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48) 결핍을 딛고 일어선 반도체 제국 TSMC 

 

9월 초 ‘세미콘 타이완(Semicon Taiwan)’이라는 전시회에 참가하려 대만에 다녀왔다. 지난 20년 동안 매년 이 전시회에 참가하면서 대만 반도체의 성장을 지켜와봤는데, 올해 전시회에서는 대만이 세계 반도체의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

▎지난 9월 방문한 세미콘 타이완 전시회 현장.
세미콘 타이완은 AI 반도체 열기로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전년보다 30% 정도 많은 전시 부스와 방문객들로 붐볐고, 한국에서는 삼성, SK 사장들이 처음으로 기조연설을 맡아 화제가 되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브로드컴, 마이크론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에서 온 유명 인사들의 이름도 여기저기서 보였다. 몇 년 전만 해도 세미콘 타이완은 경쟁국들 전시회에 비교해 작은 규모의 지역 행사 수준이었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전시회로 발전한듯했다.

대만 반도체산업의 선봉에는 세계 최대의 압도적 파운드리 기업 TSMC가 있다. 챗GPT로 촉발된 생성형 AI의 수혜를 가장 톡톡히 누리는 회사가 TSMC이다. TSMC의 시가총액이 1000조원을 넘겼다는데 이는 400조원 규모인 한국 최대 기업 삼성전자의 2.5배에 해당한다.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는 60%대 점유율을 차지하면서 10% 초반의 점유율을 기록한 삼성전자를 압도하고 있다. 영업이익률도 제조업체에서는 꿈꾸기 힘든 기록적인 수치인 40%대를 유지하고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파운드리 산업에서 TSMC와 삼성의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TSMC는 20년 전만 해도 존재감이 그리 큰 회사가 아니었다. 2010년 이후 스마트폰 시장이 커지면서 애플에 AP 반도체를 납품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인공지능에 필요한 엔비디아 GPU를 독점 생산하면서 무섭게 성장했다. TSMC의 중장기 투자계획을 보면 지금의 파운드리 독주체제가 더 견고해질 것 같다.

작년 이맘때에는 중국의 대만 침공에 대한 우려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대만에서 반도체 엔지니어 수천 명이 미국 반도체 기업으로 전직해서 잡음도 많았다. 그런데 올해는 전쟁 위험성에 대한 우려가 크게 줄어든 것 같다. AI 반도체 붐이 거세지고, TSMC의 중장기 투자가 많아지면서 대만 땅값도 많이 올랐다. 대만 사람들이 TSMC를 ‘호국신산(護國神山)’이라고 부른다는데, 반도체 방패론(Silicon shield)이 작동하는 것 같다. 반도체 방패론은 대만 침공에 대한 강력한 반대 논리로 작용한다. 중국, 미국 모두 대만 반도체의 중요성 때문에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란 주장이다.

9월 초 대만을 방문했을 때 진도 4의 비교적 가벼운 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이 발생하자마자 TSMC로 향하는 모든 도로는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았다. 긴급하게 지진피해를 복구하려고 장비 엔지니어 수천~수만 명이 TSMC로 몰려갔기 때문이다. 지진이 한번 발생하면 장비가 멈추고 웨이퍼가 손상을 입어 작게는 수백억원, 많게는 수천억원의 피해가 발생한다. 장비 엔지니어들은 TSMC의 장비 복구를 마치고 나면 UMC, PSMC 등 다른 반도체 팹으로 향한다. 대만에서는 이런 일들이 매년 몇 차례씩 반복된다.

사실 대만의 반도체산업 환경은 지진뿐만 아니라 전력, 용수, 공업용지, 인재 등 여러 면에서 한국에 비해 열악하다. 대만 현지 투자를 검토하려고 몇 지역을 돌아다녔는데, 전기, 용수, 공업용지, 인력 등 대만의 산업 인프라가 생각보다 취약했다. 어떻게 이런 섬나라의 제한된 인프라 속에서 TSMC 같은 대단한 회사가 나왔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대만 정부는 대만 주식시장의 시가총액 30%를 차지하는 TSMC를 전폭적으로 지원한다. 대만이라는 나라가 국가의 운명을 걸고 TSMC를 지원하는 셈이다. 가뭄으로 물이 부족하면 TSMC에 우선적으로 용수를 공급하고 전력이 부족해도 가정집은 단전을 하더라도 TSMC에 전기를 먼저 공급한다. 법과 제도, 국가 예산도 TSMC에 우호적으로 지원한다. 반면 한국의 산업구조는 훨씬 다원화되어 있다. 대만은 반도체와 전자산업에 국가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자하지만 한국은 반도체뿐만 아니라 자동차, 철강, 화학, 조선 등 거의 모든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시장 선두권의 대기업이 즐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 반도체 붐을 탄 대만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은 한국을 넘어섰다.

