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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21)]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왜 고향을 떠나야 했을까 

“비를 쫓아 가나안 거쳐, 이집트까지 내려왔다” 

신의 목소리 듣고 75세에 비옥한 고향 갈데아 우르 떠나
최초의 기후 난민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집트로 집단 이주


▎영화 [하나님의 마음] 속 아브라함.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이 신의 목소리를 듣고 75세에 고향 갈데아 우르를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 사진:영화 [하나님의 마음] 포스터 캡처
"여호와께서 아브람(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얻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이 선조로부터 살았던 고향 갈데아 우르를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펼치기엔 적지 않은 나이였다. 심지어 그가 거주하던 갈데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었다. 인류 최초의 도시가 건설됐던 이곳은 당시에 문명이 가장 발달한 지역이었다. 식량, 교육, 치안, 시장 등등 모든 인프라를 따져볼 때 이곳을 능가하는 지역은 당시 지구에 거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법은 매한가지다. 가장 안전하고 삶의 수준이 높은 도시를 떠난다는 것은, 심지어 조상부터 대대로 살아왔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결정이 아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주저 없이 결정했다. 왜냐하면 신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이동은 이후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영감을 줬다.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는 자들에게 70대 고령에 안락한 갈데아 우르를 떠나 큰 성공을 거둔 가장 유명한 사례였기 때문이다.

신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라고 언약했고, 이 말을 믿고 과감하게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은 몇몇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나중에 거대한 부를 일궜다.

아브라함이 주저 없이 떠난 진짜 이유


▎지구 대기의 대순환에 따라 적도 부근에서는 북반구의 아열대고압대로부터 북동무역풍이, 남반구에서는 남동무역풍이 불어와 만나게 된다. 두 방향에서의 무역풍이 만남에 따라 거대한 규모로 공기의 수렴대가 형성되는데, 이를 적도수렴대라고 한다. / 사진:두산백과
그런데 신은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이동하라고 했을까? [창세기]는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아브라함의 이동 경로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이후 [창세기]의 구절을 보자.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를 떠나 처음 정착한 곳은 가나안이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불리는 곳이다. 아브라함이 이곳에 도착하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갈데아 우르를 나와 계속 서쪽으로 길을 떠난 뒤 지금의 팔레스타인에 이르렀을 때 다시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 땅이 바로 약속의 땅이라는 메시지였다. 그래서 이곳에 장막을 쳤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다시 이동해야 했다. 이어지는 [창세기]의 구절이다.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당초 가나안땅에 정착하면 될 줄 알았지만, 아브라함의 이동은 계속됐다. 그는 계속 남쪽으로 다시 떠났다. [창세기]는 그 이유에 대해 “그 땅(가나안)에 기근이 들었으므로”라고 설명한다. 그랬다. 아브라함은 기근 때문에 가나안에 계속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애굽(이집트)으로 다시 이동해야 했다. 고대 근동은 농업과 유목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비가 오지 않아 물이 마르기 시작하면 농사에 쓸 물이 부족해지고, 양과 염소를 먹일 풀도 사라진다. 그러니 초원을 찾아 이들은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안 됐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다시 이집트로 간 이유다. 아마도 이집트의 환경은 가나안보다 더 나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간 사람들은 아브라함뿐만이 아니었다. 당시에 이집트에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지금 표현으로 치면 ‘기후 난민’들이다. 어쩌면 이들은 역사 최초로 기록된 기후 난민일 것이다. 이들은 가뭄으로 메마른 삶의 터전을 떠나 당시 높은 수준의 농업 생산성을 갖고 있던 이집트로 흘러들어왔다.

이집트는 유목도 없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농업 국가다. 농업 사회의 특징은 배타성이다. 한정된 농지에 물을 끌어 써야 하는 농업 시스템은 외부인의 유입을 반기지 않는다. 그래서 대개 몽골처럼 유목민족들이 세운 사회보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분위기가 있다. 그러니 이집트로 들어온 이스라엘인들의 처지가 어땠을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대개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품팔이꾼이나 노예 같은 일을 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것처럼 모세가 이들을 이끌고 나오게 된 것도 이런 열악한 환경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나저나 이 당시 아브라함을 이집트까지 가도록 했던 가뭄의 정체는 무엇일까. 기후학자들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과거엔 지금처럼 건조하지 않았다. 요즘보다 1~3도 가량 높았던 6000~8000년 전에는 물이 부족하지 않게 흐르고 수목이 풍성한 땅이었다. 적도수렴대가 이 지역에서 비를 많이 뿌렸기 때문이다. 지구 대기의 대순환에 따라 적도 부근에서는 북반구의 아열대고압대로부터 북동무역풍이, 남반구에서는 남동무역풍이 불어와 만나게 된다. 두 방향에서의 무역풍이 만남에 따라 거대한 규모로 공기의 수렴대가 형성되는데, 이를 적도수렴대라고 한다.(두산백과 참조)

