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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18)] 영화 ‘글래디에이터’와 로마인의 와인 사랑 

온난화로 포도 재배지 늘자 제국 영토 덩달아 넓어졌다 

최대 영토인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는 로마 기후 최적기와 일치
와인 보급이 병사 사기 좌우, 수송 중 변질되자 현지 생산하기도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로마 5현제 중 마지막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게르만족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총애하는 장군 막시무스와 다뉴브 강 전선에 나와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 사진:영화 ‘글래디에이터’ 캡처
2022년은 영국 헤리티지 재단에서 지정한 하드리아누스 장벽의 해였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영국의 로마식 명칭)에 상륙한 이래 확장을 거듭하던 로마는 이곳에서 진군을 멈췄다. 그리고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브리튼 섬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긴 장성을 쌓았다. 이는 로마 제국의 최북단 국경이 됐다. 길이 73마일의 이 장벽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나누는 기준이기도 하다. 장벽 곳곳에는 로마인이 건설한 마을이나 요새의 유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고 거기서 발굴된 도자기, 조각상, 동전, 모자이크 등이 잔뜩 전시돼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이중 나의 눈길을 가장 잡아끈 것은 다름 아닌 ‘암포라’였다. 암포라는 와인을 저장하고 운반하는 데 사용되는 토기 항아리다. 그런데 와인이라고?

와인 용기를 보고 의외라고 생각한 이유가 있었다. 와인은 장기간 운송이 어려운 술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포트(Port) 와인으로 더 많이 알려진 포르투(Porto) 와인이다. 달고 높은 도수(18~20도)가 특징인 포트와인의 탄생 배경에는 백년 전쟁이 있다. 백년 전쟁의 패배로 영국은 수백 년간 보유했던 프랑스 내 영토를 잃게 됐다. 그중에는 와인 산지로 유명한 보르도가 있었다. 와인을 가져올 대체지가 필요했던 영국이 눈을 돌린 곳은 포르투갈의 도시 포르투였다. 그러나 포르투에서 실은 와인들은 영국에서 뚜껑을 연 순간 식초가 돼 있었다. 저온 보관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찾아낸 해법은 주정강화였다. 도수 높은 브랜드를 섞어 변질을 막을 수 있었다. 덕분에 다른 와인과 차별화되는 특징을 갖게 됐다. 그런데 이보다도 수백 년 전인 고대 로마 시대는 와인을 운송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로마 제국의 심장에서 가장 먼 변경이었던 이곳에서 발견된 와인은 어떻게 된 것일까?

고대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물자 중 하나는 와인이었다. 로마인들은 식사를 비롯해 거의 모든 행사에서 와인을 즐기는 습관이 있었다. 이것은 군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로마는 활발하게 정복 전쟁을 벌이는 동안 군인들에게 지급될 와인이 필요했다. 술은 타향 생활을 하는 군인들의 외로움을 달래고 사기를 올려주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로마는 영토를 넓히고 정착할 때마다 군인과 현지 정착민들에게 줄 와인 공급에 신경을 썼다. 로마에서 와인을 수송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엔 거리에 비례해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고, 품질도 담보하기 어려웠다. 비록 로마인은 그 어떤 민족보다도 길을 잘 만들고 유지 보수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신선한 와인이 공짜로 보급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도수 높은 브랜드 섞어 변질 막아


▎포르투갈 포르투 지역을 대표하는 그라함 양조장의 2004년산 빈티지 포트 와인. 영국은 백년 전쟁 당시 와인 산지로 유명한 보르도 지역을 프랑스에 넘겨주게 되자 대체지로 포르투 지역을 선택했다.
그래서 발달하게 된 방식이 현지 생산이다. 이미 로마 제국이 확대하는 과정에서 와인 양조 기술도 제국 전역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세계적인 와인 생산지가 고대 로마 제국이 유럽에 남긴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군의 전진 기지였던 보르도(프랑스), 마인츠(독일) 등이 대표적인데, 이 지역에서는 지금도 와인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와인 축제도 열리고 있다. 당시 로마 제국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대서양,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북쪽으로는 브리튼,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이었고 이들이 주둔한 곳이라면 어디든 와인이 함께 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로마 5현제 중 마지막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게르만족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총애하는 장군 막시무스와 다뉴브 강 전선에 나와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이들도 이곳에서 재배한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중해 인근 지역에서만 생산되던 와인이 이렇게 제국 전역에서 재배될 수 있었던 것은 기후 덕분이었다. 과거 같으면 꿈도 꾸지 못했을 포도나무가 프랑스, 독일 북부 지역은 물론 영국에서도 재배될 수 있을 만큼 기후가 따뜻해진 것이다.

영국에는 울체스터, 체스터, 윈체스터 등 체스터(Chester)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다. 한국인들에게도 유명한 축구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 지역인 맨체스터도 마찬가지. 이것은 라틴어로 요새를 뜻하는 카스트룸(castrum)에서 유래됐다. 당시 로마군의 주둔 기지가 만들어지면서 발달한 마을이다. 그래서 이런 도시들에는 여지없이 박물관이 있는데 하나같이 그곳에서 발굴된 로마 시대 유물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영국 중부 지역에서는 로마시대의 암포라 생산 시설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다.

