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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의 향연] 파리 국립오페라발레단 박세은의 권토중래 

클래식에 컨템포러리 접목해 승부수 

런던= 한정호 음악평론가
2000년대 한국 발레가 배출한 최고의 엘리트… 세계 최고수준 프랑스 발레의 정상에 오를까

▎2007년 2월 열린 스위스 로잔 국제 발레 콩쿠르에서 1위에 오른 박세은의 멋진 파세 동작.
오랫동안 한국과 인연이 없던 파리 국립 오페라(Opéra national de Paris)에 다시 한국인이 모습을 드러낸 건 2002년이었다. 국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로 활동한 발레리노 김용걸이다. 그는 2002년 2월, 6개월 계약으로 군무 무용수 계약을 체결하며 가르니에에 모습을 드러냈다. 발레단 역사상 최초의 동양인 무용수였다. 김용걸은 2009년 파리 오페라에서 쉬제(Sujet)로 은퇴할 때까지 일곱 시즌을 활동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에 임용됐다.

단체의 역사와 원작의 질, 공연의 순도, 무용수의 기량에서 파리 오페라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정상의 발레단이다. 파리 오페라 발레는 오페라 부설 발레학교(école de danse)에서 충원되는 신인들이 단원의 근간이 된다. 은퇴할 때까지 다섯 계급(카드리유-코리페-쉬제-프리미에르 당쇠즈-에투알)의 승급시험을 통해 주역무용수를 가려내는 특별한 전통을 갖고 있다.

단정하고 빠르고 맵시 있는 파리 오페라의 기운

그로부터 10년 뒤인 2011년, 세계 최정상의 발레단에 한국인이 다시 등장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김용걸을 사사한 발레리나 박세은이다. 2011년 7월 파리 오페라의 준단원 제안을 받았다. 2000년대 후반, 박세은은 세계 유명 주니어 콩쿠르를 연속으로 제패한 당대 최고의 발레 유망주였다. 불가리아 바르나 콩쿠르, 미국 잭슨 콩쿠르, 로잔 콩쿠르에서 최고 등위에 올랐고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세컨드 컴퍼니인 ABT Ⅱ에서 경험을 축적했다. 2009년 국립발레단에 특채돼 국내에서 잠깐 활동한 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2011년 가을부터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입단이 예정돼 있었다. 박세은의 마음을 움직인 건 김용걸이었다. 박세은은 어린 시절부터 대학 입학 전까지 깨끗하고 날카로움이 강조되는 러시아 바가노바 스타일에 익숙했다. 대학 입학 후 김용걸에게 새로운 프랑스 스타일을 섭렵했다. 박세은은 단정하고 빠르고 맵시 있는 파리 오페라의 기운을 머금게 됐다. 망설임 없이 파리 오페라 행을 택했다.

파리 오페라 생활은 연전연승이었다. 2012년 정단원 오디션을 통과했고, 2013년 1월 카드리유에서 코리페로, 2013년 11월 코리페에서 쉬제로 승급했다. 파리 오페라에서 코리페는 보통 군무를 리드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쉬제는 솔리스트와 군무를 겸하게 된다. 2013년 가을 이후 박세은의 독무를 가르니에와 바스티유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2013년 10월에는 발레단이 가장 주목하는 청년 무용수에게 수여하는 ‘세르클 카르포’ 상도 받았다.

프로에 입문하기 전부터 박세은은 탁월한 신체조건으로 각광받았다. 파리로 건너온 이후 박세은은 적응력 측면에서도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발레단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언어가 프랑스어이기에 언어 공부도 놓지 않았다. 러시아와 프랑스 발레 언어 사이의 혼동을 줄이는 자신만의 노하우도 터득했다. 해답은 “느낌이 있는 무용수가 되자”였다.

박세은과 함께 한국 예술종합학교 무용원과 국립발레단에서 파트너를 이룬 마린스키 발레의 수석무용수 김기민도 같은 답을 들려준다. 두 사람의 스승, 마르게리타 쿨릭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박세은의 고속 성장은 1995년부터 2014년 8월까지 파리 오페라 발레감독을 장기 집권한 브리지트 르페브르의 후원이 발판이 됐다. 무용수 서열이 낮아도 박세은의 캐스팅을 배려하는 결정은 모두 르페브르를 거쳤다. 르페브르는 ‘에콜드 당스’ 출신으로 열여섯 살에 파리 오페라에 입단해 50년 넘게 발레단의 영광을 온몸으로 느꼈던 산증인이다. 파리 오페라 스타일이 무엇이고, 누가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를 단장이 승급 심사와 캐스팅으로 정하던 시절이다.

