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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다이사쿠의 일생(1)] ‘인간주의’ 가슴에 품은 청년의 꿈과 성취 

냉전의 벽 허물고 대화의 시대 연 거인의 족적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이케다 다이사쿠 SGI 회장, 작년 11월 15일 95세 일기로 서거
전후 혼란의 시대 딛고 1200만 세계적 재가불교단체로 키워
세계 지도자·석학들과 끝없는 대화로 평화공존의 길 모색


▎불교철학자, 평화운동가, 교육자, 작가 그리고 시인으로 ‘대화’를 통한 세계 평화 증진에 평생을 바쳐온 이케다 회장의 삶은 곧 창가학회의 역사나 다름없다. 사진은 1960년 5월 3일 제3대 회장 취임식. / 사진:SGI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국제창가학회(SGI) 회장이 지난 11월 15일 9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창가학회(創價學會)는 11월 18일 공식 발표를 통해 이케다 회장이 노환으로 도쿄 신주쿠 자택에서 생을 마무리했으며 장례는 가족장으로 거행됐다고 전했다.

불교철학자, 평화운동가, 교육자, 작가 그리고 시인으로 ‘대화’를 통한 세계 평화 증진에 평생을 바쳐온 이케다 회장의 삶은 곧 창가학회의 역사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창가학회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던 시기 그 중심에 이케다 회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케다 회장은 19세에 창가학회에 입문해 창가학회 제3대 회장과 명예회장, 국제창가학회 회장으로 조직을 이끌었다. 국제창가학회는 현재 192개국·지역에 1200만여 명의 회원을 둔 세계적인 불교단체로 성장했다.

창가학회는 13세기 일본의 니치렌(1222~1282)이 설한 불법(佛法)을 신봉하는 재가(在家) 신도 단체다. 창가(創價)는 ‘가치를 창조한다’는 뜻으로, 생명의 가치와 평화의 가치를 일컫는다. 한국에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로 잘 알려져 있다. 남묘호렌게쿄 봉창은 묘법연화경(법화경)을 주 경전으로 삼고 있는 창가학회의 수행법이다.

니치렌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강조하고, 우주 생명의 근본법인 법화경을 실천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파했다. 1930년에 교육자였던 마키구치 쓰네사부로(1871~1944)가 제자인 도다 조세이(1900~1958)와 함께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전 인류의 행복과 번영, 항구적인 세계평화 실현을 목표로 ‘창가교육학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이 됐다. 마키구치 회장은 창가학회가 추구하는 생명의 가치, 평화의 가치에 위배된다고 생각하여 군국주의에 맞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치안유지법 위반과 불경죄로 체포된 뒤 옥사했다.

19세에 평화주의자 도다를 만나다

마키구치의 제자인 도다 조세이도 군국주의에 저항하다 2년간 투옥돼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45년 그가 출옥했을 때 일본은 패전으로 황폐화됐다. 창가학회도 사실상 괴멸 상태에 놓여 있었다. 도다는 단체 이름을 ‘창가학회’로 바꾸고 만인존엄과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를 구축하고 고통받는 민중을 구제하기 위해 니치렌불법을 넓혔다. 1947년 8월 14일 창가학회 좌담회에서 도다와 19세 청년 이케다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졌다. 도다가 ‘입정안국론’(니치렌이 1260년 당시 가마쿠라 막부의 최고 권력자인 호조 도키요리에게 제출한, 권력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정의를 밝힌 간언서)을 강의하는 모임에서였다.

유소년기에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이케다는 공습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데다 폐병에 걸려 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다시는 이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이케다는 도다의 명쾌한 철학과 인격에 매료됐다. 훗날 이케다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투옥된 사람의 말에는 무게가 실려 있었습니다. 저는 직감적으로 도다 선생님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다의 문하생이 된 이케다는 도다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소년잡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학회 재건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전쟁 후 불어닥친 초인플레이션으로 이내 경제적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월급을 받지 못한 직원들이 떠난 뒤에도 이케다는 스승 곁을 지키며 고된 일을 떠맡았다. 이케다의 각오는 단단했다.

“6개월 동안 전혀 월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신발은 찢어져 갈라지고, 입을 만한 옷도 없었습니다. 건강상태 역시 좋지 않았지만, 도다 선생님을 지키는 일이라면 지옥의 고통도 참아낼 결심이었습니다.”

