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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98)] 선조의 심학(心學) ‘과외교사’ 동강(東岡) 김우옹 

임금 마음 바로잡는 일이 나라 바로잡는 출발 

조식의 남명학파이자 이황의 퇴계학파, 경연에서 40여 차례 선조에 강의
“당파 활동 하지 않고 중립적 입장”… 류성룡 파직 반대하며 홀로 상소하기도


▎청천서원 강당 앞에 선 동강 김우옹의 후손 김영(오른쪽)과 한강 정구의 후손 정재엽 씨. / 사진:송의호
봄을 따라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2길 청천서원(晴川書院)을 찾았다. 서원 문루인 수정문(守正門)에서 김영 관리인을 만나 동재(東齋)인 소원재(素源齋)로 들어갔다. 동재는 다례 교육과 접빈 등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관광 두레 사업으로 서원에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차를 마신 뒤 경내를 둘러보았다. 먼저 서원의 맨 위쪽 대나무가 감싼 숭덕사(崇德祠)로 올라갔다. 주벽에 ‘문정공동강김선생(文貞公東岡金先生)’이란 위패가 모셔져 있다. 청천서원은 동강 김우옹(金宇顒, 1540~1603) 선생의 존현 공간이다. 좌우로 서계 김담수와 용담 박이장이 종향돼 있다. 사우를 나와 앞 건물 일중당(一中堂)에 올랐다. 서원 강당이다. 처마에 청천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동강의 후손인 관리인이 편액의 내력을 설명한다. “백범 김구 선생이 글씨를 썼습니다. 동강의 종손이던 심산(김창숙)이 서원 복원을 생각하면서 함께 독립운동한 백범의 휘호를 받아둔 것이지요.”

청천서원은 1729년(영조 5) 창건됐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 15년이 지나 지역 유림이 복원을 주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문중은 대신 청천서당을 건립해 채례(菜禮)로 추모를 이어오다 유림과 후손이 나서 1992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정병호 경북대 교수는 [성주 동강 김우옹 종가]에서 “청천서원은 동강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심신을 수양한 동강정사가 중건됐다가 1955년 화재로 소실된 터에 들어섰다”고 정리한다. 서원 강당 앞뜰에 만국기가 걸려 있다. 얼마 전 문중 회의를 하느라 만국기가 내걸렸다고 한다.

일중당 앞은 동재와 서재. 서재의 한 기둥에는 ‘사단법인 동강·심산기념사업회’ 간판이 걸려 있다. 동재 오른쪽에는 ‘경정각(經正閣)’이라 이름한 장판각이 있었다. 보관된 목판을 직접 보고 싶었다. 관리인이 열쇠 꾸러미를 들고 와 이중 안전장치 출입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내부에 목판이 빼곡하게 정리돼 있다. 동강의 학자적 내공이 온축된 [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 판목이다.

함경도 유배 3년 동안 '속자치통감' 저술


동강은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에 연루돼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된다. 그는 힘든 유배 3년을 [속자치통감] 저술에 매달리며 이겨냈다. 36권 20책으로 집필이 마무리된 것은 1595년. 내용은 송나라 태조가 즉위한 960년부터 원나라 순제를 거쳐 명나라 태조가 왕위에 오른 1368년까지 408년간 중국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것이다. 특히 이 저술은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의 체제와 필법을 이어받아 동강의 춘추 의리 정신이 반영돼 있다. 이 역작은 오랜 기간 초고 상태로 전해왔다. “이후 정조가 세손 시절 그 내용을 접하고 식견에 감탄했다고 합니다.”

1771년 영조는 마침내 내각활자로 책을 처음 출간한다. 이어 순조는 1808년 사림에 목판본 판각을 지시했다. 청천서원에 판각이 전하는 내력이다. 경정각 안내판에는 “[속자치통감]이 조선 시대 주자학 연구의 심화와 함께 대의명분과 정통론을 강조하는 사림의 역사의식이 잘 반영된 서적”이라고 적혀 있다.