TSMC가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을 갖게 된 것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투자해온 덕분이다. 대만 정부는 미국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서 레전드급 활약을 하던 모리스 창을 대만산업기술연구원(ITRI) 원장으로 모셔왔고, 그는 1987년 대만 정부를 설득해서 TSMC를 창업하면서 반도체 파운드리 산업이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냈다. 지금도 모리스 창의 말 한마디는 대만에서 법과 같다고 할 정도로 그는 절대적인 리더십으로 TSMC를 진두지휘해왔다. 대만은 ODM과 파운드리 산업에 최적화된 생태계를 가지고 있고, TSMC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라는 모토에 따라 글로벌 고객들에게 최고의 파운드리 솔루션을 제공하는 데 집중해왔다. 대만 반도체업계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20년 전 한국 기업들 같다. TSMC 월급이 다른 대만 기업보다 2배 가량 많아서 삼성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매일 10시까지 야근하는 조건이라 한다. 대만 반도체 기업 사람들에게 연락할 일이 있어 낮에 메시지를 보내면 저녁 늦게 답장을 받는 경우가 많다. TSMC 업무 강도가 워낙 세서 입사해서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집 살 돈을 벌고, 퇴직하겠다는 사람이 많다고 할 정도이다.


▎지난 4월 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진 대만 화롄 현장. 이곳은 TSMC 인근 지역으로, 지진이 발생해 건물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TSMC의 피해 복구를 위해 달려가는 오토바이를 탄 인파가 포착됐다. / 사진:연합뉴스
대만은 한국과 자주 비교되는 나라이다. 두 나라 모두 일본의 식민지였고, 분단의 역사 속에서 냉전시대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되어 성장했다. 세계화 시대에는 중국의 부상에 가장 큰 혜택을 받았다. 탈세계화의 조류 속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전략적 선택을 강요받는 것도 비슷하다.

이번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기조연설을 한 SK하이닉스의 대표는 대만과 한국의 긴밀한 협력을 언급했고, 삼성전자와 TSMC 최고 임원들도 나란히 앉아 협력을 이야기했다. 나날이 복잡해지는 기술 때문에 이제는 한 회사가 담당할 수 있는 영역이 점점 더 작아지고, 여러 기업이 협력해야 새로운 고객 솔루션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대만 회사들은 이런 협력적 분업을 한국 회사들보다 훨씬 더 잘해왔다. TSMC의 뒤에는 ASE, SPIL, Mediatek, Foxconn 같은 세계적인 대만 기업들이 긴밀한 파트너십을 맺어 TSMC를 받쳐주었다. 대기업 중심의 수직적 분업체계인 한국의 산업 생태계와는 사뭇 다르다. 한국 기업들이 대만보다 잘하는 부분도 많지만 동시에 배워야 할 부분도 많다.

이번 전시회에는 유난히 한국 사람이 많았다. 60개 한국 회사가 부스를 냈고, 전시장에서는 잘 아는 한국 사람들과 상담하다 보니 오히려 대만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못 나눴을 정도였다. TSMC 중심으로 대만에서 프로젝트가 많아지고, 그동안 한국 기업들에 폐쇄적이었던 대만 시장의 분위기가 협력적인 분위기로 바뀌면서 시장의 문이 열리고 있다. 3D 패키징, 실리콘 포토닉스(Silicon Photonics) 등 새로운 기술 시장에 대한 기회도 대만에서 더 빨리 열리기 시작했다. 최근에 한국 소부장 회사들이 TSMC 등 대만 회사에 납품했다는 이야기가 더 자주 들려온다. 한국의 한 반도체 기업 사장은 요즘 가장 자주 방문하는 나라가 대만이라고 한다. 1992년 한국-대만 단교 이후에 다소 껄끄러웠지만, AI 반도체 붐을 계기로 대만과 한국의 반도체 생태계가 훨씬 더 가깝게 연결되어가고 있다.

※ 김정웅 - 한국공학한림원 회원이자 연세대학교 신소재공학과 겸임교수. 30여 년간 5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이다.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의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00년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기업 간 전자상거래 사업을 하다가 폐업 위기를 겪었지만 반도체 산업에 집중해 전화위복을 이뤄냈다. 지금까지 반도체 업계의 레거시 장비를 전 세계에 5만 대 넘게 판매하며 서플러스글로벌을 세계적인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5년 무역의 날 대통령상과 2021년 산업포장을 수상했다. 2012년에는 발달장애인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Autism Expo를 개최하는 등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2410호 (2024.09.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