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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16)] 조선 후기 북학파 거두 초정 박제가 

청나라서 위조 그림 돌고 글 받으려 줄 서 

사회제도 모순과 개혁 방안 제시한 [북학의] 편찬
그의 문호 개방 제안 받아들였다면 지금 한국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제가의 그림으로 알려졌던 ‘연평초령의모도’. 하지만 원근법 등 서양화 기법을 사용한 점과 화제의 글씨가 박제가의 서체와 차이가 두드러진 점을 볼 때 가짜 그림이 분명하다. 중국에서 가짜 그림이 나돌 정도로 박제가는 중국에서 유명인사였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북학파의 거두인 초정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사회 제도의 모순과 개혁 방안을 설파한 실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청나라 선진 문물을 보고 돌아와 저술한 [북학의]는 서얼 철폐 등 사회제도의 개혁뿐 아니라 수레나 벽돌 등 일상에서 쓰이는 생활 도구의 도입·개선까지 폭넓은 국가와 사회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를 알아보고 중용한 현군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어도 오늘날 우리나라의 모습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제안은 시대를 앞서가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혜안이었다.

그러한 개혁가로서의 박제가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가 글과 글씨, 심지어 그림에까지 일가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의 글씨는 예서풍을 띠고 있지만 구양순·동기창체의 행서는 물론 해서와 초서 등에도 능해 필적이 활달하면서 강건했다. 추사 김정희가 그의 문하에서 글과 그림을 배웠을 정도였다. 그 이름이 청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져 그의 글을 구하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베이징의 유리창(琉璃廠) 거리에 가짜 박제가의 글과 그림이 등장해 팔릴 정도였다. ‘연평초령의모도’라는 그림이 대표적이다.

이 그림은 서양의 원근법을 조선 화단에 처음 도입한 사례로 소개되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박제가의 혁신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는 측면이 없지 않은 게 사실이다. ‘연평초령의모’란 ‘어린 연평이 엄마에게 의지하다’라는 뜻이다. 연평은 청나라 초기 타이완을 근거지로 한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반청복명 운동을 펼쳤던 인물인 정성공을 일컫는다. 초령은 젖니를 갈 때의 나이를 말한다. 그림에는 박제가가 직접 썼다는 화제가 있다.

“명 말엽 정지룡이 일본에서 장가들어 아들 성공을 낳았다. 지룡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성공은 어머니와 함께 일본에서 살았다. 우리나라 최(崔)씨가 일본에서 머물 때 그림을 그려 가지고 돌아왔다. 이제 최씨는 없고 그 초고가 내 스승 댁에 남아 있어 이를 보고 그렸다. 붉은 옷을 입고 단정하게 앉은 사람은 지룡의 처인 일본인 종녀다.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채 칼을 차고 놀고 있는 아이가 성공이다. 박제가가 그리고 적는다.”

모든 그림이 그렇듯 이 그림 역시 소장자의 명성 덕에 성가가 더욱 오른 경우다. 20세기 초 추사 김정희 연구자로 이름이 높았던 경성제대 후지쓰카 지카시(藤塚) 교수가 그다. 후지쓰카 교수는 1935년 한 강연에서 자신이 어떤 경로로 ‘연평초령의모도’를 입수하게 됐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청나라 학자 진전의 책을 읽다가 박제가의 문집에 쓰인 서문을 보고 박제가에게 관심을 갖게 됐으며,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박제가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한다. 1934년 어느 날 경성에 와 있던 일본 건축가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박사가 후지쓰카를 찾아갔다. 그는 후지쓰카가 소장하고 있던 추사의 ‘세한도’를 구경하다가 박제가라는 조선 사람이 그린 그림을 도쿄에서 보았노라고 말했다. 깜짝 놀란 후지쓰카는 최근 상해에서 입수했다는 이 그림을 도쿄의 한 골동품상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음날 세키노가 가져온 사진을 본 후지쓰카 교수는 그림을 본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시대를 앞서간 혜안 지닌 개혁가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원에 소장된 [한객건연집] 표지. 조선 후기 4대 문인이라고 불렸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의 시를 모아 놓은 책으로 조선과 청나라에서 인기를 끌었다. / 사진:고려대해외한국학자료센터
“나는 너무도 감격하고 놀라 정신이 나갈 정도였다. 손이 덜덜 떨리고 남의 발을 밟는 것도 몰랐다. (중략) 필법이 굳세 사진으로 본 것만으로도 놀랍고 영광이었다. 게다가 윗부분에 따로 종이에 쓴 초순이라는 위대한 학자의 찬이 있었다. 초순은 청조 최고의 학자로, 완당이 존경하는 은사인 완원의 친구다. 완원의 아들 복이 북경에서 박제가의 그림을 손에 넣어 양주로 돌아왔고 초순에게 보여 찬을 받았다. 초순은 한편으로 정성공을 기리고 다른 한편으로 성공이 죽은 뒤 청나라 조정의 관대한 태도를 기렸으며 마지막으로 필자의 화제를 극찬했다. 나는 완전히 감동했고 세키노 박사에게 (그림을 구할 수 있도록) 간절히 부탁했다.”

