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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 등 보빙사 큰절로 禮 갖춰 

“조선의 청년 실세, 아서 대통령 만나 독자외교 초석 다졌다”
조선 개화기 100가지 경제풍경 ⑭ - 코리안 프린스, 미국 대통령을 방문하다
전봉관의 근대사 가로보고 세로읽기 

전봉관·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1883년 5월 특명전권공사 푸트가 조선으로 부임하자, 그해 7월 고종은 미국으로 보빙사(報聘使:답례 사절)를 파견한다. 보빙사 전권대신에 임명된 인물은 24세 청년 민영익. 조선이 서양으로 파견한 최초의 외교사절단 수반에 쟁쟁한 고관들을 제치고, 약관을 갓 넘긴 청년이 선임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민영익은 1860년 민태호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7대조 민유중의 딸이 숙종 계비로 책봉되면서 중앙 정계의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지만, 고조부가 예조판서를 지낸 이후로는 권력에서 점차 소외되었다. 민영익이 태어났을 때, 민태호는 동생 집에 얹혀살면서 콩죽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처지였다.



부친의 초상 때 관을 살 돈이 없어 시신을 짚자리로 말아 출상했을 정도로 가난했다. 간구했던 민영익의 집안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그가 7세 되던 해인 1866년 민치록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면서부터였다. 민비 책봉 이전 몇 안 되는 과거 합격자였던 그의 숙부 민규호는 일약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고, 1870년 그의 부친도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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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7호 (2009.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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