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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13)] 풍전등화 위기서 나라 구한 최무선 

중국 견제와 국내 무관심 속 혼자 힘으로 화약 개발 성공 

18종 화약무기 만들어 왜선 300척 전멸시킨 진포대첩 이끌어
아들 최해산, 세종 때 화차 발명하는 등 화약무기 발전 이바지


▎최무선이 만든 대장군포와 유사할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시대 대장군포. / 사진:육군박물관
소년은 댓가지에서 타오르는 불꽃에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것은 호롱불처럼 심지 끝에서 힘없이 흔들리는 불꽃이 아니었다. 가는 댓가지를 박차고 튀어 오르며 빛을 사방으로 퍼뜨리는 불꽃이었다. 비록 깨알만한 크기에 금방 사그라지고 말았지만 처음 타오를 때의 기세는 ‘쉭쉭’ 거친 숨소리까지 내지르며 세상을 다 태워버릴 듯 매서운 기색이 있었다. 댓가지에 바른 검은 진흙이 불에 타며 그런 불꽃을 내는 것이 너무도 신기했다.

보다 커다란 소리를 내며 불꽃을 내뿜는 물건도 있었다. 좀 더 두툼한 진흙을 종이로 싼 알갱이가 포도송이처럼 매달린 물건에 불을 붙이면 각각의 종이 알갱이가 연달아 폭발을 했다. 커다란 소리에 귀청이 찢어질 듯했고 흰 연기와 함께 솟아난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세상 물건이 아니라 악귀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지옥의 불이었다.

그러한 지옥의 불에 대한 소년의 관심은 자라면서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커져만 갔다. 소년은 끝내 자신의 손으로 그 지옥의 불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그리고 그 불은 소년의 조국을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해낸다.

이 소년이 바로 최무선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무기를 개발하고 그것을 이용해 왜선 300척을 수장시킨 진포대첩의 주인공 말이다. 그처럼 위대한 업적에 비해 최무선에 대한 기록은 안타까울 만큼 적다. 조금이나마 자세한 기록은 조선 태조 4년(1395) [태조실록]에 실린 ‘졸기’가 전부다. 나머지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국조보감], [사류재집] 등에 이름 정도만 언급될 뿐이다.

그나마도 관심이 없어서 1995년 이전만 해도 최무선에 대한 대부분의 글에서 그의 생몰연대가 ‘?~?’으로 표기되고는 했다. 그러다가 문화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가 1995년 최무선을 4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것을 계기로 그의 고향인 경북 영천을 중심으로 역사 찾기 작업이 시작됐다. 문체부가 최무선의 생년월일을 몰라 과학의 날인 4월 21일에 맞춰 그 달의 문화인물로 정한 것이었다.

화약에 남다른 관심 보였던 소년 무선


▎조선 정조 때 김지남이 편찬한 화약 제조법 설명서 [신전자초방] 표지와 본문. 염초 재료를 수거하는 방법이 설명돼 있다. / 사진:한국학 중앙연구원 장서각
영천시에서 발족된 최무선기념사업회는 최무선의 출생 연도부터 찾아 나섰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자료에도 불구, 어렵사리 족보 등을 살펴 최무선이 고려 충숙왕 12년인 1325년 태어난 것을 밝혀냈다. 또 후손들의 기억을 되살려 영천시 금호읍 원기리 마단 마을 입구에 최무선의 생가터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오늘날 ‘최무선과학관’이 세워진 바로 그 자리다.

최무선이 실제로 그곳에서 태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부친이 광흥창사를 지냈으니 영천 출생이라 하더라도 일찌감치 개성으로 거주지를 옮겼을 것이 분명하다. 광흥창사는 문자 그대로 광흥창(廣興倉)의 관리 책임자를 가리킨다. 광흥창은 관리들의 녹봉으로 지급할 양곡을 보관하는 창고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조선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 광흥창역이 있는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위치했으나 고려 때는 당연히 수도인 송도(개성)에 있었다. 광흥창사라는 직급은 종5품의 중간급 관리가 맡는 자리였다. 종5품은 매일(현종 이후에는 월 1회) 왕을 배알하는 약식 조회인 상참에 말석이나마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직위였다.

