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Home>월간중앙>사람과 사람

[조윤수의 국가를 품격 있게 만든 지도자들(5)] ‘유럽의 병자’ 독일을 ‘유럽의 기관차’로 바꾼 슈뢰더 

정권은 내줬지만 국가 부흥시킨 지도자로 남다 

국가경쟁력 높이기 위해 임기 도중 뼈아픈 개혁 시행
적폐청산 외치며 과거 부정하는 우리 지도자와 대비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 자신의 임기 동안 뼈아픈 개혁을 시행하고 에너지 절약을 위해 현실적인 정책을 시행해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2003년 8월, 필자가 외교관으로 부임할 당시 독일 사회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경기 침체와 높은 실업률로 사회 분위기가 침울했으며, 노사 갈등 때문에 기업은 인건비가 저렴한 동구 지역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노동자의 지지를 받고 집권한 슈뢰더 정부가 2003년 3월에 발표한 노동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집단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연일 일어나고 있었다. 평균 실업률 12%, 청년실업률이 20%에 이르다 보니 젊은이들은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고,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컸다.

게다가 1990년 통일 이후 13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동·서독의 경제적 불균형은 해소되지 못해 사회적 갈등이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었다. 서독 주민들은 자신들의 세금으로 동독에 매년 1000억 달러 정도를 퍼붓고 있음에도 동독 주민들이 감사할 줄 모른다며 못마땅해했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 주민들이 자신들을 이류 국민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불평하며 통일 이전이 더 나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동독의 변화상을 보기 위해 주요 산업 지역이었던 켐니츠 지역 등을 가봤다. 통일 전 노동자로 넘쳐나던 거리는 스산하게 변해 있었다. 인적이 드문 거리 곳곳의 상점 창문은 깨진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동·서독 통합은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독일은 변화가 필요했지만, 막상 개혁을 시행하니 이에 대한 반감이 폭발하고 있었다. 개혁정책의 후유증으로 2004년 각 주에서 시행된 지방선거에서 사민당 후보들은 연이어 낙선했고, 2005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기민당에 총리직을 내줘야 했다.

이같이 나락에 빠졌던 독일이 현재는 유럽과 세계의 중심국이 됐다. 변화의 배경에는 독일 지도자들의 리더십이 있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78)에 이어 집권한 앙겔라 메르켈(68) 총리는 슈뢰더의 정책을 배척하기는커녕 오히려 충실히 이행했고, 저점에 빠진 독일 경제는 반등했다. 16년 동안 장기 집권한 메르켈은 2021년 12월 정권을 물려줄 때까지 유례없는 인기를 누렸다.

독일의 성공은 메르켈 총리의 통합력 못지않게 슈뢰더의 개혁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노동자의 권익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슈뢰더 총리가 노동계층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개혁정책을 시작했는데, 이는 기름을 안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았다. 그 결과 그는 정권을 내줬지만, 궁극적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지켜나갔고 국가를 부흥시킨 지도자로 남을 수 있게 됐다.

노사정 협의 실패와 개혁정책 ‘2010 어젠다’


▎독일 시내에 걸려 있는 앙겔라 메르켈(오른쪽) 기민당 당수와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대형 포스터. 독일의 성공은 메르켈 총리의 통합력 못지않게 슈뢰더의 개혁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슈뢰더는 빌리 브란트 총리 못지않은 흙수저였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전사했다. 슈뢰더는 허드렛일을 하는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자랐다. 2차 대전 후 제대로 먹지 못해 삐쩍 말랐다. 늘 배고팠지만, 학업에 열정을 가졌다. 그는 직업학교를 거쳐 괴팅겐대에 진학했다. 슈뢰더는 사민당 연구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던 의지 강한 젊은이였다. 그는 성장 과정에서 노동자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노동자의 권익을 증진하고자 젊어서부터 사민당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경제적 이해집단인 기업에 늘 비판적이었다. 기업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억제하고, 이윤을 목적으로 해고를 쉽게 하며, 병가수당 등 복지 혜택을 축소하려 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임금 억제를 주장하는 재계의 입장을 수용하는 것은 현명한 노사정책이 될 수 없으며 노동계의 입장을 존중하는 가운데 노사정 협의를 통해 해결책을 도출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공동결정제도, 연대원칙, 일자리를 위한 동맹, 참여민주주의 사회, 노동자 공동결정 모델 등 특성을 가진 독일의 사회시장경제가 우수함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전후 경제 재건 이후 발전시켜온 독일의 사회시장 경제 모델은 2000년대 들어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경제성장률은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 뒤처졌고, 기업 도산 기록은 경신됐으며, 실업률은 위태로울 정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사회복지와 동·서독 경제 통합을 위해 높은 세금이 부과돼 일하는 임금과 실업 상태에서 지원받는 지원금의 차이가 줄어들었다. 독일의 사회복지 제도는 전후 사회 안정과 발전을 가져왔지만 2000년대 들어 기초생활을 보장하는 공공부조가 최저임금 수준에 근접해 노동의 인센티브가 사라졌다.

