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옥분(65) 공주떡집 사장이 떡 공장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
"기사 양반, 서울에서 최고로 돈 많고 사람 많은 곳으로 갑시다!”
1999년 겨울, 서울 반포동 고속버스터미널에 막 도착한 박옥분 공주떡집 사장은 택시를 잡더니 다짜고짜 “서울에서 가장 잘나가는 곳으로 가자”고 외쳤다. 잠시 당황한 택시 기사는 물정 몰라 뵈는 ‘시골 손님’을 강남으로 안내했다. 박 사장은 택시를 타고 압구정·대치동을 돌며 창문 틈으로 보이는 부동산 중개업소 전화번호를 재바르게 적었다.
“대전은 너무 멀다”는 서울 단골손님들의 투정(?)에 강남 어디든 목 좋은 곳에 ‘서울 분점’을 낼 요량으로 떡집 자리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그렇게 자리 잡은 곳이 지금의 압구정 현대백화점 뒤쪽 골목이다. 대전에서부터 15년 단골인 박희영씨는 한 달에 열다섯 번 이상 압구정 공주떡집에 전화한다.
물론 떡을 주문하기 위해서다. 박씨는 “식사 대용, 선물용으로 떡을 구입한다”며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맛이 한결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떡을 선물하면 받은 사람이 어디 떡이냐고 꼭 다시 연락한다”며 “1만원어치를 주문해도 고객의 요구에 따라 맛과 색상을 맞춰주는 것이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번쩍거리는 간판 하나 없이도 10년째 ‘손님 몰이’를 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곳은 ‘망하는 자리’로 불렸다고 한다. 어느 업종이든 문을 여는 대로 몇 년을 버티지 못한 덕에 공주떡집은 권리금도 없이 입주할 수 있었다. 대전 본점에서 배달부터 시작해 하나 둘씩 ‘떡’을 배운 맏사위 주경현(46)씨는 이제 어엿한 사장님이 됐다.
성공 비결을 묻자 그의 대답은 “모든 게 장모님 손에 달려 있다. 대전에 가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대전 용문동에 있는 공주떡집 본점에서 박옥분 사장을 만난 것이 지난 2월 25일이다.
>> 왜 이름이 ‘공주떡집’입니까?
“고향이 공주니까 공주떡집이지.”
그러니까 박 사장은 ‘공주댁’인 셈이다. 인사를 나누기 무섭게 박 사장은 떡을 몇 접시 내왔다. 기자가 내민 명함이 떡에 깔린 것도 모르는 듯했다.
>> 그런데 왜 대전에서 사업을 시작했나요?
“아, 큰 곳에서 해야 장사가 되지! 벌써 40년이 지났네. 스물넷에 시집 와서 시부모님에 시동생 여섯이랑 공주에서 살았는데 도저히 먹고살 길이 안 보여. 그래서 장에 옷감 내다 판 돈을 남편한테 안겼어요. 그 돈으로 서울이든, 대전이든, 부산이든 어디 큰 도시에 자리 잡고 부르라고.”
이렇게 등 떠밀려 집을 나선 남편 배태희(69)씨는 정확히 보름 만에 부인을 대전으로 불렀다. 벽돌공장에서 막일을 해 번 돈으로 용문동에 작은 거처를 마련하고 나서다. 젊은 부부는 국수를 팔고 쌀을 배달해가며 조금씩 돈을 모았다. 그러던 중에 방앗간을 싸게 내놓는다는 사람이 있어 공주에서 시부모가 소 팔아 보내준 돈 10만원에 그동안 모아두었던 3만원을 보태 방앗간을 샀다. 이게 1968년이다.
그런데 사고가 났다. 전 재산을 털어 산 방앗간이 무허가 건물이라 헐릴 위기에 놓인 것. 억울하게 사기를 당했지만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으란 법은 없었는지, 아는 사람이 방앗간을 빌려줬다. 그때부터 참기름 짜고, 고추 빻고, 가래떡 뽑으며 자연스레 떡에 마음이 갔다고 한다.
“왜 여기는 낱개로 안 싸주느냐?”
>> 원래 떡 만드는 재주가 좀 있었나 봐요?