스승의 곁을 지키느라 학업마저 포기한 이케다에게 도다는 대학 수준의 개인 교습을 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이케다 회장은 훗날 이를 ‘도다대학’이라 일컬었다. 수업은 도다 회장이 서거하기 1년 전인 1957년까지 이어졌다. 매일 아침 근무를 시작하기 전과 주말에 쉼 없이 이어졌고, 역사, 문학, 철학, 경제학, 과학, 조직 이론을 망라했다. 도다의 수업은 깊이 있고 엄격했다. 이때의 배움은 이케다의 철학과 신념을 형성하는 데 큰 자산이 됐다.

두 사람의 노력으로 1951년 사업이 안정궤도에 들어섰고, 도다는 창가학회 제2대 회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여전히 회원 수는 3000명 정도에 불과했다. 도다는 75만 세대를 포교하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이케다는 이듬해 도쿄 가마타지부 책임자가 되어 지부 회원 수를 비약적으로 늘렸고, 뒤이어 맡은 오사카 조직을 확대하며 지도자의 자질을 보였다.

1957년 도다 회장이 목표로 제시한 75만 세대 포교를 달성했다. 꿈같았던 숫자를 6년 만에 달성하며 창가학회는 일본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듬해 도다 회장이 서거했다. 곧장 이케다에게 회장직을 맡아달라는 회원들의 요구가 이어졌지만, 이케다는 쉽게 수락하지 못했다. 도다의 곁을 지키며 회장의 무거운 책임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케다 회장이 남긴 일기에는 당시의 고뇌가 오롯이 드러난다.

“4월 14일 비 온 뒤 맑음. 거절하지 못하고 분위기가 자연히 승낙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내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도다 선생님을 홀로 그리워한다. 그리고 홀로 결의한다.”

회장 취임하자마자 세계로 눈 돌린 청년 이케다


▎이케다는 도쿄 가마타지부 책임자가 되어 지부 회원 수를 비약적으로 늘렸고, 뒤이어 맡은 오사카 조직을 확대하며 지도자의 자질을 보였다. 도다(오른쪽) 제2대 회장과 이케다(왼쪽 아래) 회장. / 사진:SGI
1960년 5월 32세의 청년 이케다는 100만 세대 가까운 조직으로 성장한 창가학회의 제3대 회장에 올랐다. 회장에 취임한 그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니치렌불법의 세계 유포’라는 젊은 이케다의 이상에 창가학회 간부들조차 미심쩍어했다. 일본 국내에선 나날이 급성장하고 있었지만, 해외 회원 수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케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으키는 작은 파동이 모여 장쾌한 파도가 되리라고 확신했다. 취임 5개월 뒤 이케다는 ‘자네의 진정한 무대는 세계다.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라는 은사 도다의 유언과 동서냉전 등 격변하는 국제 정세를 떠올리고 자신의 사명을 되새기며 북남미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생에 걸친 세계 평화를 위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이케다 회장은 뉴욕을 방문해 총회가 열리고 있는 유엔본부를 찾았다. 이는 국제적 조직의 역할과 가능성에 관해 깊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고, 꾸준히 유엔의 리더십 강화와 유엔을 중심으로 지구상 여러 문제를 해결해갈 것을 촉구했다. 이후 아시아와 유럽 순방을 마치고 일본 전국을 순회하면서 조직 발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회장에 취임한지 불과 2년 반 만에 3배 가까운 300만 세대로 급증하는 기념비적 위업을 남겼다.

세계 각국의 조직도 성장을 거듭했다. 회장 취임 직후 방문한 북남미, 아시아, 유럽을 비롯해 오세아니아와 아프리카에도 니치렌불법이 넓혀졌고, 1975년 1월 26일 세계 51개국 멤버 대표 158명이 괌 국제무역센터에 모여 제1회 ‘세계평화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세계 각국의 창가학회 조직을 연계하는 국제적 기구로서 국제창가학회(SGI)가 결성되었고, 이케다는 모든 참가자의 추대로 회장에 취임한다.