당시 독일 근로자의 노동시간이 유럽의 노르웨이·네덜란드를 제외하면 최하 수준이었지만 노동조합은 더 줄이고자 했다. 기업은 상승하는 임금 수준과 강력한 해고 보호 정책으로 신규채용을 꺼리게 돼 청년실업은 점차 증가했다.

게다가 통일 이후 동·서독 경제를 조기에 균등화하는 정책목표에 따라 동독 근로자의 임금이 통일 후 5~6년 사이에 10~12배로 상승했다. 생산성이 부족한 근로자의 임금 상승으로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돼 동독 산업은 붕괴되고 대량실업이 발생했다. 그 결과 정부는 대규모 실업자들에 대한 지원으로 재정적자가 크게 발생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국채 발행 이외에 조세 및 사회보장 기여금을 올렸다. 독일 경제는 총체적인 부실에 직면했고, 이러한 상황이 2000년대 들어 더욱 가속화됐다.

슈뢰더는 악순환되고 있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네덜란드의 노사정 협의 경험을 활용하고자 했다. 네덜란드의 노사정 협의체는 소위 ‘네덜란드 병’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방안으로, 노조는 임금 요구를 완화함으로써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고하는 데 일조하고, 사용자는 노동시간을 단축하도록 했으며, 정부는 노동자 세금 부담을 하향 조정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법적 지위를 향상했다.

또 노사 간의 협의와 합의를 바탕으로 국내 소비를 진작하고, 고용을 창출하며, 일자리 나누기를 하는 선순환 구조를 모색했다. 이 정책이 성공을 거두면서 경제 성장을 회복하고 일자리가 창출돼 실업률이 떨어졌으며, 인플레이션이 낮아지고 재정적자가 줄어들어 네덜란드의 기적이라고 불렸다. 당시 유럽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높은 실업률, 저성장, 노동시장의 경직성, 과도한 규제, 복지국가의 과도한 부담 등 유럽 경화증을 미국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안으로 극복함으로써 제3의 길을 개척했다.

슈뢰더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사정 협의체 성격인 노동을 위한 동맹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독일의 노동자와 기업은 대체로 입장이 대립됐지만 정부의 개혁에 반대하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했기에 3자 협의체를 진전시켜 나갈 환경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노동자의 권익을 주장했으나 경직적인 노동 환경이 지속될 경우 독일의 경쟁력이 더욱 하락하고 궁극적으로 노동자의 권익 보호에 역행한다고 느꼈다. 또 사회의 고령화, 통일의 후유증 및 경제의 세계화라는 대내외 환경과 도전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체제를 구축하지 않을 경우 노동계층의 피해가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고 3자 협의 대신 자신이 주도하는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과감한 개혁 통해 노동시장 유연성 높여


▎ 사진:연합뉴스
그는 노동·사회복지 제도의 근본적 변화를 추진하기 위해 개혁이 필요하나 개혁의 결정 시점과 개혁의 성과가 가시화되는 시점의 시차가 발생하는 만큼 정치인으로서 선택하기 어렵다는 점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국가의 장래를 위해 정치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개혁정책 ‘어젠다 2010’을 시행했다.

이 정책은 여러 개혁과제를 담고 있는데 그 핵심 사항은 노동시장의 개혁이다. 주요 내용은 실업급여와 기초생활보장비를 통합해 최저생계비 이상으로 지원하되, 지원을 받는 사람들은 국가의 지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자신이 충분히 만족하지 않아도 일자리를 수락하는 조건이 전제됐다. 또 그동안은 한번 고용되면 해고하기 어려웠으나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감안해 그 절차를 간소화, 일정한 조건이 갖춰지면 해고가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증가됐다.

