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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취재 - 신동엽 대표시 ‘껍 데기는 가라’ 최초 발표작 공개 

 

3연과 4연 뒤바뀌어 있고 작가가 육필로 수정한 흔적 뚜렷…작가연보의 ‘1967년 첫 발표’를 ‘1964년 첫 발표’로 수정해야

▎올해는 1960년대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민족시인 신동엽의 45주기이다.



<월간중앙>은 고 신동엽 시인의 45주기를 맞아 작가의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의 최초 발표작과 수정본을 입수해 공개한다. 초기작은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과 달리 3연과 4연이 뒤바뀌어 있다. 또 이를 작가가 육필로 수정한 흔적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학계의 연구가 뒤따른다면 작가 연보는 물론 교과서 내용도 수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시단> 제 6집에 실린 ‘껍데기는 가라’ 시 전문. 작가가 펜으로 수정한 흔적이 보인다.
시인 신동엽(申東曄, 1930~1969)은 1960년대 한국 현대시를 대표해 ‘민족시인’으로 불린다. 그는 39세에 요절했지만 그의 작품은 생존했던 60년대보다 80년대 이후 더욱 애송됐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껍데기는 가라’이다. 18종이나 되는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가운데 8종의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1967년 <52인 시집>에 실린 시 전문)



▎‘껍데기는 가라’ 최초 발표작이 실린 <시단> 제 6집. 1964년 12월 발간됐다.
‘껍데기는 가라’는 4·19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는 강렬한 시어를 통해 분단현실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과 함께 평화와 생명에 대한 갈구를 보여준다. 7번이나 반복되는 ‘가라’의 외침은 삶 속에서 늘 새롭게 4·19혁명을 진행시켜야 한다는 시인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

<한국현대문학대사전>은 이 시에 대해 “신동엽이 1967년에 발표한 시로, 우리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여러 의미 있는 사건들을 바라보던 화자가 허위적인 것(껍데기)이나 겉치레는 사라지고, 순수한 마음과 순결함만이 남아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975년 창작과비평사가 펴낸 <신동엽 전집>, 2005년 현암사가 펴낸 <시인 신동엽>, 그리고 ‘신동엽문학관’ 등에 기록된 ‘작가 연보’에도 이 시를 시인이 37세 때이던 1967년 1월에 신구문화사에서 현대한국문학전집 제 18권으로 기획한 <52인 시집>에 첫 발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유족들이 보관해오다 신동엽문학관에 기증한 육필 원고(초고) 역시 52인 시집에 수록된 것과 같은 내용으로 적혀있다. 지금까지는 “1967년에 ‘껍데기는 가라’를 처음 발표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월간중앙>이 최근 입수한 시단동인회지 <詩壇> 제6집에 실린 ‘껍데기는 가라’는 청운출판사에서 1964년 12월 발간된 것으로 기존 기록보다 3년이 앞서 있다. 시는 또 그동안 알려진 원본과 달리 3연과 4연이 바뀌어있다.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東學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漢拏에서 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모오든 쇠부치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가슴과 그곳까지 내놓은/ 아사달 아사녀가/ 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을 빛내며/ 맞절을 할 것이다. (1964년 <시단> 6집에 실린 첫 발표작 전문)


‘껍데기는 가라’가 실린 329쪽에는 작가가 파란색 펜으로 3연과 4연을 다시 바꾼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작가가 <시단> 동인에 보낸 첫 발표작을 출판사를 통해 받아본 뒤 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직접 펜으로 6곳에 걸쳐 수정한 것이다.

<월간중앙>은 최근 이 자료를 고문서 수집가인 최현호(55) 씨를 통해 입수했다. 고서점 ‘장서각’을 운영하는 최씨는 “2013년 8~9월께 서울의 골동품 매장에서 신동엽 시인이 소장하고 있던 다량의 시집과 소장품들을 함께 구입하면서 <시단 6집>을 찾아냈다”며 “작가가 펜으로 직접 수정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껍데기는 가라’의 초기 발표작이 확실하다”고 밝혔다. 작가 연보에 기록된 ‘껍데기는 가라’의 최초 발표 시기를 ‘1967년 1월 <52인 시집>’에서 ‘1964년 12월 <시단> 6집’으로 3년 앞당겨야 한다는 게 최씨의 주장이다.

<시단> 동인지는 1963년 5월에 창간됐는데, 문덕수 시인이 주도해 김규태·성춘복·신동엽·이형기·황금찬 시인 등 20명의 발간 동인이 참여했다. 500부 한정판으로 창간해 1965년 제8집까지 간행됐다고 한다. 신동엽 시인은 <시단> 동인지에 다섯 차례에 걸쳐 ‘기계야’ 등 9편의 시를 발표했다. 하지만 고 신동엽 시인의 유족들은 그동안 신동엽 시인의 시단 동인 참여는 물론 동인지 <시단>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초기작 발굴에 따라 신동엽 시 연구와 관련해 신세계가 열린 셈이다.


▎고향 부여에 세워진 신동엽 시비.




