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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창업열전(1)] 이자카야 프랜차이즈 ‘사쿠라테이엔’ 일군 정형진 대표 

“박리다매 시대는 지났다… ‘특별한 메뉴’가 손님 부른다” 

안덕관 월간중앙 기자
식당은 손님 입소문이 좌우… 포털 상위 노출 목표로 마케팅 독학
가격대 주도할 수 있는 신메뉴 개발하고 적극 홍보하는 게 승부처


▎이자카야 프랜차이즈 브랜드 ‘사쿠라테이엔’을 설립한 정형진(38) 대표. 서울 강남에서 개인 술집을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 12개 지점까지 확장했다.
경기가 어려울 때는 사업을 접는 사람도 많지만 그때가 새로운 사업의 기회이기도 하다. 월간중앙은 자수성가한 30대 사업가들을 만나 그들의 남다른 사연과 성공 노하우를 들어보는 ‘청년창업열전’을 연재한다. 그 첫 번째 인터뷰 대상은 이자카야(일본식 선술집) 프랜차이즈 브랜드 ‘사쿠라테이엔(桜庭園)’을 설립한 정형진 대표다.

5호선 전철을 타고 안양천을 가로지르자 곧 서울 양천구의 오목교역이었다. 출구에서 나와 주점과 요릿집으로 둘러싸인 대로변을 지나 골목에 접어드니 사쿠라테이엔 오목교점이 보였다. 사쿠라테이엔을 한글로 번역하면 벚꽃 정원이다. 매장 내부도 곳곳이 벚꽃으로 장식돼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일본식 홍등의 조명이 벚꽃 사이사이에 옅은 음영을 그려낸다. 그걸 보자니 한 일문학과 노교수에게서 들었던 일본 유학 시절 경험담이 불현듯 떠올랐다. 3월 중순, 꽃놀이나 즐길 겸 벚꽃이 흐드러진 공원에 들렀더니 몰려든 인파에 놀라 벚꽃 나뭇가지를 하나 꺾고는 술집에 들어가 그걸 보며 술을 마시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는 얘기였다. 내부를 둘러보니 그때 들었던 일본의 노포(老舗)가 연상됐다.

“사업 초창기에 매달 일본 출장을 갔다. 일식을 배우는 것뿐 아니라 특유의 분위기도 가져오려고 했다.” 사쿠라테이엔의 정형진(38) 대표가 설명한다. 천장은 짙은 남색으로 칠해져 있다. 흰색의 벚꽃과 어울리는 색 조화다. 그는 “저녁 나절의 봄 그리고 꽃구경이 인테리어의 모티브였다”고 말한다.

사쿠라테이엔의 프랜차이즈화에 성공한 지는 7년째. 서울 강남에서 개인 술집을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 12개 지점까지 확장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상권을 장악한 주먹들로부터 ‘장사를 접으라’는 협박에 수년간 시달렸고, 정상궤도에 오르는가 싶을 때 코로나19가 터졌다. 그 모든 난관을 어떻게 헤쳐왔을까?

장사 말고는 미래가 없었던 20대


▎이자카야 프랜차이즈 브랜드 ‘사쿠라테이엔’의 판교 본점 전경. / 사진:사쿠라테이엔
장사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25살 때니까 2010년대 초다. 처음에는 프랜차이즈 카페 매장을 운영했다. 테이블도 3~4개밖에 안 되는 작은 매장이었다.”

사업하기엔 이른 나이다. 취업 전선에 뛰어들지 않았던 이유는?

“사실 10대 후반에 방황도 했고… 대학에 들어갔는데 영 재미가 없어 자퇴했다. 대기업에서 성공할 스펙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큰 사업이든 작은 사업이든 일단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카페 창업은 레드오션이었을 텐데?

“그렇다(웃음). 점심때면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리의 한 상가 지하에 매장이 있었다. 주변에 카페가 열댓 군데나 입점할 만큼 경쟁이 심했다. 더군다나 제 매장은 소규모 프랜차이즈여서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붙어볼 수가 없었다.”

솔직히 커피 맛보다는 브랜드와 인테리어 싸움 아닌가?

