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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일본 직설(直説), 요설(妖説) 그리고 곡설(曲説)(6)] 일본이 21세기 최고 ‘필진국’이 된 이유 

연말연시 북적이는 달력·수첩 매장에 답 있다 

아날로그 수첩문화에서 시작되는 언어와 사고의 확장
필진국 일본을 느낄 최상의 공간 도쿄 문방구 ‘이토야’


▎가계부는 디지털 숫자로 정리되는 자신과의 대화록이다. 숫자에 대한 감각은 물론 어제와 오늘, 내일을 비교할 모두에게 열린 비밀수첩이기도 하다. / 사진:유민호
송년회·신년회 시즌이다. 팬데믹 후유증이겠지만, 크게 웃으면서 함께 모여 즐길 여유도 사라진 듯하다. 가까운 주변부터 챙기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서로에게 부담이 안 되도록, 작은 선물이라도 나눠주려는 문화가 확산되는 배경일지 모르겠다. 필자의 경우 연말연시 크게 두 가지 선물을 주변에 보낸다. 잡지와 달력이다.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뭔가 아날로그 분위기의 선물이다. 잡지는 받는 사람의 나이에 맞춰 보낸다. 50세라면, 50년 전인 1974년 1월 1일자 잡지 [타임]을 보내는 식이다. 아마존닷컴에 들어가면 과거 잡지도 쉽게 구할 수 있다. 받는 사람 생일에 맞춘 잡지도 좋겠지만, 출생 25년 전이나 50~100년 전 잡지도 무난하다. 어제의 세계를 통해 현재의 나와 마주할 수 있다.

21세기에도 종이문화로 채워진 일본


▎다양한 펜은 일본 테크놀로지의 상징이기도 하다. 주기별로 새로운 펜이 쏟아진다. 하나씩 비교하면서 수기를 쓰는 오타쿠도 넘친다. / 사진:유민호
잡지가 장년층이라고 할 때, 달력은 상대적으로 청년층에 보내는 선물이다. 대략 어린이에서부터 40세 미만이 대상이다. 지금까지 가족과 주변 친구 30여 명에게 나눠줬지만,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리뷰 만족도 5.0 만점이 달력이다. 디지털 시대라고 해도 아직 달력은 지니게 마련이다. 다만, 필자가 선호하는 달력은 통상 만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30여 년간 거래한, 일본 지방 출판사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특별한 달력’만이 필자의 애호품이다. 특별하다고 말한 이유는 1년이 아니라 100년을 하나로 묶은 달력이기 때문이다. 가로 70㎝, 세로 1m에 달하는 통째 종이 달력으로,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한 100년간 3만6500일이 빽빽이 새겨져 있다. 만약 1990년생이라면, 1990년부터 2090년까지의 100년간 날짜가 달력 안에 들어서 있다. 출발점을 어디로 할지는 주문하면서 미리 맞춘다. 개인 이름도 새겨 넣을 수 있지만, 가격이 배로 뛴다. 특정 연도와 함께 자신의 나이가 얼마인지도 표시한다. 1990년생이 맞이한 2024년에는 35세라는 숫자가 들어서 있다. 선물을 주면서 책상 위나 화장실 안에 걸어두길 권한다. 100년 달력은 일정이나 기록 용도와 무관하다. 한눈에 보면서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에 대한 비교가 100년 달력의 최대 기능이다. 나름대로 기승전결, 생로병사, 인생 1막·2막·3막으로 나눠 매일 대할 수도 있다. 초 단위 틱톡, 길어야 10분짜리 유튜브 일상이 아니라 3만6500일 인생에서 본 하루하루인 셈이다.

