토의 어소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일기주가 서로 싸워 통일되지 않으면 너희가 빼앗음이 가하다’는 글을 내렸습니다. 이에 (일기도주) 좌지전이 대내전에 귀순했습니다. 축전주를 관할하던 대마도의 종정성은 원래 대내전에 복종하지 않았고 소이전도 본도(本島)에서 왔기 때문에 대내전이 곧 군사를 일으켜 칠 것입니다. 대내전이 거느리는 병사가 수만 명에 이르고 군수와 병기를 항시 준비하고 있는 까닭에 구주의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따르고 교토에서도 두려워할 정도입니다. 일기주는 우리 변경과 가까운데다 위세가 중하고 군사가 강하니 크게 염려됩니다. (중략) 각 포구의 병선과 군기를 살펴 튼튼하지 못하면 즉시 수리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소서.”([세종실록] 1430년 5월 19일자 기사)

꼼꼼한 분석력으로 병선 개량 작업 돕기도


▎16세기 명나라 화가인 구영(仇英)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왜구도권(倭寇圖卷)’ 중 노략질 장면. 일본 도쿄대 사료편찬소 소장. / 사진:도쿄대 사료편찬소
이예는 왜구의 본거지였던 지역들 사이의 국지적 대립관계는 물론 일본 중앙 정치권의 동향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축전주는 오늘날 후쿠오카(福岡) 일대를 말하며, 대내전은 무로마치 막부 때 주코쿠 지방을 장악한 다이묘 가문으로 센코쿠(戰國) 시대까지 남아 패권을 다퉜다.

대내전은 백제 온조왕의 후손을 자처하며 친조선 정책을 펼쳤다. 이예가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했을 때와 귀국길에 해적선을 만나 약탈당했을 때도 그를 도와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이예는 여러 차례의 사행 과정에서 다른 나라 조선 기술의 우수성을 터득하고 상대적으로 낙후된 우리 선박의 문제점을 깨닫게 됐다. 그의 제안을 살펴보면 그의 지식이 지나가면서 우연히 보게 된 수박 겉핥기식이 아니라 이것저것 꼼꼼히 살피고 오랫동안 연구를 거듭했음을 알 수 있다.

“강남·유구·남만·일본 등 여러 나라의 배는 모두 쇠못으로 조립한 데다 오랜 기간 건조해 만들었기 때문에 튼튼하고 정밀하며 가볍고 빨라 여러 달을 떠있어도 물이 새는 일이 없고 강풍을 만나도 부서지거나 상하지 않아 20~30년은 갈 수 있사온데, 우리 병선은 나무못을 쓰고 짧은 시간에 급조해 견고하지 못하고 빠르지도 못하며 8~9년이 못가서 부서지고 상하게 됩니다. (중략) 구조도 다른 나라의 배처럼 가운데는 높고 가장자리는 낮게 해 물이 배 안으로 흘러들어가지 않게 하옵소서.”([세종실록] 1430년 5월 19일자 기사)

배의 성능에 그치지 않고 왜구를 상대하는 전술적인 측면에서도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보인다.

“비거도선(鼻巨刀船)은 고기를 잡고 왜적을 쫓는데 매우 편리하오나 병기를 싣지 않아 적선을 만나면 반드시 사로잡힐 것입니다. 검선(劎船)에 한 자되는 창과 칼을 뱃전에 벌려 꽂아 적이 칼을 뽑아들고 배에 오르지 못하게 하며 검선 1척마다 비거도선 2~3척이 따르게 하소서. 그리하면 왜적을 보면 비거도선으로 급히 쫓아 붙잡고 검선이 따라 치면 왜적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여러 나라의 배들이 비거도선을 본선에 실었다가 쓸 일이 있으면 내려놓는데, 우리 병선은 본디 몸이 크고 비거도선을 배꼬리에 달고 다녀 배가 느릴 뿐 아니라 줄이 끊어지면 버리고 가게 됩니다.”

비거도선은 오늘날의 소형 쾌속정에 해당한다. 숨어 있다가 약탈하고 도망가는 왜구의 배를 큰 전함이 따를 수 없어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작은 배를 만든 것이다.