“그래서 서비스를 노렸다. 일단 작은 프랜차이즈여서 어떻게 운영하건 본사 터치가 없었다. 예를 들어 직장인들은 커피값에 민감할 거라 보고 오늘의 메뉴에 선정된 커피나 생과일주스는 500원을 할인했다. 또 손님들 특성을 하나하나 기억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했다. 누구는 시럽을 넣거나 누구는 물을 더 넣어달라고 하는데, 그런 특성을 항상 메모하고 기억해서 손님이 다시 왔을 때는 ‘어제처럼 드릴까요’라고 하는 식이다. 당시는 카카오스토리가 유행이었는데, 저와 연락처를 공유한 손님들은 카카오스토리의 제 일상 사진을 보면서 일종의 유대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중에는 ‘다른 매장에 가면 사장님을 배신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손님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해당 프랜차이즈에서 매출 1위를 찍었다.”

잘나가던 카페를 접은 이유가 뭔가?

“결국엔 상가에 있는 모든 카페가 제 전략을 따라했다. 대형 프랜차이즈가 모방하니 저만의 무기가 사라지게 됐다. 박리다매(薄利多賣)의 한계도 뚜렷하게 느꼈다. 아무리 많이 팔아봐야 남는 게 없었다. 그러다 보면 가격을 낮추는 전략밖에 남지 않는데, 그건 폐업에 가까워지는 길이다.”

왜 이자카야를 선택했나? 일식에 조예가 있었나?

“서울 강남에 있는 한 개인 술집을 인수했는데 그게 이자카야였다. 친동생(정세진)도 요리에 일가견이 있겠다, 어떻게든 (장사가) 되지 않을까 낙관했다.”

그 말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는 얘기로 들린다.

“당시 창업회사가 권리금 5000만원을 뻥튀기해서 챙겨갔더라. 거기다 강남이라고 해도 술집은 외진 곳에 있는데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오래된 빌딩 3층에 있었다. 솔직히 누가 자처해서 올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계약 당시 월 매출 3000만원은 찍히는 곳이라고 해서 인수했는데, 나흘 내내 손님이 한 명도 안왔다. 옆 가게 사장이 측은한 눈으로 원래 ‘삐끼 술집’이었다고 했다. 거리에서 전단 돌리고 만취한 손님들한테 호객을 해야 겨우 영위할 수 있는 싸구려 술집이었던 거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바로 인터넷에 구인 글을 올려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호객을 시켰더니 테이블이 채워지기 시작하더라. 어느 날 새벽 휴대폰으로 이상한 문자가 왔다. 상권의 유력가가 찾으니 근처 술집으로 오라는 얘기였다. 룸으로 된 지하 술집이었는데 들어가니 한눈에도 힘깨나 쓰게 보이는 주먹들이 복도에 도열해 있었다. 그 유력가란 인간이 강남 상권을 장악해서 여기서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인물이 됐다고 누가 귀띔해줬다.”

카페 운영해 성공한 뒤 이자카야 인수


▎이자카야 프랜차이즈 브랜드 ‘사쿠라테이엔’의 대표 메뉴인 제주딱새우회(왼쪽)와 제주갈치회. 드라이아이스를 곁들여 서늘한 연기를 연출, 수산물의 생생한 느낌을 살렸다. / 사진:사쿠라테이엔
그가 뭐라고 하던가?

“이 동네에서 호객 행위를 없애기로 했으니 동참하라고 했다. 그 유력가 양반이 목 좋은 곳에 술집이란 술집은 다 가지고 있었는데, 누가 호객하면 자기 손님이 줄어든다고 본 것이다. 제가 인수한 술집 사장이 왜 그렇게 성급하게 가게를 내게 넘겼는지 퍼즐이 맞춰지더라. 이미 유력가에게 호객 행위를 그만두라고 협박을 받고 도저히 살아남을 방도가 없어서 싸게 팔고 달아난 것이다.”

난생 처음 보는 주먹들에게 간이 떨렸을 법하다.