이 무렵 이케다 회장은 또 한 번 중대한 도전에 나섰다. 바로 정당(政黨)을 만드는 일이었다. 창가학회의 정치 참여는 도다 회장 재임 때 한 번 시도한 적이 있었다. 1956년 참의원 선거에 6명의 후보를 내 3명이 당선했다.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파와 좌파 성향의 노동조합이 양분하고 있던 당시 일본의 정치 구도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주목을 받았다. 더불어 노조와 보수세력 양쪽에게서 탄압받는 구실이 되기도 했다.

냉전 빼닮은 일본 정치, 대중정당으로 개혁 도모


▎코시긴 소련 총리와의 대화에서 “우리는 평화주의, 문화주의, 교육주의이며 그 근본은 인간주의입니다.”라고 명확히 말한 이케다 회장. / 사진:SGI
무소속으로 활동하는 데 제약이 크다고 판단한 이케다 회장은 학회 출신 정치인들이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우산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해서 기존에 중도정치를 표방하며 결성했던 공명정치연맹을 정식 정당인 공명당으로 바꿨다. 공명당은 불법(佛法)의 자비 정신과 생명의 존엄성에 기반을 둔 정치 개혁과 민중의 삶 개선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케다 회장은 일본 정치에 동서냉전의 대립구도가 그대로 옮겨져 있다고 판단했다.

“기성 정당은 한편에서는 미국을 추종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소련을 따르는 등 정당으로서의 자주성이 결핍되어 있었다. 이데올로기나 다른 나라의 의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행복과 평화 실현을 최우선으로 하여 중도의 입장에서 정치를 이끌어 가는 정당을 사람들은 대망하고 있었다.”

다만 종교와 정치의 역할에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 창가학회와 공명당은 모두 불법철학에 근간을 두고 있지만, 구조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완전히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운영되도록 했다. 공명당은 좌우를 넘나들며 여러 정치 세력과 연대하면서 중도 정당의 입지를 지켰다. 여러 차례 자민당과 공조해 연립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공명당이 자력으로 정부를 구성할 정도로 세력을 키우진 못했지만, 이케다 회장이 꿈꿨던 대중정당의 역할은 충실히 해오고 있다. 2012년 이후로 자민당과 연립여당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정부의 극단적인 우경화를 제어하는 나름의 역할을 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창가학회와의 관계도 독립 정당과 지지 단체의 처음 성격을 유지해오고 있다.

이케다 회장의 정치관은 그가 남긴 어록에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는 정신이라는 토양을 일구고 정당이라는 종자를 심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자라서 어떤 꽃을 피우고,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초목 자체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1960년대에 이케다 회장이 지구촌에 뿌린 씨앗은 1970년대 들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가 세계를 무대로 한 활동은 창가학회가 신봉하는 니치렌불법을 근간으로 해 현대사회가 직면한 지구적 문제를 극복할 철학적 토대로 작용했다. 이케다 회장이 그 도구로 선택한 건 문명을 뛰어넘는 ‘대화’였다.

1970년대는 대립의 시대였다. 미국과 소련을 필두로 한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냉전 대립이 최고조에 달했다. 위기감이 고조될수록 대화를 향한 인류의 열망도 덩달아 커져만 갔다. 다만 서로를 향해 섣불리 손을 내밀지 못하는 두 진영 사이에서 이케다 회장은 가교를 위해 스스로 몸을 내던졌다. 이케다 회장은 사상과 신분,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대화의 대장정에 나섰다. 때로는 국가와 진영 간 중재자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화의 시대’의 막이 올랐다.

1972년 9월 베이징에서 전해진 ‘중·일 국교정상화’는 이케다 회장의 선견지명을 입증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케다 회장은 4년 앞선 1968년 9월 8일 ‘중·일 국교정상화 제언’을 발표했다. 냉전은 격화하고 있었고,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양국 관계가 냉랭한 상황에서 이케다 회장의 제언은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국 관계의 돌파구를 바라던 이들에게 이케다 회장의 말은 천군만마와 같았다. 앞서 창설한 공명당도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냉전시기 진영 뛰어넘는 평화 공존 모색


▎공명당은 불법(佛法)의 자비 정신과 생명의 존엄성에 기반을 둔 정치 개혁과 민중의 삶 개선을 이상으로 삼았다. 사진은 1964년 11월 공명당 결성대회. / 사진:SGI
양국 수교가 이뤄진 뒤 1974년 5월 30일 이케다 회장은 홍콩을 거쳐 기차를 타고 처음으로 중국 땅을 밟았다. 1974년 9월 8일에는 ‘철의 장막’이라 불리던 소련의 심장부 모스크바로 향했다. 크렘린궁에서 만난 알렉세이 코시긴 총리는 이케다 회장에게 “당신의 근본 이데올로기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케다 회장은 힘주어 답했다. “평화주의, 문화주의, 교육주의입니다. 그 근본은 인간주의입니다.”

