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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26)] 중국을 뒤흔든 을지문덕의 노래(下): 살수대첩의 재구성 

신채호가 전한 을지문덕의 감춰진 진실 

“을지문덕, 살수대첩 여세 몰아 수나라 정벌 주장”
귀족들은 영양왕 동생 고건무 앞세워 수나라와 화친


▎살수대첩 기록화. 고구려군이 살수를 건너 퇴각하는 수나라 별동대를 앞뒤에서 협공해 섬멸했다. / 사진:독립기념관
"살수의 거센 물결 푸른 하늘에 출렁대니(薩水湯湯漾碧虛) / 수나라 백만대군이 물고기 밥이 되었구나(隋兵百萬化爲魚) / 지금까지 어부와 나무꾼의 이야기 되어(至今留得漁樵話) / 정복자를 웃음거리에도 미치지 못하게 하네(不滿征夫一笑餘)”(조준, [송당집])

조선 개국공신 조준이 명나라 사신과 함께 평안도 안주의 백상루(百詳樓)에 올라 굽이치는 청천강(살수)을 접한 소회를 노래한 시다. 살수대첩을 이룩한 을지문덕의 공을 자랑하고 수양제의 헛된 정복욕을 비웃었다. 이 시에서 ‘정부’(征夫)는 물고기밥이 된 수나라 원정군이자, 무모한 정벌로 나라를 망친 수양제를 일컫는다. 중국사의 일대 치욕을 건드린 것이다. 명나라 사신은 낯을 붉히며 감히 화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수나라 9개 군단, 압록강 서편에 진 구축


▎평안남도 안주시의 백상루. 조선 개국공신 조준은 이곳에서 청천강을 굽어보며 살수대첩의 소회를 노래했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창업 초기에 조선은 명나라와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홍무제 주원장의 군사 위협에 맞서 정도전 등이 요동 정벌을 준비하면서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은 임금에게 무례하게 굴고 신하들을 윽박질렀을 것이다. 그런 사신의 기를 꺾기 위해 조준은 백상루에 올라 시담(詩談)을 나누었다. 살수대첩을 끄집어낸 것은 품격 높은 경고로 볼 수 있다. 수양제처럼 홍무제도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을지문덕은 어떻게 수나라 대군을 물고기 밥으로 만들었을까? 이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대부분 중국 사서를 인용했다. [자치통감], [수서] 등 여기저기서 뽑아 편집하다 보니 두서없고 흐름이 어색한 대목들도 눈에 띈다. 살수대첩을 전황에 맞게 재구성해 보면 어떨까. 을지문덕의 앞뒤 행적이 묘연한 까닭도 함께 살펴본다.

612년 6월 요동성 공략이 지체되자 수양제는 고구려성들을 우회해 평양성을 직공(直功)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부여도군, 낙랑도군 등 9개 군단이 별동대로 투입됐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30만5000명의 대병력이었다. 고구려는 성곽 중심의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국경과 도로를 따라 성들을 촘촘하게 배치하고 유기적으로 협력해 적의 침략을 물리쳤다. 평양성으로 가는 간선도로에는 오골성, 백마산성, 통주성, 철옹성, 안주성 등 큰 성들이 수두룩했다. 수군(隋軍)이 우회하더라도 후위를 습격당하거나, 협공에 걸려들 공산이 컸다. 이에 대비하려면 충분한 병력이 필요했다.

9개 군단은 압록강 서편에 집결해 진을 쳤다. 그런데 중대한 문제가 드러났다. 별동대 군사들은 요서 보급기지에서 100일분의 군량을 지급받았다. 여기에 무기와 갑옷, 기자재와 장막까지 더해 각자 3석 이상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한계가 온 병사들이 식량을 버렸다. 곡식을 버리는 자는 참(斬)하겠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군졸들은 밤중에 장막 밑에다 구덩이를 파서 몰래 묻었다.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는 군량이 거의 바닥나고 말았다.

군량은 전투의 승패와 직결되는 생명줄이다. 우익위대장군 우중문, 좌익위대장군 우문술 등 별동대 지휘부는 고심했을 것이다. 물론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양제는 별동대와 함께 수군(水軍)을 내보내 서로 협력하도록 했다. 수군은 중국 산동의 동래에서 출발해 발해만 묘도열도, 요동반도 남단,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패수(浿水, 대동강)로 향했다. 임무는 서해안 간선도로를 따라 남하할 별동대에 군량을 보급하고 평양성 공략 시 수륙 합동작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전장에서, 그것도 낯선 원정지에서 별동대와 수군의 협력이 성공할지는 미지수였다.

