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장석주의 書齋 - 번역은 또 다른 글쓰기다 

기계적인 번역에 돌직구를 던지다 <번역 예찬> VS 번역의 이론과 실재의 차이 <번역 논쟁> 

장석주 전업작가



날마다 새로운 번역본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내가 읽는 많은 책이 번역본이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번역가들이 번역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한 적이 없었다. 번역을 사유하는 책 두 권 <번역 논쟁>과 <번역 예찬>을 겹쳐 읽으며, 번역의 불행과 영광을 더듬어볼 기회를 가졌다.

번역, 이것 생각보다 복잡한 일이다. 이것이 내재화하는 윤리적 소명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심대하다. 번역은 원전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을 넘어서서, 강한 파급력으로 이쪽의 문화를 저쪽으로 전달하고, 다른 두 언어가 일군 두 문화 사이의 소통을 트고, 결과적으로 문명 발달의 촉매가 되고 삶의 지평을 넓히는 데 힘을 보탠다.

그러나 번역이 흠모나 경탄의 대상이 되거나 진지한 문화적 성찰의 대상이 되는 일은 드물었다. 그간 번역은 그것에 내재된 문화 가치와 윤리적 소명, 번역자가 뿌린 땀방울과 수고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한 채 의붓자식 취급을 당해왔다. 그럴 만한 까닭이 없지 않다.

일부 나쁜 번역이 버젓이 활개를 치며 번역에 대한 불신과 의구심을 키운 탓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번역을 길바닥에 구르는 개똥만큼이나 흔한 것으로 업신여기고 번역에 대한 낮은 처우를 당연시해왔다. 번역은 불가능한 일이거나 배반이며, 모국어 이외의 다른 언어 해독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범속한 일이라는 편견과 불신은, 짐작하셨겠지만 다 틀렸다.

원작의 능동적 해석과 모국어의 결합

번역을 ‘말의 무게를 다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은 프랑스의 번역가 발레리 라르보다. 그는 번역을 “저울의 한쪽에 저자의 말을 얹고 한쪽에 번역어를 올려놓는 일이다”라고 말했다지만, 번역이 다른 언어로 된 원전을 번역자의 언어로 옮기는 일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원작의 언어와 번역의 언어가 포개지지 않는다는 점, 즉 두 언어 사이의 불일치가 엄연하고, 이는 문화와 인식의 다름과 불일치까지를 포괄한다. 이 불일치가 번역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근거이겠지만 이것은 번역이 주체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틈이기도 하다.

번역은 원전을 동일성과 반복의 원리에 따라 기계적으로 옮기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름 속에서 울려 나오는 원곡의 새로운 연주(演奏)이고, 원전과는 또 다른 글쓰기다. 번역은 “원작에 담긴 모든 특징, 예측할 수 없는 변화, 작가 특유의 표현, 문체상의 특색 등을 이질적인 언어 체계 안에서 최대한 재현re-create”(<번역 예찬>, 이디스 그로스먼)이거나, “번역 주체가 자신을 둘러싼 번역 지평과의 상화 작용 속에서 주체적으로 텍스트를 읽어내고 그 텍스트를 모국어로 다시 쓰는”(<번역 논쟁>, 정혜용) 것이다.

번역의 역사에서 직역과 의역의 대립, 충실성과 가독성의 길항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번역한 이윤기의 경우, 한쪽에서는 최고 번역가라는 평가를, 또 다른 쪽에서는 오역의 주범이란 평가를 하는데, 이렇듯 상호모순되는 극단적 평가가 동시에 나오는 것은 직역과 의역의 해묵은 대립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직역을 떠받드는 이들은 의역이 원전을 훼손한다고 말하지만 언어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한 언어가 갖는 복잡함과 애매모호함을 생각한다면 직역은, 번역이 의미의 맥락을 전달하는 일이고, 원전과의 대화라는 점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한계에 닿는다.

