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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15)] 조선시대에 소고기 요리가 발달했던 이유 

농사에 꼭 필요했던 소… 잔칫상에 늘 있던 소고기 

소를 잡아 판매하는 권한 성균관 노비에 주고 무단 도살 금지
‘백정’과 공식 소고기 판매업소 ‘현방’ 외에도 불법 사례 만연


▎농사에 필수적인 소는 조선 500년 동안 3만 마리에서 110만 마리로 그 수가 크게 증가했다. 그림은 19세기 후반 양기훈의 [뇌경].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1인당 연간 육류 소비량은 62.3㎏이다. 소, 돼지, 닭, 오리 고기 물량을 합한 것으로, 이 중 소고기 소비량이 14.8㎏, 돼지고기는 30.1㎏이다. 반면 쌀, 보리, 밀 등 전체 곡물 소비량은 64.6㎏이었다. 이 중 쌀이 56.4㎏이라고 하니 이제 한국은 육류와 양곡 섭취량이 비슷한 나라가 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1980년 쌀 소비량은 132.4㎏, 육류 소비량은 11.3㎏이었다. 40여 년 동안 육류 소비는 5배 이상 증가한 반면, 쌀 소비는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소고기 소비량만 봐도 1980년 1인당 2.6㎏에서 지난해 14.8㎏으로 5배 이상 증가했다.

현재 한국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육류는 돼지고기다. 삼겹살이나 돼지갈비를 파는 음식점이 수없이 많다. 야외의 바비큐나 가정에서 먹는 고기 중에서도 돼지고기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다. 이토록 돼지고기를 많이 소비하지만, 육류 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것은 역시 소고기다. 예로부터 손님을 대접하거나 잔치를 벌일 때, 그리고 제사상에는 소고기가 빠질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1인당 소고기 소비량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돼지고기보다 소고기를 더 많이 먹은 것이 분명하다. 소는 농사에 꼭 필요했던 만큼, 전국에서 기르는 숫자가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반면 돼지는 순전히 고기를 얻기 위해 기르는 것인 만큼, 많지 않았다. 지금은 소고기가 돼지고기보다 훨씬 비싸기 때문에 돼지고기 소비량이 많지만, 조선시대에는 소가 돼지보다 훨씬 많았으므로 소고기를 더 많이 먹었다는 얘기다.

다만 농업국가인 조선에서는 농사에 필요한 소를 함부로 도살해 식용으로 사용하는 것을 엄격히 통제했다. 아무나 자유롭게 소를 잡아 고기를 판매할 수는 없었다. 국가는 농사짓는 데 필요한 소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됐지만, 한편으로는 국가나 개인이 지내는 제사에는 소고기를 써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고기는 맛있는 음식의 재료였으므로, 당연히 소고기 수요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 국가에서는 공식적으로 소를 잡아 판매할 수 있는 권한을 성균관 노비들에게 줬다. 이들 외에는 소를 팔 수 없었지만, 이익이 나는 곳에는 반드시 불법 사례가 생기기 마련이다. 허가받지 않은 도축업자와 소고기 판매점이 많이 생겨났다.

성균관 부근에 백정 많이 모여 살아

소나 돼지 같은 짐승을 잡는 사람을 일컫는 ‘백정’이라는 단어는 요즈음에는 별로 쓰이지 않는다. 과거 백정은 ‘백장’이라고 발음했다. 이제 백정이나 백장이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아 사전에나 남아 있는 단어가 됐다. 근래에 백정이라는 말이 단독으로 쓰이기보다는 주로 잔인한 살인자에게 붙여져 ‘인간백정’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말이나 행동이 막된 사람을 일컫는 ‘개백장(개백정)’이라는 단어도 어쩌다 쓰인다.