달력·수첩 매장은 연말연시 일본의 전형적 풍경 중 하나다. 서점은 물론 지하철, 백화점처럼 사람이 모일 만한 곳에 가면 ‘반드시’ 달력·수첩 매장이 들어서 있다. 한국 기준으로 볼 때 달력·수첩은 20세기 흑백필름 유물로 느껴질 듯하다. 모바일 하나에 전부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새삼스럽게 벽에 달력을 걸 이유도, 필요도 없다. 펜을 필요로 하는 수첩도 무겁고 거추장스럽다. 그러나 연말연시 일본 전역은 달력·수첩에서부터 가계부나 일기장 같은 1년 단위, 나아가 3년, 5년, 10년 단위의 기록용 종이문화로 채워진다. 이미 30여 년 전이지만, 2000엔짜리 100년 달력은 그 같은 분위기 속에서 발견한 필자만의 소중한 선물이다.

필자의 유년기 얘기지만, 가계부가 항상 방 한가운데 들어서 있었다. 여성잡지가 연말연시에 제공한 부록으로, B4 사이즈 컬러판 가계부다. 필자의 어머니는 가계부 기록에 거의 무심했다. 매일 쓰는 것이 아니라 큰일이 있을 때 왕창 기록하는 ‘벼락치기’ 캐릭터였다. 원래 가계부는 하루에 얼마를 쓰고 수입이 얼마인지를 기록한 뒤 월말이나 연말 다시 총결산해야만 한다. 돈과 디지털 숫자로 채워진 일기인 셈이다. 그러나 수입이란 것이 뻔하고, 들어갈 돈도 일정하다는 점에서 새삼스럽게 가계부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을 듯하다. 거꾸로 매일 기록할 경우 생활고만 확연히 느낄 ‘척박한 현실 증명서’로서의 가계부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세상에 간 어머니가 돌아와 가계부를 다시 살펴본다면 나름대로 큰 의미가 될 수 있다. 척박한 일상이었지만, 반세기 전 삶을 되살펴 볼 추억 재생 일지이기 때문이다. 연탄 한 장, 소고기 반 근, 쌀 1㎏, 신발 한 켤레, 설탕 500g 가격을 통한 어제와의 만남이다.

여전히 가계부 쓰는 주부가 대세

한국에서는 거의 사라진 가계부지만, 일본에서는 아직도 가계부를 쓰는 주부가 대세다. 연말연시만이 아니라 연중 가계부 판매가 이뤄진다. 가계부는 일본에서 들여온 수입문화다. 식민지 시대를 통해 한반도에 들어왔고, 대략 1980년대 초까지 볼 수 있었다. 문화인류학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로, ‘아키타입(Archetype)’이란 단어가 있다. ‘원형론(元型論)’이란 의미로, 특정 지역이나 민족에 내재된 ‘영원히 변치 않을 유전자’를 의미한다. 한국은 어제에 치중한 기록문화와 무관한 아키타입이다. 내일도 드물고, 오직 눈앞의 현실에 대처하면서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참모형이나 작전형이 아닌 현장중심 야전형 전투형 체제라고나 할까? 인구감소, 인구절벽, 인구소멸로 이어지는 세기말적 상황이 닥치고 있지만, 위기의식이나 대응능력을 보면 아직 멀었다. 당장 눈 앞에 일이 벌어져야 해결하고, 극복해나갈 아키타입이 전형적인 한국인 유전자다. 현장중심 야전형 전투형 캐릭터는 알뜰살뜰 가계부와 무관하다.

