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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일본 직설(直説), 요설(妖説) 그리고 곡설(曲説)(9)] 고목(古木) 선진국 일본 탐방기 

오랜 세월 땅과 하늘을 연결해온 성스러운 존재 

태평양 전쟁으로 나라 전체가 불탔지만 특유의 정성으로 도시에 넘쳐나는 고목
도쿄 최고 고목 ‘센푸쿠지 은행나무’… 대지진 뒤 살아남은 ‘기적의 소나무’ 2세도


▎센푸쿠지의 도쿄 최고 고목. 지팡이를 꽂아 나무로 만든 스님 신란의 입상과 함께 있다. 고목은 아주 가까이서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몸과 마음으로 느끼면서 대하는 것이 좋다. / 사진:유민호
'61년만의 고전(古典) 부활.’ 2월 초 접한 할리우드발 뉴스다. 일본 영화계 천황으로 불리는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감독 작품이 리메이크될 예정이라고 한다. 1963년 출시된 [천국과 지옥(天国と地獄)]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글로벌 애플TV 확장 기념 작품이다. 할리우드 영화계의 명콤비 스파이크 리 감독과 덴젤 워싱턴이 힘을 합친다고 한다.

일본 영화에 관심이 있다면 [천국과 지옥(영어명: High and Low)]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셰익스피어 작품이나 고대물에 집중했던 기존 구로사와 영화와 다른, 어린이 유괴사건을 둘러싼 수사 심리극이다. 부잣집 자식 유괴사건을 통해 인간 심리와 빈부 갈등을 추리극 스타일로 풀어나간다. 영화가 나온 1960년대 초는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해당된다. 경천동지할 경제 성장과 함께 개인·가족·집단 사이 모순과 갈등이 증폭되던 시기다. 구로사와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결론이나 정답은 없다. 영화 [라쇼몽(羅生門)]처럼 각자의 생각과 행동을 중시 여기는 고대 그리스 드라마 스타일 작품이다. 금수저와 흙수저 간 대립을 통한 이념이나 투쟁에 매달리면서 선악을 분명히 나누는 식의 영화가 아니다. 인간 내면에 숨겨진 성(聖)과 속(俗)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영화 속 캐릭터나 사건에 대한 판단은 관객 개인에게 맡겨진다. 배우 덴젤 워싱턴은 지난해 애플TV를 통해 셰익스피어 [맥베스] 원작의 영화 [맥베스의 비극]에도 등장했다. 스파이크 리 감독의 연출 능력이 기대되는 것은 물론 덴젤 워싱턴이 1960년대 흑백 영화 속 주인공 모습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면서 풀어나갈지도 궁금하다.

서방의 클래식 개념에 어울리는 일본 고목

영화 [천국과 지옥] 리메이크 얘기를 들으면서 주목한 키워드는 ‘고전(古典)’이란 한자어다. 서방 미디어 보도를 보면 일본 ‘고전’ 영화를 21세기 풍으로 바꾼다고 한다. 뉴스를 접하면서 1963년 영화가 고전 대열에 들어선다는 것이 놀라웠다. 고전이라고 하면 뭔가 오래되고, 과학과 무관한 근대 이전 작품으로 느껴진다. 춘원 이광수 작품이 걸작이긴 하지만, 고전으로 부르기는 어렵다. 20세기 후반까지 활약한 구로사와를 고전의 창조자로 대하는 것이 어색하다. 그러나 발 빠르게 돌아가는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태평양 전쟁 후 흑백 영화 전부가 고전에 포함되는 듯하다. 인간 본능이지만, 지금 당장 그리고 눈앞에 펼쳐질 세상에 주목한다. 어제는 어제일 뿐, 살고 살아가야 할 오늘과 내일이 핵심이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동양인이 만든 61년 전 흑백 영화가 어떻게 서방에, 그것도 글로벌 IT 대명사인 애플의 리메이크 영화가 될 수 있었는지 신기할 뿐이다.

여기저기 공부를 하다가 알게 됐지만, 결론은 필자의 무지였다. 구로사와 영화를 고전 영역 밖에 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스스로의 무식에 있다는 의미다. 고전이란 단어를 둘러싼 필자의 편견과 오해가 배경에 있다. 고전이란 단어 속의 한자 ‘고(古)’가 핵심이다. 오래된 것을 의미하는 한자 덕분에 ‘고전=수백 년 전 문학이나 작품’으로 대했다. 그 결과 1963년 영화도 고전 범주 밖으로 처리한 것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서방의 고전은 시간 흐름을 상수(常数)가 아닌 변수(變数)로 대한다. 소설 해리포터에서 보듯 최근 작품이라도 고전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다. 사전적 의미로서의 고전은 영어의 ‘클래식(Classics)’을 어원으로 한다. 클래식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번째는 인류 모두로부터 인정받은 영구불멸 가치를 가진 작품, 두번째는 고대 그리스나 라틴어에 기초한 문학·예술·철학·학문에 관한 영역이다.