그런데 백정이라는 단어는 이제 곧 사어(死語)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을 쓰면서 개백장이라는 단어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재미있는 것을 봤다. 필자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으로 개백장을 이해하고 있었다. 어떤 사이트에 올려놓은 개백장 이미지는 올가미를 들고 개를 잡으려는 그림들이었다. 국어사전에 개백장의 뜻이 ‘개를 잡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라고 하니, 개를 도살하는 사람이 아닌 개를 올가미 같은 것으로 잡아가는 사람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개백장을 이런 뜻으로 이해하게 되면 조만간 원래 뜻이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헌법 제15조에서는 ‘모든 국민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진다’고 해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각자 신분에 따라 정해진 일이 있었고, 이를 위반할 수 없었다. 특히 힘들고 천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은 대대로 그 직업을 계속해야만 했다. 짐승을 도축하는 일이 직업인 백정도 마찬가지였다. 백정들은 함께 모여 살면서 대대로 이 일을 계속했다.

19세기 중반 서울에서 백정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은 성균관 부근이었다. 1916년 3월 19일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혜화문 안쪽으로 백정들이 모여 살았고,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천시를 받아서 교제나 혼인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이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1910년 그 동네 한가운데에 ‘사립숭정학교’를 기와집으로 만들었는데, 이 학교가 혜화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수많은 백정이 있었지만, 이들은 하층의 천대받는 존재였다. 이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다. 19세기 백정에 관한 자료는 대부분 세금 문제나 범죄와 연관된 기록에서나 확인해볼 수 있다. 고종 9년(1872) 경상도 영천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백정 사이에 일어난 일인데, 이 사건 기록을 통해 백정의 실태를 보기로 한다.

경상도 영천군 내동면 교촌동에 사는 백정 정대가 도장동에 사는 백정 말종을 2월 6일에 구타해 8일 정대가 죽은 사건이다. 교촌동과 도장동은 붙어 있는 동네이므로, 같은 동네에서 사는 사람 사이에 일어난 살인사건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영천에 사는 백정들이 관청에 납부하는 말가죽과 개가죽에 관련된 문제였다. 정대가 말종에게 기준보다 더 많이 부담을 지라고 해 말종이 정대를 꾸짖은 일이 있었다. 그러자 정대가 자신의 조카 선록, 함춘과 함께 말종을 다른 백정 집으로 끌고 가 구타했다. 말종은 쓰러져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다가 사흘 후 죽었다. 말종의 부인 월절과 아들 춘억이 관청에 고발해 정대는 감옥에 갇히게 됐다. 정대는 자신이 말종을 구타한 일이 없고, 말종이 모욕을 당했다며 비상을 먹고 자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주장을 옹호하는 여러 증인의 증언이 있었다.

신분 해방에도 차별과 멸시 지속


▎조선시대에는 짐승을 잡는 수많은 백정이 있었지만, 하층의 천대받는 존재였다. 사진은 경북 안동시 풍천면의 ‘백정탈’.
우선 정대의 조카로 정대와 함께 말종을 구타한 선록이다. 선록은 말종이 정당한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하면서 정대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기에 자신이 말종에게 욕을 했는데, 아저씨인 정대가 자기 뺨을 때리며 참견하지 말라고 했다며 정대를 옹호했다. 그리고 말종이 비상을 먹었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고 증언했다.

선록의 증언과 거의 비슷한 내용의 증언을 한 증인으로는 정대의 육촌 동생인 한돌과 칠손이 있다. 이들은 모두 백정으로, 말종의 조카딸 회열에게서 말종이 비상을 먹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또 정대의 이웃인 백정의 아내 정심과 매이도 회열에게서 말종이 비상을 먹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 아니라, 말종이 비상을 먹고 괴로워하는 것을 직접 봤다고 증언했다.

반면 회열은 자신은 숙부가 비상을 먹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대가 조카들과 함께 말종을 구타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백정 어출은 정대와 오촌이고, 말종과는 외오촌인데, 자신은 직접 싸우는 것은 보지 못했고, 말종이 비상을 먹었다는 말은 정대에게 들었다고 했다. 정대와 선록을 말종의 아내와 아들과 대질시켰는데, 서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백정 이외에 증언한 사람으로는 도장동 동네 일을 맡아보는 한량 구삼한과 교촌동 동네 일을 봤던 양인 조팔복이 있는데, 구삼한은 정대와 말종이 싸운 내용을 자세히 모른다고 했고, 조팔복은 백정 마을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는 정도로 말했다.