통상 국민은 개혁이 추상적일 경우 대체로 찬성하나, 개혁이 구체화돼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면 반대하는 경향을 나타내곤 한다. 실제로 ‘2010 어젠다’를 2003년 3월 발표한 이후 2004년 1월 시행하기까지 언론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지기반인 노동계층과 사민당 내부에서도 반대가 극심했다. 경영자총연합회는 방향이 맞지만 불충분하다는 입장이고 노동조합총연맹은 강한 반대와 함께 최악의 경우 사민당과의 연대를 끊겠다고 협박했다. 일부 사민당 의원도 개혁안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조직해 대규모 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슈뢰더는 세부사항에 대해 논의할 수는 있으나 기본노선은 변경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노동조합의 비판이 거세다는 것을 알면서도 총집회에 참석해 개혁정책에 관해 설명했다. 개혁정책을 이행하기 위해 당대표직도 내려놓았고 사민당 특별전당대회를 통해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결과 사민당의 동의를 끌어냈으며 기민기사당과의 협의를 거쳐 의회에서 개혁안을 통과시키고 2004년 1월 1일 발효시켰다.

슈뢰더가 노사관계 조정 및 일자리 창출에 관련된 개혁에만 치중한 것은 아니다. 기후변화에 대응한 에너지 정책의 전환,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구조 변화, 통일로 인한 경제·사회적 변화 등이 상호 연관돼 있다고 판단하고 보다 거시적이고 중장기적인 전략으로 사회 문제에 접근했다. 그는 기후변화라는 세계적 도전에 대응해 선진국이 먼저 책임을 지고 온실가스 감축 약속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봤다.

그는 이를 위해 국내적으로 환경세를 도입해 에너지를 절약하는 방향으로 사회 분위기를 유도했으며, 기업들의 에너지 절약 신기술 개발과 재생에너지원 발전을 도모해 독일이 그 선두주자가 되도록 했다. 재생에너지 부문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비중을 늘리면서 온실가스 배출을 감소해나가는 방향으로 이끌어갔다. 전력 생산에서는 원자력 비중을 줄이면서 핵폐기물을 러시아에서 처리하는 방안도 강구해나갔다.

에너지 정책 전환하고 연금개혁도 추진


▎2018년 7월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와 김소연씨가 베를린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씨는 국제경영자회의에서 슈뢰더 전 총리를 만나 통역을 하며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슈뢰더와 메르켈은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 천연가스 수입선 확보, 국내 전력 요금의 상승 등 에너지 절약 및 전환 방안에 대해서는 입장을 같이했다. 다만 메르켈 총리는 원자력을 일정 부분 유지하려고 했으나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국민적 합의를 거쳐 2022년까지 모든 원자로를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또 전력의 절약을 위해 전력 요금을 인상해나갔는데 2000~2018년 가정의 전기요금이 3.3배 수준으로 올라 선진국 가운데 최고 수준에 이르렀지만, 국민은 친환경 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이를 수용했다. 에너지 전환 정책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에너지 사용 지표를 보면 2008~2018년 지속해서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도 오히려 독일 전체 및 1인당 에너지 사용이 10% 정도 줄었다.

슈뢰더는 재생에너지 비중을 확대한다고 해도 에너지원 확보에 취약성이 있는 만큼 천연가스를 확보해 약점을 보완했다. 이를 위해 러시아와의 협력을 중요시했는데 독일 기업이 러시아 에너지 채굴에 참여하도록 했으며 총리직을 마친 이후 독일·러시아 합작회사인 북유럽 가스관 사업의 주주위원회 의장직을 수락했다.

슈뢰더는 또한 인구구조의 변화에 따른 연금개혁을 추진했다. 고령화 추세와 함께 구동독 주민에게 연금을 지급하게 되면서 연금보험의 재정적자가 악화돼갔다. 그동안 근로자와 기업이 납부한 보험 분담금으로 연금보험이 유지됐지만, 인구 변화로 사회보장보험에 가입한 근로자의 수가 감소하는 추세였다. 아울러 근로자의 고용 기간도 예전의 장기 고용에서 수시로 직장을 옮기는 형태로 변화하면서 적립하는 보험금액도 감소하는 경향이었다.

아울러 기대수명과 연금수령 기간이 증가해 기존의 연금체계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이에 따라 사회와 국가가 제공하는 사회보장 이외에 개인별로 노후에 대비하는 개인의 자기 책임을 강화하도록 하는 연금개혁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기민기사당뿐만 아니라 사회보장 혜택을 당연시했던 노조의 반대가 심했지만, 의회에서 약간의 수정을 통하여 연금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슈뢰더는 전후 최대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국내외 흐름을 냉철하게 인식한 가운데 지지계층의 상당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젠다 2010’이라는 개혁 방안을 제시하고 이행했다. 또 기후변화에 선도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에너지원을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전환하고 러시아로부터의 가스 도입선을 확보했으며 전기요금 인상을 통해 국민이 에너지 절약에 체화되도록 했다. 국민에게 일정 기간 어려움을 주는 개혁을 택했기에 슈뢰더와 사민당은 지방선거와 총선에 패배하면서 정권을 내줘야 했다. 그러나 그 성과가 서서히 나타나면서 제조업이 활기를 띠는 가운데 고용이 활발해지고 동·서독 지역 간의 격차가 거의 없어졌으며 기후변화에 선도적으로 대응하는 국가로 거듭났다. 지금의 독일은 유럽의 엔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지도국가로 우뚝 서있다.