고위직은 아니었지만 어린 무선에게 화약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주기에는 충분한 자리였다. 부자는 아니더라도 끼니 걱정을 해야 할 만큼 어려운 형편이 아니었을 테고, 광흥창에 들어오는 물자의 운송을 조운에 의지했던지라 당시 중국 상인들의 왕래가 잦은 예성강과 벽란도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 무선이 불꽃놀이를 처음 본 것도 중국 상인들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또는 중국 상인들에게 폭죽을 구입한 송도 사람들이 터뜨리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당시 고려에서도 화약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저 폭죽 정도로만 사용되는 정도였다. 그것도 가격이 비싸 부잣집에서 추석이나 정월 대보름같은 특별한 날에만 가끔 터뜨려 동네 사람들에게 재력을 과시할 뿐이었다.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날이면 이웃 동네에서까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테고, 신기한 불꽃의 향연을 넋을 잃고 쳐다보고 귀청을 찢는 폭음에 놀라 나자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 무선은 달랐다. 요란한 폭음을 내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불꽃을 보며 무선은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만들고 말리라 다짐했다.

그것은 불꽃놀이 따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화약으로 만든 무기였다.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부터 화약 무기가 만들어져 실전에 응용되고 있었다. 고려에서도 숙종 9년(1101) 윤관이 여진을 정벌할 때 편성한 군대인 별무반 중 ‘발화(發火)’라는 이름의 부대가 있었고, 1135년 묘청의 난을 평정할 때도 ‘화구(火毬)’를 사용해 성벽을 파괴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세조 때 동지중추원사 양성지가 올린 상소를 보면 화약의 사용은 더욱더 거슬러 올라간다.

“화포(火砲)의 제도는 신라 때부터 시작해 고려 때 갖추어졌고 본조에 이르러 그 진가를 다하게 되었으니 가위 군국(軍國)의 이기(利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세조실록] 1464년 8월 1일자 기사)

신라 때 화약무기가 존재했다는 것은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 이론적으로 따지면 꼭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이미 당나라 때 화약이 개발됐으므로 신라에 전해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치솟는 불꽃 보며 자신 손으로 만들리라 다짐


▎전북 군산시 금강시민공원에 설치된 진포대첩 기념비. / 사진:연합뉴스
중국 문헌에 화약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병기가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당나라 말이다. 904년 당이 예장(오늘날 장시성 난창)을 공격할 때 비기(飛機)와 비화(飛火)를 써서 용사문(龍沙問)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 비기와 비화라는 것은 초기형 화전(火箭)으로 추측된다. 화전이란 단순히 화살 끝에 불을 붙인 불화살이 아니고, 화약 장치를 화살에 부착해 강력한 추진력을 얻는 무기를 말한다.

송나라 때 군사전문가인 허동의 병법서 [호령경(虎鈴經)]에는 “화포는 화약을 사용하는 포를 말하며, 화구는 구상으로 만든 화약을 화전 끝에 가까이 묶은 다음 인선으로 점화시키고 포로 발사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송이 975년 남당을 멸망시킬 때 화포와 화전을 사용했다는 사료도 있다. 이로 볼 때 중국은 10세기 초 이미 화약무기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으며, 10세기 후반에는 실전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향상됐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화약병기의 실전 투입은 11세기에 들어서였다. 북송(960~1126년)은 1040년 변경(汴京, 현 허난성 카이펑)에 화약 공장을 세울 정도였으며, 1044년 증공량이 찬술한 송나라 병서인 [무경총요(武經總要)]에는 화약의 배합과 화전, 화구 등 화약무기의 구조에 대해 삽화와 함께 상세한 설명이 들어있기도 하다. 이로 미뤄 11세기 말에는 화약과 화기에 관한 기술이 거의 완성됐다고 추론할 수 있다.

송의 이처럼 고도화된 화약무기 탓에 금이 송을 공격할 때 고전을 면하지 못했으며, 이후 몽골이 금을 칠 때 역시 초기에는 송의 화약 공장을 접수하고 화약무기 기술을 습득한 금의 반격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뒤늦게 화약무기의 중요성을 인식한 몽골은 유럽에 진출할 때 화약무기를 가져갔으며, 고려와 함께 일본 정벌에 나섰을 때도 화약무기를 사용했다.

중국은 당시 최첨단무기인 화약의 제조 비법을 국가 비밀로 지정해 꼭꼭 숨겼다. 화약 판매를 금지시키고 이를 어기는 자들은 극형에 처했음은 물론이다. 송나라와 원나라 때 모두 마찬가지였다.

