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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16)] 법으로도 막기 힘든 과시 욕구 

사치품으로 여겨지던 비단… 수입 억제에도 버젓이 유통 

사치 줄인다는 명목으로 무늬 있는 비단 유입 막은 조선 조정
실제로는 외환보유고 정상화 목적이었지만 수입 유통 못 막아


▎조선시대 양반댁 혼례복인 활옷. 1993년 미국에서 되찾아온 뒤 처음 공개된 19세기 옷이다. 영조 때 궁중 여인들도 문단으로 지은 옷을 입지 못하게 했는데, 정조 11년 무렵에는 궁중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여인들도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었다. / 사진:경운박물관
필자가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던 1960년대의 군대는 지금과는 다른 면이 있어서 복무 기간 중 병역 의무에 포함되지 않은 일도 많이 했다. 지금 들으면 우스운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필자가 근무하던 부대에서는 누에를 키우는 일도 했다. 부대에 뽕나무밭이 많았고, 누에를 치는 시기에는 병사들이 군사 훈련보다 누에치기에 매우 힘을 썼다. 필자도 뽕나무에 거름 주는 일부터 시작해 새끼를 꼬아 누에 키우는 채반을 만들고, 뽕잎을 따 누에에게 먹이는 일까지 누에고치를 생산하는 전 과정을 모두 해봤다.

양잠산업과 관련된 과거 기록을 보니 필자가 군대에서 누에를 치던 시기는 제2차 잠업증산 5개년 계획을 실시하던 때였다. 정부가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생사를 중요 수출품으로 지정했기 때문에 양잠산업은 국가 기간산업의 하나였다. 1964년 국가 총 수출액이 1억 달러였을 때 생사 수출은 약 6%였고, 1970년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했을 때는 생사 수출액이 7500만 달러로 전체 수출액의 약 7.5%였다.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군인도 누에를 쳐 수출 역군으로 참여한 덕분에 1970년대 중반 무렵 우리나라 생사 생산량은 세계 3위였고, 이때 수출액은 3억 달러 가까운 수준이 됐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 한국 생사 수입을 줄인데다 중국의 값싼 생사가 일본에 들어가면서 한국 양잠산업은 사양 산업이 돼버렸다.

조선시대에도 일본에 생사를 수출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일본으로 수출한 생사는 조선에서 생산한 것이 아닌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조선 상인들은 중국에서 생사를 수입해 이를 일본에 되파는 중계무역을 통해 돈을 벌었다. 또 상인들은 중국과 일본에서 비단을 수입해 국내 비단 소비를 촉진시켰다. 그러나 조선시대 비단은 사치품에 속했으므로, 비단 수입이 사치를 조장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영조와 정조는 비단 수입을 통제하는 강력한 정책을 썼고, 그 이후에도 이 정책은 명목상으로는 유지됐다. 그러나 19세기 유행한 노래나 소설을 보면 국가에서 사용을 금지한 고급 비단이 버젓이 유통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요 무역 품목이던 생사와 비단


▎2010년 8월 농진청 양잠 시험장에서 노란 비단실을 뽑는 품종의 누에가 고치를 지은 모습으로, 흰 비단실로 지은 고치도 섞여 있다. 양잠산업은 과거 국가 기간산업이었다.
18세기 조선의 주요 해외 무역 대상국은 중국과 일본이었다. 중국과의 무역은 매년 몇 차례씩 북경에 가는 사신 일행에 무역상이 함께 가면서 이뤄졌다. 그리고 일본과의 무역은 동래 왜관에서 이뤄졌다. 양국과의 무역은 공식적인 것도 있고, 비공식적인 것도 있었으며, 심지어 불법적 밀무역도 있었다.

역사학자들 연구에 따르면 17세기에서 18세기 전반까지 조선이 중국과 일본 두 외국과 거래한 중요 품목이 생사와 비단이었다고 한다. 조선 상인들은 인삼을 일본에 팔아 그 대금을 은으로 받고, 중국에서 생사와 비단을 수입할 때 일본에서 받은 은으로 대금을 결제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들여온 생사와 비단을 다시 일본에 팔 때도 은으로 결제했다.