이러한 독일의 변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의 성숙된 독일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최저점이었던 독일 상황과 고통스러웠던 개혁 과정을 동시에 바라봐야 의미가 있다. 지금 우리의 상황도 2005년 독일의 상황과 같이 사회적 구조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 저출산·고령화의 인구구조, 재생에너지로의 구조 변화, 미·중 갈등으로 인한 불확실성은 우리의 지속적인 발전에 부정적이다.

이에 더해 국내적으로 우리의 노동 구조는 점차 경직화돼 가고 있으며, 연금 및 교육 개혁은 전혀 논의조차 하고 있지 못하다. 정치 지도자들은 국가 경쟁력을 위해 개혁을 해나가야 함에도 여론의 반대를 의식해 변화를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투자의 주체인 기업에 대한 부담이 증가되고 있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반면 안전한 일터에 보금자리를 튼 부모 노동자 계층은 수시로 집단 시위를 통해 더 높은 임금·후생복지를 계속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들의 자녀들은 점점 더 직업전선에 뛰어드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다. 신규로 진입하는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창출, 제공할 수 있도록 노조 및 경영계를 설득해나가고 환경을 조성해나가야 하는데도 주저하고 있다.

지도자는 여론이 아닌 성과로 평가된다

베를린에 부임한 직후 독일인들이 얼마나 에너지를 아끼는지를 실감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환경 보존을 위해 전기를 아끼면서 에너지 절약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 결과 탄소배출량은 줄어들고 재생에너지가 발전의 주요 동력이 됐다. 우리도 탄소중립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재생에너지를 주 에너지원으로 가겠다는 목표는 내세우지만 이를 위한 정책방안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천연가스 도입이 증가하면서 전력 원가가 상승했으나 여론을 의식하다 보니 전기요금은 동결해왔고, 그 결과 우량기업이던 한국전력의 상황은 악화됐다.

탄소절감과 환경보호를 위해 기업의 ESG(환경·책임·투명경영), 정부의 원자력·석탄발전소 폐기 등 방안을 논할 뿐 정작 국민이 어느 정도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환경을 보호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은 보이지가 않는다. 방송마다 도저히 다 소화하지 못할 정도의 넘쳐나는 밥상을 소개하는 먹방이 인기를 얻고 있고, 가계 전기요금은 2000년 수준 그대로 동결돼 원가에 못 미칠 정도로 싸다 보니 집집마다 여한 없이 전기를 소비한다. 정부는 탄소중립을 선도하겠다고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선진국 대부분이 에너지 사용과 탄소 배출이 줄어든 반면 우리는 중국과 함께 오히려 증가했다.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 자신의 임기 동안 뼈아픈 개혁을 시행하고 에너지의 절약을 위해 현실적인 정책을 시행해간 슈뢰더 총리, 그리고 이를 계승해 일관성 있게 발전시켜나간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은 적폐청산을 외치면서 과거를 부정하는 우리의 지도자와 너무나 대비된다. 성과를 내기 어렵거나 실현될 가능성이 미약한 정부의 정책을 보면서 동서양에서 회자되는 고진감래 또는 ‘희생 없이 성과 없다(No Pain, No Gain)’는 어귀가 문득 떠오른다. 지도자는 자신이 임명한 대변인의 논평이나 수시로 변하는 여론이 아니라 임기를 마친 이후에 서서히 나타나는 성과로 평가된다는 것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 조윤수 - 미국·러시아·독일·싱가포르·쿠웨이트·터키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2017년 주(駐)터키 대사를 마지막으로 37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현재는 한국유라시아문명연구회 이사장, 부산외국어대 초빙교수로 외교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 [독일 통일 30년, 독일의 과거에서 한국의 미래를 본다] [대사와 함께 떠나는 소아시아 역사문화산책] 등 근무한 국가의 모습과 주요 국제 사안을 책으로 엮었다. 현재 [오스만 제국의 영광과 쇠락, 터키 공화국의 자화상] [중앙유라시아에서 본 새로운 역사흐름]이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202203호 (2022.0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