이 사건을 처음 조사한 영천 군수와 경산 현령은 시체를 검사한 소견과 함께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시체 목에 은비녀를 넣었을 때 색이 변하지 않았으므로, 말종이 비상을 먹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정대 등이 구타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검시 결과 사인이 폭행에 의한 것이 분명하다. 또 “저 정대는 풍요롭게 살고 무리가 많았으며, 불쌍한 이 말종은 가난하고 외로운 혈혈단신이었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이 정대를 위해 거짓 증언을 했다고 했다.

살인사건 보고서를 통해 백정에 대한 두 가지 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대부분 범죄 관련 기록에는 성과 이름을 함께 쓰는데, 이 자료에서 백정은 성이 없이 이름만 기재돼 있다는 점이다. 정대와 말종을 비롯한 백정 집안사람들은 성 없이 이름만 나타난다. 같은 기록에 들어 있는 군수와 현감은 말할 것도 없고 양인, 한량, 유학 등이 모두 성과 이름을 쓴 것과 비교하면 백정은 성 없이 이름만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정이 성을 쓸 수 없는 엄청난 차별을 당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영천군에는 ‘백정 마을’로 부를 정도의 상당히 큰 백정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에 이름이 나오는 백정 집안사람만 해도 숫자가 꽤 많은데, 이들 외에도 더 많은 사람이 이 집단 거주지에 살았다. 영천이라는 하나의 군에 이 정도의 백정마을이 있었으니, 전국에 백정 숫자가 상당히 많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지금부터 101년 전인 1923년 4월 25일 경상도 진주에서는 백정들이 신분 차별을 철폐하고 평등을 쟁취할 것을 주장하는 형평사가 창립됐다. 갑오개혁으로 백정의 신분 해방이 이뤄졌음에도 백정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계속됐으므로, 백정이 자신들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조직을 결성한 것이다. 형평사 창립은 백정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다.

“소 한 마리 잡는 데 500냥 줘야”


▎한해 농사 풍년을 기약하는 들놀이 광주 서구 ‘서창 만드리’ 재연 행사에서 김매기를 끝낸 소몰이꾼들이 소를 앞세우고 들을 걸어 나오고 있다.
소고기를 파는 가게를 부르는 명칭은 푸줏간, 고깃간, 육고간, 식육점, 정육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근래에는 정육점이라는 이름이 가장 널리 쓰인다. 요즈음 정육점에서는 국산 소고기나 돼지고기는 물론 미국산이나 호주산 소고기, 스페인산 돼지고기, 호주산 양고기 등을 파는데, 수입 육류가 국산 육류보다 저렴한 시대가 됐다.

19세기 조선 사람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소고기를 사서 먹었을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소고기를 어디에 가서 얼마나 사서 먹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참으로 보기 어렵다. 분명히 꽤 많은 양의 소고기를 먹었는데, 그 많은 양을 어디에서 어떻게 구해 소비했는지, 값은 얼마나 했는지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제사상에 소고기를 올리는 집이 많았고, 잔치에 쓰기 위해 소고기가 필요한 집도 꽤 됐다. 전국의 수많은 주막에서 손님에게 국밥을 팔기 위해서도 소고기가 있어야 했는데, 이 소고기를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도 거의 없다.

조선시대 음식 관련 기록에는 소고기로 만든 음식이 여러 가지 나온다. [춘향전]만 봐도 이도령이 춘향 집에 처음 갔을 때 차려온 안주상에 놓인 많은 음식 가운데 소고기로 만든 것만 여러 가지다. 갈비찜, 양지머리, 차돌박이, 염통산적, 양볶이, 신선로, 전골, 포육, 편포 등이 나온다. 이 중 소 염통으로 만든 산적이나 밥통으로 만든 양볶이가 맛있는 요리로 돼 있다. 포육이나 편포 같은 소고기 육포도 고급 안주였다.