고전이란 한자어는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말이다. [사서삼경(四書三經)] 같은 오래된 책과 그 속에 담겨진 예법을 지칭하는 말이 고전이다. 세대가 전승되면서 반드시 오랜 시간이 축적돼야만 하고, 거기에 맞춰 이미 구축된 과거에 무조건 따라야만 한다는 의미가 고전이란 단어 속에 투영돼 있다. 따라서 61년 역사에 불과한 구로사와 영화는 고전 근처에도 들어갈 수 없다.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세계를 추앙하는 서방 클래식 세계관이 중국식 고전과 비슷하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서방은 그리스 철학도 중시 여기지만, 인류 모두에게 인정받는 작품이라면 시간을 뛰어넘어 곧바로 수용한다. 중국에서는 일정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고 해도 고전이 될 수 없다. 그 같은 배경 하의 결론이지만, 동양의 고전은 장유유서 세계관에 따른 결과물이다. 반면 서방의 클래식은 장유유서와 무관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을 전제로 한 것이다. 동양의 세계가 ‘정(静)’, 서방의 삶이 ‘동(動)’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근본적 해답을 고전이란 단어를 통해 재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서방은 구로사와 영화를 클래식, 즉 고전으로 대할 수 있다. 중국식 세계관에 따르면 ‘결코’ 고전이 될 수 없다.

오래된 나무일수록 가까이 다가가 느껴야


▎아사쿠사 은행나무는 ‘신의 나무(神木)’로 불린다. 전쟁 중 공습에서 살아난 기적의 생존물로 추앙된다. 절에 가는 일본인이라면 한번쯤 들러 머리를 숙이고 전쟁 중 숨진 사람들을 기린다. / 사진:유민호
고전의 연장선에 있을 듯하지만, 대략 4년 전부터 고목(古木)에 관심을 갖고 있다. 오래된 나무는 크고 풍성하다. 그러나 아무리 고목이라도 가지·잎·꽃은 막 탄생한 나무와 다를 바가 없다. 몸통은 오래됐지만, 그 위를 장식하는 세계는 한 살짜리 나무와 똑같다. 고목의 모습과 의미는 중국식 고전이 아닌 서방 클래식 개념에 어울린다. 오래된 나무이기 때문에 가지·잎·꽃도 오랜 경륜에 맞춰 자라는 것이 아니다. 당연하지만, 나무에는 계급장이 없다. 고목에 빠진 첫 계기는 튀르키예에서 본 ‘모세 나무(Moses Tree)’다. 기독교 선지자 모세가 자신의 지팡이를 땅에 꽂은 순간 나무로 변해 3000년간 지속됐다고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기승을 부리던 2020년 9월 지중해 동쪽 끝에 인접한 고대도시 안타키아(Antakya) 주변에서 만났다. 한국 가로수로도 활용되는 플라타너스 고목이다. 안타키아는 기독교 신자에게는 안디옥(Antioch)으로 통하는 곳이다. 초기 기독교의 사도 바울이 세운 인류 역사상 첫 교회가 세워진 성스러운 땅이다. 모세 나무는 안타키아에서 서쪽으로 25㎞ 정도 떨어진 지중해 근처에 있다.

오래된 나무일수록 바짝 다가가 가까이서 느끼는 것이 좋다. 직접 만져보고 몸과 부딪치면서 나무 아래에서 심호흡을 하는 것도 좋다. 귀를 바짝 대면 나무의 음성과 신비한 파워도 느낄 수 있다. 대략 17m 높이의 고목으로, 둘레만 7.5m 에 달한다. 몸체는 시멘트로 메워진 거의 화석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러나 푸른 잎과 튼튼한 잔가지가 나무 주변에 퍼져 있다. 나무 바로 옆에는 1901년 사진도 있다. 순례자와 함께 거의 변하지 않은 120여 년 전 모습이 실려 있다. 진짜 3000년 된 수목이냐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믿으면 산도 옮길 수 있고, 안 믿으면 눈앞 진실도 멀리한다. 흥미롭게도 모세 나무는 ‘장수(長壽)의 시냇물’ 주변에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로, 마시거나 목욕을 하면 무병장수한다고 한다. 튀르키예인들은 모세 나무도 ‘장수 시냇물’ 덕분에 3000년이나 생존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튀르키예인들은 장수 시냇물 주변에 모여 식사를 하고 차도 마신다. 모세 나무 주변이 순례지, 관광지이자 나아가 유원지인 셈이다.