후지쓰카는 그림에 대해 전혀 의심 없이 박제가가 그린 것으로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제가 스스로 쓴 제발이 있는데다 저명한 학자 초순의 글도 아주 구체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림 하단에는 19세기 중국 강남의 3대 수장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던 심수용의 수장인까지 선명하게 날인돼 있었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성이 최씨인 조선 화가가 그린 그림을 보고 박제가가 모사하고 제발까지 쓴 그림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가 상해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골동품상에 이어 후지쓰카의 소유가 된 것이다. 후지쓰카는 그림을 손에 넣은 뒤 “이야말로 국제적 명화이니 진기함이 흡사 종합예술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며 감격했다.

하지만 ‘연평초령의모도’는 박제가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납득이 되지 않는 점이 많다. 필자는 고서화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데 문외한이지만, 그런 비전문가의 눈에도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그림 솜씨가 박제가가 그릴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 전문 화가의 것이다. 박제가가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해도 문인화를 그리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원근법까지 도입한 정밀한 필치의 서양화풍 그림이다. 박제가의 다른 그림과 비교할 때 수준 차가 현격하다. 아무리 조선 화가의 그림을 모사했다고 해도 아마추어 문인 화가가 그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또한 전문 화가라 하더라도 그림의 구도나 채색, 등장인물들의 복식이나 배경이 되는 서양식 건물 양식, 괴석 너머로 보이는 흰눈에 덮인 후지산 등은 조선 화원의 상상력으로 그릴 수 있는 범주를 크게 벗어난 것이다. 당시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간 조선 화원 중 최씨 성을 가진 인물은 최북이다. 이 그림은 그러나 최북의 화풍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으며, 정원의 괴석과 수목을 그린 붓놀림이 중국풍에 가깝다.

최씨의 초고를 박제가의 스승이 가지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렇게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박지원이나 유금 정도다. 하지만 ‘연평초령의모도’에 대해 깊이 연구한 한양대 정민 교수에 따르면 박제가는 박지원이나 유금을 ‘나의 스승(吾師)’이라고 지칭한 적이 없다. 박제가의 친구인 유득공의 숙부 유금은 박제가와 아홉 살 차이로 당시로는 서로 벗을 할 수 있는 나이였다. 박지원의 경우 박제가가 스승이라고 칭한 적은 없어도 스승뻘 선배로서 예우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 박지원이 “그림의 원본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토록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그림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에게 영향 미친 ‘만능맨’


▎[한객건연집] 1권. 조선 후기 북학파 문인인 이덕무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함께 그의 시가 실려 있다. / 사진:고려대해외한국학자료센터
정민 교수는 무엇보다 “그림에 적힌 박제가의 글씨가 대단히 졸렬해 박제가가 쓴 글씨라고 믿기 어렵다”고 단언한다. 앞서 말했지만 박제가는 문장뿐 아니라 명필로서도 중국에까지 이름을 날려 그의 글을 받으려는 청나라 지식인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그는 큰 글자를 잘 썼고 작은 글자도 오늘날 전하는 것들을 보면 “야무지고 찰진 해서체”를 구사했다. 이와 달리 이 그림 속 서체는 수준이 크게 떨어진다. “글씨의 획은 어설퍼 따로 놀고 글씨는 줄도 맞추지 못한 채 삐뚤빼뚤하다. 자신의 이름을 쓴 부분은 더욱 졸렬하다. 이런 글씨를 받자고 베이징의 내로라 하는 문인들이 줄을 섰다고는 믿을 수가 없다”는 정민 교수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

후지쓰카는 그때까지 박제가의 글씨를 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박제가의 그림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조선의 많은 지인들에게 물어 확인했지만 누구도 박제가의 글씨를 본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연평초령의모도’를 보고 흥분했을 것은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국내에서도 이 그림이 한·중·일 3국에 걸친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림의 소재도, 그림의 탄생 과정도, 그림이 유전되는 경위도 국제적”이라고 평가한 연구까지 나왔다. 박제가 스스로 베이징의 유리창에서 자신의 가짜 글씨가 돌아다니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 문집 [정유각집]에 쓰고 있는데도 말이다. ‘국제적’이라는 훌륭한 이슈가 당연히 의심해볼 수 있는 이성을 잠재운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주UN 한국대사관 측이 입수해 공관에 걸어두고 오랫동안 동아시아, 특히 한·중·일 우호의 역사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세계에 소개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으니 그럴 일은 없겠다.