을지문덕의 유인책과 청야전술


▎20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작자 미상의 ‘평양성도’. 6세기에 쌓은 평양성(장안성)은 평지성과 산성을 합친 것으로 외성, 중성, 내성, 북성이 첩첩이 둘레 17.4㎞의 웅장한 도성을 이루고 있었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이때 을지문덕이 압록강을 건너 수나라 진영에 나타났다. 거짓으로 항복하는 척하면서 저들의 허실을 정탐하고자 한 것이다. 우중문이 사신을 맞이했다. 수양제는 계책에 능한 자라 해 그에게 별동대의 지휘권을 맡기면서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만약 고구려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오거든 반드시 붙잡으라고 한 것이다. 수양제는 둘 중 한 사람만 잡아도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보았다.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잡아두려고 했다. 이를 위무사(慰撫使) 류사룡이 만류했다. 위무사는 황명을 받들어 정무를 보는 관리였기에 장수들이 무시하지 못했다. 류사룡은 항복을 논의하러 온 사신을 붙잡는 건 대국의 품격과 황제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행위라고 논박했다. 장수가 말로 문관을 이기기는 힘들다. 우중문은 우물쭈물하다가 을지문덕을 놓아주었다.

이 소식을 듣고 우문술 등 다른 장수들이 반발했다. 우중문도 후회하며 정예부대를 보내 추격하려고 했다. 우문술의 생각은 달랐다. 군량이 바닥났으니 퇴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중문이 “전쟁터의 일은 한 사람이 결정해야 한다”며 지휘권을 내세워 밀어붙였다.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갔다가 황제로부터 추궁을 당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결국 우중문의 뜻대로 수나라 별동대가 압록강을 넘어 평양성으로 진군했다. 을지문덕은 청야(淸野) 전술과 유인책을 썼다. 그는 적의 실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수군(隋軍) 병사들에게 굶주리고 지친 기색이 엿보였다. 그래서 적과 맞붙을 때마다 지는 척하고 달아났다. 또 고을과 들판을 깨끗이 비워 곡식 한 톨도 남기지 않도록 했다. 수군은 계속된 승리에 우쭐하여 거침없이 진격했다. 병사들의 굶주림과 피로는 극에 달했다.

그 무렵 수나라 함대는 서해안을 따라 패수 하구에 이르렀다. 황제의 특명을 받은 총관 내호아가 중국 장강과 회수의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연안 지역에 걸망성·용골산성·능한산성 등 고구려성들이 버티고 있어 군량의 하역과 운송은 불가능했다. 내호아는 곧장 패수로 들어가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도성을 위협해 고구려군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별동대가 당도하기를 기다린 것이다.

평양성 주변에는 대성산성·안학궁성·청암동토성 등이, 그 외곽에는 청룡산성·황룡산성·황주성 등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고구려의 도성을 지키기 위해 이중삼중의 위성 방어망을 구축한 것이다.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은 수수(水手, 배를 부리는 선원) 1만 명, 노수(弩手, 노를 젓는 병사) 3만 명, 배찬수(排鑹手, 짧은 창을 쓰는 전투병) 3만 명 등 도합 7만 명 규모였다(정동민, ‘고구려의 수군 격퇴와 그 영향’, [7세기 국제정세와 고구려-수·당 전쟁], 동북아역사재단). 단독으로는 위성 방어망을 뚫고 평양성을 공략하기 힘들었다.

고구려로서는 평양성 근방에 주둔하는 적의 수군이 부담스러웠을 터였다. 전술적인 측면에서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별동대가 근접하기 전에 수군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관건은 저들을 진영에서 끌어내는 일이었다. 단독으로 움직이도록 미끼를 던져야 한다. 고구려군이 출동해 수나라 수군 진영을 습격했다. 내호아는 황제에게 능력을 보여줄 기회라고 여겼다. 총관의 명에 따라 배찬수들이 돌격했고 고구려군은 꽁무니를 뺐다.

서전(緖戰)을 승리로 장식하자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내호아는 승세를 몰아 평양성으로 도망가는 적을 쫓기로 했다. 부총관 주법상은 만류했다. 별동대가 이르면 함께 진격하는 게 원래의 작전이었다. 하지만 전공(戰功)에 눈이 먼 내호아는 듣지 않았다. 병력 4만 명을 거느리고 기어코 출전한 것이다. 별동대를 지휘하는 우중문과 우문술보다 먼저 평양성을 치고 싶었으리라.