기후의 축복, 로마 최적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남겼을 정도로 철학을 사랑했던 황제였지만, 그의 임기 대부분은 제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반란을 진정시키는데 보내야 했다.
로마 온난기(Roman Warm Period, Roman Climatic Optimum, 로마 기후 최적기)는 유럽에서 이전보다 특별히 따뜻했던 시기를 가리킨다. 그 시기는 대략 기원 전후 200년까지로 추정되고 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 스페인 등에서 머물던 지중해성 기후대의 북방 경계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춥고 음습한 대륙성 기후는 유럽 대륙 귀퉁이로 밀려났다. 덕분에 로마는 유럽 전역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었고 이에 따라 경계도 계속 확장됐다. 로마 제국의 영토가 최대 크기로 확장됐던 트라야누스 황제(98~117년)는 바로 이러한 로마 기후 최적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트라야누스 황제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이제 더는 전진할 수는 없다고 느꼈다. 제국의 판도는 ‘로마인’이 거주할 수 있는 기후의 땅 전체를 다 아우르고 있었고, 그 바깥은 ‘로마인’의 삶을 누릴 수 없는 땅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그 자리에 선을 그었다. 그것이 바로 하드리아누스 장벽이다. 이런 이유로 하드리아누스 장벽 남쪽인 잉글랜드에는 로마 유적이 풍성하게 남아 있게 됐지만, 그 이북에서는 보이지 않게 됐다.

기후 변화는 삶의 많은 것을 바꾼다.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따뜻한 기후는 제국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고, 지중해성 기후가 확대되면서 따뜻해진 유럽 대륙은 그 이전 시기보다 농산물이 풍족해졌다. 제국 이곳저곳에 대농장이 만들어졌고, 식량이 충분히 확보된 로마 정부는 점차 정치에서 소외되는 서민들을 달래기 위해 빵과 서커스를 공급할 수 있었다.

한편 이전에 수렵과 채집을 기반으로 경제를 꾸려가던 지금의 프랑스, 독일, 영국 지역도 활발한 농업과 상업 발달이 일어났다. 새로운 개척지가 만들어지고 이민족과 로마인들이 어울려 살게 되면서 이들은 차츰 제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게 됐다. 시간이 더 흐르면 이들은 제국의 변경을 지키는 병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때의 환상적인 기후는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최적기 시절 동아시아에서는 한나라가 자리 잡고 있었다. 기후의 혜택 덕분에 농업 생산량이 늘어난 한나라도 로마처럼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였다. 그래서 한나라 무제는 고조선, 흉노, 남월 등 다양한 방향으로 군사를 보냈고 대부분 성공했다.

또한 따뜻한 기후는 원거리 교역망도 가능하게 만들어줬다. 그래서 로마와 한나라는 서로 비단을 매개로 긴 상업망을 열게 됐는데, 그것이 바로 실크로드다. 이것은 한반도에도 영향을 줬다. 기원 전후가 되면 한반도 내에서 다양한 정치 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백제(18년), 고구려(기원전 37년), 신라(기원전 57년) 등 삼국이 모두 이 시기에 일어선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후 덕분에 농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잉여 생산물이 확보됐고, 교역을 안전하게 통제할 강력한 정치적 힘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한랭화와 로마의 쇠퇴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브리튼 섬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긴 장성인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쌓았고, 이는 로마 제국의 최북단 국경이 됐다. / 사진:위키피디아 퍼블릭 도메인
로마 기후 최적기는 3세기부터 약화했다. 로마 제국을 지탱해 준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 군대도, 로마의 법도 아니라 바로 로마의 기후였다. 기후 방어벽이 무너지자 제국의 안전도 담보할 수 없게 됐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다뉴브 강 전선에 나간 이유는 이민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트라야누스 시대 이후 더는 국경을 확장하지 않았던 로마는 이제 점차 변경의 반란에 직면하게 됐다. 기후는 한랭해졌고, 농업 생산량은 감소했다. 상업이 함께 위축됐으며 도시와 도시를 연결해주던 교역로도 쇠퇴했다. 이민족들은 이런 로마의 빈틈을 노리고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남겼을 정도로 철학을 사랑했던 황제였지만, 그의 임기 대부분은 제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반란을 진정시키는데 보내야 했다.

395년 로마는 동서로 분열된다. 더는 제국을 지탱할 식량도 교역망도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 된 것이다. 브리튼 섬에 주둔했던 로마군도 추워지는 기후를 버티지 못하고 410년 완전히 철수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제국의 동요를 막기 위해 변경 이곳저곳으로 동분서주하던 그 무렵, 중국 한나라는 환제와 영제가 다스리던 시기였다. [삼국지]에서 십상시들이 국정을 농단하면서 동탁 등 지방군벌들이 대두하던 시기다. 한나라도 이 무렵부터 한랭화에 접어들면서 로마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다. 환제와 영제의 무능한 정치력도 한몫했겠지만, 기후도 한나라의 쇠퇴에 영향을 준 것은 무시할 수 없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은 황건적의 난이 발생했고, 중앙 통치력을 완전히 상실한 한나라는 위·촉·오 삼국으로 분열하게 된다. 로마가 하나의 제국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듯이 한나라도 중국대륙 전체를 다스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두 제국은 비슷한 길을 걸었다. 5세기부터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서로마 제국의 국경은 사실상 유명무실화 됐고, 결국 476년 고트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의 장군 오도아케르에 의해 무너졌다. 중국도 5세기 이후 북방 유목민족들의 남하를 막아내지 못했다. 삼국을 통일했던 한족 왕조진(晉)나라는 유목민족들에게 중원을 내주고 양자강 일대로 내려가 동진(東晉)을 건국했다. 이후 중원에는 5개의 유목민족들이 번갈아 왕조를 세웠으니 이 시기를 5호 16국 시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중원의 혼란은 고구려에는 큰 기회가 돼 고구려는 이 시기 영토를 최대치로 확장할 수 있었다. 적어도 고구려는 동아시아에서 한랭화의 수혜자였던 셈이다.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401호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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