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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 인터뷰] 한국·필리핀 수교 75주년에 만난 마리아 테레사 주한 필리핀 대사 

“FTA 체결로 韓 자동차 기업 수혜 볼 것…, 필리핀 찾는 한국인 관광객 더 늘었으면” 

김태욱 월간중앙 기자
“남중국해 중국-필리핀 충돌 직후 한국 외교부 우려 성명에 깊은 사의”
“한국은 필리핀 군 현대화 사업 중추적인 파트너… 국방협력 강화 기대”


▎마리아 테레사 주한 필리핀 대사는 “필리핀이 중국에 보내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국제법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필리핀을 방문한 전체 여행객 4명 중 1명은 한국인이었다. 세부와 보라카이 등 필리핀의 유명 명소는 어느새 제주도처럼 익숙한 여행지가 됐다. 이를 반영하듯 주한 필리핀 대사관 입구에는 주요 관광지 홍보책자들이 비치돼 있다. 과거 6·25전쟁을 통해 혈맹의 우호관계를 맺은 양국은 오늘날 관광을 통해 한층 친밀한 이웃이 됐다. 6·25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수교한 양국은 올해 3월 수교 75주년을 맞았다.

한·필리핀 수교 75주년을 맞아 3월 11일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주한필리핀대사관에서 마리아 테레사 디존-데 베가 대사와 마주 앉았다. 인터뷰 내내 테레사 대사에게서 “한국은 대단히 특별한 국가”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테레사 대사는 “특별하다는 말은 결코 외교적 수사가 아니다”라며 지난해 체결된 한·필리핀 자유무역협정(FTA)을 시작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 밖에도 테레사 대사는 국제 정세를 설명하면서 복잡한 동아시아 지도를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치환해서 설명했다. 평소 동북아 관점에선 보이지 않던 사각(死角)을 짚어냈다. 테레사 대사가 아세안(ASEAN) 외교가의 핵심 인물로 불리는 이유를 엿볼 수 있었다.

남중국해 갈등에 “중국은 국제법 지켜야”


▎한국·필리핀 공군은 3월 3일 수교 75주년을 맞아 우정비행을 실시했다. 사진은 우정비행과 에어쇼를 마친 한국 블랙이글스와 필리핀 FA-50PH 조종사들 모습. / 사진:연합뉴스
남중국해에서 필리핀과 중국의 갈등이 연일 고조되고 있다. 최근에는 필리핀 병사 4명이 중국 함정이 쏜 물대포에 맞아 다치는 일도 발생했다.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남중국해에서 도발을 이어가고 있다. 문제는 앞으로도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지난 2016년 국제상설재판소(PCA)가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국제법상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음에도 중국은 연일 역내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심히 우려된다. 필리핀이 중국에 보내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국제법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이다.”

현재 중국과 필리핀은 남중국해 영유권 갈등을 벌이고 있다. 급기야 지난 3월 5일 남중국해에서는 필리핀 함정과 중국 해경선이 충돌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필리핀 병사 4명이 중국 해경선이 발사한 물대포에 맞아 다쳤다.

한국 외교부는 필리핀-중국 충돌 직후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필리핀 선박이 충돌하고 필리핀 선박에 대해 물대포가 사용되면서 벌어진 위험한 상황에 대해 깊이 우려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최근 남중국해에서 발생한 필리핀과 중국의 충돌, 구체적으론 중국 측의 물대포 사용으로 인해 발생한 위험한 상황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한 주필리핀 대한민국대사관에 깊은 사의를 표한다. 중국은 남중국해의 긴장을 고조시킴으로써 우리의 주권과 관할권을 침해하고 있다. 중국의 이 같은 일방적이고 불법적인 행동은 역내 평화와 안보, 상호 신뢰를 훼손한다. 남중국해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모든 노력은 지난 1982년 체결된 ‘해양법에 관한 유엔 협약(UNCLOS)’과 지난 2016년 국제상설재판소(PCA)의 판결 등 국제법에 기초해야 한다.”

이번 입장문 발표를 두고 외교가에선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고 평가한다. 입장문 발표 반대의 목소리도 내부적으로 적지 않았다. 그만큼 한국 정부의 ‘통 큰’ 결정이었는데.

“거듭 감사의 뜻을 표한다. 올해 수교 75주년을 맞는 한·필리핀의 소중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라고 본다. 한국 외교부가 밝힌 바와 같이 필리핀도 남중국해에서 평화와 안전, 규칙 기반 질서 유지 및 해당 수역에서 유엔해양법 협약을 포함한 국제법 원칙에 따른 항행과 상공 비행의 자유를 지지한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고 싶다.”

외교부 내에서는 입장문 발표 직전 ‘중국이 반발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3월 12일 “한국은 남해(남중국해) 문제의 당사자가 아니다. 한국이 분위기에 휩싸여 덩달아 떠들지 않으며, 중·한 관계에 불필요한 부담을 늘리는 일을 피할 것을 촉구한다”며 반발했다.

“한·필리핀 합동 군사훈련, 가능성 있는 이야기”


▎마리아 테레사 주한 필리핀 대사는 한·필리핀 양자 대규모 군사 훈련 가능성에 대해 “양국 국방부 간 조율돼야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외교부가 ‘어려운 결정’을 내린 이유는 향후 한국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필리핀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기 위함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한국의 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하면 필리핀의 전폭적인 도움을 기대해도 좋은가?