긴자(銀座) 이토야(伊東屋: ITO-YA)는 필자의 도쿄 산책 필수 코스 중 하나다. 언제부턴가 한국인, 중국인 관광객도 들르는 관광 명소로 변했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신데렐라 무도장 공간으로 와 닿는다. 1904년 창립 이래 일본 전역 10여 군데에 지점을 둔 일본 최고(最古) 문방구전문점 중 하나가 이토야다. 가장 긴 역사의 문방구점은 1872년 창립된 마루젠(丸善)이다. 필자는 책과 가방은 마루젠, 그 외 문방구는 이토야를 선호한다. 긴자 이토야는 본관 7층과 별실 3층을 포함한 세계 최대 규모의 문방구점으로 유명하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문방구=종이에 관련된 모든 것’을 지칭한다. 편지지, 연하장, 일기장, 가계부, 메모지에서부터 필기도구인 만년필, 연필, 볼펜, 나아가 가위, 칼, 잉크, 필기도구 보관함이 문방구에 들어간다. 그림과 관련된 붓, 종이, 물감도 포함된다. 문방구 주변에 들어설 지도와 같은 장식물, 벽에 걸린 그림이나 포스터도 문방구에 포함된다. 간단히 말해 책상을 마주한 혼자만의 시간에 필요한 모든 도구와 환경이 문방구 대상이다.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모바일 하나로 전부 해결될 도구와 환경이다. 돈도 들고, 공간도 필요하며, 구입에 따른 시간과 노력, 지식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같은 번잡하고도 불필요한 도구와 환경에 주목하는 사람이 결코 적지 않다. 아무리 값싼 와인이라도 집이 아닌 고급 레스토랑이나 와인전문점에서 전문가의 설명과 함께 천천히 마시는 것이 좋다. 한층 더 맛있고 기억에도 오래간다. 아무리 귀하고 비싼 와인이라도 소주잔과 함께 집에서 마시는 순간 ‘달콤한 설탕물’ 정도에 그친다. 필자에게 있어서 이토야는 종이에 관련된 모든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다시 말해 책상에서 맞이한 혼자만의 ‘명상(瞑想)’을 장려하는 판타지 세계로 느껴진다.

필자가 생각한 선진국의 정의지만, ‘필진국(筆進国)’이란 개념이 있다. 선진국 여부를 돈이나 무력이 아닌, 필(筆)의 수준에 따라 나누는 식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고, 돈보다도 한층 더 오래간다. 필, 즉 펜의 수준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글을 통한 문학에서의 수준과 글을 직접 쓰는 필기도구의 수준이다. 지난 30년간 125개국을 돌아다닌 필자의 지구순례 결론이기도 하지만, ‘문학세계 수준=필기도구 수준’으로 보면 된다. 문학이 높게 평가되고 문화의 중심에 선 나라일수록 기록용 필기도구의 수준도 높다. 반대로 필기도구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그 나라의 문학세계 수준도 높다. 프랑스 요리의 수준은 맛 그 자체만이 아닌 음식을 둘러싼 식기, 포크, 나이프, 나아가 테이블 매너와 레스토랑 분위기 전체로 연결된다. 혀 하나가 아니라 오감, 나아가 육감으로서의 요리다.