평양성에서 매복전 펼친 고건무


▎평양성 현무문. 왕궁을 방어하는 북성의 북문이다. 모란봉과 을밀대 사이에 있다. / 사진:나무위키 캡처
평양성은 북쪽으로 금수산과 모란봉을 끌어안고, 동·서·남 3면에 대동강과 보통강이 자연 해자(垓字)를 이루는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양원왕 8년(552)에 성을 쌓기 시작해 평원왕 28년(586)에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장안성’(長安城)이라고 불렀다. 장수왕 15년(427) 처음 평양으로 천도했을 때는 안학궁성과 대성산성을 수도로 삼았다. 이전의 국내성과 환도산성처럼 평소 거주하는 평지성과 전쟁에 대비하는 산성을 묶어서 이원적인 도성 체제를 만든 것이다. 반면 장안성(평양성)은 평지성과 산성을 합친 것으로 외성, 중성, 내성, 북성이 첩첩이 둘레 17.4㎞의 웅장한 도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612년 6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고구려군을 추격하던 내호아의 군대가 얼떨결에 평양성의 외성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외성은 백성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수군(隋軍)은 평양성을 깨뜨렸다는 착각에 빠져 환호했다. 공공시설과 귀족의 저택들이 늘어선 중성, 왕궁이 자리한 내성, 궁궐을 방어하는 북성 등 안쪽의 성채들은 철통 같은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지만 수군은 알지 못했다. 승리에 도취한 병사들은 사람들을 붙잡고 재물을 약탈하느라 전열에서 이탈했다. 군을 조직하는 대오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외성 안의 빈 절에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 결사대가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경악한 수군은 혼돈에 빠져 우왕좌왕했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평양성 중성의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고구려 정예 군단이 창칼을 번뜩이며 쏟아져 나왔다. 수나라 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내호아는 혼비백산해 성 밖으로 달아났다. 고구려군은 거세게 추격해 적을 섬멸했다. 대승이었다. 수군 4만 명 중 살아 돌아간 자는 수천 명에 불과했다. 수나라 함대는 서둘러 닻을 올리고 바다 어귀로 빠져나갔다. 강 언덕 위에서 고구려 장수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유인책과 매복전을 지휘한 영양왕의 동생 고건무였다.

한편 수나라 별동대는 살수(薩水, 청천강)를 건너 평양성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격했다. 굶주림과 피로에 기력이 떨어졌지만, 고구려군이 매번 패해 달아나자 의욕을 불태우며 쫓아간 것이다. 수군은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고 진을 쳤다. 도성 공략을 위한 최후의 포진이었다. 이때 을지문덕이 시 한 수를 지어 우중문에게 보냈다.

“신묘한 책략은 천문을 헤아리고(神策究天文) / 기묘한 계교는 지리에 통달했네(妙算窮地理). / 싸움에 이겨 이미 공로가 드높으니(戰勝功旣高) / 만족할 줄 알고 그치기를 바라오(知足願云止).”([삼국사기] 열전 ‘을지문덕’)

우중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을 칭송하고 선처를 당부하는 시 같은데 어쩐지 섬뜩한 냉소가 깃들어 있다. 을지문덕은 청야전술과 유인책으로 수군의 전력을 최대한 소모시켰다. 이제 멋도 모르고 고구려 땅 깊숙이 들어온 적들을 요리할 차례였다.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는 국면 전환의 신호탄이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결정적인 고비를 맞으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고아한 품격을 보여준다.

우문술은 평양성 공략에 앞서 군사를 점검했다. 30만 대군이라지만 굶주림과 피로에 녹초가 돼버려 힘을 쓸 수 없었다. 게다가 수군(水軍)이 참패해 바다 어귀로 물러났다는 소식까지 들어왔다. 평양성에 이르면 수군으로부터 보급도 받고 수륙 협공의 이 점을 얻을 줄 알았는데 말짱 도루묵이 된 것이다. 우문술은 착잡한 심정으로 고갯마루에 올라 평양성을 바라보았다. 지세가 험준하고 성벽이 견고해 도저히 깨뜨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성곽 방어에서 역공으로 전환

수나라 장수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이 때마침 을지문덕이 보낸 고구려 사신이 당도했다. “만약 군사를 거두어 돌아간다면 마땅히 국왕을 모시고 황제가 계신 곳으로 가서 조알(朝謁)하겠소.” 수군(隋軍)에게 퇴각의 명분을 주기 위한 거짓 항복이었다. 우중문과 우문술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허울뿐인 명분이라도 얻었으니 굶어 죽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회군하는 게 상책이었다.

