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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의 인사이드아웃(03) 경주선 동문건설 회장 

자력으로 재기에 성공한 건설사의 저력 

신윤애 기자
10년 만에 워크아웃을 졸업하고 재기에 성공한 동문건설. 여전히 경제적·사회적으로 건설업에 불리한 환경인 가운데 동문건설의 고민과 전략은 무엇일까. 자신의 손으로 워크아웃을 졸업하고 재기에 성공한 경주선 동문건설 회장을 김지원 대표가 만났다. 2세 경영인이자 여성 리더라는 공통점을 가진 이들의 경영 철학을 들어본다.

▎김지원 대표(오른쪽)와 경주선 회장은 여성이자 2세 경영인으로서 느끼는 고민과 철학을 진솔하게 나누었다.
동문 굿모닝힐, THE EST(디이스트)로 잘 알려진 동문건설은 1984년 경주선 회장의 아버지인 고 경재용 회장이 창업한 건설사다. 맨손으로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뛰어난 시행 능력과 호황기였던 건설업계 흐름에 힘입어 승승장구했다. 한창일 땐 시공능력평가 순위에서 50위권 안에 드는 내실 있는 중견기업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건설회사 대부분이 그랬듯 동문건설도 IMF 외환위기와 미국발 금융위기 등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대규모 투자금이 필요한 건설사에 은행의 몰락은 극복하기 힘든 위기였고 2008년 동문건설은 결국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회생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동문건설은 자력으로 워크아웃을 졸업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코로나19,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건설사들이 부침을 겪는 와중에도 매년 예전의 힘을 찾아가고 있었다. 부채비율, 차입금의존도 등이 양호한 수준에 접어들었고 매출도 회복했다. 기적에 가까운 동문건설의 재기엔 경주선 회장의 공이 크다고 평가된다. 2012년, 20대 나이에 회사가 가장 힘든 시절 투입된 그는 강인한 리더십으로 직원들과 합심해 탈출구를 찾아냈다. 2023년 동문건설의 매출은 6020억원으로 전성기였던 2005년(6073억원)에 근접했고, 시공능력 순위도 61위까지 끌어올렸다.

업계 안팎에선 기적의 스토리를 쓴 경주선 회장에 대해 궁금해한다. 여성에게 불모지와 같은 건설업계에서 젊은 여성 리더가 10년간 계속된 워크아웃을 이겨내고 회사를 정상화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관심일 터다. 동문건설은 어떻게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를 창출할 수 있었을까. 언론 인터뷰에 잘 나서지 않는 경 회장을 김지원 대표가 만나 그의 저력을 들여다봤다. 2세 경영인이자 여성 리더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은 인터뷰 내내 서로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으며 깊이 공감했다.

동문건설도 어느덧 설립 41년을 맞았다.

벌써 그렇게 됐다. 지난 40년간 동문건설이 공사한 공동주택만 6만 세대 정도 된다. 우린 종합건설사이며, 주로 아파트, 오피스텔, 주상복합 등 공동주택을 다루고 물류센터, 지식산업센터, 학교, 병원 등 비주거 건설도 취급한다. 지하철 연장 공사, 도로·철도 공사도 하고 있다. 동문건설의 특징은 비슷한 규모의 중견 건설사에 비해 시행을 많이 한다는 점이다. 시행사는 땅을 직접 구매하고 지주와 한 명씩 계약하면서 땅 전체를 개발하는 ‘디벨로퍼’를 말하는데,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1세대 디벨로퍼라고 소개되었다.

창업주인 경재용 회장님은 어떤 분이셨나.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대학 졸업 후엔 전기 기술자 일을 하셨는데, 건물을 짓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 보였다고 했다. 관련 자격증을 다수 취득하고 마침내 1984년에 건설사를 창업했다. 단독주택 한 채, 연립주택 한 동으로 시작해 차근차근 몸집을 불려갔다. 말 그대로 자수성가한 분이다. 일하러 가는 아침이 즐겁다고 하시던 아버지는 밤낮없이 일했고 가족여행을 가거나 명절 때도 늘 가족들을 데리고 주변 현장에 들르셨다. 덕분에 어린 나이에 건설 현장을 드나들며 그곳의 분위기를 익혔다. 지금 현장에 다니는 게 재미있고 익숙하게 여겨지는 것도 의도치 않은 조기교육에서 비롯됐다.

나도 어린 시절, 가족 휴가 때면 공장에 갔다. 요즘들어 그때의 시간들이 큰 도움이 된다고 느낀다. 아버지께서 해준 말 중에 기억나는 게 있나.

건설업에 종사한다는 자부심이 강하셨다. 나라의 근간을 이루고 부흥하는 건설 역군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던 게 기억난다.

다른 회사에서 마케팅 관련 일을 하다가 2012년이 되어서야 동문건설에 합류했다.