조선은 중국의 생사와 비단을 수입해 일본으로 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통해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이와 같은 중계무역이 가능했던 것은 청나라와 일본이 직접 교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초 일본과 중국이 직접 교역을 시작하면서 조선의 중계무역은 막을 내리게 되고, 조선 상인들은 이런 방식의 무역으로는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게 된다.

연암 박지원의 작품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은 원래 글만 읽던 선비였지만, 장사를 해 큰 돈을 버는 인물로 묘사돼 있다. 작품에서 주인공이 일본 나가사키로 가 조선에서 생산한 곡물을 팔아 은 100만 냥을 버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은 당시 외국과 교역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잘 알려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지원은 허생이라는 가공 인물을 통해 자신이 가진 생각을 드러낸 것인데,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방법으로 허생이 반복적으로 얘기하는 내용 중 하나가 무역이었다.

19세기 들어 많은 서양의 배가 와서 교역을 원했지만 조선은 이를 모두 거절했고, 조선의 무역은 여전히 중국과 일본에 국한돼 있었다. 게다가 조선 정부는 해외 정보를 얻는 데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매해 몇 차례씩 청나라에 사신들이 갔지만, 외국 정보를 얻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영조 22년(1746) 왕은 중국에서 문단(紋緞, 무늬가 있는 비단)의 수입을 통제하는 명령을 내렸다. 겉으로 내세운 명목은 사치를 줄인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문단을 사 오는 데 드는 은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즈음 개념으로 말하면 사치품의 수입으로 외환보유고가 너무 줄었기 때문에 수입을 통제한 것이다. 이 명령에 따르면 왕과 왕비의 예복, 벼슬아치의 제복, 고위층 부녀자의 예복, 군대의 깃발을 만들기 위한 것 외의 문단은 수입할 수 없었다.

문단을 수입하지 말라는 명령이 공식적으로 내려진 때는 영조 22년 11월 6일이었다. 이때는 수입하지 말라는 명령만 내렸지 문단을 수입한 사람에게 어떤 형벌을 내릴 지는 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12월 15일 명령을 어기고 중국에서 무늬 있는 비단을 사온 관리가 적발되자 영조는 신하들에게 어떤 형벌을 내리는 것이 옳은지 물었다.

신하들의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렸다. 하나는 금지하는 물건을 몰래 사 오는 것은 목을 벤다는 법률이 있으므로 사형을 시키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으로 법조문이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영조는 다수 의견에 따라 죽이지는 않고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처벌 수준을 낮췄다. 그리고 무늬 있는 비단을 몰래 사 온 사람을 처벌하는 법조문을 정해 통역관이나 무역상 중 문단 밀무역이 발각된 자는 먼저 목을 벤 후 보고하도록 했다.

이처럼 조선에서 엄격하게 문단 수입을 통제하자 중국 비단 상인들은 무늬가 없는 비단을 시장에 내놨고, 조선 상인들은 중국에서 무늬가 없는 비단을 사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조는 무늬가 없는 비단 수입도 금지했다. 그러나 영조의 중국 비단 수입 금지령은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때 이 문제가 다시 조정에서 논의되고, 임금은 무늬 있는 비단 수입을 재차 금지시켰다. 정조 11년(1787) 9월 29일 임금은 영조 때의 무늬 있는 비단 수입을 금지한 법이 해이해졌음을 지적하고, 자세한 규정을 책자로 만들어 배포하라고 명령했다. 이 같은 명령이 나오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영조 때는 궁중 여인들도 문단으로 지은 옷을 입지 못하게 했는데, 정조 11년 무렵에는 궁중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가정 여인들도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금지령에도 무늬 있는 비단옷 유행


▎비단 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왕후가 양잠의 본을 보이는 ‘친잠례’가 2002년 6월 경복궁에서 재현됐다. 왕후가 누에에 뽕잎을 뿌리는 의식인 양잠례를 거행하고 있다.
정조는 신하들과 이런 논의를 하면서 대궐 안에도 문단으로 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많다고 얘기하고, 신하들의 집안에도 반드시 문단으로 지은 옷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 후 무늬 있는 비단 수입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고, 이 명령을 책자로 만들어 배포하도록 한다.