수군이 퇴각을 시작하자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성곽 방어체계를 역공 태세로 전환했다. 먼저 평양 일대의 여러 성에서 출동한 군사들이 거세게 추격하면서 적의 퇴각로를 막았다. 수군은 방진(方陣, 네모꼴진법)을 이루고 북쪽으로 행군했다.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들이닥치니 싸우면서 퇴각해야 했다.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살수에 이르렀지만, 이제 ‘물고기 밥’이 될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구려군이 살수 상류에 제방을 축조해 강물을 저수해 두었다가 수군이 강을 건널 때 무너뜨려 물에 빠져 죽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7명의 승려가 개울처럼 바지를 걷은 채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보여줘서 수군이 물이 얕은 줄 알고 뛰어들게 만들었다는 전설도 곁들인다(안주목 칠불사). 하지만 이는 사찰의 유래를 설명하는 전승일 뿐 실제 급박한 상황에서 큰 제방을 축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보다는 살수 이북의 고구려군이 가세해 강을 건너는 수군을 앞뒤에서 협공함으로써 대첩을 이룩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곳에서 수나라 우둔위장군 신세웅 등이 전사하고 여러 군단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살수에서 살아남은 수군은 집요한 추격에 시달렸을 것이다. 천라지망(天羅地網), 하늘과 땅에 온통 그물이 쳐진 형국이었다. 사지(死地)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절망의 수렁은 깊어만 갔다. 평양성 공략에 나선 30만 대군 가운데 요동성 본진까지 살아서 돌아간 병력은 겨우 2700명이었다.

수양제는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돌렸다. 천자의 위엄을 만천하에 과시하려다 오히려 통일제국의 기반까지 흔들리게 생겼다. 울화가 치밀었을까? 황제는 613년과 614년에도 고구려 원정군을 일으켰지만, 양현감의 반란과 줄을 이은 민란으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회군해야 했다. 과중한 희생과 혹사에 분노한 백성들이 중국 전역에서 들고 일어났다. 결국 수양제는 618년 우문화급(우문술의 아들)에게 살해됐고 수나라도 그 해 멸망했다.

18세기 역사학자 안정복은 고구려 영양왕이 수군의 뒤를 쫓아가 수양제의 죄를 벌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안으로 을지문덕 등 여러 신하를 중용하고, 밖으로 신라·백제·말갈과 힘을 합하고, 천하에 격서를 띄워 출병할 수 있었는데 애석할 따름이다.”(안정복, [동사강목]) 왜 승세를 몰아 수나라를 정벌하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을지문덕전]을 쓴 근대 역사가 신채호도 동조했다. 그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고서 [해상잡록]을 인용, 을지문덕이 수나라 정벌을 주장했다는 설을 제기했다(조선상고사).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의 의견이라 파급력이 컸을 것이다. 친왕 세력인 신흥 귀족들이 호응하며 결집했다. 영양왕의 의중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을지문덕의 묘연한 행적, 왜?


▎1. 대한제국 교과서에 실린 을지문덕 삽화. / 2. 근대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 선생. [조선상고사]에 을지문덕의 감춰진 진실을 서술했다. / 사진: 네이버 지식백과 캡처, 위키백과 퍼블릭 도메인
뼈대 있는 귀족들은 반대했다. 장수왕이 정립한 서수남진(西守南進) 전략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서쪽(중국)은 수비하고 남쪽(백제·신라)을 공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왕제(王弟) 고건무를 앞장세워 수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했다. 고건무는 내호아의 수군을 격파해 을지문덕에 버금가는 공을 세웠다. 평양성을 지켜 백성들의 지지도 받았다.

영양왕은 고심 끝에 고건무 세력의 손을 들어주었다. 양현감의 반란에 연루돼 고구려로 망명한 곡사정을 송환해 수양제의 체면을 세워주고 번국(藩國)의 예로 화친을 맺은 것이다. 왕은 강력한 귀족들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동생을 내세워 왕권을 빼앗을지도 몰랐다. 영양왕이 돌아서면서 을지문덕의 입지는 불안해졌다.

역사에서 을지문덕의 행적은 612년 말고는 묘연하다. 세력과 계보조차 알지 못한다. 혹시 신흥 귀족들과 함께 숙청당해 기록이 삭제된 것은 아닐까? 618년 영양왕이 죽고 왕제 고건무가 즉위하니 바로 영류왕이다. 역사의 행간에 권력투쟁의 피비린내가 풍긴다. 행적은 지워졌을지 몰라도 을지문덕의 영웅담은 어부와 나무꾼의 이야기가 돼 가슴으로 전해졌다. 오랜 세월 중국의 등쌀에 시달려 온 이 나라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진 것이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 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모함의 나라](2022),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사랑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이는가](2023) 등을 썼다.

202405호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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