“무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 일단 그 자리를 피하려고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호객을 안 하니 매출이 바닥을 찍었다. 한 달이 지나자 동생이 그러더라. 요리 좀 만들고 싶다고. 형이 돼서 이게 뭐하는 건가 부끄러웠다. 바로 직원들을 불러서 거리로 나가 손님 불러오라고 내보냈다. 그날부터 주먹들이 우리 가게에 와서 난동을 부리고 시비를 걸고 손님들을 내쫓으려고 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공권력에 호소할 생각은 없었나?

“일단 그쪽의 표면상 이유는 호객행위 근절이었으니까, 경찰에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손님이랍시고 가게에 들어오는 주먹들을 돌려보낼 이유도 마땅치 않았고… 두어 달을 간신히 버텼다. 매출은 기대도 안 했다. 이걸 접으면 나도 죽는다는 생각이었다. 어느날 그들이 저를 어느 성인게임방으로 데려가 의자에 앉혀놓은 채로 협박했다. ‘보증금 5000만원 줄 테니 권리금 없이 나가라’고 했다. 8시간 동안 협박과 회유가 반복됐다. 가게 잃으면 부끄러운 자식 되는 거고, 부끄러운 형 되는 거였다. 그래서 끝까지 버텼다. 그러자 유력가보다 높은 회장이란 인간이 와서 ‘얘는 굴복 안 하는 아이니 그냥 동생 삼으라’고하더라. 그 말에 유력가도 월급 챙겨줄 테니 자기 밑에서 일하라고 했다.”

수락하는 쪽을 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제가 방황하던 때에도 어머니께 항상 듣던 얘기가 있었다. ‘할아버지 얼굴에 먹칠하지 말라’고. 정정섭(2013년 작고) 전 기아대책 회장이 제 할아버지다. 어려서는 할아버지께서 사회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평생 남을 돕는다는 긍지와 자신감으로 일생을 사셨던 분인 것만은 똑똑히 알고 있다. 그런 피를 이어받은 제가 어떻게 그들의 수발을 들고 살겠나. 그래서 거절했다.”

고 정정섭 전 기아대책 회장은 과거 전경련에서 23년을 일하며 전무이사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후 국제구호단체인 기아대책 회장을 역임하며 2010년에는 1500억원을 모금하기도 했다. 비하나회 출신으로 현대사를 들불처럼 살다간 정일섭(2000년 작고) 전 육군 소장도 정 대표의 큰할아버지다.

프랜차이즈 결심 후 마케팅 독학


▎이자카야 프랜차이즈 브랜드 ‘사쿠라테이엔’을 설립한 정형진(38) 대표는 “손님들은 ‘특별한 것’에 돈을 쓴다. 결국 변화를 주도하는 메뉴를 만들어야 장사의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랜차이즈화를 결심한 뒤 무엇을 시작했나?

“그때가 2017년이다. 더는 호객이 안 통하던 시기였다. 일단 기존의 메뉴부터 싹 갈아치워야 했다. 주변을 수소문해 ‘미셰린2스타’를 받은 모 일식집에서 일하는 요리사를 소개받았다. 일면식도 없고 연고도 없는 관계였지만 찾아가서 일식 레시피를 배우고 싶다고 사정했다. 문전박대당했지만 거듭 찾아가 진솔하게 접근하니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그때부터 제 동생이 그분 밑에서 하루 3~4시간씩 자며 요리공부만 했다.”

좋은 메뉴가 있더라도 입소문이 나야 할 텐데?

“그렇다. 호객이 안 먹히니 손님을 찾아오게 할 방법이 없었다. 가게는 폐업 직전이었고. 그때 포털 상위 노출을 통한 마케팅이 머리를 스쳤다. 바로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 파워블로거들이며 마케팅 업체를 찾았다. 그런데도 포털 상위 노출에 계속 실패했다. 마이너스 통장을 하나 더 개설해 아예 나 스스로 마케팅을 독학했다. 생존을 위해 원고 내용이 포털 상위 노출과 연결되는지 단어 하나하나 테스트하고 알고리즘을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사쿠라테이엔이 노출되면서 어느날부터 손님이 늘기 시작하더라. 월 매출 7000만원을 찍었다.”

