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이강호의 생각 여행(58) 한여름 밤 야외 오페라와 감사의 힘 

 

일생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인 야외 오페라 감상을 위해 오스트리아 브레겐츠와 이탈리아 베로나를 찾았다. 희망을 현실로 이뤄낸 지금의 감동이 모두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주변의 도움 덕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오스트리아 브레겐츠의 호반 위에 야외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위해 설치된 거대한 무대.
한여름 밤 달빛 아래 상연하는 야외 오페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아름다운 호숫가에 오페라 무대가 설치되고 호수 위에 서서히 저녁노을이 물들 무렵, 여름밤의 환상적인 오페라 서곡이 울려 퍼진다. 또 옛 로마의 원형경기장 아레나에서는 뜨거운 열기 속에 하늘 멀리 보름달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오페라가 공연된다. 얼마나 멋진 장면인가? 평생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인 야외 오페라 감상 여행을 하려고 경유지인 스위스 취리히로 향했다. 호반 오페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 브레겐츠(Bregenz)로 가기 위해서다.

저녁 무렵 취리히에 도착했다. 우연히도 유럽 최대 테크노 음악 축제로 불리는 취리히 스트리트 퍼레이드(Zurich Street Parade)가 열리는 날이었다. 취리히에서 가장 큰 연례행사로, 도심의 주요 도로를 다 막아놓고 어마어마한 인파가 움직인다. 별의별 복장으로 꾸민 이들이 저마다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남자들은 윗옷을 벗은 채 움직이는 사람도 많았고, 여자들은 희한하고 특이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축제에 참여하고 있었다. 1년에 한 번 이웃 나라 사람들까지 수십만 명이 참여해서 젊음을 발산하고 한여름을 즐기는 멋진 축제다.

축제를 보기 위해 야외 바(Bar)에서 맥주 한잔을 즐기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젊은 독일 여인이 한국말을 하는 우리에게 “말이 익숙하다”면서 이야기를 건넨다. 알고 보니 한양대학교에서 6개월 동안 공부해서 서울을 잘 안다고 했다. 내친김에 한국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은 이제 유럽에서 세계적인 문화국가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하룻밤 머물려고 들른 취리히였지만, 이튿날 아침 시간을 할애해 쿤스트하우스 취리히(Kunsthaus Zürich)를 찾았다. 미술관 입구 앞마당에는 로댕의 역작인 ‘지옥의 문‘이 설치되어 있어 쿤스트하우스의 높은 위상을 이야기해주는 듯했다. 미술관을 돌아보며 놀란 것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세계적 작품이 컬렉션돼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네(Monet), 샤갈(Chagall), 피카소(Picasso),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를 비롯해 뭉크(Munch), 로스코(Rothko) 등 엄청난 대가들의 작품을 행복한 마음으로 감상했다.

호수 위에서 펼쳐지는 감동


▎이탈리아 베로나의 아레나. 로마 시대의 건축물로 지금도 야외 오페라 공연장으로 유명하다.
이제 호수 위에서 상연하는 오페라를 보기 위해 오스트리아 서북쪽 끝에 자리한 브레겐츠로 이동했다. 취리히에서는 자동차로 약 2시간 거리다. 브레겐츠에 근접하니 바다처럼 큰 보덴호(Bodensee) 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요트가 물살을 가르며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보덴호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이 국경을 마주한 거대 호수다. 브레겐츠에 도착하니 벌써 야외 오페라를 관람하려고 이웃 나라와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브레겐츠 페스티벌(Bregenz Festival)은 매년 7월과 8월에 오스트리아의 아름다운 호반 도시인 브렌겐츠에서 열리는 공연예술 축제다. 호수에 설치한 대형 수상 무대로 오페라 애호가들이 모여든다.

이 축제는 2차 세계대전 1년 후인 1946년에 국제행사가 된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매년 20만 명 넘는 관람객이 찾는 세계적인 문화 행사로 자리 잡았다. 2017년과 2018년에 비제의 [카르멘]을 선보였을 때는 관객 40만 명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날도 야구장 스타디움 같은 거대한 관객석이 완전 만석이었다. 호수 위에 붉은 석양이 서서히 물들어가면 오페라서곡이 울리고 환상적인 조명 아래 공연이 시작된다. 호수와 여름밤 하늘, 오페라라는 예술이 어우러져 멋진 무대가 펼쳐진다. 이번에 관람한 오페라는 독일 낭만 오페라로 여겨지는 요한 프리드리히 킨트의 대본에 기초한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3막짜리 오페라[마탄의 사수(魔彈의 射手, 독일어: Der Freischütz, 영어: The Freeshooter)]였다. 연인인 아가테(Agathe)와 사랑을 이루기 위해 악마와 거래해서 마탄을 얻은 사냥꾼 막스(Max)가 이틀 동안 겪는 고뇌와 슬픔의 이야기가 주제다.

