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25)] 중국을 뒤흔든 을지문덕의 노래(上): 백만 대군의 침공 

고구려 대 수나라, 거대한 전쟁의 서막이 오르다 

고구려, 요서(遼西) 선제공격해 수나라 ‘천하질서’에 도전
수양제, ‘난공불락’ 요동성에 막히자 별동대를 평양성으로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는 살수대첩 시각물. 을지문덕의 신묘한 지휘로 고구려는 요하를 건넌 백만 대군을 막아내고 살수와 평양성에서 대적(大賊)을 섬멸했다. / 사진:전쟁기념관
"신묘한 책략은 천문을 헤아리고(神策究天文) / 기묘한 계교는 지리에 통달했네(妙算窮地理). / 싸움에 이겨 이미 공로가 드높으니(戰勝功旣高) / 만족할 줄 알고 그치기를 바라오(知足願云止).”([삼국사기] 열전 ‘을지문덕’)

살수(薩水)를 건너온 수나라 별동대를 평양성 인근까지 유인한 후에 을지문덕은 시 한 수를 지어 적장 우중문에게 보냈다. 겉보기에는 상대의 책략과 계교를 칭송하는 것 같지만, 반어적으로 전공에 눈이 멀어 사지(死地)로 뛰어든 적을 비웃고 있다.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오언고시(五言古詩),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다.

서기 612년 중국의 통일제국 수(隋)나라가 무려 113만3800명의 대군을 편성해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수양제는 “고구려의 무리는 우리의 한 군단도 감당하지 못할 텐데, 백만 대군을 이끌고 가면 마땅히 이길 것”이라며 승리를 장담했다([자치통감] 수양제 대업 8년 정월). 그러나 고구려에는 구국의 영웅 을지문덕이 있었다.

을지문덕의 신묘한 지휘로 고구려는 요하를 건넌 백만 대군을 막아내고 살수와 평양성에서 대적(大賊)을 섬멸했다. [삼국사기]는 “수양제가 일으킨 성대한 군세로부터 작은 나라를 보전한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라고 논하여 말했다. 그럼 그 거대한 전쟁은 어떻게 막을 올렸고, 고구려에 을지문덕이 등장한 배경은 무엇일까?

수나라는 581년 북주(北周)의 세력가 양견이 제위를 넘겨받아 창업했다. 수문제 양견은 589년 장강을 건너 진(陳)을 정복함으로써 남북조 시대를 마감하고 300여 년 만에 중국을 다시 통일했다. 통일 제국의 탄생은 이웃 나라와 종족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중국이 남북으로 나뉘고 수많은 왕조가 명멸했던 혼돈기에는 분열을 이용해 제각기 이득을 취하고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원에 대제국이 등장하자 판도가 달라졌다. 수나라는 중국 중심의 일원화된 국제질서를 이웃들에게 강요했다.

남북조 시대에 중국 왕조들은 조공과 책봉을 통해 형식적인 주종관계를 맺되 내정은 간섭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수나라는 이웃들을 실질적인 속국으로 삼으려 했다. 먼저 북방의 패자 돌궐이 동서 내분에 휩싸인 틈을 타 군사력과 이간책을 동원해 동돌궐을 복속시켰다. 또 요서 군벌 고보녕 세력을 소탕하고 거란족과 말갈족에 대한 영향력도 키워나갔다. 다음은 동방의 강국 고구려 차례였다. 서기 590년에 수문제는 고구려 평원왕에게 새서(璽書, 옥새가 찍힌 문서)를 보냈다.

“너희 나라는 번부(藩附)라면서도 정성과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 만약 행실을 바꿔 헌장을 따르지 않는다면 짐의 관속(官屬)을 보내 다스리게 할 수도 있다. 왕은 요수(遼水)의 넓이가 장강(長江)에 비해 어떠하고, 고구려의 인구가 진국(陳國)에 비해 어떠하다고 생각하는가? 짐이 왕의 허물을 질책하려 한다면, 한 명의 장군에게 명을 내리기만 하면 된다. 다만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바라며 타이르는 것이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평원왕 32년)