이때 이케다 회장은 코시긴에게 “소련은 중국을 공격할 것이냐”고 물었다. 당시는 미·소 대립 못지않게 중국과 소련의 대립도 격해지고 있던 터였다. 코시긴은 “공격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는 “그 말을 중국 수뇌부에게 전해도 되겠냐”고 했고 “괜찮다”는 응답을 얻었다.

3개월 뒤 이케다 회장은 중국을 재차 방문해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났다. 암투병 중이던 저우 총리는 의사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케다 회장을 반겼다. 이케다 회장은 코시긴 총리와 나눈 대화 내용을 전달했다. 저우 총리는 “이케다 회장은 중·일 양국 국민들의 우호관계 발전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주창해 왔습니다. 그 점이 저는 매우 기쁩니다”라고 치하했다.

쉴 틈도 없이 이듬해 1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을 만났다. 어느 진영에서나 이케다 회장의 신념은 한결같았다. “당신들은 세계 어느 세력을 지지하느냐”라고 키신저가 물었다. 이케다 회장이 중국과 소련을 잇달아 방문한 것을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 이케다 회장의 답변은 간결했다. “우리는 평화세력입니다. 인류의 편입니다.”

이어진 그의 설명은 대화에 천착한 집념의 이유를 명확히 보여준다.

“우리는 동서 양 진영 중 어느 한쪽을 편들자는 게 아닙니다. 중국 편을 드는 것도, 소련 편을 드는 것도, 미국 편을 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평화세력입니다. 인류의 편입니다.”

이케다 회장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결정적 계기로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학의 거장 아널드 J. 토인비(1889~1975) 박사와의 대담을 꼽을 수 있다. 토인비와의 대담은 이케다 회장이 중·일 국교정상화제언을 발표한 이듬해인 1969년 9월 영국에서 날아온 한 통의 편지로 시작됐다. “우리 둘이서 의미 있는 의견 교환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토인비”

역사가의 혜안과 종교인의 신념이 만나다


▎국제창가학회는 현재 192개국·지역에 1200만여 명의 회원을 둔 세계적인 불교 단체로 성장했다. 사진은 대학부 총회에서 중·일 국교 정상화를 제안하는 이케다 회장. / 사진:SGI
이케다 회장은 1972년과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런던을 방문해 토인비 박사를 만났다. 토인비 박사는 문명의 발달과정에서 종교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불교를 이성과 과학을 중시하는 현시대에 세계가 직면한 위기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종교이자 철학으로 생각했다. 그가 ‘살아 숨쉬는’ 불교를 세계에 전파하는 이케다 회장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72년 5월 영국 런던 토인비 박사의 자택에서 첫 대담이 이뤄졌다. 당시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핵무기 사용 위협이 높아지고 있었고, 저명한 학계·재계·정치 지도자들의 모임인 로마클럽은 보고서 [성장의 한계]에서 ‘100년 안에 지구가 성장의 한계에 직면할 것’이라고 발표해 위기감이 커지던 때였다.

냉전이 격해질수록 대화의 걸음을 재촉하다


▎이케다 회장은 동서 진영을 오가며 중·일 수교와 중·소 화해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사진은 중국 저우언라이 총리와의 회담 장면. / 사진:SGI
세상의 몰인식을 뚫고 문명을 통찰한 역사가의 혜안(慧眼)과 ‘한 사람의 위대한 인간혁명은 이윽고 지역과 국가, 더 나아가 전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가져온다’고 역설한 종교인의 신념(信念)은 서로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열흘 넘게 지속됐다. 이윽고 40시간에 걸친 대담은 <21세기를 여는 대화>로 정리돼 31개 언어로 출판됐다. 대담 직후 이케다 회장은 모스크바대학교로부터 첫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대담 마지막 날, 소련 정상과 서독 총리의 회담 소식을 보도하는 TV 뉴스를 보며 토인비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대화는 소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는 후세 인류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대화야말로 영원한 평화의 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어 더 많은 사람을 만나 더 많은 대화를 펼쳐주길 부탁하면서 메모를 건넸다. 거기에는 “가능하면 만나주세요”라는 글귀와 함께 미국의 미생물학자 뒤보스 박사, 로마클럽 창립자 펫체이 박사 등 저명한 서양 지식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1970년대가 가고 1980년대가 왔지만, 세계는 여전히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이듬해 모스크바 올림픽을 서방 국가들이 보이콧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레이건 미국 행정부는 소련에 대한 강경노선으로 긴장을 끌어올렸다.

