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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야설천하⑦ 신산(信山) 김성덕의 서예 강론 - 고요한 정진으로 절제의 힘, 심신의 건강 얻는다 

 

글 조용헌 원광대 불교학 박사, 사진 전민규 월간중앙 기자
글씨 보는 안목은 서체의 기운생동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명필에는 형체의 아름다움 넘어 신령스러운 광채 넘쳐

▎10대 중반부터 붓을 잡은 신산(信山) 김성덕은 “경전에 대한 공부가 있어야 하고, 인생의 쓰라린 경험도 겪어야 글씨가 깊어진다”고 말했다.



한국 현대사는 서예전통의 황폐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IT산업이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자살률도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다. ‘고요함’의 전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망하게 서둘러 대체 어디를 가기 위함인가. 서예의 도는 하단전에 묵직한 힘을 쌓고 천천히 가라, 여유 있게 살라 가르친다.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동양에서 세웠던 기준이 신언서판(身言書判)이다. 그 사람의 신체적 조건, 즉 풍채와 말하는 것, 글씨 쓰는 것, 그리고 판단력이다. 이 4가지 요건 중에서 신(身)·언(言)·판(判) 3가지는 서양 문명에서도 통용된다. 외모가 잘생겼는가, 말을 조리 있게 잘 하는가, 판단력이 정확한가는 사람의 능력을 결정짓는 요소다. 그런데 서(書)가 문제이다. 서양에는 없고 동양에만 있는 기준이 바로 이것이다.

글씨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 사람의 총체적인 자질과 능력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기준으로 삽입되었단 말인가. 과연 붓글씨 가지고 자질을 판단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가? 필자와 평소 교분이 있는 서예가 신산(信山) 김성덕(金成德·50)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신산(信山)은 원광대학교 서예학과와 석사를 거쳐 2004년 국전(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바 있는 서예가다.

서예를 하면 장수한다?

서예를 오래 하면 인격이 수양되면서, 장수하게 된다는 설이 있다. 이 말이 일리가 있는 말인가?

“일리가 있다. 첫째 서예를 하면 좋은 문구를 많이 보게 된다. 동양의 경전이나 법첩(法帖: 옛사람의 좋은 글씨를 모아놓은 텍스트) 내용을 붓으로 쓰는 과정이 서예의 훈련이다. 붓에다 먹물을 묻혀 한 자 한자 정성을 들여 쓰다 보면 성현들의 좋은 말씀이 가슴에 새겨진다. 그냥 눈으로 글씨를 보는 것과 손에다 정신을 집중하여 글씨를 쓰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부드러운 털로 된 붓으로 먹물을 묻혀 글씨를 쓴다는 것은 강렬한 체험이기도 하다. 좋은 문구들이 각인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자기도 모르게 절제와 수양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욕심을 줄이고 오버를 적게 하는 게 수양 아닌가. 이러다 보면 몸에 무리가 갈 일을 잘 벌이지 않는다. 부글부글 속이 끓는 일을 잘 만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중년이 되면 정신 건강이 중요해진다. 화가 나거나 크게 실망할 일이 적은 사람이 건강하다.

둘째로는 호흡이 아랫배 단전으로 내려간다. 손으로 붓을 잡고 먹물을 벼루에서 갈면서 호흡이 단전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마음이 떠 있어 가지고는 글씨를 쓸 수가 없다. 획을 그을 때도 도중에 마음의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중간에 호흡이 흔들리면 획도 흔들린다. 정신 집중이 이루어져야만 붓이 떨리지 않는다. 마음이 위로 뜨면 글씨도 흔들린다. 붓은 부드럽고 예민한 필기구다.

그 사람의 정신 집중상태, 또는 마음의 상태가 그대로 반영되게 되어 있다. 호흡이 아랫배로 내려가면 글씨가 덜 떨린다. 마음이 차분해진다는 것은 호흡이 아래로 내려간다는 이야기다. 호흡이 아랫배로 내려가면 건강한 사람이다.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니까. 따라서 붓글씨를 많이 쓰다 보면 자연히 단전호흡이 된다. 건강해진다.