2008년에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그전까지는 회사가 탄탄했고 계열사도 많았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시작되며 우리나라 금융사와 저축은행들이 타격을 입었고 우리도 한순간에 무너졌다. 정말 말 그대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 건강이 악화됐다. 당시 나는 대학 졸업 후 휴대전화 제조사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출근할 수 있는 일수가 점점 줄더라. 가족 중 누군가가 정리를 해야 했다. 가족 구성원 중 내가 가는 것이 가장 맞겠다는 결론이 났고 회사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목표가 아니라 클로징을 하고자 입사했다. 출근해보니 상황이 정말 안 좋았다. 연간 캐시플로를 보면 몇 달 후엔 월급이 못 나갈 수도 있었고 내일 당장 문을 닫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워크아웃에 들어가면 신용등급이 낮아진다. 이는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건설 프로젝트 특성상 당장 돈을 끌어올 수가 없어 공사를 딸 수 없고, 수익을 낼 수 없다는 이야기다. 악순환이 반복됐다.

클로징을 하러 갔는데 결국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워크아웃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안 좋은 일이 너무 많았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암에 걸려 수술과 치료를 병행했다. 사람들이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 궁금해한다. 버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임직원과 가족들의 안녕이 내게 달려 있으니 쉽게 포기할 수 없었고 힘든 티 팍팍 내면서 하루를 버티고 일주일, 한 달, 1년을 지나왔다.

재기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일단 워크아웃에 들어가면 신용도가 떨어져 토지를 새로 매입할 여력이 없어지게 된다. 당시 우리에겐 부산 만덕동의 만덕주공 2단지 재건축 프로젝트가 있었다. 재건축은 기존에 있는 입주민들 땅을 확장해 일반 분양한 다음 남는 비용으로 공사비를 충당하는 형태여서 새로운 비용이 필요하지 않다. 지금은 아무리 지방이어도 대기업과 경쟁하는 구도인데 당시엔 대기업이 지방 재건축에 참여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우리에게 기회가 있었고 3160세대나 되는 큰 단지를 맡을 수 있었다. 직원들과 하루 종일 그 현장만 보고 있었고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그 프로젝트로 물꼬를 트고 하나씩 다시 시작했다. 워크아웃을 졸업하는 데 일등 공신은 평택의 단지였다. 사실 평택의 단지는 우리와 애증의 관계다. 평택에 5000세대 가까이 되는 52만8900㎡(약16만 평) 땅을 워크아웃 전부터 갖고 있었는데 금융위기로 돈을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규모 단지를 지으려 무리하다 보니 워크아웃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워크아웃 내내 건설은 중단됐고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워크아웃을 졸업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평택 사업을 마무리하기 시작했고 1조5000억원 정도 되는 매출을 올리며 잘 마칠 수 있었다. 이때 거둔 성공으로 계속 기업가치를 인정받아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철학을 전공하고 마케팅 분야에서 근무하다가 경영 리더가 됐다. 어려운 점은 없었나.


▎경주선 회장은 동문건설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입사해 워크아웃을 졸업하고, 제2의 전성기를 향해 도약하고 있다.
경영이라는 건 워낙 광범위해서 내가 모든 부분을 기술적으로 알 수는 없다. 협력업체, 직원들과 잘 소통하고 논리적으로 일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을 이해하고 탐구하는 학문인 철학을 공부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됐다.

후계자가 투입되면 기존 이사진이나 임원진과 마찰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긴급 투입됐지만 반대 세력도 있었을 것 같다.

마찰을 생각하지 못할 만큼 상황이 어려웠기 때문에 모든 직원이 함께 마음을 모아서 이겨내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지금도 어려울 때 회사를 위해 남아준 임직원들에게 늘 고맙게 생각한다.

30대 여성 리더가 보수적인 건설회사를 이끄는 점을 대단하게 보는 시각이 많다.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준비했을 정도로 성격이 털털하고 터프하다. 여전히 건설업계가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이지만 나와는 오히려 잘 맞는다. 만약 김 대표님처럼 우리 회사가 패션회사였다면 오히려 힘들었을 것 같다.(웃음)

현장은 얼마나 자주 가나.

전국에 20개 정도 현장이 있는데 매주 수요일에 방문해서 20번을 돌고 쉰다. 현장 직원들은 위험한 순간을 매 시간 마주하며 일한다. 조금이라도 환경을 개선해주고 싶어 현장을 지적하는 대신 직원들을 일일이 만나 필요한 부분이 있는지 건의를 듣는 편이다.

2세 경영인은 선대의 철학과 자신의 철학 사이에서 고민이 많다. 경 회장은 어떤 편인가.

아버지 철학과 내 철학이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시대적인 환경은 많이 달라졌다. 1980년대는 우리나라에 집이 모자라던 시절이어서 건설 수요가 넘쳤고 국가적으로도 많은 지원을 받았다. 지금은 인구가 계속 줄고 도심으로 수요가 쏠리는 구조다.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생각하며 해답을 찾으려 노력한다. 2세들은 아버지 세대가 영위해온 사업을 함부로 버리거나 바꾸기 힘들지 않나. 그걸 이어가면서 사회경제적인 상황에 맞게 혁신을 이뤄야 한다는 미션이 있다. 솔직히 아직 답을 찾지 못했고, 여전히 노력 중이다. 변화하는 가족 형태, 계속 늘어나는 노인인구를 중심에 두고 공부하며 리서치하고 있다.