“재주는 무슨, 동네에서 행사를 하면 증편을 해주던 이가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가도 만드는 방법을 모르겠더라고. 그 집에 쌀을 대는 방앗간에 찾아가 몇 날 며칠 앉아 있었더니 안주인이 자기는 필요 없다면서 쪽지를 하나 내밀었어요.”
쪽지에는 증편을 만드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비슷하게 흉내를 낼 수 있게 될 때쯤 공주떡집은 방앗간에서 떡집으로 자리를 잡았다. 바람떡, 찰떡 등 메뉴도 한 가지씩 늘었고, 공주에 있던 시부모까지 대전으로 모셨다. 그런대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그런데 이때부터 박 사장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결혼식이 있으면 예식장에 가서 찰떡을 도마에 놓고 직접 썰어 주는데 자꾸 떡이 달라붙어서 먹기가 너무 불편하더라고.” 고민 끝에 비닐을 잘라 떡을 한 개씩 포장했다. 사람들이 편하게 떡을 집어먹는 것을 보고 아예 모든 떡을 낱개로 포장했다. 개별 포장은커녕 떡이라면 으레 큰 시루를 먼저 떠올리던 1980년대였다.
>> 낱개로 싸면 비닐 값도 더 들고 손이 많이 갈 텐데요.
“그렇지. 괜한 짓 한다고 남편한테 혼도 많이 났어요. 그런데 한 번 해보니까 그렇게 안 싸고는 불편하겠더라고. 나중에 들으니 다른 떡집 단골들이 ‘왜 여기는 낱개로 안 싸주느냐’고 성화였다고 해요.”
박 사장의 새로운 시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남들 다 하는 메뉴로는 살아남기 어렵겠다 싶어 영양떡을 개발해 상품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가 1995년이다. 영양떡은 찰떡에 밤, 대추, 잣 등 각종 견과류를 넣은 떡인데 쑥, 호박, 흑미, 팥앙금, 깨 등 주 재료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고 식사 대용으로 좋다.
일명 ‘공주떡’이라 불리는 이 떡은 냉동실에서 1~2시간 전에 꺼내 놓으면 찌지 않아도 원래 맛 그대로 먹을 수 있다. 이른바 ‘박옥분표 특허상품’인 셈이다. 맏사위 주경현씨는 이 영양떡을 두고 “블루오션을 개척한 벤처상품”이라고 자랑한다. 압구정동에 서울 분점을 내고 첫 5년 동안 공주떡 한 가지로 전화선이 ‘마비’됐다.
공주떡은 홍선기 당시 대전시장이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가져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고 한다. 지금도 전체 매출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특히 공주떡은 좋은 재료를 아끼지 않고 쓰는 대신 값을 조금 더 받겠다는 ‘고급화 전략’을 통해 진가를 발휘했다.
“1997, 98년에 외환위기가 왔잖아요. 돈 있는 사람들은 쓰임새를 크게 줄이지 않더라고. 믿을지 모르겠지만 공주떡집은 외환위기 때가 제일 호황이었어요. 서울·대구·부산으로 하루에 몇 대씩 (배달을) 나갔지.”
>> 떡을 맛있게 하는 비법이 뭡니까?
“비법이 따로 있나. 좋은 재료로 정성스레….”
박 사장이 ‘모범답안’을 읊고 있는 중에(?) 5년 동안 떡을 만들었다는 생산팀 직원이 ‘정확한 해답’을 내놓는다. 재료를 고르는 것과 준비에 철두철미하다는 것이 직원의 얘기였다. 가령 10년 동안 거래한 부여 쌀은 밥을 해보고 맛이 없으면 몇 백 가마니도 다시 되돌려 보낸다. 며칠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단다.
무조건 최상급을 요구하는 박 사장에게 쌀집 주인이 “나도 좀 살자”고 아무리 하소연해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쑥은 여수에서, 밤은 공주 정안에서 가져오고 호박은 단호박만 쓴다. 소금은 직접 구매해 3년 동안 쓸 양을 저장해 놓고 쓴다. 지난 1년 새 재료 값이 20% 정도 올랐지만 떡의 질과 양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박 사장은 또 재료를 외부에서 조달하지 않고 직접 챙긴다. 팥을 직접 볶고 쑥도 직접 찐다. 인공색소나 방부제를 넣는 것은 꿈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방부제를 넣으면 최소 하루는 더 팔 수 있지만 ‘내 손자에게 먹이는’ 떡에 해로운 짓을 할 수 없다는 게 박 사장의 말이다.