셋째는 먹물의 효과라고 생각한다. 먹물에는 향이 난다. ‘샤넬5’와는 다른 동양의 향이 바로 먹(墨)이다. 좋은 먹은 그 향이 참 좋다. 옛날 왕실이나 귀족 집안에서 사용하던 고급 먹에는 사향(麝香)도 첨가되었다. 사향은 마음을 평안하게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요즘에는 사향이 워낙 귀해지다 보니 사용할 수 없지만, 소나무를 태워서 생기는 훈제향은 여전히 먹의 제조에 사용된다. 소나무 훈제향도 편안한 기분을 주는 향이다.

동양의 품격 있는 향이 먹물향이라고나 할까. 집에서 붓글씨를 쓰면 먹을 갈아야 하고, 그 먹에서 풍기는 향이 집 전체에 스며들게 된다. 서예를 한다는 것은 집안에 향수를 뿌리를 일과도 같다. 집안에 손님이 들어섰을 때 먹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는 집은 품격이 있지 않겠는가!”

먹은 어떤 것을 상품으로 치는가?

“일본에서 만든 고매원(古梅園) 먹을 최고로 친다. 일본 ‘나라’시에 그 제조사가 있다. 1577년에 창업했다고 전해진다. 추사 선생 시구에도 고매원 먹이 등장한다. 조선 후기에도 식자층은 일본의 고매원 먹을 귀한 물건으로 인식했다는 이야기다. 먹이 좋으면 향기도 좋고, 종이에 쓰고 나면 시간이 지나도 글씨가 번지지 않는다. 프로 작가들이 작품을 쓸 때는 고매원 먹을 많이 사용한다. 고매원 먹 중에서도 가장 좋은 상품이 별 5개짜리 5성급(五星級)인데, 한국 돈으로 치면 30만∼50만 원 정도 한다. 100만 원 이상 가는 것도 있다.”

신산 선생의 설명을 듣다 보니까 서예는 ‘정(靜)을 익히는 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요할 정(靜)이다. 인품의 골격은 고요함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근래에 하게 되었다. 평소에 고요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고요하지 않으면 문제를 일으킨다. 우선 판단에 착오가 생긴다. 움직이지 않아야 할 데에 움직이게 된다. 오버가 발생한다.

‘동정일여(動靜一如)’라는 말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고요함이 먼저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움직임도 제대로 된 움직임이 아닐 수 있다. 현대사회의 모든 환경이 동(動)을 유발시킨다. 컴퓨터 화면, 스마트폰, SNS, 자동차, 정보통신의 환경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각을 잠시도 가만 놔두지 않는다. 도대체 고요하게 있을 수가 없다. 마음을 항상 요동치게 만든다. 각종 정신질환이 창궐하고 있다.


▎글씨를 붓으로 쓰는 것은 강렬한 체험으로 좋은 문구가 각인되고 절제와 수양이 이뤄진다.



사상과 철학의 뒷받침이 필요

조선후기에는 염병이 창궐하였지만, 지금은 정신병이 대세다. 가만히 있으면 도태된다는 불안을 유발시키는 문명이 현대의 전자 문명이다. IT산업이 가장 발달한 나라가 한국이고, 한국이 자살률이 높은 배경에는 이유가 있다. 고요함(靜)을 가장 많이 잃어버린 나라가 한국이 아닌가 싶다. IT와 정은 상극이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끊임없이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고 눈과 귀를 혹사시켜야 먹고 살 수 있는 불쌍한 나라가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정을 획득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동양의 정신 수양이라고 하는 것이 고요함에 기초하고 있다. 전통적인 수양법이나 학습법의 기초가 바로 정인 것이다. 누구나 고요함의 미덕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어떻게 이 고요함에 도달한 것이냐? 방법론이 문제다. 어떤 방법으로 정신 없는 한국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도록 할 것이냐?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서예가 아닐까.

‘글씨가 좋다’, ‘힘이 있다’. ‘잘 쓴 글씨다’를 어떻게 알아보는가? 어떤 점을 보고 이게 잘 쓴 글씨와 못 쓴 글씨를 구분하는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딱 집어서 말할 수 없다. 안목이 있어야 글씨를 본다. 안목은 적어도 1만장 정도는 글씨를 직접 써보아야 생긴다. 붓글씨를 쓰는 종이 한 장은 가로 70㎝, 세로 200㎝ 크기의 한지를 가리킨다. 이 크기의 한지에 글씨를 빽빽이 써보는 것이다. 해서, 행서, 초서, 전서, 예서와 같은 서예의 오체(五體)를 써봐야 한다.