정조 11년 10월 배포한 무늬 있는 비단 수입을 금지한 내용을 실은 명령의 명칭은 [금문사목(禁紋事目)]인데, 전체 12장으로 된 책자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책자는 세 부분으로 돼 있다. 첫째는 영조 때 문단 수입을 금지할 때 내린 명령의 내용이다. 둘째는 정조가 내린 명령이다. 셋째는 부록으로, 중국에 가지고 가거나 중국에서 수입할 수 없는 물건 항목과 이를 어겼을 때의 처벌 규정이다.

정조는 [금문사목]을 배포하면서 먼저 선왕인 영조의 명령을 실어 자신의 명령이 영조의 뜻을 잇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영조는 국가에서 필요한 것이 많은데, 비단 같은 사치품을 수입하느라 국가 돈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특히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을 흉내 내는 것이 심하므로, 윗사람들에게 무늬 있는 비단을 쓰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이 명령을 어기면 엄격한 처벌을 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영조의 명령은 세월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돼 혼례나 잔치 때 부녀자들이 무늬 있는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는 일이 일상이 됐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정조는 다시 문단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번 명령에는 자세한 규정을 붙여 놓았다. 그 핵심 내용은 왕과 왕비의 옷이나 가마에 쓰는 비단이나 문신과 무신의 예복에 쓰는 비단은 무늬가 있는 것을 쓸 수 있지만, 그 외에는 문단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정조는 무늬 있는 비단의 수입을 금지하는 강력한 명령을 내리면서 중국과 무역할 수 있는 물건 항목을 자세히 나열하고, 이 규정을 어겼을 때 내리는 형벌을 아울러 수록한 규정도 부록으로 함께 실어놨다. 이 규정의 명칭은 ‘사행재거사목(使行齎去事目)’인데,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이 물건을 가져가거나 가져오는 데 지켜야 할 규정’이라는 뜻이다. 그 중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비밀을 누설하면 볼기 백 대를 맞고 중노동 3년에 처하는데, 중대한 비밀을 누설했다면 사형에 처한다.

조선의 책을 몰래 가지고 가면 볼기 백 대에 삼천리 귀양을 보낸다.

인삼을 몰래 가져가면 사형에 처한다.

이단의 책을 들여오는 자는 중형에 처하고, 사신도 처벌을 받는다.

표범 가죽 같은 수입을 금지하는 물건을 들여오면 볼기 백 대에 중노동 3년인데, 보석이나 무기 같은 것을 들여오면 사형에 처한다.”

이상의 몇 가지 예에서 볼 수 있듯 조선 조정에서는 엄격하게 무역을 통제했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규정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불법 무역이 성행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시대부터 전해지는 속담에 ‘선전 시정 비단 감듯’이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춘향전]에도 나오는데, 변사또가 춘향을 마당으로 끌어내라고 나졸에게 분부하는 대목에서 나졸들이 “춘향의 머리채를 선전 시정 비단 감듯, 상전 시정 연줄 감듯” 감아쥐고 끌어내린다고 했다. 선전 시정 비단 감듯이란 말은 서울 비단 가게에서 비단을 감는다는 의미고, 상전 시정 연줄 감듯은 서울 잡화 파는 가게에서 연줄을 감는다는 뜻으로, 무엇을 잘 감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엄격한 규정에 되레 밀무역 성행


▎검정 비단에 노랑과 빨강색 꽃으로 장식한 꽃신.
비단 파는 상점인 선전(縇廛)은 입전(立廛)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이 개국한 후 서울에 상점가를 만들 때 가장 먼저 세운 것이 이 선전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러 업종 중 선전의 규모가 가장 커 세금도 가장 많이 냈고 가게 수도 많았다. 19세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를 보면 선전은 현재 서울 종로구 견지동의 우정총국을 복원해 놓은 곳 근처에 42개 점포가 있었고, 선전에서 취급하는 물품은 중국에서 수입한 비단이라고 했다.

