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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97)] 단식 순절 항일지사 향산(響山) 이만도 

나라 잃은 것 부끄러워 책임을 자임하다 

퇴계 이황 11대손으로 장원 급제, 승승장구하다 벼슬 그만두고 낙향해 강학
을미사변 나자 의병장… 경술국치에 단식으로 일제 항거하다 24일 만에 순국


▎안동의 향사모 회원들이 올해도 변함없이 정초 향산고택에 모였다. ‘향산고택’ 편액은 ‘기암고택’ 더 왼쪽에 걸려 있다. 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향산의 4대손인 이동직 씨. / 사진:송의호
설이 지나고 첫 토요일인 2월 17일, 안동 시내 한 사랑채에 머리 희끗희끗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두 20여 명. 오전 11시 참석자들이 일어나 큰절로 서로 세배한다. 유림과 문중 대표, 출향 인사 등이다. 모인 곳은 안동댐이 들어서며 수몰돼 옮겨진 향산고택(響山故宅). 1년에 딱 하루 만나 인사를 나누고 나라 사랑과 지역의 미래 등을 이야기하며 수십 년째 이어지는 이른바 향사모 자리다. 모임을 주선한 권석환 안동문화원장은 향사모를 ‘향산 고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또는 ‘향산을 기리는 모임’으로 설명한다.

향산은 1910년 나라가 망한 경술국치에 24일간 단식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생을 마감한 독립지사 이만도(李晩燾, 1842~1910) 선생의 아호다. 선생은 죽음으로 일제에 경종을 울리고 민족을 일깨우는 자정(自靖) 순국의 길을 걸었다. 사랑방에 절명시(絶命詩)가 걸려 있다.

“눈 들어 살펴보니 고국 산하 달라졌네/ 무슨 수로 하늘에 하소연할까/ 부끄럽구나, 필부의 이 모습/ 끝없는 임금 은혜 갚을 길 없어라/ 가슴 속 잡된 생각 다 사라지니/ 마음 더욱 밝아라/ 내일은 날개 돋아/ 아득히 하늘나라에 오르리라”

모임을 파한 뒤 향산이 절명시를 남긴 순절 현장을 찾아갔다. 고택에서 북동으로 25㎞쯤 떨어진 안동시 예안면 인계리 도로변에 작은 향산공원이 조성돼 있다. 가운데 ‘향산이 선생순국유허비’가 보인다. 글씨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가 썼다. 뒷면 비문은 위당 정인보가 지었다. 당시 추도 분위기가 온 나라에 퍼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선생은 110여 년 전 이곳에 있던 종손자 이강호의 집에서 단식에 들어갔다.

“나라가 없는데 어찌 집이 있겠는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제에 병탄되는 경술국치를 당했다. 선생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9월 8일에야 그 비보를 듣는다. 향산은 그날부터 조상 묘소를 찾아가 통곡한다. 열흘이 지났다. 마음이 정해진다. 9월 17일 선생은 마침내 죽음을 결심하고 단식에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임금에게 전할 유소(遺疏)를 써 내렸다.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던 신하로서 고분고분 원수의 백성이 되면서도 혼몽해 부끄러워할 줄 모르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그는 나라가 망해도 원수 일제의 백성으로 살 수밖에 없는 괴로운 현실을 인식했다. 이 수치를 피할 방법은 원수의 백성 되기를 거부하는 자진(自盡)하는 길뿐이었다.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 박민영 박사는 “당시 향산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됐다”고 표현했다. 이강호는 단식 첫날부터 순국 이틀 전인 10월 8일까지 향산의 자결 과정을 [청구일기(靑邱日記)]로 남겼다.

단식을 결행하던 날 향산은 양아버지 묘소가 있는 봉화군 재산면 명동을 가다가 안동시 예안면 율리 청구언덕 이강호의 집에 들렀다. 이강호가 울며 인사하자 향산이 입을 뗐다. “내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도 을미년 변란이 일어났을 때 죽지 못하고, 다시 을사년 5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또한 죽지 못하고 산에 들어가 구차히 연명한 것은 그래도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이미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어졌는데 죽지 않고 무엇을 바라겠는가? 변란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이때까지 지체하고 목숨을 이어가는 것은 자진할 방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내 뜻이 정해졌으니, 명동에 가서 생을 다할 참이다. 다시는 여기에 대해 말하지 말라.”

단호한 말에 이강호는 명동으로 가지 말고 자신의 집에 머무르기를 간곡히 권한다. “이곳 역시 궁벽한 객지이니 본가로 돌아가지 않으신다면 여기에 머무십시오.” 이에 향산은 본가가 아닌 고조(이세사)의 주손이자 제자인 이강호의 집에서 단식에 들어간다. 18일 이강호는 향산에게 아침상을 올렸다. 그러자 향산은 단식하기로 마음을 굳혔다며 밥상을 물리쳤다. “내가 원수 앞에서 목숨을 끊고 묘당에서 피를 토하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누워서 먹고 편히 쉬고 살면서 거처할 수 있겠느냐?”