하루에 종이 10장씩 쓰면 대략 3년이 되면 1만장의 분량에 도달한다. 하루에 평균 10장씩 쓰려면 하루 2∼3시간씩을 글씨 쓰는 데 할애해야 한다. 한 서체를 익히는 데에도 대략 1만장의 노력이 필요하다. 오체를 모두 익히려면 산술적으로 5만장의 공력이 들어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쓰다 보면 글씨가 보인다. 보인다는 것은 글씨를 썼을 때 먹의 농담, 완급 조절, 두껍고 약한 것이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神彩爲上(신채위상) 形質次之(형질차지)’라는 말이 있다. 글씨를 볼 때 신채(神彩)를 중요하게 보고, 그 다음으로 형질(形質)을 본다는 말이다. ‘신채’란 글씨에서 풍겨져 나오는 신령스러운 광채다. 형질은 글씨의 모양이다. 신령스러운 광채를 보통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결국 글씨를 보는 안목이라는 것은 기운생동을 그 글씨에서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서예도 형이하학적인 부분에서 형이상학적인 단계로 넘어가기 마련이다.”

신채(神彩)를 풍기려면 손을 많이 쓰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머릿속에 그래도 뭐가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사상과 철학이 있어야 광채가 생기는 것 아닌가?

“맞는 말이다. 단순하게 손으로 노동만 한다고 되는게 아니라고 본다. 경전에 대한 공부가 있어야 하고, 인생의 쓰라린 경험도 겪어야만 글씨가 깊어진다. 글씨도 자기가 살아본 만큼만 쓸 수 있다. 자기가 살아보지 않은 단계는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가 경험해보고, 자기가 사유해본 만큼까지만 쓸 수 있다. 문·사·철에 대한 섭렵이 필요하다. 하지만 학문만 하고 글씨를 안 써본 사람은 설명이 길어진다. 그래서 학문과 연습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신산(信山)은 10대 중반부터 붓을 잡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붓글씨 쓰는 일이 지겹지 않게 느껴졌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젊은 남자가 붓글씨쓰는 일이 유망한 업종으로 비쳐지지는 않는다. 취미로 한다면 모를까 직업으로 한다는 데에는 집에서 찬성하지 않았다.


▎전각에 몰두하고 있는 김성덕 씨의 모습에는 옛 사람의 질박한 기운이 느껴지고, 만들어진 전각은 부드러운 광택과 운취를 품고 있다.
서예 분야는 젊어서 성공할 수 없는 분야이기도 하다. 성취가 늦게 온다. 대가로 인정받으려면 60대는 되어야 한다. 그때까지 경제적 궁핍도 감당해야 한다. 당장 돈 벌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반대가 많았다. 대학 서예학과도 20대 후반에야 입학했다. 궁핍을 예상하면서 프로 서예가가 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서예학과 입학을 한 것이다.

‘명필’과 ‘범필’은 50대 나이가 분기점

30대 중반 서예학과 대학원에 다닐 때에는 기쁨이 있었다. 1주일에 먹을 1개씩 소모할 정도였다고 한다. 집중해서 쓰다 보니 손에서 전기를 느낄 정도였다. 손에서 전기가 날 정도로 쓰면 정신이 아주 맑아진다. 학교 서실에서 밤 12시까지 하루 종일 글씨를 쓰고 나서 한밤중에 자취방으로 돌아갈 때 그 어떤 희열을 맛보았다.

겨울 추운 날씨였지만, 하루 종일 글씨를 썼다는 데서 오는 자부심과 내공이 쌓여 간다는 성취감이 솟아날 때는 그 추위가 추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한 5년간을 아침 5시부터 쓰기 시작하여 밤 12시까지 썼다. 하루 동안에 법첩 1권 분량을 다 쓰던 시절이었다.

본인 말로는 이 시기에 실력이 가장 늘었던 기간이라고 한다. 3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20년 동안 하루 평균 3시간씩은 글씨를 써온 것 같다고 술회한다. 이렇게 쓰다 보니까 기라성같이 보이던 선배들의 글씨가 담담하게 보였다고 한다. 어느 분야든 이렇게 미치는 기간이 있어야 한계를 돌파한다. 미치도록 할 수 있느냐? 여기에서 전생론이 등장한다.