그야말로 팔 수 있는 유효기간이 아니라 맛이 가장 좋은 ‘상미(上味)기간’에만 떡을 팔겠다는 것이다. 그날 남은 떡은 몇 군데 단체에 기증해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준다. 둘째 사위인 강성철(43)씨가 경영하는 대구 공주떡집 역시 팔고 남은 떡을 회수한다. 지금은 매장에서 떡을 팔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전화로 맞춤 주문만 받았다.
압구정 공주떡집은 지금도 100% 맞춤 주문으로 떡을 생산한다. 전화로 주문을 받고 나서야 떡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실에는 ‘직원용’ 떡뿐이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들렀다가 고를 떡이 없어 실망해 돌아간 적도 있었단다.
요즘 히트작 없어 새 연구 중
“유효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경단처럼 쉽게 상하는 떡 몇 가지는 여름에는 아예 안 팔아요.”
직원이 원망인지 자랑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고는 떡 공장으로 잰걸음으로 돌아갔다. 주·야간 합쳐 12명인 생산팀 직원은 야단맞기 일쑤다. 공장을 맴돌며 무작위로 떡을 집어 간을 보는 박 사장에게서 시도 때도 없이 불호령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 요즘도 직접 떡을 만드시나요?
“이젠 내가 다 못하지. 88년에 사람을 쓰기 전까지는 혼자 다 했어요. 떡을 보통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만드니까 24시간 영업이거든. 사흘 밤낮을 새운 적도 있고 하루에 10분 잔 적도 허다했지. 그때 애들이 참 많이 도와줬어.”
첫째, 둘째 딸은 태어날 때부터 떡 반죽을 가지고 놀았으니 어머니 못지않은 베테랑이다. 맏사위와 둘째 사위는 연애 시절 주말마다 불려 와서 떡을 포장하고 배달하러 다녔단다. 결국 맏사위는 자동차 영업사원을 그만두고 박 사장의 문하생이 돼 서울 압구정점을 맡았고, 둘째 사위는 2006년 대구 용산동에 대구 공주떡집을 냈다.
대전에 남은 막내아들 배중수(35)씨와 며느리는 대전의 다섯 개 지점을 관리한다. 사위 둘은 장모 얘기를 하면서 연방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어디 떡이 맛있다는 얘기가 들리면 당장 찾아가서 맛을 본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전라도 완도 바람떡이 유명하다고 해서 1박 2일로 ‘원정’을 다녀왔단다.
>> 이제 편히 계셔도 될 것 같은데요.
“공주떡 이후로 이렇다 할 히트작이 없어. 그래서 더 연구 중이야. 근데 요새 영 아이디어가 없네.”
>> 연구요?
“요새 스피드 시대 아니여? 떡 문화가 많이 바뀌었잖아. 집에서 뷔페로, 다시 카페로. 양도 줄었고, 포장도 신경 써야 하고. 그러니 더 연구할 수밖에. 나도 연구 많이 해요. 나랑 같이 연구만 하는 직원도 따로 있어.”
>> 떡집을 더 확장할 계획은 없나요?
“막내아들이 대전 관평동·월평동·관저동에 떡 카페를 내면서 사업이 많이 커졌지…. 그런데 나는 자꾸 뭘 벌이는 게 불안해. 내 손이 그만큼 덜 가니까.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그래도 부산에는 한 번 내려고 해. 서울·대전·대구 찍었으니 다음은 부산이네.”
>> 전국 제패의 꿈인가요?
“(활짝 웃으며) 그래 전국 제패. 맞네!”
공주떡집 이래서 성공했다 □무엇이든 ‘내 손’으로 환갑이 넘었지만 박옥분 사장은 쌀이며 밤, 소금 등 재료를 고르는 일부터 팥 볶고 쑥을 찌는 일을 직접 한다. □이순(耳順)을 무색하게 한 R&D 맛있다고 하는 전국의 유명 떡집에 다니면서 ‘경쟁 제품’을 연구한다. 그는 공주영양떡을 이을 ‘신제품’ 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돈이 몰리는 곳을 찾아가라 서울이든, 대전이든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방앗간을 얻고 영업점을 냈다. 그래야 소문도 더 빨리 타 성공할 가능성이 커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