나 또한 2세로서 늘 고민한다. 회장님과는 다른 나만의 리더십도 보여주고 싶다. 예술적인 것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디자이너와 소통을 늘리며 그 답을 찾고 있다. 그렇다면, 건설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아파트는 준공하고 입주해야 이익이 실현된다. 5년이 걸릴지 15년이 걸릴지 아예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긴 시간 동안 정책 변화도 있고 정권도 바뀌고 세계 경제의 흐름도 바뀐다. 경제 보고서 100개를 봐도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게다가 아파트 건설엔 정말 다양한 형태가 있다. 재건축, 재개발, 일반 공사 등 수십 가지는 될 거다. 나는 가장 먼저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려고 한다. 대기업이 아닌 중견기업에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중견 건설사 대부분은 한 가지 영역에 특화돼 있다. 토목공사에 특화돼 있거나 지역주택조합에 특화돼 있거나 등이다. 우리도 시행에 강점이 있는 회사였지만, LH와 신탁회사 공사를 많이 하고 금융권과도 함께 일하며 포트폴리오를 넓히고 있다. 요즘엔 원가도 많이 올랐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업체를 발굴하고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

워크아웃 졸업 이후 매년 성장하고 있다.

매출 규모가 2005년 6000억원에서 2012년에는 900억원까지 떨어졌었다. 그러다 지난해 계열사 모두 합해서 9700억원 매출을 올렸다. 10년 만에 10배를 달성했다. 무엇보다 직원들의 역할이 컸다. 호황기부터 워크아웃 졸업까지 다 겪으신 분들이다. 우리도 인력 유출이 많았는데 연봉이나 승진을 포기하고 아버지와 내 곁에 남아주었다. 워크아웃 시기에는 금융 관련 팀이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워크아웃을 졸업할 때 이 팀을 특진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어느 팀도 워크아웃 때 힘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으니 말이다. 우리 직원 모두가 함께 이뤄낸 일이다.

경 회장은 ‘여장부’, ‘잔다르크’ 리더십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라.

저돌적이고 진취적인 것은 맞다. 특히 영업을 할 때 그런 기질이 더 나오는 듯하다. 한번은 울산에서 온 시행사 대표와 식사를 하며 프로젝트를 따야 하는 미션이 있었는데 그때 12시간 동안 술을 마셨다. 빼지 않고 열심히 술을 마시며 설득한 끝에 공사를 따낼 수 있었다.

능력이 있으니까 일을 맡기지 않았겠나. 동문건설의 차별점은 뭔가.

매년 국토부에서 시공능력평가를 실시해 건설사들의 순위를 발표한다. 3000위까지 잘라 발표하는데 우리나라에 3000개가 넘는 건설사가 있다는 이야기다. 나라 규모에 비해 상당히 많은 숫자다. 특히 수요까지 줄고 있어서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경쟁에서 중요한 건 시공능력평가에서 100위 안에는 꼭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신용도 중요하다. 신용등급이 높아야 대출을 받을 때 유리하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같은 면적이더라도 최대한 넓게 설계하고 옵션은 많이 넣어준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정치와 경제 상황으로 인해 건설업이 많이 어렵다.

요즘 업계 사람들과 만나면 ‘안녕하세요’란 인사를 하지 말자고 한다. 안녕하지 못하니 말이다. 부동산정책, 시장 여건에 따라 매출은 정해져 있는데 원가는 또 계속 오른다. 게다가 지방은 집값이 많이 떨어졌고 부동산 거래가 둔화돼 있다. 대출금리가 내려가야 숨통이 트일 것 같다. 몇 년째 힘든 상황이 악순환되고 있는데 그럼에도 언젠가는 풀릴 것이라고 전망한다. 모든 건 사이클이 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잘 버텨왔다. 앞으로도 할 일들을 해내며 잘 버티다 보면 기회는 꼭 올 것이다.

※ 김지원 - 한세예스24홀딩스의 자회사인 한세엠케이를 이끌고 있는 김지원 대표는 대학에서 심리학과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뉴욕 International Culinary Center와 르 코르동 블루, 이화여대 식품영양학과 대학원, 요리 아카데미 츠지원에서 요리를 공부했다. 이후 예스24에 입사하여 경영훈련을 받은뒤 2019년 한세엠케이 대표직에 올랐다. 한세엠케이는 현재 모이몰른, 나이키 키즈, 버커루, NBA 등 유아부터 성인까지 전 연령대 라이프웨어를 선보이며 패션을 넘어 문화와 라이프스타일까지 아우르는 비즈니스로 나아가고 있다.

- 신윤애 기자 shin.yunae@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

202501호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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