전생에 했던 사람은 미치도록 한다는 것이다.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느껴지는 단계가 미치는 단계이다. 이렇게 미쳐서 기라성이 담담하게 바라다보이는 상태가 될 때 프로가 된다. 몰두하는 단계에서 한 가지 받쳐줘야 하는 문제가 체력이다. 큰 종이를 펼쳐 놓고 글씨를 쓰다 보면 무릎이 고장 날 수 있고, 어깨가 고장 날 수 있다. 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오랫동안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동을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

운동시간도 하루 평균 2∼3시간씩은 필요하다. 한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글씨를 쓰다 보면 카르마(業報)가 발생한다. 육체적 불균형이다. 이걸 바로 잡아 주는 운동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망가져서 정진이 불가능하다. 1시간 이상 걷거나, 등산을 하거나, 적당한 근력운동을 해줘야만 어깨와 무릎이 성하다. 하루 3시간 글씨 쓰고, 하루 3시간 운동을 해줘야만 프로 서예가의 길을 간다. 그러니 술을 많이 먹는다거나 골치 아픈 문제에 휘말려서 신경을 많이 써버리면 글씨를 쓸 수 없다고 한다.

그 분기점이 연령적으로는 50대라고 한다. 50대는 체력도 떨어지기 시작하는 연령인데다가 세상사의 각종 시비에 휘말리기 쉬운 연배다. 돈을 벌어야 하고, 여기 저기 인간관계에 휘말려 각종 송사나 이해관계에 엮이기 쉽다. 한 길로만 가도록 놔두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다 보면 글씨를 못 쓴다. 40대까지 어느 정도 일가를 이뤄왔던 고수들도 50대에 들어와 글씨를 안 쓰고 외도를 하기 쉽다. 50대에 5∼10년간 한눈팔고 다른 일을 해버리면 60대에 들어와 복귀가 어렵다고 보는 것이 신산의 ‘50대 분기론’이다.


1 왕희지의 ‘난정서’가 전범인 행서. 겸손과 유려의 미가 잘 나타나 있는 서체다. 2 김성덕 씨가 올해 1월부터 6월 초까지 글씨를 연습한 종이뭉치. 그는 3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약 20년 동안 하루 평균 3시간씩 글씨를 써온 것 같다고 술회한다.



해일 멈추게 했다는 미수 허목의 글씨

서예의 단계를 설명하는 표현이 ‘수파리(守破離)’다. 제일 처음에는 기존의 모범답안 서법을 지키고(守), 어느 단계에 들어가서는 모범답안을 파괴하고(破), 그 다음에는 기존의 서체들로부터 떠나는(離) 것이다. 결국 고수가 된다는 것은 이 사이클을 반복하는 셈이다. 그러자면 우선 먼저 수(守)가 이루어져야 한다. 서예의 5가지 스타일, 즉 오체(五體)를 모두 익혀야 한다.

오체 가운데 제일 먼저 전서(篆書)가 있다. 전서에는 소전(小篆)과 대전(大篆)이 있다. 소전은 정갈하고 가지런한 맛이 있고, 대전은 자유분방하고 예술성이 풍부하다는 장점이 있다. 소전은 진시황이 문자를 통일했던 글씨다. 말하자면 관용체(官用體)다.

대전은 청동솥에 새겨져 있는 글씨이기도 하다. 대전을 금문(金文)이라고 한다. 조선조에 미수 허목이 쓴 유명한 글씨는 삼척에 있는 ‘동해척주비’다. 이 미수 글씨를 쓴 비석을 해놓으니까 동해안에 자주 일어났던 해일이 멈추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보통 미수의 글씨를 ‘지렁이체’라고 부른다. 꾸불꾸불 서체이기 때문이다.

미수의 지렁이체 글씨를 집에다 걸어 놓으면 재수 좋다는 속설이 있다. 미수 글씨에는 영기가 있기 때문에 귀신을 쫓는다는 믿음이다. 그만큼 미수 글씨는 전설이 있는데, 이 미수 글씨가 바로 전서에 해당한다. 미수는 대전과 소전을 융합해서 썼다. 소전만 많이 쓴 사람들은 경직될 수가 있다는 게 신산의 설명이다. 전서에다가 행서와 초서를 가미하면 예술적 여유가 생긴다고 한다.