박제가가 중국에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유금 덕분이다. 유금은 31세이던 1771년 중국을 방문하고 온 뒤 유득공은 물론 이덕무, 박제가 등에게 중국에 대한 지식을 전해줬다. 유금은 서얼 출신이라 벼슬을 하지는 못했지만, 중국에서 [사고전서] 편찬 책임자인 기윤과 축덕린, 옹방강, 반정균, 철보 등 당 대 일류 학자들과 교유를 가졌다. 이 같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1776년 정조의 명을 받고 [도서집성]을 수입하기 위해 중국에 간 서호수를 수행해 민간외교관으로 활약했다. 유금은 이때 사가시인(四家詩人)이라 일컬어지던 이덕무와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의 시 각 100수를 뽑아 책으로 만들어 중국에 가져갔다. 이른바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라는 책이다. ‘한객’이란 조선 사람, ‘건연’은 작은 상자라는 뜻으로, 건연집은 소형 책자라는 의미다. 따라서 [한객건연집]은 조선 사람의 시를 모은 작은 시집이라는 뜻이다. 유금은 청조의 유명한 문인인 이조원과 반정균에게 사가시인들의 시를 보여주고 서문을 받은 뒤 필사본으로 출간했다.

중국에서 가짜 박제가 그림 등장하기도


▎1790년 두 번째 연행길에 올랐던 박제가가 귀국할 때 청나라 학자 나빙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그려준 박제가 초상화와 시. 나빙은 “사랑스런 그대 자태 무엇에 비교할까/ 매화꽃 변한 몸이 그대인 줄 알겠구나”라고 노래했다. / 사진:과천시 추사박물관
“경물을 그림처럼 새기고 흉금을 묘사한 것이 아름답고도 오묘하고 즐길 만해 두서너 작품을 읽으니 차마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비록 내가 네 사람의 일생에 대해서는 다 알지 못하나 시로써 상상해볼 수 있었는데 모두 높고 드넓으며 조용하고 담백한 선비였다.”

이 글은 반정균의 서문 중 일부다. 저명한 중국 문인의 극찬에 가까운 서문까지 첨부되자, 이 책은 중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많은 사람이 필사해 읽었다. 필사본 외에 간행본까지 나왔다. 이 책만큼 이본이 많은 책도 드문 이유다. 오늘날에도 고서를 수장한 전국 도서관이 대부분 이 책을 소장하고 있으며, 지금도 드물지 않게 거래가 이뤄지고 있을 정도다. [한객건연집]이 청나라 문인 사이에 인기를 끌자 역관을 중심으로 한 여항시인들도 자기의 시집을 엮어 청나라에 소개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한객건연집]이 문학 한류의 원조가 된 셈이다.

[한객건연집]의 사가시인 중 중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는 단연 박제가다. 그가 글씨를 잘 썼던 이유도 있지만, 한 번 가기도 어려운 청나라 사행을 무려 네 번이나 하면서 100명이 넘는 중국 지식인과 사귀었던 까닭이다. 박제가는 청나라 문물을 제대로 파악하고 청나라 지식인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한 그 시대의 대표적 ‘지청파(知淸派)’였던 셈이다. 이와 같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1801년 무렵 박제가의 시문집인 [정유고략]이 중국에서 간행되기도 했다. 앞서 후지쓰카 교수가 박제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중국 학자 진전의 문집을 읽다가 그가 [정유고략]에 써준 서문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또 청나라 문인 이조원은 박제가의 문집 [정유각집]에 이런 서문을 썼다.