“한·필리핀은 이미 해양 안보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다. 지난 2022년 출범한 한·필리핀 해양 대화가 대표적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한국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처럼 한·필리핀 양국 관계는 수교 75주년 이상의 의미가 있다. 아울러 ‘한·필리핀 해양대화’는 한국이 아세안(ASEAN) 국가와 맺고 있는 유일한 해양 협력 대화다.”

북한은 최근 ‘한·미·일’과 ‘미·일·필’ 협력을 거론하며 필리핀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한·필리핀 군사협력이 한층 강화되면 ‘한·미·일·필’ 구도가 완성될 전망이다. 그러기 위해선 한국과 필리핀도 호주·필리핀처럼 합동 해상 및 공중 순찰 훈련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지난해 11월 호주·필리핀의 합동 해상 및 공중 순찰 훈련은 양국이 처음 실시한 훈련이란 점에서 특별하다. 한국과 필리핀도 비슷한 훈련을 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특히, 지난해 11월 필리핀에서 열린 KAMANDAG 군사 훈련에 한국이 미국, 일본, 영국과 함께 참가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그전까지 한국은 옵저버 자격으로만 참여했다. 필리핀과 한국은 양국 관계의 발전을 위해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남중국해에서 양국의 합동 해상 및 공중 순찰과 같은 군사훈련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군사훈련은 향후 다양한 환경적 요인과 상호 작용 방식 등에 따라 양국 국방부 간에 논의돼야 하는 사안이다. 필리핀과 한국은 빠르게 변하는 지역 및 글로벌 안보 환경을 인식하고 역내 평화와 안보에 대해 같은 열망을 공유하고 있다. 아울러 필리핀이 북한에 보내는 메시지도 간단하다. ‘국제법을 지키라’는 것이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2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정책을 비판하며 “미국·일본·한국과 미국·일본·필리핀의 3자 협력을 제도화하는 등 추종 세력들을 호전적이며 불가역적인 블록에 망라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노골화됐다”고 보도했다.

필리핀 정부는 최근 군 현대화 사업에 350억 달러(약 45조9000억원)를 책정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필리핀이 한국산 무기를 대규모 도입할 경우 한·필리핀 협력을 가속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주장도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은 필리핀 군 현대화 사업의 중추적인 파트너다. 현재 진행 중인 필리핀 해군 현대화 사업에도 한국 기업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한국에서 건조한 두 척의 호위함은 이미 필리핀으로 인도됐다. 우리는 현재 두 척의 초계함과 여섯 척의 원해경비함을 기다리고 있다. 양국의 국방 협력이 한층 강화됐으면 한다. 필리핀 자체 방위산업이 강화되는 방안으로 말이다.”

한국과 폴란드의 방산 협력과 같은 ‘현지화’ 사업을 의미하는가?

“그렇다. 한국산 무기를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군사 장비 생산의 필리핀 현지화 추진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필리핀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됐다. 대표적인 수혜 예상 분야는 무엇인가?

“한국의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 기업들이 큰 수혜를 볼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 제조업체들이 밸류체인을 필리핀으로 확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이 밖에도 핵심 광물 분야에서 양국 협력이 크게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FTA 체결로 비즈니스가 대폭 확대되면, 필리핀을 찾는 한국인 여행객도 덩달아 증가할 것이다. 이미 지난해 기준 필리핀을 방문한 해외 관광객 4명 중 1명은 한국인이었다. 더욱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필리핀을 방문했으면 한다.”

“재한 필리핀인 지원에 한국 국회가 관심 가져줬으면”

현재 6만4000여 명의 필리핀인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국인 여행객들이 필리핀을 찾는 이유는 필리핀이 집처럼 편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도 그렇다. 한국이 집 같다. 이처럼 우리는 정서적인 유대관계가 형성돼 있다. 아울러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숫자가 지난해 2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에 거주하는 필리핀 교민도 계속 늘고 있다. 재한 필리핀인들을 위해 한국 국회가 필리핀 이민자와 다문화 가정을 지원하는 데 앞장섰으면 좋겠다.”

통상 외교가에서는 주재국에 부임하는 대사의 무게감을 통해 주재국을 바라보는 파견국의 생각을 가늠하곤 한다. 대사는 한국 부임 이전 외교부 차관과 독일 대사를 지냈다. 한국은 필리핀에 어떤 국가인가?

“필리핀은 한국을 항상 소중한 파트너국으로 여겨왔다. FTA 체결과 군사협력 등에서 읽히듯, 양국은 훌륭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양국 사이에 그 어떤 방해물도 없다. 내가 한국에 부임한 것도 부분적으론 그러한 의중이 반영됐을 수 있다. 양국의 관계는 한국전쟁 당시 공동의 희생을 바탕으로 구축된 이후 꾸준히 깊어지고 있다. 한·필리핀 관계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세안은 한국이 공들이는 주요 지역이다. 한국의 대아세안 외교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윤석열 정부의 인도·태평양 정책과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 정책 모두 아세안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두 정부의 아세안 정책은 한국의 외교정책이 지속적으로 발전·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넓은 시야를 갖고 다른 지역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향후 학계에서 ‘외교 정책의 발전’을 가르칠 때 사용해도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 글 김태욱 월간중앙 기자 kim.taewook@joongang.co.kr / 사진 김상선 기자 kim.sangseon@joongang.co.kr

202404호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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