번역어이건 원전어이건 언어는 다 같이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며 다루기 까다롭다. 그런 “두 언어 사이를 오가며 의미를 전단하고, 동시에 두 언어의 효과와 리듬과 예술성을 들으려고 하며, 그 가운데 두 언어 사이에서 소용돌이치고 비등(沸騰)하는 기호와 의미의 혼돈 속으로 뛰어드는 경험은 환각”에 가까운 일인데, 그런 사정을 무시한 “직역은 어설프고 도움이 되지 않는 개념으로, 번역과 원본의 복잡한 관계를 심히 왜곡하고 지나치게 단순화”(그로스먼) 할 수 있다.

번역자는 원전의 출발(어를 번역자의 모국어인 도착)어로 바꿔 단순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쪽 언어와 저쪽 언어의, 이쪽 문화와 저쪽 문화의 차이로부터, 원저자와 번역자라는 서로 다른 더 글쓰기의 주체의 차이로 부터 생겨나는 차이의 글쓰기”이고, “시공간의 다름을, 언어와 문화의 다름을 타고 넘나들며 자신의 글을 한 올 한 올 짜나”(레몽 크노)가는 일인 것이다.

번역은 원전 언어를 번역자 모국어의 언어로 전사(轉寫)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의미 구조의 옮김이고, 즉 텍스트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의미 산출체계를 번역하는 것”(정혜용)이다. 모든 번역자는 필연적으로 ‘인비저블(invisible)’ 이냐 ‘비저블(visible)’ 번역이냐라는 기로에 선다. 이 선택은 좁게는 단어와 자구의 번역이냐 의미의 번역이냐 하는 해묵은 논쟁과 넓게는 번역의 윤리에 대한 고뇌를 드러낸다.

전자는 번역자가 드러나지 않는, 외국의 이질성을 뺀 번역자의 모국어에 충실한 번역이라면, 후자는 원저자의 언어와 문화가 가진 외래성을 드러내는 번역을 뜻한다. 번역의 충실성이란 무엇이냐 하는 데서 차이가 드러나며, 그 차이에 따라 입장이 갈라진다. 충실성은 “서로 동떨어진 두 언어 체계를 오가며 개별적인 요소들을 일대일로 맞추는 기계적이고 단순한”(그로스먼) 행위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번역 주체가 하나의 텍스트를 현동화(現動化)하여 그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생산해 내는 작업”(정혜용)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다.

문학 번역가는 또 하나의 작가다

<번역 예찬>과 <번역 논쟁>의 저자들은 두 입으로 번역의 어려움과 복잡함을 짚고, 그럼에도 번역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한 목소리를 낸다. 두 저자는 번역이 원작과는 또 다른 글쓰기이며 새로운 의미의 생산이라는 것에 동의하지만 책 제목에서 드러내고 있듯 번역이라는 하나의 화두를 두고 논의의 초점이 ‘예찬’과 ‘논쟁’으로 갈라진다.

스페인 걸작 문학을 영어로 옮기는 일을 해온 그로스먼이 윌리엄 포크너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예를 들면서 번역 덕분에 얼마나 많은 “언어 간의 생산적인 교환”이 이루어졌는가를 말하고, “단일 민족이나 단일 언어의 전통에선 있을 수 없는 문학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프랑스 문학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는 정혜용은 <번역 논쟁>에서 문학 번역과 그 번역 평가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그간의 번역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여러 논쟁을 검토하며 생산적인 번역 논쟁에 대한 기대를 펼쳐놓는다. 정혜용은 번역학 박사답게 베르만의 ‘글-몸 번역론’과 메소닉의 ‘번역 시학론’에 기대어 번역을 사유하고, 그간에 있었던 번역 논쟁들을 더듬는다. 무엇보다 번역 비평의 윤리와 방법론을 세우고자 궁구한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다른 입장에서 나온 두 책, 하지만 번역이 근사하고 영예로운 일이라는 것에 한 목소리를 내는 <번역 예찬>과 <번역 논쟁>을 함께 읽는 일은 번역의 가치와 번역자들의 숨은 수고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다.

201404호 (2014.03.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