사악한 사냥꾼 카스파(Kaspar)가 악마와 결탁해 막스를 유혹하고 마탄을 사용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막스는 아가테를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막스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회개하며, 아가테는 신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카스파는 결국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고, 막스는 자신의 과오를 용서받고 아가테와 결혼한다는 해피 엔딩이다. 오페라서곡이 연주될 때 관악기 혼이 중간에 연주되어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한다. 공연 중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냥꾼의 합창’이 랄랄라 랄랄랄라 울려 퍼진다. 연기자들과 성악가들이 호수물에 직접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면서 열연한다.


▎말과 당나귀까지 동원된 초대형 야외 오페라 [카르멘(Carmen)] 공연을 마친 후 주인공 카르멘이 무대 인사에 나섰다.
평소 자주 접했던 오페라가 아니기에 출국 전에 장일범 교수로부터 ‘마탄의 사수’ 감상 포인트에 대해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독일어라는 언어장벽이 있기 때문에 유튜브를 보며 오페라 해설도 미리 예습하고 갔다. 하지만 이번 연출은 악마 역을 맡은 연기자가 아주 많은 부분을 노래 대신 독일어 대사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다른 언어권 국가에서 온 관람객을 위해서 잘 보이는 번역 전광판을 설치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본다.

호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무대가 막을 내리고 연기자들이 커튼콜에 나섰다. 어떤 연기자는 물속에 잠긴 채, 또 다른 연기자는 무대 위에서 인사하는 것도 멋진 장면이었다. 뜨거운 여름밤에 펼쳐진 호반 오페라는 단순한 예술적 표현을 넘어 자연과 음악, 사람의 감정이 하나 되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오페라의 매력을 배가한 호수 위 대형 무대는 다음 날 낮에도 개방돼서 다시 한 번 돌아보면서 지난밤에 즐긴 장면들을 떠올렸다. 무대 곳곳을 사진으로 남기는 재미도 쏠쏠했다. 수상 무대라는 특별한 환경에서 펼쳐진 오페라는 단순한 공연이 주는 감동 이상이었다. 브레겐츠 호반에서 느낀 감동은 특별한 평생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옛 로마 원형경기장에서 열린 오페라


▎아레나 공연에서 큰 감동을 준 오페라 [아이다]의 이집트식 기둥과 오벨리스크. 무대 위로 보름달이 비친다.
다음 야외 오페라 공연의 목적지인 이탈리아 베로나(Verona)로 향했다.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베로나는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주 아디제강 유역에 자리한 도시다. 베로나에는 고대 로마 원형극장인 아레나 디 베로나(Arena di Verona)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된 줄리엣의 집이 역사 지구에 있다. 베로나를 방문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아레나에서 줄리엣의 집에 이르는 중심 상가 도로 포장재다. 특이하고 멋진 대형 천연 대리석이다. 베로나 아레나는 로마 시대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장소로, 그 크기와 아름다움은 소리의 울림을 극대화한다.

올해 여름밤에는 [카르멘]과 [아이다]라는 두 작품을 아레나에서 야외 오페라로 보며 잊지 못할 추억을 갖게 됐다. 첫날 아레나에서 관람한 프랑스 작곡가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의 [카르멘(Carmen)]은 시작과 막 사이마다 실내 무대의 막을 대신하는 병풍 같은 멋진 스크린을 사람들이 뒤에 서서 좌우로 열었다 닫았다 하며 야외 무대의 특징을 잘 살렸다. 대형 징을 든 여인이 무대 가운데로 나와서 두드려 오페라의 시작을 알리는 모습도 분위기를 고조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아름답고 유혹적인 여주인공인 집시 카르멘과 고뇌하는 돈호세의 열연도 돋보였다. 사랑·질투·배신·사건의 순간들과 화려한 투우사들의 모습이 멋진 아리아로 불릴 때면 마치 그 무대의 주인공인 된 듯 빠져들었다. 평소에 자주 들었던 아리아인 ‘하바네라’와 ‘투우사의 노래’가 더욱 친근한 느낌으로 전해졌다.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짐작되는 수많은 관객이 열광했다. 엄청나게 큰 무대에는 여러 마리의 말과 당나귀까지 등장했다. 어린이 합창단과 스페인 무용단, 성악가와 무용수들이 줄잡아 500명이나 출연했고, 오케스트라도 70~80명이 참여해 실내 공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대형 공연을 만들었다. 화려한 의상과 생동감 넘치는 무대, 스페인 무용단의 힘차고 화려한 무용은 몸을 들썩이게 만든 멋진 연출이었다.