‘통일제국’ 수나라, 고구려를 위협하다


▎1974년 김기창(金基昶)이 그린 을지문덕(乙支文德) 표준영정. 수양제의 대대적인 침공을 막아내고 살수에서 적의 별동대를 섬멸해 고구려를 구하고 수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 / 사진:나무위키 캡처
황제는 고구려가 복속하지 않으면 왕을 내치고 수나라 관리를 보낼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장강과 진국을 거론함은 강남 정복의 위업을 과시한 것이다. 요하(遼河) 너머 고구려 정도는 장군 하나만 보내도 짓밟는다는 것이다. 통일 제국을 이룩한 수문제의 오만한 자신감이 새서에 흐른다. 고구려로서는 아니꼽겠지만, 수나라의 국력이 막강한 건 사실이었다. 군사력뿐 아니라 재정도 풍족했다. 창고에 곡식과 공물이 넘쳐 지방의 조세를 낮춰줄 정도였다. 정치도 빠르게 안정됐다. 법령을 간소화하고 제도를 개혁해 민심을 얻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상대가 막강하다고 호락호락 굽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요하의 서쪽, 요서(遼西)로 강역을 확장했다. 이곳은 원래 돌궐과 고보녕 세력이 주인 노릇을 했으나, 둘 다 수나라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후 수문제가 강남 평정에 힘을 쏟는 동안 요서에는 잠깐 힘의 공백이 발생했다. 그 빈틈을 치고 들어간 것이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요하를 건너 의무려산(醫無閭山)까지 나아가 무려라(武羈邏) 등 군사기지들을 구축했다. 요서 동부 지역에 근거지를 확보한 것이다. 이윽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도 요서 한복판에 영주총관부를 설치하고 변경 통치에 나섰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수문제는 새서에서 “고구려가 말갈을 마구 부리고 거란을 억눌렀다”라고 질책했다. 요서 일대의 거란족과 말갈족에 대한 지배권이 다툼의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바야흐로 요서에서 고구려-수 전쟁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요서를 선제공격한 영양왕의 무력시위


▎수문제 양견. 북주의 제위를 넘겨받아 수나라를 창업하고 300여 년 만에 중국을 통일했다. / 사진:위키백과
서기 598년 1월 고구려 영양왕이 말갈의 무리 1만여 명을 이끌고 요서를 침공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9년). 수나라 영주총관부 치소인 유성(柳城)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불의의 습격이었지만, 영주총관 위충이 대응에 나서 물리쳤다고 한다. 병력이 말갈의 무리 1만여 명에 불과했다면 애초 영주총관부를 함락시킬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고구려 국왕이 직접 요서 깊숙이 들어가 친정(親征)했으니 강력한 무력시위로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왜 거대한 중원 제국을 상대로 겁도 없이 선제공격을 펼쳤을까? 아마도 요서에 거주하는 거란·말갈에 대해 수나라가 영향력을 확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수나라는 중국과의 교역을 미끼로 이들 종족의 환심을 샀다. 반면 거란·말갈을 통한 고구려의 북방 교역은 타격을 입었을 터. 가만히 있을 고구려가 아니다. 이에 앞서 복속시킨 속말말갈 병력을 모아 요서를 침공했을 것이다. 무력시위는 모양새가 중요하다. 국왕이 친히 모습을 드러내 영향력을 과시했다. 왕관의 무게를 얹어 수나라에 엄중히 경고한 것이다.

고구려의 요서 침공을 보고받은 수문제는 분노했다. 황제는 당장 고구려 정벌을 명하고 30만 대군을 편성했다. 다섯째 아들 양량과 왕세적을 행군원수로 임명하고 주라후를 수군총관으로 삼아 즉각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수문제는 이참에 중국 중심의 일원화된 국제 질서를 공고히 할 속셈이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고 했다. 수나라의 ‘천하질서’에 도전하는 고구려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작심했을 것이다.

그해 6월 수나라 30만 대군이 출정했다. 하지만 이 원정은 고구려 땅을 밟기도 전에 실패로 끝났다. 수나라 육군은 영주총관부 치소 유성에 집결하고 일부는 요하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때 장마와 홍수가 발생하는 바람에 보급로가 끊기고 군량 수송이 막혔다. 굶주린 군사들은 영양 부족과 면역력 저하에 시달렸고, 이는 밀집된 군대 환경에서 전염병 창궐로 이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군(水軍) 함대도 평양으로 향하다가 태풍을 만났다. 결국 원정군은 병력 대부분을 잃고 회군해야 했다.

수문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고구려 정도는 장군 한 명만 보내도 평정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건만 싸워보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실패한 것이다. 체면치레는 고구려가 해줬다.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사죄하고 신하로서 예를 다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짐짓 고개를 숙임으로써 황제에게 전쟁을 그만 둘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큰 낭패를 본 수문제는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598년의 실패는 수나라에 교훈을 남겼다. 천재지변이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장거리 보급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고구려를 정벌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598년부터 한동안 고구려와 수나라는 표면적으로 우호 관계를 이어갔다. 수나라는 603년까지 서돌궐과 전쟁을 벌여야 했기에 고구려를 적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북에서 전쟁이 얼추 마무리되자 수나라는 다시 동북으로 눈길을 돌렸다. 요서에 군사기지를 잇달아 설치했는데, 특히 동부 지역에 둔 회원진과 노하진은 최전방 보급기지의 성격이 짙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염두에 둔 치밀한 안배였다.