고려에서 요청하면 극히 소량만 보내 생색을 낼 뿐이었다. 그러니 고려로서는 화약무기를 다루는 부대를 정규 편성하기 어려웠고 그저 시험 운영해보는 수준에 그쳤다. 적 진영에 불을 지르는 것이 주 임무였던 별무반의 발화부대 역시 화전을 만드는 데 화약을 소량 사용하는 정도의 기초적 수준에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원나라 때는 고려에 대한 간섭이 더욱 커져 충렬왕 34년(1308) 화약무기 등 병기를 제조하는 기관이던 군기시가 폐지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약과 화약무기 기술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했음은 물론이다. 발전은커녕 알고 있던 기술마저도 퇴보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런데 14세기 일본이 남북조의 내란에 접어들게 되면서 왜구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남조에 속한 일부 지방 세력이 해적이 돼 한반도와 중국 연해를 침략한 것이다. 왜구들의 노략질은 원~명, 그리고 고려~조선 교체기를 맞아 중앙 행정력이 지방까지 미치지 못하게 되자 최고조에 달했다. 원의 간섭과 감시로 군사력을 줄여야 했던 고려는 1356년 공민왕이 개혁을 시도하지만 약화한 국방력을 일시에 회복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려 요청에도 생색내며 기술 전수 꺼린 중국


▎최무선 표준 영정. 1987년 신영상 작. / 사진:국립현대미술관
그러니 왜구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1350년 무렵부터 시작된 왜구의 고려 침략은 이후 40여 년간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졌다. 왜구들의 주요 목표는 곡물이었다. 고려 조정이 세금으로 걷은 쌀을 보관하는 전국의 조창과 경상·전라도에서 개경으로 세곡미를 운반하는 세운선이 약탈 대상이 됐다. 민가에 대한 노략질도 심해 농민들은 해안 경작지를 포기하고 내륙으로 이주해야 했다.

처음에는 내륙 쪽 30~40리 정도였던 것이 나중에는 70리까지 들어가야 했다. 당연히 경작지가 줄었고 세수도 따라 줄 수밖에 없었다. 고려 조정은 세수 부족으로 관료들의 급료를 제때 지급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해안가에서 노략질할 대상이 사라지자 왜구들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 관청을 공격하고 행정을 마비시키는 사례까지 빚어졌다. 1868년에는 왜구가 개경 입구인 강화도까지 침입해 300여 명을 살해하고 4만 석에 이르는 쌀을 약탈해가기도 했다. 이들 왜구는 대체로 대마도와 규슈(九州) 해안가에 거주하는 어민이 대부분이었지만, 때로 남북조 시대에 남조에 소속된 정규 군사집단이 주축이 되기도 했다. 내란을 치르면서 대규모 전투를 앞두고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고려를 약탈한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무로 마치(室町) 막부에 사신을 보내 왜구 침략을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1375년 통신사를 자청해 일본에 가서 왜구 방지책을 요구했던 고려 말의 무신 나흥유가 우왕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그 나라(일본)의 승려 주좌가 부친 글에 이르기를 ‘규슈는 난신(亂臣)들이 할거하고 있으며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은 지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서쪽 바닷가의 완악한 무리들이 틈을 엿보아 귀국을 노략질한 것이지 저희들이 한 일이 아닙니다. (중략) 규슈를 수복하게 된다면 천지신명에 맹세코 해적질을 금지시키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고려사] ‘열전’ 권 제46 1375년 10월)

해안 넘어 내륙까지 노린 왜구들의 약탈


▎13세기 작자 미상의 일본 화가가 그린 [몽고습래회사]에 묘사된 고려 전함의 모습.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 때 해전을 그린 것이다. / 사진:규슈국립박물관
최무선은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자라고 장성해 벼슬을 했던 것이다. 최무선이 1325년 태어났으니 스물다섯이 되던 해부터 왜구들의 출몰과 노략질을 보고 듣게 됐을 터다. “기술에 밝고 방략이 많으며 병법을 말하기 좋아하던([태조실록〉최무선 졸기)” 젊은 무선이 인심을 흉흉하게 만드는 왜구들을 강 건너 불 보듯 하기만 했을 리 없다. 아마도 왜구를 뿌리째 뽑을 연구를 거듭하느라 수많은 밤을 새웠을 것이다. 최무선은 과학 기술에 관련된 책을 구해 읽으면서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부터 화약과 화포를 사용해 커다란 성과를 거뒀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는 왜구를 물리치는 데도 화약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화약을 제조하는 방법을 구할 수 없었다.

“(최무선이)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태조실록] 최무선 졸기)

공민왕은 명과 외교관계를 맺은 직후인 1373년(공민왕 22) 11월 명에 사신을 보내 왜구를 물리치기 위한 화약을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것 또한 최무선의 건의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높다.

“왜적이 소란을 일으킨 지 20년이 되었습니다. 그간 본국 연해의 요충지에 군사를 두어 방어만 했을 뿐 그들을 추격하지 못했습니다. 근래 왜적의 세력이 왕성해졌으므로 이제 바다로 나가 체포함으로써 백성의 근심을 없애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배를 만들고 있는데 배에서 사용할 기계와 화약, 유황, 염초 등 물품을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이에 아뢰오니 그 물품들을 내려주시어 쓸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명 태조 주원장은 에둘러 거절하는 답신을 보낸다.