전서의 묘미는 무엇인가?

“상형성이 가장 풍부한 서체다. 갑골문 시대부터 발전한 서체이기 때문에 원시성이 살아 있다. 갑골문 다음에 나온 글자가 전서(금문)다. 청동기를 주조하는 과정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변형도 전서에 영향을 미쳤다. 그 상형성과 원시성이 매력이다. 그래서 전서는 여백이 중요하다. 글씨와 빈 공간의 균형이 맞아야 한다. 여백에 신경 써야 하는 것이다. 글씨와 빈 공간의 균형까지를 고려하면서 써야 되는 것이 전서다.

여백을 지배한다고나 할까. 소전은 간격 대칭이 정확한 글씨다. 대전(金文)은 곡선과 직선의 변화가 자유롭고 활발하다. 현대 서양사람들에게 동양의 서예를 어필시킬 수 있는 서체가 금문이다. 서양 사람들도 금문에는 공감한다. 의미는 잘 모르지만 그 조형적 아름다움에 공감하는 것이다. 디자인에도 응용할 수 있다. 서예 하는 사람들은 예술적 영감을 금문을 통해 많이 얻는다.”

전서 다음에 나온 글씨가 예서(隸書)다. 예서는 한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글씨다. 전서의 불편한 점을 개선한 글씨이기도 하다. 여덟 팔(八)자 형태가 많다 보니까, 팔분서(八分書), 또는 팔분체(八分體)라고 부르기도 했다. ‘광개토대왕비’는 예서로 쓴 글씨다. 옛날 예서, 즉 ‘고예’(古隸)로 쓴 비문이 광개토대왕비인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예서에다가 전서도 약간 섞여 있고, 해서도 적절하게 융합되어 있다. 예서를 연습할 때 주로 알려진 법첩(法帖)이 장천비(張遷碑), 조전비(曹全碑), 사신비(史晨碑), 예기비(禮器碑)가 있다.

장천비는 웅장하고 강건한 글씨다. 조전비는 유려하고 부드러운 글씨다. 사신비는 그 중간 형태에 위치한다. 추사 김정희는 예서 전문가다. 예서를 가지고 청대 서예가들보다 더 여백미를 살렸다. 대중에게 가장 어필할 수 있는 글씨다. 추사는 예서 스타일로 난도 그렸다. 파격적이면서도 전체 공간에서 보면 균형을 잡고 있다. 중국 사람들이 추사를 인정하는 이유는 청대 글씨 스타일이면서도 자기들보다 진일보한 개성을 소유한 점 때문이다.

예서 다음에는 해서(楷書)다. 북위시대 당나라 시대에 풍미한 서체다. 묘지 비문에 새겨진 글씨체는 해서와 예서를 많이 쓴다. 백제, 신라의 고비(古碑)나 묘지명(銘)에 새겨진 글씨들이 해서가 많다. 해서에는 당해(唐楷: 당나라 해서)가 있고 북위해(北魏楷:북위시대 해서)가 있다. ‘당해’의 전범은 구양순이 남긴 ‘구성궁체’(九成宮體)다. 구성궁체는 해서의 완성본이다. 당나라 시대에 거의 완성되었다. 발견은 할 수 있지만 발명은 할 수 없다는 평이 있다. 글씨의 간격과 여백이 정확하게 법도를 따르고 있다.

최치원은 해서를 잘 썼다. 최치원이 남긴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는 구성궁체로 쓴 것이다. 여기에 비해 북위해서는 거칠고 남성적이다. 돌에 새긴 비문에 북위해서가 많이 남아있다.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오히려 그게 예술성이 있다. 미시적으로는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데, 거시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다. 우리나라 서예가 가운데 북위해서를 유행시킨 인물이 여초 선생과 검여(劍如) 유희강 선생이다. 일본 유학파에 속하는 제주도의 소암 현중화 선생도 북위해서를 잘 썼는데, 북위해서 중에서도 고정비(高貞碑)를 잘 썼다.