동강 김우옹은 조선 선조 시기 활동한 성리학자이자 문신이다. 김우옹은 아버지 김희삼이 남명 조식과 가까운 사이여서 남명의 외손녀 상산 김씨와 혼인했다. 그 인연으로 남명 문하에서 공부했다. 김우옹은 이후 퇴계 이황 문하에서도 수학한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동강은 성주 천곡서원에 신위를 모시고 곡했으며 1573년 ‘퇴계 선생의 시호를 청하는 차자’를 올리기도 했다. 그래서 김우옹은 학문적으로 남명학파이면서 퇴계학파로 분류된다.

그는 류성룡과 친분이 두터웠지만 당파 활동은 하지 않아 이산해·이이 등 정치적·학문적으로 반대편에 서 있던 이들과도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김우옹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누구를 미워하거나 견제하지 않고 대체로 중립적 입장을 견지했음에도 기축옥사가 닥쳤을 땐 정철과 서인의 모함으로 유배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김우옹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었다. 그는 회령 유배 중 임진왜란이 나자 사면돼 의주 행재소로가 선조를 호종한다. 승문원 제조를 거쳐 병조참판 직책이었다. 그러면서 명나라 원황의 접반사가 되고 경략 송응창을 위한 문위사 등을 맡았으며 장수 이여송에게 어찰을 전하기도 했다. 김우옹은 이후 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는 등 국난 극복에 기여했다.

류성룡이 모함당하자 상소하며 억울함 호소


▎청천서원 경정각에 보관된 [속자치통감강목]의 목판. 모두 673판이다. / 사진:송의호
또 전쟁 중 이산해가 이끄는 북인이 이른바 정응태 무고 사건으로 류성룡을 모함할 때 홀로 상소하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는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가 본국으로 돌아가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을 모함하고 비방하는 글을 올린 사건이었다. 조선이 왜와 손잡고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치려 한다는 거짓 내용이었다. 명나라 황제는 격노했고 선조는 사신을 보내 해명하기로 했다. 북인은 류성룡이 가서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류성룡은 그러면 더 의심받는다며 가지 않았다. 그러자 북인은 가지 않은 것을 트집 잡아 류성룡의 파직을 요구했다. 북인의 공격은 집요했다. 1599년 류성룡은 결국 삭탈관작이 되고 김우옹도 사직을 청해 물러난 뒤 인천에 소요정을 짓고 은거했다.

김우옹은 동향의 한강 정구와 교유가 깊었다. 둘 다 성주에서 태어나 성주 교수 오건에게 배웠다. 이후 김우옹은 처외할아버지 남명을 찾아 수학하고 정구는 퇴계를 찾아가 공부했다. 그러다가 김우옹이 다시 퇴계를 찾아가자 정구는 남명의 문하에서 수학한다. 뒷날 김우옹은 관직에 있으면서 널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해 1574년 정구를 천거해 그를 벼슬길로 이끌기도 했다. 1595년에는 곽재우 등 33인을 천거한다.

김우옹이 남명을 찾아간 것은 1563년. 그는 24세에 상산 김씨와 혼인하고 그해 겨울 남명을 찾아가 배웠다. 남명은 김우옹의 첫인사를 받고 ‘雷天(뇌천)’ 두 글자를 써주며 대장부의 의리를 강조했다. 또 자신이 차고 있던 성성자(惺惺子) 쇠방울을 풀어 그에게 건넨다. 성성자는 남명이 경의검과 함께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것이었다. 성성자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 막아 깨어 있는 마음을 유지하는 내면적 수신인 경(敬)을 위한 도구였다. 김우옹을 비롯한 오건과 최영경·정인홍·김면 등은 남명에게서 배우며 이른바 남명학파를 이룬다. 그중 정인홍과 김면 등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큰 공을 세웠다.