“고려에서 배를 만들어 병기와 화약으로 왜구를 물리치고자 한다는 글을 보냈다 하니 내가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이전처럼 백성의 고통을 좌시하지 않고 드디어 백성을 구제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렇게 문서를 보내온 것일 터다. 그런데 왕전(王顓 공민왕)이 진실로 나의 뜻을 따르고자 한다면 그에게 전해 반드시 시행하게 하라. 고려에서 염초 50만근과 유황 10만 근을 구해서 가지고 오게 하라. 그러면 여기에서 별도로 필요한 화약을 배합해 그에게 줄 것이다.”

특유의 끈질김으로 화약 개발에 성공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사용한 대장군전과 대장군전의 글씨. ‘가리포 상 김등 조(加里浦 上 金等 造)’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가리포는 전남 완도에 설치됐던 수군영이 있던 장소로 이곳의 장인 김씨 등이 제조했다는 뜻이다. / 사진:국립진주박물관
고려의 사정을 아는 신하가 “고려에는 그 물품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고했지만 주원장은 고집을 꺾지 않는다.

“같은 하늘 같은 해 아래 있는데 어찌 여기는 있고 거기는 없겠는가. 그 물품은 어디에나 있는데 다만 그들이 배합하는 법을 모르는 것일 뿐이다.”([고려사] ‘세가’ 권 제 44 1374년 6월 18일)

화약의 주요 재료는 유황과 목탄, 염초다. 이 중 고려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목탄뿐이었다. 유황은 천연재료이기는 하지만 국내에서 유황 광산이 개발된 것은 17세기 조선 현종 때였다.

이전에는 전량을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염초였다. 특수한 토양에서만 채취되기 때문에 대량으로 얻기 어려웠고, 그것을 질산칼륨으로 정제하는 공정이 필요한데 그 방법을 아는 공인이 고려에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염초와 유황을 가져오면 만들어주겠다니 처음부터 주기 싫다는 얘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막 건국한 명으로서는 아직 믿음이 가지 않는 이웃나라 고려에 고성능 무기를 제공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명나라로부터 거절당한 고려 조정은 화약에 대한 관심을 접었지만 최무선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중국의 과학 서적을 구해 연구하는 한편, 중국에서 상인들이 들어올 때마다 벽란도에 나가 염초 제조법을 아는 사람을 수소문했다.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 집으로 데려가 숙식을 제공하며 기술을 물었다. 하지만 중국이 워낙 제조법 누출을 엄금하고 있던 터라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최무선은 이원(李元)이라는 중국 강남의 장인을 만난다. 그는 최무선의 정성에 감복해 염초 제조법을 가르쳐줬다.

이원의 비법이 전해지지는 않지만, 1635년 편찬된 병서 [신전자취염초방언해(新前煮取焰硝方諺解)]에 따르면 염초 재료를 구하기부터 고역이었다.

“오래된 집안의 부엌 바닥, 마루 아래, 담벼락 밑 낡은 구들 밑의 흙을 가만가만 위만 긁어내 취한다. 혀로 핥아 짜고 시고 달고 또는 매운 것이 좋다.”

오랜 시간에 걸쳐 구석구석에서 재료를 긁어모으면 그제야 염초를 만들 수 있는 셈이다.

“이 흙에 사람 오줌과 가마 속 재를 버무려 비를 맞지 않게 잘 쌓아둔다. 얼마 후 말똥을 말려 흙 위에 덮고 불에 태워 불기가 잘 스며들게 하면 습하고 더운 기운에 띄워져 흰 이끼가 생긴다. 이렇게 해서 대여섯 달 뒤에 쓴다. 오래 둘수록 좋다.”

화약은 물론 화포 탑재할 전함까지 설계


▎대장군전 규격(㎝). / 사진:국립진주박물관
수차례의 실험을 거쳐 화약 제조에 자신감을 얻은 최무선은 당시 최고의결기관이던 도평의사사에 보고하고 본격적인 생산을 건의하지만 모두 그를 비웃고 믿어주지 않았다. 사기꾼이라고 욕하는 자들까지 있었다. 당시 화약이란 그만큼 범접하기 어려운 높은 벽이었던 것이다. 최무선은 굴하지 않고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 마침내 1377년 화약 연구·제조기관을 만들기에 이른다.