제사를 지내거나 집에서 고기반찬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소고기가 필요한데, 소고기를 판매하는 구체적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을 찾기 어렵다. 이제까지 필자가 본 바로는 [계우사]라는 소설에 집주인이 하인에게 “급히 뛰어가서 꾸미고기를 사 오너라”라고 심부름을 시키는 대목 정도가 나올 뿐이다. ‘꾸미고기’는 ‘고기꾸미’를 말하는 것으로, 국이나 찌개에 넣는 고기를 뜻한다. 소설에 이런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면 19세기 중반 서울 고기를 파는 가게에서 소량의 고기도 살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자료를 소개한다. 19세기 말 경기도 광주에 살던 지규식이라는 인물이 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저녁 무렵 이원유가 들어와서 돼지 한 마리를 잡아먹자고 말하여, 즉시 백정을 불러 돼지를 잡아 삶아서 바로 한 상을 다 먹었다.”(1892년)

“사기그릇 굽는 곳에서 소를 잡으려고 하여 소 한 마리를 500냥에 값을 정하고 왔다. 200냥은 먼저 주고 나머지는 오는 장날에 모두 주기로 기한을 정했다. 백정이 외부에 나가서 밤이 깊은 뒤에 비로소 잡았다.”(1894년)

이 기록을 보면 소나 돼지를 산 채로 사서 백정을 불러 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 일기에는 소고기를 샀다는 기록도 몇 군데 보이는데, 소고기를 파는 가게는 소를 도축하는 곳과 같은 곳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경기도 광주에 소고기를 판매하는 가게가 여러 군데 있었다는 내용도 있다.

국가에서 허가한 소고기 판매업소 ‘현방’

19세기 중반 서울에는 국가에서 허가한 소고기 판매업소가 있었는데, 이를 현방(懸房)이라고 했다. 소고기를 매달아 놓고 판매하기 때문에 ‘매달다’라는 한자 ‘懸’을 붙인 것이다. 현방이 처음 생긴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 현종 때부터 기록이 보인다. 처음에는 40곳 넘는 현방이 있었지만, 19세기 중반에는 스물세군데로 줄었다.

서울에는 현방 외에도 사사로이 소를 잡아 판매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지방에는 각 고을에 한 곳의 푸줏간을 설치할 수 있게 했지만, 지방에도 공식적으로 허가받은 푸줏간이 아닌 사사로이 소를 잡는 사람들이 있었다. 철종 9년(1858) 5월 20일 승정원일기를 보면 영의정 김좌근은 “지방에는 각 고을에 한 군데의 푸줏간만을 허가하고 그 이외에 법을 어기는 자는 철저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철종에게 진언했다. 철종은 이에 동의하고 각 고을에 한 개 이상의 푸줏간이 있는 것은 모두 없애라고 명령했다.

고종 11년(1874)에도 이런 논의가 반복돼 서울 23곳의 현방 외에 사사로이 소를 잡는 것을 엄하게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런 명령이 계속된다는 것은 사사로이 도축하는 일이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더 이상 막을 길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884년 11월 전주의 전라감영을 방문한 미국 외교관 조리 클레이튼 포크는 전라감영에서 대접하는 밥상의 그림을 그리고, 밥과 반찬 등 열일곱 가지 음식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콩밥, 소고기뭇국, 닭구이, 돼지고기구이, 소고기 편육, 김치, 깍두기, 소고기 육전, 콩나물무침, 조개젓과 굴젓, 오리탕, 꿩탕, 불고기, 수란, 생선 젓갈, 간장, 초간장.”

이들 음식 중 김치, 깍두기, 조개젓, 생선 젓갈, 간장, 초간장 등은 밑반찬이다. 이를 뺀 열한 가지 중 소고기뭇국, 소고기 편육, 소고기 육전, 불고기 등 네 개가 소고기를 재료로 한 음식이다. 그리고 닭고기, 돼지고기, 오리고기, 꿩고기 요리가 한 가지씩이다. 육류가 여덟 가지고, 밥 외에 콩나물과 계란 반찬이 한 가지씩이다. 이것만 봐도 한국인이 육류를 좋아했고, 특히 소고기를 좋아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소고기를 재료로 한 요리도 풍성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405호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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