나무 하나가 마을 전체를 유지·발전시킬 수 있다는 어른들 말이 생각난다. 그 동네 인심이나 분위기는 고목 존재 여부에 달려 있다는 얘기도 있다. 수백 년, 수천 년 된 고목이 존재하는 한 마을의 평화와 번영도 지속될 수 있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고목이 없는 곳은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의 평화와 번영도 어렵다는 얘기다. 나무는 나무 그 자체만이 아닌, 나무를 둘러싼 주변 환경과 분위기의 결과물이다. 500년 고목이 존재한다는 말은 주변 거주민의 생각과 마음이 500여 년간 함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다의 고래와 아프리카의 코끼리는 존재 그 자체가 감동이다. 인간 기준에 맞춰 움직이거나 애교를 부리면서 다가오지 않는다. 느리지만 거대하고 깊은 몸동작, 헤엄을 치거나 걸어가면서 표출하는 거대한 숨소리가 인간을 압도한다. 조용히 지켜보는 것 하나만으로도 애정, 존경, 신뢰가 생긴다. 고목도 마찬가지다. 태어나서 한자리에 뿌리를 박은 채 수백 년간 세상을 지켜본 통찰의 눈이 나무 주변에 어른거린다. 사람들의 사랑과 정성에 기초해 오랜 세월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성스러운 존재가 바로 고목이다.

전문 정원사가 나무를 관리하는 일본

고목 선진국이라고 할까? 나무를 숭배하고 가꾸며 지키는 데 주목하는 글로벌 최대 선진국으로 일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일본은 나무 대국이다. 태평양 전쟁 기간 수많은 미군기의 공습으로 나라 전체가 불에 탄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2024년 현재 어디에 가든 고목이 넘친다. 나무는 필자가 도쿄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다. 수적으로 많고 오래된 것은 물론 나무의 크기나 종류도 엄청나다.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수십 미터 높이 나무가 도쿄 곳곳에 들어서 있다. 나무가 잘 자랄 토양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본인들의 특별한 정성과 보존 기술도 한몫을 했다. 가령 도쿄 주변 개인주택을 보자. 좁은 정원이지만, 어디 하나 예외 없이 잘 가꿔진 나무를 갖췄다. 한국에서도 가끔씩 볼 수 있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전혀 다르다. 그냥 막 자란 나무가 아니라 사람 손이 곳곳에 드리워진 잘 가꿔진 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지를 치는 정도가 아닌, 나뭇잎과 나무의 골격도 ‘철저히’ 인공적으로 관리한다. 전문 정원사가 계절별로 나무를 관리한다. 서울 청와대 주변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비교적 오래된 소나무가 많다. 사람 손때가 묻어 있지만, 일본과 비교하면 확연히 다르다. 가지치기 정도는 하지만, 소나무 잎과 나무 골격에 대한 관리가 거의 없다. 도쿄 황궁 주변 소나무를 보면 사람 손이 나무 구석구석 배어 있다. 바늘형 소나무 잎을 예로 들면, 한국의 경우 바깥쪽 소나무 잎의 높이를 하나로 통일하는 정도의 관리에 그친다. 일본은 소나무 잎 높이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잎의 양도 70% 정도 줄인다. 따라서 일본 소나무 잎은 뭔가 듬성듬성하고 틈이 많다. 중앙청 소나무 잎은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일본의 경우 미적 감각을 높이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소나무 잎으로 갈 영양분을 가지로 보내기 위해 잎의 수를 조절한다고 한다. 사람 손이 많이 갔다고 해서 나무에 좋고, 미적 감각이 높아지진 않을 것이다. 한국의 자연관은 그대로 두면서 지켜보는 데 있다. 반면 일본의 자연관은 철저히 사람 손으로 관리하는 인공적 세계에서 출발한다. 도쿄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일본식 정원은 사람 손이 극대화된 최적 본보기다. 나무뿐만 아니라 돌, 꽃, 시냇물, 호수, 심지어 이끼류와 물속 금붕어조차도 사람 손으로 조절하고 통제한다. 잔인하게 들릴 듯하지만, 금붕어의 등 윗부분 색깔을 조절하기 위해 불로 가볍게 지지는 식의 인공 장식법도 있다.