프랜차이즈 구조는 어떻게 만들었는가?

“2018년부터 사쿠라테이엔 가맹점을 차리고 싶다는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는 그저 너무 힘들게 브랜드를 만들어냈고, 또 저를 믿고 차린다는 것에 감사해서 점주가 일하는 만큼 돈을 벌자는 취지로 로열티를 낮게 책정했다. 다만 메뉴 조리법 등의 프랜차이즈 교육은 엄격히 진행했다. 또한 특제소스만큼은 제대로 된 값을 받았다.”

정상궤도에 진입하나 싶을 때 코로나19가 터졌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2020년 사쿠라테이엔 연 매출이 50억원을 돌파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바로 다음 해 곤두박질친 거다. 오후 5시에 가게를 오픈하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저녁 9시에 문을 닫았다. 점주들이 너무 힘들어해 사태가 끝날 때까지 로열티를 면제했다. 매출이 안 잡히니 각종 재료부터 소스 등 공급 비용 일체를 본사가 공장에 대납했다. 그래도 매출의 70%가 날아갔다. 가맹점도 세 군데가 폐업했다.”

그래도 그 정도면 선방한 거 아닌가?

“그때 마케팅 업체를 설립했다. 포털 상위 노출과 관련한 내 마케팅 능력이 입소문이 난 터라 여러 기업에서 홍보 대행을 요청해왔다. 정식으로 돈을 벌기 위해 사업자 면허를 내고 본격적으로 마케팅 의뢰를 받았다. 사쿠라테이엔의 적자도 메웠고, 정부지원사업까지 따냈다.”

손님들은 특별한 것에 주머니를 연다

불황기에 식당이 살아남기 위한 비결을 말한다면?

“저희는 1년에 최소 2개씩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고 있다. 기존의 메뉴만 고수하다 보면 이미 다른 데서 다 벤치마킹해서 본인만의 희소성이 사라진다. 저희 메뉴가 일반화되지 않으려면 매달 일본 출장도 가서 신메뉴를 개발할 수밖에 없다. 변화에 적응하는 것을 넘어서 변화를 주도하는 메뉴가 존재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사쿠라테이엔 메뉴를 보면 비주얼에 특히 신경 쓴 모습이다.

“손님들은 흔한 음식에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한 푼을 쓰더라도 평범한 것보다는 ‘특별한 것’에 돈을 쓴다. 그런 니즈가 충족될 때 손님들은 기꺼이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계정에 방문 후기 사진을 올린다. 장사하는 입장에선 매출과 홍보를 한 번에 쥐게 되는 셈이다.”

사실 음식의 맛에 신경 쓰더라도 망하는 가게도 많은데?

“본인 매장의 메뉴가 맛이 있고 친절한 서비스를 갖추는 건 기본조건이다. 그러한 장점을 예비 고객에게 알리는 마케팅이 관건이다. 단순히 메뉴 사진을 SNS나 포털에 올려놓고 누가 봐주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어떤 식으로 홍보해야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지, 사람들은 어떤 홍보에 마음을 쓰는지 철저하게 공부해야 한다. 모두 자기 일인데 남의 일 대하듯 마케팅에 소홀한 사장님들이 많다.”

지난해에는 기부도 했다.

“밀알나눔재단기빙플러스에 5200만원 상당의 비타민 음료를 기부했다. 말씀드렸다시피 할아버지께선 항상 남을 돕고 사는 분이셨다. 기부한 뒤에야 비로소 할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장사로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은지?

“박리다매가 통하던 시대는 끝났다. 대중적인 음식은 가격대가 형성돼 있다. 그런 메뉴로는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 누가 더 싸게 파느냐의 경쟁구조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본인이 가격대를 주도할 수 있는 메뉴를 개발하고 홍보하시라. 손님이 적당히만 와주더라도 돈을 버는 구조를 만드는 게 성공의 첫걸음이다.”

- 글 안덕관 월간중앙 기자 ahn.deokkwan@joongang.co.kr / 사진 김상선 기자 kim.sangseon@joongang.co.kr

202404호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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