이집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인들


▎성경의 인물인 아브라함이 살았다고 하는 도시 우르파. 현재는 튀르키예령이다. / 사진:두산백과 캡처(좌)
그런데 한랭화로 온도가 낮아지면서 적도수렴대는 점차 남하하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횟수가 줄어들자 지역도 건조해졌다. 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를 떠난 것도 사실은 비를 쫓아온 것이다. 양 떼를 먹이는 풀도, 경작에 필요한 물도 필요하다 보니 비 내리는 기후를 찾아 가나안을 거쳐 이집트로 남하한 것이다. 당시 이집트에는 그렇게 아시아에서 흘러들어와 정착한 사람들이 많았다.

덧붙여 말하면 애초에 갈데아 우르에서 떠난 이유도 아마 비슷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들었던 ‘신의 목소리’는 비가 내리는 기후를 찾아 떠나야 한다는 절박함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는 그것이 ‘신의 뜻’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훗날 약속받은 대로 풍요로운 보상을 받았다.

참고로 지금보다 기온이 올라가면 다시 과거처럼 적도수렴대가 상승해 중동 지역에 비를 뿌려줄 것이다. 또 지금보다 기온이 내려가도 한대 전선이 남하하면서 이 지역에 비를 뿌려줄 수 있다고 한다. 즉, 중동 입장에선 지금이 최악의 건조한 상태인 셈이다. 그러니까 온난화 현상이 지속돼 1~2도 정도 올라가면 도리어 기후 상황이 나아질 수도 있는 역설도 가능하다. 사실 기후는 거대한 시간을 두고 늘 변화하기 때문에 현재 사람들에게 익숙한 상태가 가장 좋은 기후로 여겨지는 면도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로버트 앨런, 리안더 헬드링, 마티아 베르타치니 등 3명의 경제학자는 ‘정부의 경제적 기원’이라는 논문을 통해 국가 기원의 형성에 대해 흥미로운 가설을 제기했다. 이들은 기원전 2850년 전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원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인근이 강우 패턴의 변화 때문에 물줄기가 크게 6차례 바뀐 것에 착안해 이런 변화가 메소포타미아에 일찍이 도시와 국가를 만들게 촉진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물이 흐르는 길이 바뀌면 기존 농경지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수로 설치와 물 배분 같은 문제가 사회의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이 일대를 5x5㎞의 정사각형으로 세분화한 뒤 강줄기에서 멀어진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을 비교했다. 그 결과 강이 이동하기 전보다 강이 이동한 후에 시장이나 사원 등 공공건물로 표시된 정착지가 있을 확률이 14% 가량 더 높았다. 운하가 건설될 확률도 12% 더 높았다. 운하는 몇몇 개인이 힘을 합쳐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공공재가 아니다. 이것은 사회 전체의 역량을 끌어내야 가능한 토목공사다. 또한 그와 관련된 이해관계자들도 많다. 즉, 어쩌면 최초의 국가는 불안정한 기후와 전보다 악화한 물 자원에 대한 우려가 촉진한 발명품일지도 모른다.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미술가 구에르치노가 1657년 그린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는 아브라함] 속 아브라함의 모습. / 사진:위키백과 캡처(우)
이전에 [삼국유사로 본 ‘단군설화’의 비밀(2023년 4월호)]에서 4200년 전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에 한랭화와 가뭄으로 인해 앞선 농경 기술을 갖춘 환웅 세력이 정치권력을 잡고 고조선을 건국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당시 만주와 한반도도 메소포타미아와 비슷한 처지였다. 한랭화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 더 나은 기후를 찾아 떠돌아야 했다. 환웅 세력도 아마도 이 당시 농경 가능 지역을 찾아 떠돌던 무리였을 것이다. 그를 따르던 무리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등 농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바람, 구름, 비라는 점은 이 같은 추정에 힘을 실어준다. 그리고 이들은 초기 농경 지식과 경험을 활용해 물 자원에 대한 이용 결정권을 갖게 됐고, 이런 과정은 정치적 권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전북 김제에 있는 벽골제(碧骨堤)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쌓아 만든 저수지다. [삼국사기]는 벽골제가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만들어졌다고 전한다. 이 시기에 신라가 전북 지역에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곧이곧대로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공사가 초기 국가의 주요 사업 중 하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공교롭게도 4세기 역시 한반도는 한랭기에 접어들어 수자원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은 시기다.

다시 말해 국가는 홉스가 주장한 것처럼 만인이 투쟁하는 폭력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변화하는 환경에서 서로 어떻게 힘을 합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지 않을까.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404호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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