김우옹은 스승 남명의 분부로 1566년(명종 21) [천군전(天君傳)]을 짓는다. ‘동강선생연보’에는 “남명 선생이 일찍이 ‘신명사도(神明舍圖)’를 찬하고 동강 선생에게 명하여 전(傳)을 짓게 했다”고 정리돼 있다. 말하자면 남명의 성리학적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지어진 작품이 [천군전]이다. 그의 나이 27세로 과거시험을 보기 전이다. [천군전]은 심성(心性)을 의인화한 소설이다. 천군소설의 효시로도 불린다. 천군소설은 마음, 즉 천군이 주요 인물로 등장해 그 아래 사단칠정이란 많은 신하를 거느리고 온몸에서 일어나는 심통성정(心統性情) 사건을 관장한다는 구성이다.

김우옹의 [천군전]은 사람을 유인국(有人國)에 비유한다. 심(心)은 일신(一身)을, 경은 일심(一心)을 주재한다. 여기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경(敬)은 태제(太帝)이고, 바깥을 다스리는 의(義)는 백규(百揆, 백관)다. 또 어진 마음의 양(良), 마음의 안정을 뜻하는 지(志), 마음의 혼란을 몰아내는 대장군 극기(克己), 굳센 마음의 장군 강(剛)이 등장한다. 사람의 심성을 어지럽히는 간신들도 등장한다. 게으른 마음의 해(懈)와 오만한 마음의 오(敖), 혼란을 부채질하는 화독(華督) 등이 나온다. 이렇게 [천군전]은 경과 의로 마음을 수양하여 성인의 길에 이르는 방법을 담고 있다. 남명은 자신의 경과 의를 [천군전] 저술을 명하며 김우옹에게 전한 것이다.

심성(心性)을 의인화한 소설 '천군전' 지어


▎불천위(不遷位, 영원히 모시는 신주) 동강 김우옹의 신주가 모셔진 사당 동강구려. 동강의 13대 종손 심산 김창숙의 신주도 함께 있다. / 사진:송의호
김우옹은 1567년(명종 22) 문과에 병과 제1인으로 급제했다. 그는 승정원 권지부정자로 임명됐으나 지병인 풍담으로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건강이 관직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위중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부모 봉양을 급선무로 여긴 것이다. 김우옹은 성주 사도실에 동강정사를 짓고 은거의 뜻을 담아 호를 ‘동강(東岡, 동쪽 비탈)’이라 했다. 그는 모친 봉양에 정성을 쏟았지만 이듬해 어머니를 여읜다.

김우옹이 동강정사에 머문 시간은 소중했다. 동강은 여기서 심성을 기르며 수양하고 절차탁마하는 등 학문을 다질 수 있었다. 후학인 장석영은 이것을 바탕으로 동강은 “경연에 출입하며 성학(聖學)을 돕고, 관찰사로 나가 학교 흥기와 절의를 숭상했으며, 의주에서 임금을 호종하고, [속강목]을 편찬해 주자의 품평(品評)을 계승할 수 있었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제자로서 스승도 지켰다. 1571년 남명이 세상을 떠날 무렵 동강은 여러 달 병석을 떠나지 않고 임종했고, 사후 스승의 행장과 언행록을 지었다.

1573년 선조는 그를 홍문관 정자로 불렀다. 재주와 덕행이 있는 젊은 사람 가운데 선발하는 관직으로 경연관을 겸했다. 경연관은 임금에게 학문을 ‘과외’하고 치도를 강론한다. 동강은 그해 9월 사정전에서 경연에 처음 입시했다. 그는 시강관으로 추대되면서 2년 사이 23차에 걸쳐 진강하는 등 모두 40여 차례 경연에 참석했다. 동강은 경연에서 [서경]과 [춘추]를 주로 강론하며 군주의 마음공부를 강조했다.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일이 곧 나라를 바로잡는 출발로 봤기 때문이다.