혁혁한 서예전통 비하하지 말아야

해서 다음에는 행서(行書)다. 왕희지의 ‘난정서(蘭亭書)’가 행서의 전범이다. 절제미와 유려미가 잘 나타나 있다. 획을 더 그어 나아가면 방종이 되는데, 난정서를 보면 그 방종 직전에서 브레이크를 잡는 절제미가 나타나 있다. 유려미는 어떤 것인가. 왕희지가 술을 한잔 먹고 쓴 글씨다. 그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유려미가 그대로 나타나 있다.

왕희지의 당시 감정상태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고 본다. 감정 표현이 솔직하고 흉금을 터놓은 글씨가 행서다. 행서는 왕희지 시대인 동진(東晉)에 완성되었다. 신라의 김생 글씨도 행서이고, 다산 정약용의 글씨도 행서다. 행서는 다산 글씨도 좋다. 명말 청초의 서예가들이 행서, 초서를 즐겨 썼다. 동기창, 미불 같은 인물들이 행서 전문가다.

행서 다음에는 초서(草書)다. 초서의 교과서가 손과정이 남긴 ‘서보(書譜)’다. 서보는 초서의 전형을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초서는 급하게 갈겨쓴 글씨다. 그래서 알아보기가 어렵다. 알아보기가 어려우니까 대중성이 약한 글씨이기도 하다. 그 대신 리듬감이 있다. 점과 선의 변화에서 오는 리듬감을 감상해야 한다. 초서가 주는 매력은 자기 감정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의 정상급 서예가는 누구로 보는가?

“서예는 60대 중반부터 70대 중반까지의 연령대에서 전성기를 누린다고 본다. 이 연령대에 속해 있는 그룹이 하석(何石) 박원규(朴元圭, 1947∼),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취묵헌(醉墨軒) 인영선(印永宣, 1947∼),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 1947∼)이다. 거의 동년배에 가까운 이 4명의 고수가 한국 서예계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본다.”

이 4명의 개성은 무엇인가?

“하석(何石)은 전서 중에서 금문, 청대의 소전, 그리고 예서에서는 한간(漢簡)에 특장을 지니고 있다. 전주에서 활동했던 강암 송성룡 선생의 문파다. 소헌(紹軒)은 예서에 강하다. 한나라 예서를 융합해서 쓰는 서체다. 장천비, 사신비, 예기비, 을영비(乙暎碑)를 모두 융합해서 쓰는 예서가 일품이다. 부친이 진주의 그 유명한 서예가였던 정현복 선생이다. 정현복은 진주 ‘촉석루(矗石樓)’의 현판 글씨를 남긴 인물이다.

취묵헌(醉墨軒)은 금문에 행·초서를 섞어서 쓴다. 딱딱한 금문을 해동시킨 느낌을 준다. 특히 간찰행서(簡札行書)가 일품이다. 주로 천안에서 활동하는데 특별한 문파 없이 독자적인 성취를 이룬 분이다. 학정(鶴亭)은 행·초서에서 오는 자유분방함이 있다. ‘적벽부’와 같은 작품을 보면 그 자유분방함이 잘 나타나 있다. 전남 보성 출신인데, 주로 광주에서 활동한다. 나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동안 서양에서는 그림을 비싸게 여겨온 전통이 있지만, 한자 문화권에서는 글씨를 더 비싸게 여겨왔다. 문·사·철과 유·불·선이 모두 들어가 있는 문화의 정수가 서예에 있다. 이제 중국이 돈을 버니까 자국의 전통문화인 서예를 고급문화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경매시장에서 중국 전통 명인들의 작품을 수백억 원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이 그것이다. 몇 년 전에 송나라 황정견의 서예 작품이 수백억 원에 낙찰된 사례가 그것이다. 피카소 작품도 수백억 원 하는데, 중국 대가들의 작품이 이보다 못할 것이 무어냐는 중국인 자존심의 반영이다.

일본도 서예가 문화에 깊이 박혀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서예를 발전시킨 나라가 사실은 일본인 것이다. 가장 어중간한 나라가 한국이다. 어떻게 보면 3국 중에서 서예가 가장 천대받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우리는 자기 것을 스스로 우습게 여기는 민족성을 지니고 있다. 주변부에서 오래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한국의 서예 전통은 중국 다음으로 깊은 나라다. 중국보다 한 발 떨어져서 서예를 보다 보면 중국이 못 본 것도 볼 수 있는 장점이 나올 수 있다. 한국의 식자층이 관심을 가져볼 만한 분야라고 생각한다.

201407호 (201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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