▎신동엽문학관에 세워진 신동엽 흉상. 매년 4월이면 신동엽 시인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늘어난다.
최초 발표 시기 3년 앞당겨야

‘껍데기는 가라’ 최초 발표 연도를 1964년으로 앞당겨야 한다는 주장은 재야 문학자인 홍윤표 씨가 2011년 12월 반연간지인 <근대서지> 4호에 “시 ‘껍데기는 가라’ 의 첫 발표연대가 당초 알려진 1967년 1월이 아니라 1964년 12월 시 동인지 <시단> 6집에 처음 발표됐다”는 글을 실으면서 학계에 처음 알려졌다.

이어 2012년 4월,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한 김성숙 씨가 국어국문학회지 160호에 ‘신동엽 서정시의 원본 변이 과정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신동엽은 등단 이후 <시단>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제 6집에 ‘껍데기는 가라’를 실었다. 이 시는 이후 <52인>에 재수록됐다”며 홍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면서 학계에 공론화됐다.


▎1967년 생전의 신동엽 시인이 지인들과 함께했다. 왼쪽부터 임헌영·이추림·정을병·신동엽·한승헌·남정현 씨.
뒤이어 신동엽 연구자이자 신동엽문학관 사무국장인 김윤태 씨가 2013년 12월 발간된 시잡지 <시인> 제17권에서 “시 ‘껍데기는 가라’의 발표연대 정정과 관련한 정본 논의”라는 글을 통해 <시단> 6집에 수록된 ‘껍데기는 가라’의 첫 발표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고서 수집가 최씨에 의해 최초 발표본을 작가가 직접 수정한 작가 소장본이 발견됨에 따라 ‘껍데기는 가라’ 첫 발표 시기를 둘러싼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를 종합해보면, ‘껍데기는 가라’는 모두 4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①1964년 <시단> 6집 첫 발표본 ②최현호 씨가 찾아낸 <시단> 6집의 작가 육필 수정본 ③신동엽시인의 유족이 문학관에 기증한 신동엽 육필 초고본 ④1967년 <52인 시집> 재수록본이 그것이다. 시간적으로는 ①→②→③→④의 과정을 거치며 시가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①④는 잡지에 공식 발표됐다. ②와 ③은 작가가 수정하고 있던 것들이다.

‘껍데기는 가라’는 이처럼 첫 발표 뒤 3년간의 숙성과정을 거치면서 시어가 정교해졌고, 특히 3연과 4연이 재배치되면서 신동엽의 대표작으로서 손색이 없는 예술성과 사상성을 성취하게 됐다. 1964년 판본은 마지막 4연을 “이곳에선 두가슴과 그곳까지 내놓은 / 아사달 아사녀가/ 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을 빛내며/ 맞절을 할 것이다.”로 마무리해 이상 사회에 대한 막연한 기원을 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1967년 판본에서는 연을 바꾸어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로 마무리했다.

시어의 변환과 수미상관(首尾相關)의 구조를 통해 4·19에서 동학혁명과 분단의 기억을 일깨우고 그 원인이 ‘쇠붙이’임을 일깨우는 주제 의식을 더욱 강조하는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다.

“그래도 정본은 마지막 발표작”

신동엽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 외에도 동인지 <시단>에 발표한 9편의 서정시 중 ‘살덩이’와 ‘蠻地의 音樂’, ‘마려운 사람들’, ‘노래하고 있었다’ 등의 시도 나중에 개작해 <52인 시집>과 <신동엽전집> <사상계> <현대문학> 등에 발표했다.

신동엽 시인은 왜 이렇게 자신의 시를 여러 번 고쳤을까? 이에 대해 신동엽 시를 연구한 김성숙 씨는 “신동엽 시인은 일단 시가 발표가 되었을지라도 시의 불완성을 인정하고 지속적으로 수정하는 자세를 보였다”며 “대체로 발표 시기가 늦은 시편에서 일관된 예술적 성취가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신동엽 시인은 운율이나 미의식을 고려해 끊임없이 퇴고를 거듭한 전경인(全耕人:세계에 대한 철인적·시인적·종합적 인식을 가진 온전한 사람)적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에 따라 “신동엽 서정시의 원본을 확정할 때에는 시인의 의도를 존중하여 가장 뒤늦게 발표한 <52인 시집> 판본을 정본(定本)으로 삼는 것이 옳다”고 했다. 신동엽문학관의 김윤태 사무국장도 “<시단> 6집에 수록된 시가 최초 발표본이 맞다. 하지만 시적 완성도 면에서 가장 돋보이는 기존 <52인 시집>의 원고를 정본으로 삼는 것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4월 7일은 신동엽 시인이 작고한지 45주기다. 충청남도 부여읍 동남리 태생인 신동엽 시인은 1959년 만 29세에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뒤 불과 10년 동안 활동하며 70여 편의 시만 남긴 채 1969년 간암으로 작고했다. 유명 건축가 승효상 씨가 설계해 지난해 5월 부여에 완공된 신동엽문학관에는 미망인 인병선 여사(짚풀생활사박물관장) 등 유족이 기증한 시인의 육필 원고 737점과 편지, 사진, 책 등 2114점이 전시되고 있다. ‘4월의 시인’ 신동엽을 만나기 위해 부여를 찾는 문학애호가들의 발걸음이 잦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201404호 (201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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