파리 오페라는 2014년 12월, 클래식 발레의 주역을 보통 수석무용수인 ‘에투알’에서 인선하는 관행을 깼다. 안무가장 기욤 바(Jean Guillaume Bart)의 <라 수르스>에 박세은을 캐스팅한 것이다. 발레단의 유구한 역사에 한국의 발레리나가 처음으로 전막의 주역에 오른 순간이었다. 박세은은 2015년 상반기 파리 오페라의 <백조의 호수>와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의 <라 바야데르>에도 주역으로 출연하며 물오른 기량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불운 겹친 2015-16 시즌


▎벵자맹 밀피에 파리 오페라 전 감독. 그의 돌출 행보로 파리 오페라에서의 박세은의 성취는 한동안 순조롭지 않았다.
2014년 가을부터 표면적으로는 순항하는 듯하던 박세은의 파리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파리 오페라의 발레 감독이 교체되면서 단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새 수장은 영화 <블랙스완>의 주인공 나탈리 포트만의 남편으로 잘 알려진 안무가 벵자맹 밀피에였다. 밀피에는 1977년 프랑스 보르도 태생이지만 무용수 경력의 대부분을 미국 뉴욕시티발레단에서 쌓았다. 파리 오페라에선 춤을 춘 적도, 안무를 한 적도 없는 인물이 감독에 기용된 것부터 스캔들이었다.

밀피에는 발레감독 취임 회견부터 논란에 휘말렸다. “전임 감독 르페브르가 신작을 수용했지만 파리 오페라는 여전히 과거의 고전 레퍼토리들로 유지되고 있다. 무용수와 관객에게 해방감을 주는, 다양한 콜라보레이션을 도입하겠다.”

그러나 발레단의 300년 전통을 개혁한다는 밀피에의 다짐은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여러 노장 무용수가 공개적으로 언론에 밀피에의 발레단 운영방침을 비판했다. 이에 맞서 밀피에는 파리 오페라의 핵심 가치들을 공격하면서 개혁을 밀어붙였다. 밀피에는 <르 피가로> 인터뷰에서 승급 콩쿠르와 엄격한 계급 구조, ‘에콜 드 당스’의 폐쇄적 교육 체계를 비판했다. “파리 오페라는 다문화에 눈을 떠야 한다”, “댄서들의 테크닉이 부족하다”면서 기존 프랑스 발레를 정면 비판했다.

박세은은 밀피에의 돌출 행보의 희생양이 된 대표적인 무용수다. 밀피에가 자기 색깔을 드러낸 2015-16 시즌은 더욱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발레단에 클래식 레퍼토리가 확연히 줄었고, 박세은에게 익숙하지 않은 뉴욕시티발레의 현대 작품들이 도입됐다. 이번 시즌, 전막의 주역 캐스팅 결과를 살펴보면 박세은은 분명히 감독의 선택 밖으로 밀려났다.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박세은은 지난해 11월에 열린 승급 콩쿠르에서 2등급 프리미에르 당쇠즈에 도전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밀피에 단장과 함께하는 심사위원들이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으로 대표되는 신고전 스타일에 어울리는 무용수들을 대거 승급시킨 것이다. 프랑스 클래식에 강점을 찾아가던 박세은은 고배를 마셨다. 스스로는 “이번 콩쿠르가 인생에서 가장 춤을 잘 춘 순간”이라고 말했지만 결과는 그 느낌을 따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2015-16 시즌을 앞두고 4인무를 준비하다가 코 윗부분이 심하게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승승장구하던 파리 오페라 생활과는 전혀 다른 2015년이었다.

박세은이 밀피에 휘하의 파리 오페라에서 고전한 건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다방면에 재능이 많았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클래식 발레에 자신감을 갖고 있지만, 감독과 외부 안무가들이 더 주목한 것은 컨템포러리 댄스에서의 탁월한 감각이었다. 이번 시즌의 캐스팅 추이를 보면 자칫하다간 앞으로 컨템포러리 발레에만 중용될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발레단의 최고 등급인 에투알로 승급하려면 무엇보다 클래식에서 캐스팅을 얻어 안정감을 보여야 한다.

답답한 마음에 박세은은 과감하게 밀피에 감독과 면담을 신청했고 뜻밖의 결과를 얻어냈다. 면담 다음날부터 감독과 함께 움직이는 크리에이티브 팀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밀피에와 함께 하려면 춤 실력만큼이나 커뮤니케이션에 능해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면담이 있은 지 얼마 뒤인, 프랑스 현지 시간 2월 4일 밀피에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파리 오페라 발레감독 직을 사임했다. 자신의 안무관에 충실한 춤을 제작하기 위해 미국 LA로 돌아갈 것이며 부인인 포트만이 지난해 11월 파리 테러 이후 프랑스 생활을 힘들어 했다는 소문도 함께 번졌다.