1577년(선조 10) 동강은 수찬에 임명됐으나 당시 임금이 직간(直諫)을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자 낙향했다. 이듬해 그는 성주 수도산 아래 고반정사(考槃精舍)를 짓고 은거하며 나라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동강은 이후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홍문관 부제학, 전라도 관찰사, 형조참판, 안동부사 등 관직에 나가고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그는 61세에 성주를 찾아 선영을 둘러보고 청주 정좌산 아래로 이사했다. 1603년(선조 36) 동강은 대호군(大護軍)에 임명됐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정좌산으로 되돌아왔다. 그해 11월 그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13대 종손 심산은 성균관대 창건해 초대 총장


▎동강 김우옹의 13대 종손인 심산 김창숙이 태어나고 성장한 성주 사도실마을 ‘심산고택’. / 사진:송의호
성주 청천서원 수정문에 서자 건너편으로 칠봉산이 보였다. 청천서원을 내려오면 아래가 사도실이다. 마을 입구에 ‘동강구려(東岡舊廬)’가 보였다. 동강의 옛날 집이 남아 있는 걸까? 알고 보니 불천위문정공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불천위 오른쪽으로는 심산(김창숙) 등 현 종손의 4대 조상 신주가 차례로 놓여 있다. 그 왼쪽은 청천서원이 훼철된 뒤 채례를 올리고 심산이 신식 교육을 한 청천서당이자 성명학교 자리다. 건너편 종가는 심산의 생가로 ‘심산고택’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사도실 마을 뒤편 칠봉산 자락에는 심산문화테마파크 조성공사가 한창이다. 일대는 동강과 심산의 흔적이 여럿 남아 있었다. 동강은 조선의 교육기관을 대표하는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고 13대 종손인 심산은 다시 성균관대학교를 창건하고 초대 총장을 지냈다.

동강은 1588년(선조 21) 안동부사로 부임하면서 이후 7년간 일기를 남겼다. 심산은 조상의 유작인 그 일기를 낱낱이 개서(改書)했다. 동강의 마음 수양과 삶을 정리하고 정서한 것이다. 국사편찬위원을 지낸 고 허선도 교수는 “심산이 일제강점기 등 평생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며 독립운동으로 나라와 민족을 수호하고 유교 전통을 올바로 선양한 기개와 확신은 동강의 정신적 유산을 접하면서 길러졌을 것”이라고 봤다.

[박스기사] 율곡의 파면 의견에도 존중 잃지 않은 동강의 그릇

“착하나 시비가 분명치 못하다”는 혹평 듣고도 이해해

이조판서 율곡 이이는 선조 임금에게 ‘인심도심설’을 지어 올린다. 퇴계 이황의 학설과 충돌하자 퇴계학파는 거세게 비판했다. 퇴계는 “인심은 칠정(七情)이 되고 도심은 사단(四端)이 된다”고 정리했다. 그러나 율곡은 “사단이 도심인 것은 가능하지만 칠정은 인심과 도심을 합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논쟁은 급기야 조정으로 번졌다. 남명학파이자 퇴계학파인 김우옹은 상소로 맞섰다.

분란이 계속되자 선조는 이이를 불러 김우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그러자 이이는 “착한 사람이나 시비가 분명치 못하다”며 파면의 뜻을 내비쳤다. 이이는 김우옹보다 3년 연장(年長)이었다. 이이는 이듬해 세상을 떠난다. 이후 경연 자리에서 이이 이야기가 나왔다.

김우옹이 둘의 관계를 설명했다. “어떤 사람은 이이가 소신을 배척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과 이이는 서로 알고 지낸 지 오래고, 처음 그 사람됨을 보니 학식이 있고 성품이 평탄하며 막힌 곳이 없어 믿고 사귀었습니다. (…) 이이도 신과 교분이 깊었기에 의견은 달라도 오히려 수습하고자 했는데, 다만 신이 정철을 공격하자 비로소 신을 암매(暗昧)하다고 했을 뿐, 별 달리 배척한 일은 없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학설은 달랐어도 동인 김우옹은 서인 이이에 대해 존경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405호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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