돌궐 가한의 게르에서 벌어진 일


▎지도로 보는 고구려-수나라 전쟁(598~614년). / 사진:7차 교육과정 중학교 국사
수문제에 이어 604년에 즉위한 수양제는 대외정책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한(漢)무제처럼 위대한 황제가 되겠다는 포부를 품고 사이경략(四夷經略)에 착수했다. 605년에는 임읍(林邑,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 수도를 점령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607년엔 친히 50만 대군을 거느리고 북변 순행에 나섰다. 서돌궐을 무력으로 위협하고 동돌궐에 황제의 위엄을 세웠다. 이듬해는 몸소 토욕혼 정벌에 나서 가한(可汗, 수장)의 군대를 깨뜨리고 서역 여러 나라의 군주들을 소집해 종주권을 확립했다.

이로써 수나라는 강역을 크게 확장하고 실크로드 교역권까지 장악했다. 북변과 서역과 남만을 평정했으니 이제 사이(四夷) 가운데 동방만 남았다. 수양제는 눈엣가시와 같은 고구려를 복속시킴으로써 수나라 중심의 천하질서를 완성하고 천자의 권위를 만방에 떨칠 생각이었다. 이러한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기도 했다.

607년 북변 순행 중에 벌어진 일이다. 수양제가 동돌궐의 계민(啓民) 가한을 방문했는데, 마침 고구려 사신이 가한의 게르에 머물고 있었다. 계민 가한은 일찍이 수나라 공주와 혼인해 황제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구려 영양왕은 사신을 파견해 교섭을 시도했다. 동돌궐은 수나라의 동맹국이지만, 고구려의 교역 상대이기도 했다. 고구려는 계민가한에게 실리를 취하는 대신 수나라를 견제하는 방안을 제시했을 것이다. 몰려드는 전운(戰雲)을 직시하고 발 빠르게 사전 포석에 나섰다는 뜻이다.

[수서] 돌궐전은 이 교섭을 ‘사통(私通)’이라고 표현했다. 수나라는 고구려와 동돌궐의 ‘밀회’를 눈치챘을 가능성이 높다. 수양제가 들이닥치자 계민가한은 충성심을 보여주려고 고구려 사신을 황제에게 데려갔다. 이 자리에서 수나라 황문시랑 배구가 고구려 국왕의 입조(入朝)를 주장했다. 수양제는 칙서를 내려 고구려에 다음과 같이 통첩했다.

“짐이 내년에 탁군(涿郡, 베이징 근처)으로 나아 갈 것이니, 그대는 왕에게 이른 시일 내에 와서 조알(朝謁)하라고 전하라. 입조한다면 계민과 같이 살피고 길러주겠지만, 안 그러면 계민을 거느리고 고구려 땅을 돌아볼 것이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18년)

수양제, 113만 대군을 일으키다


▎중국 랴오닝성 판진시에서 바라본 랴오허강(요하)의 갈대밭. 요서와 요동의 경계를 이루는 강이다. 수양제의 백만 대군은 부교를 제작해 강을 건너려다 고구려군의 결사 항전에 고역을 치렀다. / 사진:위키백과
고구려는 수양제의 입조 요구를 거부했다. 동서남북의 모든 나라와 종족이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렸지만, 고구려만은 굽히지 않은 것이다. 수나라는 착실하게 전쟁을 준비했다. 배구는 [고려풍속(高麗風俗)]을 저술하며 고구려의 지리정보 등을 수집했다. 대외정책통으로서 전쟁을 위한 기초자료를 만든 것이다. 수양제는 황하, 회수, 장강을 잇는 대운하를 정비하고 수도 낙양과 집결지 탁군을 연결하는 영제거(永濟渠)를 완공해 남북대운하를 완성했다. 수문제 때의 실패를 거울 삼아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인프라를 구축한 것이다.

611년 2월 수양제는 조서를 내려 고구려 정벌을 선포했다. 4월에는 황제가 탁군의 임삭궁에 이르고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여들었다. 병력과 선박, 군량과 물자의 징발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결을 완료하자 612년 1월 황제가 조서로 출정을 명했다. 좌 12군, 우 12군, 친위 6군 등 30여 개 군단에 113만3800명의 병력이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전무후무한 규모요, 성대한 출정이었다.