모세 나무와의 만남 이후 알게 된 새로운 세계지만, 여행에 나서면 현지 고목 방문도 잊지 않는다. 2월 초 도쿄에 들러서도 고목 탐방에 나섰다. 도쿄 최고 고목으로 통하는, 미나토구(港區) 1200년 역사의 사찰 센푸쿠지(善福寺)의 은행나무가 주인공이다. 수령 750여 년으로, 도쿄 최고 고목으로 통한다. 1926년천연 기념물로 지정된 고목으로, 14세기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선조로 추앙된 스님인 신란(親鸞)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유산이자 유물이다. 모세가 그러했듯 신란이 센푸쿠지 방문 당시 땅에 꽂았던 지팡이가 나무로 자라 고목이 됐다고 한다. 센푸쿠지 은행나무는 1945년 도쿄 공습 당시 불에 타 거의 사라질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성을 다해 꾸준히 가꾸는 과정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센푸쿠지는 도쿄 한국 대사관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필자가 들른 날은 이미 추위가 풀린 화창한 봄 날씨였다. 센푸쿠지 은행나무는 그동안 수차례 스쳐 지나간 적이 있다. 20여 년 전 처음 들렀을 때는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주워 책장 사이 어딘가에 보관하기도 했다. 올해는 종전과 달리 좀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는 생각에 들렀다. 아자부주반(麻布十番)역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어가자 센푸쿠지가 나타났다. 사찰 왼쪽에 하늘로 치솟은 750년 고목이 보인다.

사찰 아사쿠사에는 700년 된 ‘신의 나무’도


▎메이지 진구 본당과 바로 앞의 상록수. 쌍둥이 나무처럼 보이지만, 기묘한 관리법에 의해 왼쪽 나무 두 개를 하나로 엮어서 선보이고 있다. 왼쪽 두 나무는 ‘부부 나무’로 불린다. / 사진:유민호
기묘한 풍경이지만 센푸쿠지 바로 뒤에는 약 40층 높이 빌딩이 들어서 있다. 빌딩 아래가 가늘고 꼭대기 부분이 굵은 역타원형 빌딩이어서 볼 때마다 뭔가 불안하다. 사찰 정문에 들어가 왼쪽으로 들어서면 신란 스님 입상이 보인다. 고목은 신란 입상 바로 옆에 있다. 굵은 밑동에서 위로 올라가면 높이 35m에 달하는 가지들이 솟아 있다. 겨울이라 은행잎은 없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굵은 몸통과 앙상한 가지만 드러나 있다. 자세히 보면 몸통 주변에 연기에 그을린 흔적도 볼 수 있다. 전쟁 중 불탔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나무들이 도쿄 곳곳에 있다. 한국 관광객 대부분 들르는 사찰 아사쿠사(浅草) 안에는 ‘신목(神木)’, 즉 신의 나무로 불리는 고목이 하나 있다. 공습으로 인해 내부 공간이 탄, 검은 연기에 그을린 700여 년된 은행나무다. 지금도 많은 일본인이 찾는 도쿄 명소이자 순례지다. 오래된 은행나무는 일본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벌레가 없는 약재이자, 가을철 도시 풍경을 노랗게 수놓는 장식물 역할도 한다.

진자(神社)는 고목 순례의 출발점이자 종점이다. 진자에 가면 고목이 있다. 일본 전통 종교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진자와 불교 사찰이다. 서로 공통되는 부분이 많지만, 무덤 여부가 둘을 구별할 가늠쇠 중 하나다. 사원 근처에 무덤이 있다면 대체로 불교 사찰이다. 가족묘와 같은 무덤이 없이 사원과 종교의식 건물만 있다면 진자에 해당된다. 진자 안에 무덤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불교 사찰이 무덤의 주된 공간이다. 진자는 무덤이 없는 대신 나무가 많다. 고목이 즐비하고, 수백 년 된 키 큰 나무도 많다. 절에도 나무가 있지만,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진자에 못 미친다. 일본 여행 중 구글에 ‘Jinja’라는 키워드를 치면 도보로 10분 안에 주변 진자로 갈 수 있다. 나무로 뒤덮인 곳이기 때문에 쉴 수도 있다. 진자는 인도발 힌두교 신, 일본 자체에서 탄생한 신, 불교의 부처, 과거 일본 역사상 업적을 남긴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다신교에 기초한 ‘신(神)들의 박물관’으로 생각하면 된다. 일본 천황을 기리는 ‘신토(神道)’는 크게 보면 진자의 영역에 들어간다. 따라서 신토사원에 가도 나무들이 넘친다. 진자와 신토의 나무는 신이나 위대한 사람들에 준하는 성스러운 존재다. 신토의 고목 가운데 최고 하이라이트는 도쿄의 명소, 메이지 진구(明治神宮)에서 만날 수 있다. 본당 바로 앞에 들어선 쌍둥이 고목이 주인공이다. 정면에서 보면 2개의 고목이 본당을 지키면서 조화롭게 들어서 있다. 그러나 왼쪽 고목을 자세히 보면 하나가 아닌 두 개를 이어 만든 것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세 개의 나무지만, 교묘하게 관리를 해 정면에서 보면 쌍둥이 고목처럼 보인다. 겨울에 가도 맑고 밝은 빛을 잃지 않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청결해지는 사계절 상록수다.