이예의 건의를 세종은 그대로 따른다.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전문성과 구체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사심 없이 오로지 국익만을 생각하는 이예의 성품을 세종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식 임무 외에도 국가 안위 위해 헌신


▎안타깝게도 고려시대 화약무기로 확인된 유물은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고려 말 최무선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총통 2점이 있을 뿐이다. 길이 24㎝, 구경 1.6㎝로 내부 구조가 조선 세종 말기의 독자적 총통 형태와 다르고 명나라 초기 총통과 유사하다. 경희대 박물관 소장. / 사진:경희대 박물관
세종은 그런 이예의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봐왔던 것이다. 이예는 이미 오래전부터 병선의 개량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상왕(태종)이 양화도에 나아가 새로운 전함의 수행 능력을 관람했다. 이에 앞서 여러 도의 전함이 왜선을 쫓았지만 왜선이 빨라서 미처 따라가지 못했었다. 이에 상왕이 대호군 윤득민에게 명해 빠른 배 3척을 만들게 했던 것이다. 귀화한 왜인이 왜선을 타고 10여 보 앞서 출발한 뒤 윤득민과 대호군 최해산, 군기부정 이예가 각각 1척씩 타고 쫓아갔는데 득민의 배가 가뿐하고 빨라 왜선을 앞질렀다.”([세종실록] 1420년 11월 17일 기사)

여기서 최해산은 최무선의 아들로 대를 이어 화약 전문가로 활약했고, 윤득민은 연안에 주둔한 수군을 다스리는 해도찰방(海道察訪)으로 왜구선 1척을 잡은 공적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문신이다.

따라서 기록으로 전하지는 않지만 빠른 왜구 병선을 쫓아 포획할 수 있는 쾌속선을 만드는 데 이예의 역할이 컸을 게 분명하다.

이예는 일본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이를 조정에 알려 대책을 강구하거나 우리가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세종이 즉위하던 해부터 대마도에서 신병기를 발견하고 이를 구해온 사실이 있다.

“화통(火㷁)과 완구(碗口)는 동을 부어 만드는 것이나 동철이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으므로 만들기 쉽지 않습니다. 신이 대마도에 갔을 때 왜적의 집에서 중국에서 무쇠를 부어 만든 화통과 완구를 보고 얻어왔사오니 무쇠로 화통과 완구를 만들어 각 주와 진에 배치하소서.”([세종실록] 1418년 8월 14일자 기사)

화통은 화약을 사용해 탄환이나 화살을 날리는 무기에 대한 일반적인 명칭이고, 완구는 역시 화약으로 포탄이나 단석 등을 쏘는 대포를 말한다. 철제 화통과 완구는 당시 중국에서 새로 개발된 첨단 무기였다. 구리가 희소한 우리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 첨단 무기인 철제 화통과 완구를 구해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칫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까지 처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예가 왜인을 구워삶아 얻어온 것이다. 자신의 임무가 아니었는데도 오직 국가의 안위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이예 사후 그의 부재를 못내 아쉬워한 세종


▎조선시대 대완구. 손으로 불을 붙여 포석을 발사하는 화약무기다. 이예는 세종이 즉위하던 해부터 대마도에서 신병기를 발견하고 이를 구해온 사실이 있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우리나라의 화약 무기는 고려 말 최무선이 화약 제조 기술을 터득한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당시 고려는 끊임없이 출몰하는 왜구를 압도할 수 있는 화약 무기를 만들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노력했다. 1377년 화약과 화기 제조를 담당하는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대장군포·이장군포·화포·화통·화전·질려포·철탄자·천산오룡전 등 18종의 화기와 발사체를 만들었다.

하지만 조선 왕조 초기의 불안정한 상황 탓에 화기의 발전이 주춤하다가, 왕권이 안정되기 시작한 태종 때부터 다시 개발에 박차가 가해졌다. 특히 화약 무기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세종 때 화기 개량이 대대적으로 이뤄져 비로소 기술이 국제적인 수준에 이르게 됐는데, 거기에는 이예의 도움도 한몫했던 것이다.