수양제는 각 군단에 지휘관과 함께 수항사자(受降使者)를 배치했다. 고구려군의 항복을 받고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위무하는 관리였다. 수양제는 친히 백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가면 고구려군이 잇달아 투항하고 평양성의 왕도 결국 백기를 들 것이라고 보았다. 전쟁의 양상을 낙관하면서 승리의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려 한 것이다. 수항사자는 또 황명에 따라 지휘관을 감찰하는 임무도 맡았다. 수양제는 모든 전투 상황을 보고받고 자기 지시를 따르도록 했다. 백만 대군을 직접 통제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천자의 권위라고 여겼다.

그러나 전황은 황제의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고구려군은 항복은커녕 요서와 요동의 경계인 요하부터 결사적으로 지켰다. 3월 15일 요하에 이른 수군(隋軍)은 부교(浮橋)를 제작해 건너편에 대려고 했으나 다리 길이가 조금 짧았다. 어쩔 수 없이 강물에 뛰어든 수군을, 고구려 궁수부대가 화살 세례를 퍼부어 섬멸했다.

원정 첫 전투부터 매운맛을 톡톡히 본 수양제는 더 긴 부교를 만들게 해 도하(渡河)를 밀어붙였다. 고구려군은 요하 동안(東岸)을 끝까지 사수하다가 중과부적으로 1만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 큰 손실을 입었지만, 성과 또한 적지 않았다. 수군을 요하에 한 달이나 묶은 덕분에 후방에서 성곽전을 빈틈없이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촘촘하게 배치된 성(城)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강력한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수군은 군사를 나눠 여러 성을 공격했는데, 고구려군이 잘 지켜 함락되지 않았다. 고구려 사람들은 주몽의 후예답게 궁술이 뛰어났다. 화살이 빗발치는 성곽전에 능숙했다. 우수한 쇠뇌(다연발 기계식 활)를 개발하는 등 대비도 철저히 했다. 특히 전략 요충지인 요동성은 수군이 4월부터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지만, 난공불락이었다.

수군의 결정적인 패착은 지휘체계에 있었다. 수양제는 전황을 일일이 보고받고 지시를 내려야 직성이 풀렸다. 황제가 요동성에서 떨어진 임해돈에 머물렀기에 보고·지시가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한번은 요동성이 함락되려고 하자 성안 사람들이 항복을 청했는데, 수군 지휘관이 황제의 명을 받드는 사이에 고구려군이 전열을 재정비해 성을 지켜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수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을지문덕, 유능한 신흥 귀족의 등장


▎무용총 수렵도. 말 달리면서 뒤로 화살을 쏘아 사슴을 맞힌다. 고구려인은 수렵을 통해 기사술(騎射術)을 연마했다. 주몽의 후예답게 활 솜씨가 뛰어나 성곽전에도 능했다. / 사진:우리역사넷
장거리 원정군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진다. 긴 보급선으로 인해 군량과 물자를 수송하기 어렵다. 113만 대군이니 고충과 부담은 훨씬 커진다. 고구려군의 성곽전에 가로막혀 진군이 지체되자 수양제는 요동성 부근에 육합성(六合城, 황제의 임시 행궁)을 세우고 장졸들을 독려했다. 그래도 뚫리지 않자 지휘관과 참모들을 모아 질책하고 비책을 강구했다.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이 별동대를 조직해 고구려 성들을 우회하고 영양왕이 있는 평양성을 치자는 책략을 내놓았다. 수군(水軍)도 패수(浿水, 대동강)로 들어가 별동대의 군량을 보급하며 고구려의 도읍을 함께 공략하기로 했다. 612년 6월 9개 군단으로 이뤄진 수나라 별동대가 압록강 서편에 이르렀다. 별동대라지만, 30만5000명의 대규모 병력이었다.

이때 고구려의 군사와 외교를 총괄하는 인물이 역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이었다. 중국 사서 [자치통감]에서는 그를 ‘대신(大臣)’이라 칭하였고, [통전(通典)]에선 ‘국상(國相)’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을지문덕의 세계(世系), 곧 세력이나 계보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를 6세기 후반에 나타난 신흥 귀족으로 보기도 한다. ‘을지(乙支)’가 성(姓)이 아니라 고구려의 중위 관등 ‘오졸’ 또는 ‘웃치’의 음차라는 견해도 있다. 이 관등은 국왕 직속이며 왕명 출납, 국가 기밀, 군사 징발 등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온달전도 평원왕과 영양왕 대에 등장한 신흥 귀족을 상징적으로 담아냈다. 그들은 신분을 뛰어넘어 능력으로 출세한 친왕 세력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을지문덕은 온달의 뒤를 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국왕의 신임을 받고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사신으로 적진을 정탐하고, 시인이 돼 적장을 농락하며, 책사로 위계를 펼치고, 장수로서 전투를 지휘하여 마침내 역사적인 승리를 이룩했다. (다음 회에 계속)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 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모함의 나라](2022),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등을 썼다.

202404호 (2024.03.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