고목은 선조와 후대로 연결되는 발판

조선 주자학 세계관의 반영이지만, ‘다신=잡신=혹세무민’으로 결론짓는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지만, 나무나 동물에 대한 숭배를 원시적이고 무지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인간이 고목에 머리를 숙이는 것을 반드시 종교적 차원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숭배라기보단 오랜 세월을 이겨낸 자연에 대한 예의로 보면 된다. 1000년 고목에 빌면 팔자를 고치고 복을 불러일으킨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고목을 눈앞에 두면서 자신의 마음과 정결한 자세를 다짐한다. 폭포 아래 물속에서 행하는 기도와 같다. 폭포 아래 기도가 물을 숭배하는 자세라고 비난하진 않을 것이다. 목욕재계(沐浴齋戒)는 허용하지만, 나무와 동물에 대한 기도를 무시하는 이중적 자세가 이상하다. 자연은 신이 만든 최고의 창조물이다. 자연에 대한 사랑은 신에 대한 존경과 찬미로 이어질 수 있다. 일본에 가면 2세, 3세, 4세로 이어진 고목 혈통을 잇는 나무가 많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기적의 소나무(奇跡の一本松)’가 최적 본보기다. 당시 쓰나미가 밀려들면서 7만여 그루 소나무 전부 휩쓸려갔지만, 유일하게 생존했다. 그러나 이후 염분에 의해 고사하면서 유전자 복제 소나무가 탄생한다. 현재 후쿠시마 전역에는 ‘기적의 소나무’ 2세들이 자라고 있다. 일본 전역에 드리워진 수많은 고목은 신이 가진 또 다른 얼굴일지 모른다. 실제로 인도 힌두교는 자연과 동물을 신의 또 다른 얼굴로 보면서 존경하고 찬미한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신과의 관계도 긴밀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기념식수는 특별한 날 이뤄지는 뜻깊은 의식이다. 보통 순국열사나 역사상 사건을 기념하면서 기념비와 함께 나무를 심는다. 나무를 인공적으로 심고 옮기는 것은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 시대에서도 볼 수 있다. 이를 국가·사회적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처음 시행한 곳이 일본이다. 진자나 절 설립과 함께 나무부터 심듯 국민들의 단결과 화합을 드높일 목적으로서의 기념식수 행사가 19세기 말 이래 곳곳에서 펼쳐진다. 일본은 지금도 특별한 행사 전후 기념식수를 ‘반드시’ 행한다. 한국에서도 한때 유행했지만, 최근에는 기념비만 세우고 기념식수는 생략하는 분위기다. 고목은 신의 얼굴인 동시에 나와 우리 선조와 후대로 연결되는 발판이자 결과물이다.

수백만 년 인류 역사를 통해 지금처럼 인간의 고개가 땅에 떨어진 때도 없었을 듯하다. 하루 종일 머리를 땅 아래로 처박은 채 살아가고 있다. 21세기에 갑자기 등장한 모바일이 원인이다. 밝은 보름달, 대낮의 태양, 가을의 드높은 하늘, 초봄 들판 위로 올라가는 아지랑이를 느끼고 본 적이 언제였던가? 고목을 보려면 고개를 하늘로 올려야만 한다. 키다리 나무를 만난다는 것은 눈만이 아닌, 몸과 마음도 하늘로 향한다는 의미다. 사방으로 뻗은 고목의 생명력에 빠져들수록 하늘의 신과도 가까워질 수 있다. 도쿄 전역에 넘치는 기념식수가 일본, 아니 인간 재발견의 소재나 주제가 될 수 있다. 삶의 향기를 드높일 계기로 곳곳에 뿌리를 박은 고목보다 더 아름답고도 성스러운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404호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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