이튿날에는 안토니오 기슬란초니의 대본에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가 작곡한 4막짜리 오페라 [아이다]를 관람했다. 이 오페라는 전날과 또 다른 차원의 경이로움으로 관객들을 초대했다. 1913년 베로나 아레나에서 [아이다]가 초연된 것은 아마도 아레나의 장엄한 구조와 매우 잘 어울렸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날 관람한 [카르멘]과 달리 [아이다] 무대는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이 웅장한 신전의 기둥을 모두 노출했다. 따라서 막간에 작업자들이 나와 무대를 바꾸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아이다]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의 전쟁 당시 사랑을 다룬 서정적이고 웅장한 이야기이다. 에티오피아와 전쟁이 발발하자 이집트 사령관으로 발탁된 라다메스(Radames) 장군은 에티오피아의 공주이지만 노예로 잡혀온 아이다(Aida)를 비밀리에 사랑한다. 한편 이집트 공주 암네리스(Amneris)도 라다메스를 사랑하지만, 아이다가 자신의 라이벌이 될까 봐 두려워한다. 개선장군이 된 라다메스가 암네리스와 결혼하게 되었지만 적에게 중요한 군사 비밀을 누출해 반역자로 체포된다. 암네리스의 구명 노력에도 불구하고 라다메스는 사형의 길을 택해 사랑하는 연인 아이다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베로나 중심가 도로 위의 대형 마블 타일이 오랜 세월을 지키고 있다.
엄청나게 큰 대형 무대인 아레나의 계단에 이집트 병사들이 수없이 정렬하는 장면과 웅장한 이집트 신전에서 펼쳐지는 에너지 넘치는 제사를 표현한 춤도 멋지게 연기됐다. 라다메스 장군의 승리를 축하하는 ‘개선행진곡’이 연주될 때 트럼펫을 선두로 한 관악기 나팔 소리는 정말 관객의 심장을 뛰게 하는 감동 그 자체였다. 사랑·질투·충성·국가·배신의 감성을 그대로 호흡하며 관람하는 가운데 무대 위로는 보름달이 조용히 떠올랐다. 열정적인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대형 무대의 연기자들까지 지휘하는 모습도 특별했다. 특히 이번 오페라[아이다]에는 한국인 성악가가 아레나의 대형 무대에 올라 멋진 모습을 선보였다. 에티오피아 왕이자 아이다의 아버지 아모나스로 역에 박영준 바리톤, 이집트 왕 파라오 역에 임채준 베이스가 열연해 한국인의 높은 위상을 보여주었다. 베로나 아레나에서 펼쳐진 야외 오페라 공연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예술 작품이었다. 뜨거운 여름밤 열기 속에서 느낀 감동은 평생 잊지 못할 순간으로 남을 것이다.

뜨거웠던 감동과 감사의 계절


▎멋진 이집트 신전을 무대 배경으로 공연한 오페라 [아이다] 주인공들의 커튼콜 장면.
올여름에는 유럽의 야외 무대에서 펼쳐지는 대형 오페라를 관람하고 돌아왔다. 그 감동의 시간과 여운을 다시 한번 가슴으로 느껴본다. 그러고는 세계 3대 오페라극장인 비엔나 국립극장·밀라노 라스칼라·뉴욕 메트로폴리탄과 브레겐츠와 베로나 아레나에서의 야외 오페라 감상이라는 버킷 리스트를 실현할 수 있도록 평생동안 도움을 주신 주변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진하게 떠올랐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큰 저녁상을 댁에서 차려주시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며 기대해주신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 사관학교 졸업식에 직접 참석하셔서 격려해주신 고등학교 교장선생님, 경험도 부족했던 30살 젊은이에게 절대 신뢰를 주며 뉴욕 현지 법인장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회장님, 외국인에게 창업 CEO로 믿음을 주고 25년 넘도록 한국뿐만 아니라 대만과 일본에서 경영에 참여하는 기회를 준 글로벌기업의 회장님, 오랜 세월 동고동락하며 땀흘려 일해준 임직원들, 항상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신 선후배님들·지인·친구들, 평생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주신 부모님께 무한히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오른다. 아직도 적극적으로 경영하고 건강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기대·격려·응원·신뢰·참여·협력을 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감사는 행복의 원천이 되어 모든 것을 극복하는 힘을 준다. 또 다른 버킷 리스트를 떠올리며 돌아본 올여름은 감동과 감사로 뜨거웠던 계절이었다.

※ 이강호 - PMG, 프런티어 코리아 회장. 세계 최대 펌프 제조기업인 덴마크 그런포스그룹의 한국 법인 창립 CEO 등 33년간 글로벌 기업 및 한국 기업의 CEO로 활동해왔고, 2014년 HR 컨설팅 회사인 PMG를 창립했다. 다국적기업 최고경영자협회(KCMC) 회장 및 연세대학교와 동국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다수 기업체와 2세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경영과 리더십을 컨설팅하고 있다. 은탑산업훈장과 덴마크왕실훈장을 수훈했다.

202410호 (2024.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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