▎바스티유와 함께 파리 오페라의 터전으로 활용되는 팔레 가르니에의 내부 모습. 프랑스 최고 권력의 건재함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다.
후임 발레감독은 32년간 파리 오페라와 함께한 에투알 출신의 오렐리 뒤퐁이 선임됐다. 안무 역량이 없는 뒤퐁을 신임 발레감독에 임명하면서 스테판 리스너 총감독은 “오렐리는 극장의 모든 기술자와도 잘 안다. 파리 오페라가 그녀의 집”이라고 추켜세웠다. “파리 오페라는 클래식 발레 컴퍼니이면서 현대적인 춤도 춘다”라는 뒤퐁의 코멘트에서 발레단의 운영방식을 점칠 수 있다.

2007년 로잔 콩쿠르 우승자의 자존심 되찾기

2016년 가을부터 시작될 뒤퐁의 파리 오페라에서 박세은의 위상은 어떻게 될까? 고전을 잘 소화해낼 무용수 가운데 컨템포러리에도 빛나는 자원들이 어떻게 조명을 받을지는 2016년 11월 승급심사를 통해 드러날 것이다. 2007년 로잔 콩쿠르 우승자가 10년 넘게 주역에서 떨어져 있는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 그림이다. 발레에서 군무는 중요하지만, 결국 발레는 주역의 예술이다. 마흔둘까지 정년이 보장되는 파리 오페라에서 1989년생 박세은이 춤을 출 시간은 여전히 많이 남았다. 어떤 춤을 어느 위치에서 어떻게 추느냐에 따라 그녀의 만족도도 달라질 것이다. 박세은은 “사람은 머무를 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되새기며 권토중래를 준비한다. 감독 교체를 또 다른 기회로 만들어내는 박세은의 활약을 주시할 시간이다.

안타깝게도 파리 오페라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박세은을 한국에서 지켜보는 일은 쉽지 않다. 세계 모든 발레단을 통틀어 가장 비싼 투어 개런티를 받는 곳이 파리 오페라다. 발레단 입단 초기에 박세은을 발굴했던 브리지트 르페브르 전 파리 오페라 발레 감독은 프랑스 밖에서의 갈라 출연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지금으로선 아쉽지만 국내 극장에서 상영하는 파리 오페라 스크린 프로그램으로 박세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런던= 한정호 음악평론가

[박스기사] 세계 최정상 ‘파리 오페라’의 명암 - 프랑스 최고권력의 애정이 낳은 보석

근대 이후 국가를 대표하는 오페라하우스는 정치권력의 부침에 따라 흥망을 달리해왔다.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공조한 마린스키 극장은 2010년대 가장 성공한 오페라하우스로 떠올랐다. 반면, 2000년대 중반부터 이탈리아 전 총리 베를로스코니의 관심이 식어버린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은 지금도 신음하고 있다. 파리 국립 오페라(Opéra national de Paris)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오페라하우스이자 프랑스 권력의 애정이 낳은 산물이다. 천부적인 댄서였던 루이 14세는 1661년 왕립발레 학교(Academie Royale de Danse)를 세웠고, 오페라단을 국영화해 자신의 통제 아래 두었다. 프랑스 국왕이 관장하는 왕립음악아카데미(Academie Royale de Musique) 체계에서 발레의 지위는 오랫동안 오페라에 봉사하는 역할이었다. ‘파리 오페라’로만 칭해도 발레단이 포괄되는 것은 프랑스의 독특한 전통이다.

파리 오페라의 터전은 두 곳이다. 하나는 팔레 가르니에(Palais Garnier). 1858년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을 겨냥한 테러에서 목숨을 건진 직후 국가를 대표하는 공연장의 신축을 지시했다. 건축가 가르니에가 디자인해 1875년 공연장이 완공됐다. 최고 권력의 건재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시작해서, 지금은 관광명소이자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배경이 됐다.

또 다른 곳은 바스티유 오페라(Opéra Bastille)다. 1980년대 미테랑 사회당 정부는 4억3000만 달러를 들여 바스티유 오페라를 지었다. 공연장 부지는 프랑스혁명의 시발점이 된 바스티유 감옥 자리, 완공 시점은 프랑스혁명 200주년인 1989년으로 제시됐다. 미테랑 정부는 오페라 바스티유를 오페라 전용관으로, 기존의 가르니에 극장은 발레 전용 극장으로 분리 운영하고자 했다. “바스티유에선 시민이 오페라를 싸게 볼 수 있다”는 게 정부 목표였다.

다니엘 바렌보임에 이어 1989년 2대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 감독에 오른 정명훈은 재임기간(1989~94) 동안 ‘파리 오페라 오케스트라’라는 기존의 명칭 대신 ‘바스티유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을 고수하는 등 사회당 정부가 기대한 공연장의 역할 구분에 충실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1993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대패한 이후 정명훈은 우파 정권이 기용한 위그 갈 총감독과 갈등했고, 이듬해 바스티유를 떠났다. 지금은 당초 사회당 정부의 의지와 달리, 두 극장 모두 발레와 오페라를 적절히 섞어 공연을 올리고 있다.

201603호 (2016.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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