연말 풍경 중 하나인 수첩 전시회


▎일본은 만년필 수공업자가 전국 곳곳에 포진해 있다. 매년 만년필 경연대회도 열린다. 2023년 천황 재임 기념에 맞춰 제작된 800본의 만년필은 하나에 165만 엔에 달한다. / 사진:유민호
필기도구 종류가 극히 제한돼 있거나 대중적이 아닌 특별층 소유물에 머물 경우 그 나라 문학 수준도 뻔하다. 필자가 내린 결론이지만, 일본은 21세기 전 세계 최고 수준의 필진국이다. 20세기까지만 해도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이 필진국을 주도했지만, 21세기 들어 일본의 위세가 압도적이다. 도쿄 이토야는 그 같은 필진국 일본을 느낄 최상의 공간이다. 연필, 볼펜, 만년필, 수성·유성펜, 붓에 이르는 수많은 필기도구를 만날 수 있다. 가격은 100엔에서 100만 엔 단위까지 다양하다. 일본 문방구업계 풍경이지만, 진화한 새로운 필기도구가 주기적으로 등장한다. 일본인의 새로운 필기도구에 대한 관심도 엄청나다. 필자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로 부르던 시대에 태어났다. 일제 샤프펜슬을 처음 만난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다. 혁명적 대사건이었다. 깎는 연필을 대신해 연필심을 넣고 위를 누르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한순간 전국에 퍼져나갔다. 필자는 반에서 샤프펜슬을 소유한 첫째 학생이었다. 샤프펜슬과 20개 샤프심 한 세트에 100원이었다. 당시 어린이 버스 운임이 10원이었다. 급우들 모두 모여서 필자의 샤프펜슬에 탄복하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만년필은 필자가 가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세속적 욕(欲)’의 대상 중 하나다. 볼펜은 관심 밖이다. 마음에 드는 만년필을 보면 즉석에서 몇 개씩 사야만 한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필자는 색깔별 만년필 20여 개를 항상 들고 다닌다. 잉크는 물론 다양한 굵기의 만년필을 항상 가방에 넣어 다닌다. 이탈리아에서 구입한 20유로짜리 0.5㎜ 만년필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토야에서 구입했다. 0.1, 0.3, 0.5㎜ 굵기 일제 만년필로, 가장 싼 350엔짜리다. 원래 인스턴트용이지만, 잉크를 다시 넣어 항상 재활용한다. 배보다 큰 배꼽으로, 잉크는 5000엔짜리 최고급이다. 350엔이라지만, 유럽의 1000유로 만년필도 못 따라갈 최첨단 테크놀로지 상품이 일제 만년필이다. 장식이 플라스틱일 뿐, 만년필 핵심인 ‘금속 펜’ 그 자체로 보면 1만 엔 이상 수준이다. 욕(欲)을 멈출 수 없는 이유지만, 하나 살 때마다 돈을 엄청 번 느낌이 든다. 월간중앙을 통해 수차례 강조했듯이, 일본 ‘가와이(可愛い: Kawaii)’문화의 최대 장점 중 하나가 ‘무한한 선택권’에 있다. 항상 윈도 쇼핑에 그치지만, 이토야에 갈 때마다 특별히 전시된 최고가 상품을 기웃거린다. 주인공은 만년필이다. 350엔짜리도 있지만, 100만 엔이 넘는 만년필도 팔고 있다. 인간문화재가 만든 특별 세공품으로, 최고급 재료에다가 예술성을 겸비한 만년필이다. 황금으로 된 촉이 기본이다. 독립선언문 서명에나 어울릴 고풍스러운 모습이지만, 너무 무거워서 1시간 이상 사용할 생활용 필기도구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이토야에 갈 때마다 항상 새로운 100만 엔 이상 고가 만년필을 만날 수 있다. 전시된 기존의 만년필이 팔린다는 의미다.

바늘 가는 데 실이 따라간다. 수첩은 만년필을 비롯한 필기도구의 파트너다. 이토야에 가면 다양한 종류의 수첩이 기다리고 있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크기·장식·재료에 따라 다르지만, 수첩 내부 내용물도 각양각색이다. 신년 수첩 전시회는 일본 연말 풍경 중 하나다. 크고 작은 전시회가 수백 곳에서 열리고, 전국 수천 전문 공급자가 자신의 수첩을 출품한다. 회사만이 아닌 개인도 만들어 선보인다. 시민들은 출품된 수첩을 비교하면서 투표로 올해의 최고 수첩을 선정한다. 사실 달, 주간, 날짜, 요일로 나열된 수첩은 전부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수첩 사용자들이 보면 전부 다르다. 시간별 나열만이 아닌, 사용자에게 던지는 질문들도 수첩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스케줄 정리용이나 일기장으로서의 수첩만이 아닌, 자신과의 대화를 위한 ‘삶의 거울’로서의 메모장이다. “첫사랑을 다시 만난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자기가 뭔가 잘하고 자신 있다고 느낀 것은 언제 어떤 일, 하루라도 빨리 결정을 내리고 싶지만 아직도 못 내리고 있는 것은…” 수첩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기록하면서 자신과의 대화를 늘려가는 식이다. 일본인은 수첩에 대한 집착과 관심이 아주 특별하다. 각자 나름대로의 기록방식과 원칙과 가치를 구현하는 나만의 예술무대로서의 수첩이다. 모바일도 갖고 다니지만, 수첩과 거기에 맞는 필기도구도 반드시 챙긴다.