이예가 대마도에서 신형 철제 화통을 가져오긴 했지만, 당시 일본이 우리보다 화기의 수준이 높았던 것은 아니다. 중국 연안을 노략질하다가 납치해온 중국인 기술자로부터 무쇠 화기를 만드는 방법을 배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화약의 수준이 크게 떨어져 화력이 세지 못했다. 그래서 조선으로부터 선진적인 화약 제조 기술을 얻기를 원했다.

왜인들은 당연히 이예한테도 여러 차례 화약을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예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장면은 세종의 회상으로 남아 있다.

세종은 1445년 5월 궁궐에 임시관서인 사표국을 설치하고 화약의 원료가 되는 염초 제조를 시험하게 한다. 보다 우수한 품질의 염초를 만들어 강력한 화약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신하들이 가뭄을 이유로 염초 제조를 가을로 늦출 것을 건의하자 세종이 설명한다.

“전라도와 경상도에 관리를 파견해 (염초를) 제조하게 했더니 주색만 일삼고 염초장에게만 맡겨두었다. 염초장이 여염집을 찾아다니며 ‘이 땅이 염초를 제조하기 좋은 터’라고 위협해 뇌물을 받아 챙기는 바람에 백성들이 괴로워했다. (중략) 왜인이 염초 제조법을 배우고자 한 지 오래이나 중국인을 납치하고 나서야 비로소 화포 만드는 법을 알았다. 예전에 이예가 일본에 갔을 때 왜인이 화포를 가졌으나 화력이 세지 못해 예에게 염초를 청했는데 예가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염초장들은 금전으로 꾀면 제조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염초 재료도 모두 일본에서 나오는 것들이니 만약 제조법을 배우게 되면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다. (중략) 장마가 시작되면 못하니 가물 때 우선 시험하고자 할 뿐이다. 외부에서 제조하면 왜인이 알까 염려되니 궁궐 내에서 하고자 하는 것이다.”([세종실록] 1445년 5월 9일자 기사)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 평가 지나치지 않아

이때는 이예가 죽은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시기다. 염초 실험의 필요성을 신하들에게 설명하면서 굳이 이예를 떠올린 것은 세종이 그를 그리워하고 그의 부재를 아쉬워한 것일 터다.

이예가 있었다면 자신의 뜻을 이해하고 적극 협력했을 것이다. 그만큼 이예에 대한 세종의 신뢰와 애정은 깊고 또 깊었다. 이 글의 서두에 말했던 것처럼 1438년 대마도주의 문인 독점권을 주는 권한을 이예에게 전권 위임했던 이유다.

그것은 사실 그보다 12년 전인 1426년부터 대마도주인 소 사다모리가 요청해온 것이었다. 문인이란 도항허가서를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 비자와 비슷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오는 왜인들은 각 지역의 실력자들이 각기 발급하는 행장(行狀)이나 노인(路引), 서계(書契), 문인 등 다양한 통행허가서를 지니고 왔었다.

그러다 보니 문서를 위조하거나 도항인의 수를 속여 자격이 없는 자를 넣어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사례까지 벌어졌다. 야간에 작은 배를 타고 나와 바다 한가운데서 대기하고 있다가 상선이 오면 이에 승선해 상인을 사칭해 조선에 입국했다.

그 수가 50여 명에 이르렀는데, 그들은 귀환할 때 왜상들에게 각각 5두의 미곡을 수수료로 지급했다. 이처럼 문란한 행태를 막고 조선 왕래의 독점을 통한 이익과 권한을 극대화하기 위해 대마도주가 요청한 것이다.

그것은 나라의 곳간이 줄줄 새는 폐해를 막아야 하는 조선과도 이해가 맞는 것이었지만, 이예는 대마도주의 요청을 곧바로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일본의 다른 실력자들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도항인들의 폐해가 커지고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의 권력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문인제도의 실효성이 커졌을 때 시행을 제안한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은 대마도를 조선의 울타리로 만들어 대마도주에게 문인 발행권을 주는 대신 그를 조선의 외교질서에 편입시켜 골칫거리인 왜구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조선 전기의 대일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이 같은 사실만 가지고 보더라도 이예를 조선 제일, 아니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전문 외교관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 이훈범 -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지난해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2023년 초 첫 소설 [화살 끝에 새긴 이름]을 발표했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을 펴냈다.

202311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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