문학 한류의 원조 격인 '한객건연집'


▎1790년 두 번째 연행길에 올랐던 박제가가 귀국할 때 청나라 학자 나빙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초상화와 함께 박제가에게 그려준 ‘매화도’. / 사진:과천시 추사박물관
“그는 왜소하지만 굳세고 날카로우며 재치있는 생각이 풍부하다. 그의 문장은 찬란하기가 별빛 같고 조개가 뿜어내는 신기루 같고 용궁의 물과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박제가를 별빛과 진주, 용궁에 비교한 극찬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단지 그의 글씨나 글재주만을 칭찬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를 정확히 짚어내고 남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대안을 제시하는 그의 혜안을 상찬한 것이다. 그만큼 박제가는 국제적 안목을 갖춘 글로벌 지식인이었다. 그는 중국을 가보고 청나라가 더 이상 조선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오랑캐가 아니라, 신문명과 우수한 서양과학을 받아들인 문명국임을 알게 됐다. 그는 청나라를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당시 그러한 주장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청나라를 그저 북벌 대상으로만 생각하던 조선 지식인들의 ‘우물 안 개구리’식 사고를 뒤흔든 혁명적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박제가는 명필과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는 결코 책상물림 선비가 아니었다. 그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급이 명확했던 조선에서 보기 드문 중상주의자였다. 조선의 뿌리 깊은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통상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박제가는 자신의 사상을 알리기 위해 책을 쓰기로 한다. 북학파의 바이블이자 중상주의 경제사상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북학의(北學議)]가 그것이다. 박제가는 청나라에서 돌아온 지 3개월 만인 1778년 9월 [북학의] 초고를 완성한 뒤 저자 서문까지 써놓았다. 이후 수년 동안 내용을 수정·보완해 내편과 외편의 체계를 갖춰 완성했다. 십 수 년이 지난 1798년에는 [북학의]의 핵심 내용을 간추리고 보완한 [진소본 북학의]를 정조에게 올렸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일본과 유구, 안남과 서양이 모두 중국의 복건·절강·교주·광주 지역에서 교역을 하고 있다”며 중국에 사신을 파견해 다른 여러 나라처럼 조선도 뱃길을 이용해 통상할 수 있도록 요청하자고 제안했다. 이와 함께 서양 기술자들을 초빙해 천문 관측과 양잠, 의약, 궁궐·성곽·다리 건설법, 구리나 옥 채굴법, 유리 제조법, 화포 설치법, 선박 건조법 등 선진기술을 배우자고 주장했다. 박제가는 이러한 통상에 사대부들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라에 놀고먹는 자가 갈수록 불어나는 것은 사족들이 날로 번성하기 때문이다. 물길과 뭍길을 이용해 장사하고 교역하는 모든 일에 사족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정유각집])

사대부들도 놀고먹지 말고 장사에 나서라는 주장은 상업을 천시하던 당대의 사대부들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박제가는 당시 양반들의 많은 비판을 받고 미움을 사게 된다. 가장 든든한 원군이자 바람막이였던 정조가 승하한 뒤 보복적인 유배를 가야 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것이 박제가의 신념이었다. 장사할 밑천이 없는 현실이 야속할 뿐, 기회만 된다면 자신도 무역에 종사하고자 하는 뜻도 가지고 있었다. [정유각집]에 실린 그의 시에서 그는 선배인 홍대용에 대해 이렇게 읊었다.

“만약 우리 인생에 서양 배에 오를 수 있다면, 관내 제후보다 장사꾼이 더 나으리.”

홍대용과 함께 드넓은 세계로 나가 무역업을 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낸 것이다. 그것만이 자신과 국가의 뿌리 깊은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박제가는 또 소비가 일어나야 국가가 발전한다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이른바 ‘소비주도성장론’을 펼쳤다. 그는 농업을 근간으로 한 조선사회가 미덕으로 여겨온 근검절약보다는 소비를 장려해 생산을 촉진하고 상업을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상물림 선비 아닌 중상주의자


▎박제가의 [북학의]. 박제가는 상업과 공업을 중흥시키고 바닷길로 외국과 통상을 해야 조선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청나라가 더 이상 오랑캐가 아니라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인 선진국이며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박제가의 견해는 당시로서는 지나치게 혁신적인 주장이어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사를 논하는 사람 중에 사치가 날로 심해진다고 말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신이 보기에 그들은 근본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다른 나라는 사치로 망한다고 할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반드시 검소함으로 쇠퇴하게 될 것입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지 않으므로 나라에는 비단을 짜는 베틀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여인의 재능이 피폐해졌습니다. (중략) 부서져 물이 새는 배를 타고 씻기지 않은 말을 타며 이지러진 그릇에 밥을 먹고 진흙을 바른 방에서 그대로 살기 때문에 공장과 목축, 도공의 기술이 끊어졌습니다. 나아가 농업은 황폐해져 농사법이 형편없고 상업을 박대하니 상업 자체가 실종됐습니다. 따라서 사농공상 네 부류의 백성이 누구 할 것 없이 다 곤궁하게 사니 서로를 구제할 방도가 없습니다.”([북학의] 외편 ‘병오소회’)