신문 한 페이지 가득 채우는 기사도…


▎만화는 어린이의 독해력을 길러주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이미 비디오에 익숙해진 이상 비주얼이 빠진 문화를 수용하기 어려운 시대다. 일본 만화는 스토리텔링에 기초해 보통 30권 이상 시리즈물로 발간된다. / 사진:유민호
필자는 만년필은 350엔짜리, 수첩은 100엔짜리로 통일하고 있다. 일본 100엔숍에서 파는 가로 15㎝, 세로 10㎝의 노트와 가로 25㎝, 세로 17㎝의 그림용 백지노트가 필자의 애호품이다. 종이 질도 좋고, 가볍고 모바일 크기에다가 바지 뒷주머니에도 쏙 들어간다. 원래 ‘문호기분(文豪気分)’이란 기묘한 이름의 200자 원고지 노트를 애용했지만, 2023년 초부터 판매가 중단되면서 100엔짜리 노트로 바꿨다. 350엔짜리 만년필과 100엔짜리 노트라지만, 손에 넣는 순간 최고 부자가 된 느낌이다. 수첩의 백지 공간을 보면 5000엔짜리 잉크 글로 가득 채우고 싶은 욕망이 ‘활활’ 불탄다.

문해력 급추락이란 얘기가 거의 매일 등장한다. 관련 학원이나 강좌가 넘치는 듯하다. 주로 유아기 학생을 대상으로 얘기하지만, 필자가 보면 대한민국 남녀노소 모두에 해당될 사안이다. 신문이나 방송에 등장하는 언어나 문장을 봐도 어디 하나 문법적으로 제대로 된 것이 드물다. 한국 중앙지 신문기자들의 글을 봐도 내용을 떠나서 뭘 전달하려는지 자체가 불투명하고 불완전하다. 필자는 언어학자도 문법학자도 아니다. 그러나 전하려는 의사가 무엇인지만은 정확히 분명히 간단히 알리자는 데 주력한다. 2024년 한국인의 초상화지만, 대략 5분 동안 집중하면서 문장을 대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노벨 문학상에 대한 기대는 남다르지만, 평생을 통틀어 소설 한 권이라도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긴 글을 읽어볼 기회도 없고, 그나마 나만의 에세이를 쓸 상황은 더더욱 드물다. 한국인 아키타입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모바일은 상황을 한층 더 악화시키고 있다. 초 단위 비주얼 틱톡 문화에 익숙한 상태에서 2차원 글을 5분 이상 읽을 여유도 능력도 없다. 비디오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최고 영화가 ‘대부(代父)’라지만, 3시간짜리 영화를 진득하게 앉아 볼 수 있는 한국인은 극히 드물다.

모바일로 인해 전 세계가 스피드 비주얼 문화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그러나 서방 선진국이나 필진국에서 보면 다르다. 신문이 주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서방이나 일본 주요 신문의 경우 신문 한 페이지를 채우는 글이나 칼럼도 적지 않다. 기사 하나 읽는 데 적어도 10분 이상은 투자해야만 한다. 영어에 서툰 한국인이라면 뉴욕타임스 일요판 에세이 하나 읽는 데 20분은 걸릴 것이다. 짧은 호흡의 비디오 문화도 있지만, 반대로 긴 호흡의 장편 에세이나 분석 기사도 필진국 언론의 일상 풍경이다. 일본은 그 같은 필진국 중에서도 가장 앞선 나라다. 청소년 문해력 추락이 문제가 되지만, 한국 상황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일본에서 순수문학 베스트셀러는 주기적 현상이다. 아쿠타가와(芥川) 수상작품이란 타이틀이 붙는 순간 수십만 부 판매가 기본이다. 매년 100만 부 이상 베스트셀러도 넘친다. 인기 정치인의 홍보용 책자를 제외할 경우 한국에서 1만 부 판매를 넘기는 책이 몇 권이나 될지 궁금하다. 책 한 권 출간하는 것보단 웃거나 벌거벗은 1분짜리 유튜브 비디오가 우선이다.