영조와 정조가 무늬 있는 비단의 수입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지만, 19세기 들어서도 중국 비단을 판매하는 비단 가게는 여전히 성업 중임을 알 수 있다. [춘향전]에는 이도령이나 춘향이 입은 옷을 묘사하는 대목이 여러 군데 나오는데, 이런 대목 중에는 옷감도 구체적으로 얘기해 놓은 데가 몇군데 있다. 그 중 춘향이 입은 옷을 묘사한 대목 하나를 보기로 한다.

“중국산 모시로 지은 깨끼적삼, 초록색 갑사로 만든 곁마기에, 흰색 무늬를 넣은 항라 고쟁이, 분홍색 갑사 너른바지, 버들처럼 가는 허리에는 중국산 비단으로 만든 허리띠를 눌러 띠고, 용무늬를 넣은 갑사로 지은 분홍빛 치마를 잘게 주름을 잡아 떨쳐입고” 이 대목을 보면 춘향이 입은 옷 중 중국산 옷감으로 지은 것이 여러 가지 있고, 당시 엄격하게 금지하던 무늬 있는 비단으로 지은 것도 있다. 특히 일반인은 사용할 수 없는 용무늬를 넣은 비단으로 만든 치마도 있는 것으로 보면 19세기 중반에 문단 금지령은 이미 유명무실해진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조선의 비단 가게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앞에서 얘기한 선전이고, 또 하나는 면주전(綿紬廛)이다. 선전은 중국에서 들여온 비단을 파는 곳이고, 면주전은 국내에서 생산한 비단을 파는 상점이었다. 그런데 선전의 규모가 면주전보다 컸다.

유명무실해진 문단 금지령

조선시대 서울의 상점 가운데 정부 허가를 받아 운영하는 상점들은 나라에 일정한 액수의 세금을 냈다. 서울의 여러 상점이 국가에 바치는 세금 액수를 통해 그 업종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이들 정부에서 허가한 상점이 국가에 내는 세금 전체를 100이라고 하면 순조 8년(1808)에 선전이 부담하는 액수는 10%였고, 면주전이 내는 액수는 8%였다.

19세기 초 서울 종로 상점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상점은 수입한 비단을 파는 선전이고, 둘째는 목면을 판매하는 면포전이며, 셋째가 국내산 명주를 파는 면주전이다. 이렇게 큰 규모를 자랑하던 면주전이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장사를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몇 차례 대형 화재로 건물과 물건이 다 타버리는 일이 있었고, 중국은 물론 서양의 비단도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국내 비단 산업은 점점 위축되고 있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영조와 정조가 무늬 있는 비단 수입을 금지한 가장 큰 이유는 사치를 줄이고 검소함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필자는 이 정책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조선에서는 무늬 있는 비단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문단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던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문단 금지 정책이 무늬 있는 비단의 생산을 막은 것인지, 어느 쪽인지는 앞으로 이 방면의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필요가 있다.

무늬 있는 비단의 사용을 통제한 정책은 근본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왕실이나 관료들의 예복에 쓰는 무늬 있는 비단은 여전히 수입해 쓸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상위 계층 사람은 문단으로 지은 옷을 입을 수 있지만, 일반인은 입을 수 없는 불평등한 규정이었다. 그래서 대궐 안에는 무늬 있는 비단이 많이 있었다. 고종 6년(1869) 벌어진 절도 사건은 19세기 중반에 무늬 있는 비단을 일반인이 구할 수 있던 길 중의 하나를 보여준다.

고종 6년 10월 22일 대궐 안에서 잡일을 하는 군사 두 명이 여러 차례 궁녀의 방에 들어가 옷감이나 돈을 훔치다가 붙잡혔다.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여덟차례나 도둑질을 했는데, 이들이 훔친 것 중 무늬 있는 비단만 보면 금향색 무늬가 있는 비단, 초록색 벼무늬 있는 비단, 서양에서 들여온 무늬 있는 비단 치마, 복숭아나무와 석류나무 무늬의 비단 등이다. 도둑들은 이런 무늬 있는 비단을 선전의 상인들에게 팔았다고 자백했다. 이렇게 궁중에서 흘러나온 물건을 비단 가게에서 일반인에게 판 것이다. 조선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물밀 듯 들어오는 문물을 막을 길은 없었다. 무늬 있는 비단을 금지하는 명령 같은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시대가 돼버린 것이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406호 (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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