당시 상상하기 힘든 ‘소비주도성장론’ 주장

박제가는 재물을 우물에 비유해 퍼내면 퍼낼수록 가득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말라버리는 것이 재물이라고 역설했다. 이처럼 ‘소비가 미덕’이라는 사고는 근대 자본주의 발생 이후에 보편화한 것이다. 시대를 앞선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박제가의 혜안은 해외통상론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나라가 풍요롭고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 나라에서 생산되는 물품과 조선에서 만든 물품을 거래하는 무역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개국 이래 400년이 지났는데 다른 나라와 배 한 척 왕래한 적이 없다. (중략) 재주와 식견이 트이지 못했는데 이는 오로지 다른 나라와의 통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외국 선박을 겁내지 않고 예로써 맞이한다면) 우리가 가지 않아도 그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의 기술과 문물을 배우고 풍속을 물어 사람들이 견문을 넓히고 세상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우물 안 개구리로 사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이는 세상을 개화하는 밑바탕이 되므로 교역을 통해 얻는 경제적 이익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북학의] 외편 ‘강남 절강 상선과의 통상 문제에 대한 논의’)

역사에 만약은 의미가 없지만, 박제가의 이런 문호 개방과 해외 통상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조선은 아마도 일본보다 몇십 년을 앞서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식민의 역사도 없었을 테고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은 아마도 훨씬 높은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 실학자들의 혁신은 글에서도 나타났다. 당시 선비들은 두보의 시를 최고로 삼았고 이어 당나라 시, 송나라·금나라·원나라·명나라 시의 순서대로 배웠다. 글을 쓸 때도 옛 시를 전범으로 원용해 써야만 바른 글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북학파 시인들은 그러한 고루하고 진부한 시와 문장을 혐오했다. 옛사람이 한 말의 찌꺼기나 주워서 어찌 오늘날 나의 생각을 말할 수 있겠는가. 자기 시대의 삶을 자기의 말로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시요 문장이었다. 박제가는 이덕무의 시집인 [형암선생시집]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조선의 단단한 습속 벽에 온몸으로 부딪쳐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모두 시다. 사계절의 변화와 온갖 만물의 웅성거리는 소리, 그 몸짓과 빛깔, 그리고 음절은 그들 나름대로 존재한다.”

삶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살아 있는 글, 좋은 작품의 소재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루한 선비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형식에서 벗어났다는 노론계 학자들의 비난이 빗발치자, 정조는 북학파 인사들의 문장들을 패관 소품으로 규정하고 고문을 모범으로 삼은 바른 글로 반성문을 써내라고 지시한다. 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이에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 문인들이 모두 반성문을 지어 올렸다. 박제가도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임금에게 바쳤지만, 다른 이들의 글과는 내용이 사뭇 달랐다.

“소금이 짜지 않고 매실이 시지 않으며 겨자가 맵지 않고 찻잎이 쓰지 않음을 책망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소금과 매실, 겨자, 찻잎을 책망하며 너희들은 왜 기장이나 좁쌀과 같지 않으냐고 한다든지, 국과 포를 꾸짖으며 너희는 왜 제사상 앞에 가지 않느냐고 한다면 그들이 뒤집어 쓴 죄는 실정을 모르는 것입니다.”(박제가 ‘비옥희음송(比屋希音頌)’)

살아서 꿈틀거리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만물을 고정된 틀에 가두고 획일적인 문장으로 옮겨 쓴다면 만물의 실체를 제대로 표현할 수가 있겠느냐는 항변이었다. 그것이 중국까지 널리 알려진 박제가의 힘이었다. 당시를 모방한 조선 문인의 시를 중국인들이 굳이 찾을 이유가 있겠나 말이다. 박제가가 개혁하려는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변화를 읽지 못하고 인습적 규범에만 갇혀 있는 사회는 고인 물처럼 썩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제가는 조선의 단단한 습속의 벽에 온몸으로 부딪치며 싸웠다. 임금에게까지 항변했듯 에두르지 않는 직설로 맞섰다. 하지만 혼자의 힘으로 대적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단단한 벽이었다. 그가 말년에 지은 시가 그의 절망을 웅변한다.

“낡은 제도 개혁해 새롭게 하는 게 선왕(정조)의 뜻이었네/ 악의 뿌리 씻어내고 나라 기강을 회복하고자 하셨네/ 선왕의 향기 중도에서 끊겼으니/ 수척하고 나약한 나라 운명 누가 다시 일으킬까.”

※ 이훈범 -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2022년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2023년 초 첫 소설 [화살 끝에 새긴 이름]을 발표했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을 펴냈다.

202404호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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