필자 판단이지만, 수첩문화야말로 ‘일본=필진국’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첩이 어린이 세계에 들어가면서 글을 통한 사고에 익숙해진다. 일기·메모, 심지어 가계부를 겸한 수첩 기록을 통해 언어와 글에 대한 통찰력을 어릴 때부터 쌓아갈 수 있다. 상식적 얘기지만, 언어의 한계는 사고의 한계, 사고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로 이어진다.

긴 문장에 익숙하고 글쓰기에도 주력

보통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는 서로 비교하고, 나만의 개성이 새겨진 수첩 기록 노하우를 개발한다. 컬러로 된 수첩 정리는 기본이고, 그림·사진도 넣으면서 오타쿠(オタク)스타일 수첩으로 발전한다. 연말 수첩 전시회에 몰리는 수많은 중·고등학생은 그같은 뜨거운 관심의 증거다. 일본 서점에 가보면 알겠지만, 수첩만 파는 것이 아니라 수첩 정리법에 관한 독특한 노하우 관련 책자도 쏟아진다. 웹툰 작가가 한국 어린이의 미래 꿈 중 하나로 떠올랐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웹툰이 아닌 만화 작가가 미래의 꿈 ‘베스트 파이브’ 안에 들어가 있다. 웹툰과 만화의 차이는 길이와 메시지의 깊이에 있다. 짧은 웹툰은 에피소드, 긴 만화는 스토리텔링으로 볼 수 있다. 만화는 웹툰으로 변신할 수 있지만, 웹툰은 만화로 가기 어렵다.

수첩 문화의 영향이지만, 일찍부터 긴 문장에 익숙하고 실제 글쓰기 훈련에도 남다른 곳이 일본이다. 필자가 출판사 전문가에게 들었지만, 한국에서는 당장 어떤 테마를 주고 1만 자로 표현하라고 할 때 다음날 글로 제출할 사람이 열 손가락 안에 불과하다고 한다. 지식도 부족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전달하는 문화가 언제부턴가 한국에서 사라져가고 있다는 의미다. 눈앞의 해결방안에 대한 방법론은 넘친다. 그러나 평소 열린 토론도 드물고, 장편의 글을 대하는 문화도 없기 때문에 사고의 폭과 깊이가 얄팍하다. 슬로건은 무성하지만, 색다른 발상이 생기기 어렵다. 강조하지만, 글과 문장은 언어와 사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초 단위 비디오가 언어와 사고 능력을 감퇴시키고 있다.

2023년 10월을 기준으로 일본을 방문한 한국 관광객이 60만 명을 넘어섰다. 도쿄 긴자는 한국인 대부분이 들르는 곳일 듯하다. 어린이를 동반한 부모라면 문방구점 이토야에 들를 것을 권한다. 구석구석 살피면서 글을 읽고 쓰고 느끼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평생 간직할 만년필도 값싸게 구입할 수 있고, 100년 달력은 아니더라도 10년 일기장 정도는 구할 수 있다. 모바일이 대세라고 하지만, 아날로그가 주는 오감(五感)문화에서 멀어질 경우 디지털의 진짜 가치도 알기 어렵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조화와 균형이다. 벌써 잊힌 듯하지만, 한때 한국은 자신의 자식들을 스티브 잡스 스타일 ‘리버럴 아트’ 세계로 독려한 나라이기도 하다. K팝 엔터테인먼트 공화국도 좋지만, 나만의 수첩을 통한 필진국 세계도 만나고 싶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401호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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