토인비 박사와의 대담 이후 동서 진영을 오가며 중·일 수교와 중·소 화해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한 이케다 회장은 보폭을 넓혔다. 창가학회 명예회장이 된 뒤로 그의 평화행동은 더 구체적이고 본격화했다.

1982년 6월 제2회 유엔 군축특별총회에 참석한 이케다 회장은 핵무기 폐기를 호소하는 제언을 발표했다. 이듬해 1월 26일 ‘SGI의 날’을 기념해 ‘평화와 군축을 위한 새로운 제언’을 추가로 발표했다. ‘SGI의 날’ 기념 제언 발표는 2022년까지 매년 지속됐다. 그는 기념 제언을 통해 유엔의 기능 강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 시민사회의 참여를 높이는 방안 등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했다. 유엔에 대한 이케다 회장의 전폭적 지지는 그의 스승인 도다 제2대 회장의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지구민족주의를 제창한 도다 선생님은 국가라는 틀을 벗어난 조직의 필요성을 깨닫고, 유엔에 깊은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21세기 지혜의 결정체는 유엔이다’ , ‘다음 세기를 향한 이 희망의 본거지를 보호하고, 계발해야만 한다’라고 선생님은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이케다 회장은 1983년 유엔경제사회이사회(ECOSOC) NGO로 등록된 SGI를 통해 2022년까지 매년 군축과 핵 폐기, 환경보호와 인권보호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벌여 지속적으로 유엔을 지원해왔다. 코피 아난을 비롯한 역대 3명의 유엔 사무총장과 대담을 갖고, 2006년에는 유엔 개혁을 위한 제언을 제출하기도 했다.

1980~1990년대 이케다 회장의 대화 상대는 더욱 폭넓어졌다. 독일의 바이츠제커 대통령, 장쩌민 중국 주석,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 카스트로 쿠바 의장, 라지브 간디 인도 총리,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 등 전 세계 지도자들과 만나 문명 간의 대화로 확장했다.

평화 향한 열정으로 수놓은 환희에 찬 여정

이케다 회장은 세계 5개국에 유치원, 일본에는 초등학교부터 대학원, 브라질 소카학원(초·중·고교), 말레이시아 소카국제학교와 미국 소카대학교를 망라하는 창가일관 교육시스템을 구축했다. 또한 평화와 문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민주음악협회’, ‘도쿄 후지미술관’, ‘동양철학연구소’, ‘도다기념국제평화연구소’, ‘이케다국제대화센터’ 등의 단체를 설립했다.

평생에 걸친 대화를 정리한 대담집만 80여 권에 이른다. 인류 평화를 위한 이케다 회장의 노력은 세계 유수 대학과 학술기관이 수여한 400개 이상의 명예학술 칭호와 20개 이상의 국가훈장 수훈이란 인류사에 괄목할 족적을 남겼다.

이케다 회장의 삶은 언제나 투쟁의 연속이었다. 1993년 9월 하버드대학교에서 가진 강연에서 이케다 회장은 생명의 존엄성과 열린 대화를 바탕으로 한 인류문명의 건설을 전망하면서 대승불교 철학인 ‘생(生)도 환희, 사(死)도 환희’를 소개했다. 이를 두고 “가치 있는 생을 살면 그 종말도 가치 있는 인생으로, 또한 가치 있는 죽음으로 평가되기에 ‘생도 환희, 사도 환희’가 되는 것”이라고 한 조문부 전 제주대 총장의 말처럼, 세계를 누비며 대화의 시대를 연 이케다 회장의 일생, 그것은 이상을 현실로 쟁취해 낸 생사 초월의 환희가 아니었을까.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202401호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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