20일, 이날 늦게 연락을 받고 아우 이만규와 아들 이중업이 달려왔다. 아우는 형의 손을 잡고 통곡하고는 함께 자진하려 했다. 향산은 자신의 사후, 아우가 집안을 잘 이끌 것을 당부하며 이를 만류했다. 아들이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아버지는 “임금이 나라가 없는데, 신하가 어찌 감히 집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일제 경찰이 식음 강제하자 벌떡 일어나 호통


▎향산이 24일간 단식을 하다 절명한 장소에 세워진 순국유허비. 백범 김구가 글씨를 썼다. / 사진:송의호
다음날부터 소식을 듣고 원근의 일족과 지인이 모여든다. 매일 수십 명과 대화하고 간간이 편지도 썼다. 향산은 단식한 지 17일이 지나서도 정신은 또렷하고 모습은 온화했다. 10월 5일 절명시를 남긴다.

10월 7일 예안 주재 일본인 경찰이 순검을 대동해 들이닥쳐 선생에게 음식을 강요한다. 향산이 순절하면 항일감정이 크게 고조될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인 경찰이 소리친다. “영공이 지금 정신이 없는데 어찌 음식을 올리지 않는가. 속히 미음을 가지고 오너라. 강제로 먹이겠다.”

그때였다. 숨이 가팔라 눈을 감고 누워 있던 향산이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나 일본인 경찰을 큰소리로 꾸짖는다. “나는 내 명대로 자진코자 하거늘 지금 너희들은 나를 빨리 죽이고 싶은가? 내 빨리 죽고 싶으니 즉시 총포로 나를 죽여라!” 울림이 산골짜기를 진동했다. 기세등등하던 일본 경찰이 크게 당황하며 사과했다. 향산이 다시 호통친다. “나는 당당한 조선의 정2품 관리다. 어느 놈이 감히 나를 설득하려 하고, 어떤 놈이 감히 나를 위협하려 하느냐?” 선생은 이렇게 마지막까지 의기와 지조를 잃지 않았다.

9일 부축을 받고 잠시 일어나 앉아 아우 등 가족의 손을 잡았다가 다시 누웠다. 10일 마침내 향산이 순절했다. 24일간 이어진 단식은 끝이 났다. 유허지 답사에 동행한 김시묘 언론인은 “순절이 소문나자 달려와 곡하는 사람들이 금세 수백에 이를 만큼 이 골짜기는 문상객이 넘쳐났다”는 구전을 소개했다. 향산의 순국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향산 가문은 ‘3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이었다. 향산은 특히 장원을 차지했다. 이 가문은 다시 향산을 시작으로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거듭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었다.

이만도는 1842년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이휘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은 안동시 도산면 하계마을이다. 필자는 예안면 순국유허비를 둘러본 뒤 40㎞ 떨어진 하계마을을 찾았다. 퇴계 묘소 아래 자리한 마을이다. 퇴계 후예 중 가장 번성했던 이 마을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돼 지금은 지대가 높은 일부만 남아 있다. 향산고택 자리는 물속에 잠겨 있었다. 도로변 마을 입구에 ‘하계마을독립운동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조동걸 교수는 이 비문에 “견위수명(見危授命)으로 자정 순국한 향산은 다시 독립운동으로 꽃피어 청사(靑史)를 새롭게 빛냈다”고 썼다.

이만도는 아버지와 족형인 이만각을 통해 가학을 계승하고 장인인 권승하, 처숙부 권연하 등으로부터 수학했다. 그는 1866년(고종 3) 25세에 진사를 거쳐 그해 9월 정시(廷試)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당시 대사성이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선비가 벼슬에 나가면 태평한 시대엔 임금을 도와 백성에게 은택을 입혀야 하지만,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목숨을 바쳐야 하니 너는 더욱 힘써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만도가 처음 받은 벼슬은 성균관 전적이다. 이어 병조 좌랑, 사간원 정언, 홍문관 교리 등을 거쳤다. 홍문관 시기에는 시독관 등으로 임금과 함께 하는 경연에 자주 나갔다. 1876년(고종 13)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이 도끼를 등에 메고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을 받았다. 당시 사헌부 집의 이만도는 최익현의 상소가 지나치긴 하지만 바른말을 하는 그를 탄핵하는 사간원의 계문(啟文)이 적절치 않다고 해 이를 수정했다. 그로 인해 이만도는 영의정 이최응의 미움을 받아 파직됐다. 이후 복직되어 성균관 사성 등을 거쳐 노모 봉양을 위해 양산군수로 나갔다.

최익현 도끼 상소 옹호하다 파직당하기도


▎향산 이만도가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음을 알리는 교지.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부임하던 해 흉년이 심해 굶주린 백성이 넘쳤다. 이만도는 녹봉 1000금을 내어놓고 사창(社倉)의 쌀 500섬으로 구휼에 힘썼다. 세곡(稅穀)의 합리적 운송 방안을 놓고 관찰사와 맞서기도 했다. 또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보강하는 한편 향교를 중수하고 양사재(養士齋)를 열어 고을 선비 교육에 힘썼다. 1878년 어사는 그의 치적이 으뜸이라고 보고했다. 그해 이만도는 집의가 되고 응교에 임명됐으나 나아가지 않고 하계마을로 돌아왔다.