“10월에 비로소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하였다. 판사 최무선의 말을 따른 것이다.”([고려사절요) 제30권 정사)

화통도감의 제조가 된 최무선은 화약 실험에 전념했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년이 지나야 만들어지는 염초와 유황, 목탄과 섞어야 하는 데, 주원장의 말대로 배합비가 중요했다. 최무선은 다시 수십 차례의 실험을 거쳐 염초 75%, 유황 10%, 목탄 15%의 비율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화약뿐 아니라 화약무기인 화포도 만들었다. 화통도감에서 만든 화기는 모두 18가지로, 대장군포·이장군포·삼장군포·육화석포·화포·신포·질려포·화통 등 화포와 화전·철령전·피령전·천산오룡전 등 발사체, 주화·유화·촉천화 등 일종의 로켓무기가 있다. 또 철탄자라는 것은 명칭으로 미워 탄환의 일종으로 추정된다. 최무선은 이들과 함께 화포를 탑재할 수 있는 전함을 설계해 만들어냈다. 구조가 어땠는지 전해지지 않지만, 배에서 화포를 발사할 때 반동으로 배가 반대 방향으로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무선은 화통도감의 책임자가 된 지 3년 만에 드디어 자신이 만든 화약무기를 실전에서 시험할 기회를 얻게 된다. 1380년 왜구들이 3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최무선을 부원수로 임명해 출전시켰다. 화약 전문가를 일약 부원수로 임명했다는 것은 고려 조정이 그만큼 화약무기의 효과를 기대했다는 뜻이다. 그 결과를 우리는 안다. 고작 100척에 불과한 전함만으로 세 배도 넘는 적선을 하나도 남김없이 불태워 수장시켜버렸다. 그것이 진포대첩이다.

가까스로 육지에 상륙했던 왜구들은 병마도원수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모조리 섬멸한다. 안타깝게도 최무선이 진포해전에서 왜구들을 상대로 시험한 자신의 화약무기 중 현존하는 것은 없다. 그 성능이 어땠는지 상세한 기록도 없다. 그나마 유추해볼 수 있는 유물은 일본에 남아있다.

부친에 이어 지상전용 화차 개발한 최해산

임진왜란 때 조선의 총통에서 발사된 대장군전이 일본의 장수인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1542~1600)의 후손들에게 전해져 온 것이다. 1592년 7월 안골포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맞섰던 구키는 자신이 탄 기함이 조선 수군이 발사한 대장군전에 맞아 대파한 뒤 가까스로 도망칠 때 대장군전을 싣고 갔다.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올라온 일본군 장계에는 “조선군은 대들보를 뽑아서 화포에 넣고 쏜다”, “조선군이 쏘는 화살은 통나무만 하다”는 내용이 있다.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대장군전을 봐도 쇠로 만든 탄두를 제외한 길이가 181.5㎝, 지름이 최대 9.4㎝에 이른다. 과연 일본군이 “대들보가 날아온다”고 혼비백산할 만한 크기이며 위력도 엄청났다. 일본의 임진왜란 종군기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에는 “조선군의 대형 화살에 맞아 일본 배의 망대와 갑판, 방패가 모조리 부서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때는 대장군전을 현자총통에 넣어 발사했지만, 명칭으로 볼 때 최무선의 대장군포에도 임진왜란 때 썼던 대장군전과 유사한 화살이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무선은 이후 화약 제조법을 담은 [화약수련법]과 화약무기에 대한 [화포법]을 저술해 아들 해산에게 물려줬다. 건국 초기 권력 집중을 위해 화약무기를 꺼렸던 태조는 고령을 이유로 최무선을 중용하지 않았지만 태종은 그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최해산을 중용하기에 이른다. 해산은 아버지에게서 전수받은 지식을 바탕으로 기존의 염초 제조방식인 향초법보다 생산 효율을 두 배가량이나 올린 당염초법을 고안했으며, 화기를 장착한 수레인 ‘화차’를 개발했다. 해전에만 사용되던 화약무기를 지상전에도 쓸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세종 대 화약무기의 획기적 발전에 그야말로 초석을 놓은 것이다.

하지만 문종 이후 화약 개발 열기가 다소 수그러든 조선은 뒤늦게 화약 제조법을 알아낸 일본에게 또다시 침략을 당하고 만다. 임진왜란 때 신병기인 조총에 호되게 당했지만, 결국 일본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왜군을 혼비백산케 한 조선 수군의 화약무기 덕분이었다. 고려에 이어 조선 역시 최무선에게 빚을 지게 된 것이다.

※ 이훈범 -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지난해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2023년 초 첫 소설 [화살 끝에 새긴 이름]을 발표했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을 펴냈다.

202401호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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