향산은 고향에서 선대 유적과 묘역을 보수하는 등 문중 일과 강학에 힘을 쏟았다. 1882년 그는 다시 공조 참의에 임명됐으며 이어 승정원 동부승지를 받았으나 사직하고 낙향한 뒤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살해당하는 변고가 발생했다. 향산은 당시 예안 인근 일월산 기슭에서 지내다가 소식을 접하고 백의 차림으로 통곡했다. 그해 12월 단발령이 내려졌다. 조정의 조처에 반대하고 외세 침탈에 항거하는 의병이 여러 고을에서 일어났다. 예안도 선비들이 중심이 돼 의진이 결성됐다. 향산은 의병장으로 추대된다. 그러나 창의 8일 뒤 의병을 해산하라는 임금의 유지가 내려와 예안 의진은 흩어졌다. 이후 향산은 고향과 선대 묘소를 오가며 죄를 지은 폐인으로 자처했다. 이때부터 세상일을 듣고 싶지 않아 산에서 머무는 날이 많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향산은 을사오적의 매국 행위를 통박하며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7년 광무황제(고종)가 일제에 의해 퇴위당하고, 퇴계 종택은 일본군에 불태워진다. 1910년 일제는 마침내 대한제국을 병탄했다. 향산은 자신을 찾아온 절친한 친구 류필영으로부터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는다. 그는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곡기를 끊었다. 향산은 나라도 망하고 종택도 불탄 마당에 갈 길은 자결뿐이라고 생각했다. 선생은 집을 나선다. 산으로 들어가는 도중 이강호의 집에 들렀다가 그의 만류로 거기서 단식에 들어갔고, 결국 순절로 이어졌다.

단식 중에도 훈계하고 편지에 답장


▎향산의 고향인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하계마을 입구에 세워진 독립운동 내력을 적은 기념비. 이 마을에서만 25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됐다. / 사진:송의호
그의 행장을 지은 류필영은 “수치스러운 마음을 품고 구차히 살아가는 자는 뒤에 죽는 비애를 금할 길이 없다”고 적었다. 지인들은 강직한 이만도의 단식과 순국을 지켜보며 무한한 존경과 극도의 죄스러움을 품고 살아야 했다.

단식을 통한 의로운 죽음은 울림이 컸다. 조동걸 교수는 “타의로 죽는 사형수와 달리 자신의 의지로 죽어가며 직접 남기는 교훈은 어디에도 비길 데가 없을 것”이라고 정리한다. 향산은 단식 중 손자와 증손자들에게 훈계의 말을 써서 주고 원근에서 온 편지에도 답을 했다. 이중언의 단식 순국 등 형제와 집안이 독립운동에 다수가 헌신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단식이 전해지자 하계마을 백동서당에서 배운 제자들은 문후 인사를 왔는데 그 자리에서 들은 말씀은 그 어떤 경서보다 가슴 깊이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향산의 제자들은 적어도 친일파는 없다고 전해진다.

단식은 음독과 달리 긴 고통을 동반한다. 향산은 24일 동안 이렇게 단식 중에도 사람들을 만나 올바름을 논하는 등 치욕의 시간에도 불굴의 선비정신을 지켰다. 그 바탕은 녹을 먹은 관리로서 나라 잃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역사 앞에 무한책임을 자임하는 것이었다. 정의를 벗어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 향산의 향기는 100년을 넘어 안동 사람들에게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박스기사] 3대 독립운동에 빛나는 향산의 거룩한 계보 - 며느리는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실명하기도

향산 이만도의 순국 투쟁은 3대 독립운동 가문을 여는 시발점이었다. 아들 이중업은 아버지의 단식을 말리지 못한 채 자진하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고통을 겪는다. 그는 1895년 예안 의병장이던 아버지를 따라 독립운동에 처음 뛰어든다. 이중업은 당시 투쟁 경험을 바탕으로 1914년 안동·상주 등 경북 북부지역 창의를 촉구하는 ‘당교격문(唐橋檄文)’을 지었다. 3·1운동 직후에는 김창숙 등과 함께 국제사회에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한다.

향산의 아우 이만규는 이 장서에 유림 대표로 서명했다. 이중업과 동서였던 이상룡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다.

향산의 며느리이자 이중업의 부인인 김락은 가족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다 만세 시위에 뛰어든다. 그 일로 일본 수비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해 양쪽 눈을 실명한다. 조선총독부 〈고등경찰요사〉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항일운동은 다시 손자로 이어진다. 이중업의 두 아들 이동흠·이종흠은 제2차 유림단의거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동흠은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과 연계해 군자금 모금에 나선다. 이종흠은 친척을 찾아가 군자금 2만원을 요구하다 거사가 탄로 나 일경에 체포됐다.

조카 이중언은 향산이 순국하던 날 단식에 들어가 27일 뒤 절명했다. 향산의 정신은 이렇게 대를 이어 폭넓게 계승됐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404호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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