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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무하마드 알리의 죽음과 한 사회학자의 복싱예찬 

나비처럼 날았던 불멸의 챔피언을 그리며 

글 한석정 동아대 교수 사진 송봉근 기자
40대 초반에 시작한 복싱이 학문 추구의 원동력으로 작용… 복싱 영웅의 삶 속에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과 고난의 미학 깃들어
대한뉴스에 등장한 무하마드 알리의 복싱 스타일에 온 국민이 매료된 적이 있다. 알리는 복싱으로 1960년대를 풍미한 스포츠 영웅이다. 철권 소니 리스튼을 가볍게 요리하는 최첨단의 복싱 기술을 선보였다. 그는 미국 민주주의의 자신감을 표상하기도 했다. 소년 한석정은 대학교수가 된 후에도 알리의 현란한 복싱과 거기에 내재한 지독한 투쟁정신을 잊지 못했다


▎무하마드 알리가 1965년 도전자 소니 리스턴(미국)을 쓰러뜨린 뒤 포효하고 있다. 알리는 한 해 전 리스튼을 꺾고 챔피언에 올랐다.
나는 60대의 복서다. 42세에 시작하여 21년간 도장을 다닌 노장 복서다. 기록은 형편없으나 세 번 출전했다. 늘 체중 조절과 훈련을 통해 출전을 꿈꾸는 현역이다. 그간 복싱을 중단할 이유는 백 가지가 넘었을 것이다. 중년 교수가 주책이라는 주변의 질책에 오래 시달렸다. 도장 시설도 문제다. 일부 도장은 지하상가, 버려진 공방 터다. 탈의 실조차 변변찮다. 냄새 나고 비좁은 곳에서 까까머리 중고생, 직장인들 사이에서 알몸으로 옷을 갈아입을 때에는 만감이 교차한다. 상하의를 걸칠 옷걸이나 신발장도 신통찮다. 깨끗한 탈의·샤워시설은 비싼 헬스장 이야기다. 그런데도 이리 오래 다녔으니 신통한 일이다. 지하철 좌석에서 꾸벅꾸벅 잠이 들 정도로 피곤한 날에도 바로 귀가하지 않고 도장으로 향했다. 나는 안다. 이 나이에 오늘 안 가면 그만두게 될 것임을. 몸은 안다. 1주일에 한 번이라도 안 가면 무언가 찌뿌드드해진다. 지금 그만두면 억울하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오래오래 다니고 싶다.

나는 늦게 발동이 걸리는 대신 한번 시작하면 오래도록 하는 편이다. 33세의 늦은 나이에 사회학의 메카인 미국 시카고 대학에 유학했다. 어려운 학문으로 잘 알려진 역사사회학에 도전, 9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근래 출판했던 책, <만주 모던-60년대 한국 개발 체제의 기원>은 10년 넘게 걸려 썼다. 그리고 1998년 극소수 동료와 만들었던 만주학회는 이제 18년 역사의, 국제적인 학술단체로 컸다. 3수하던 시절 학원에 같이 다니던 선후배들과 함께 만든 동호인 야구팀 도르마는 한국 최장 기록인 44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일부 언론에 ‘동네야구계의 전설’로 소개되기도 했다. 젊은 후배들은 부산의 사회인야구 리그전에서 1년에 수십 게임을 치른다. 후보 선수에도 끼지 못하는 우리 60대 고참들은 1년에 한두 번 부산에서 친선 게임을 치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대학시절에 그랬듯, 시합이 다가오면 1~2주간 흥분 상태에서 술·담배를 줄이고 달리기와 방망이 연습 등 몸 만들기에 들어간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복싱을 시작하게 된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깊은 혐오 때문이었다. 나는 고교 2학년까지 전형적인 ‘범생’이었다. 몸은 삐쩍 말라 가죽만 남고, 가슴이 빨래판 같아 친구들은 나를 ‘국제 왕갈비씨’라고 불렀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공부도 못하고 싸움도 못하는 앙상한 소년이 서 있었다. 나는 경남고교 3학년 때 어느 농땡이 친구의 대학 진학을 도와준답시고 같이 하숙을 했다가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는 늘 아령으로 팔의 알통을 키우며 박력과 이성교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선각자였다.

1976년 알리 방한 땐 45만 인파 몰려


▎무하마드 알리의 사진 앞에서 가드를 올리는 포즈를 취한 한석정 교수. 한 교수는 “복싱을 통한 심신의 수련이 학문적 도전정신의 바탕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나는 같이 시내로 진출하며 야릇한 성인의 길로,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아프락사스(선과 악을 포괄하는 신)의 세계로 갔다. 그 대가는 긴 방황이었다. 대학입시에 실패하여 재수, 삼수, 사수의 나락에 떨어졌다. 시인 서정주는 ‘자화상’에서 자신을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했다.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4수였다. 중간에 서울대 치과대학 예과에 다니다 낙제, 새로 사회계열에 합격하여 3년 후배들과 같이 다녔다. 그럼에도 학사경고를 두 번이나 받아 인문대학 국문과로 쫓겨가서 겨우 졸업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문학과 남성성에 눈을 떴다. 문무를 겸비한 이상적인 자아로 나아가고 싶은 욕망에서 처음에는 동호인 야구에, 그 다음 복싱에 몰입했다. 양자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본능적인 공격 욕구를 채워주었다.

범생은 조선조 500년에서 현대 한국에까지 지속되는 전통이다. 건강한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실용적인 용사보다는 추상적인 문인을 우대하는 유교문화는 국제경쟁, 국토방어 측면에선 치명적이었다. 소년급제는 도박장의 1회성 잭팟 같은 단판승부다. 해방 후에도 경기고, 서울대 출신 등 창백한 범생에 대한 대우는 가히 병적이었다. 사법·행정고시 합격자는 모든 것을 거머쥐었고, 서울대 총장은 쉽게 대통령 물망에까지 올랐다. 그런즉 한국의 부모들은 명문대 진학을 위해 어린 자녀들을 몇 개의 학원으로 내몬다. 서울대와 도쿄대는 매년 야구 정기전을 벌이는데 10여 년간 서울대는 콜드게임 패배(5회 안에 10점 이상의 차이로 인한 시합 중단)를 당했다. 두 나라의 대표적인 범생들에게 이런 중요한 차이가 있다. 선진국의 학생들은 공부와 스포츠를 다 익힌다.

아, 초등 5학년 나의 어린 범생 시절, 대한뉴스에 등장한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의 모습이란! 나는 아웃복싱으로 철권 소니 리스튼을 가볍게 요리하는 그에게 금방 매료되었다. 지금도 그의 포스터를 내 연구실 벽에 붙여놓고 있다. 대한뉴스에서 미국 소식의 전령사는 복싱이었다. 스웨덴의 잉게마르 요한슨을 KO로 설욕, 헤비급 왕좌를 탈환한 흑인 플로이드 패터슨을 위한 뉴욕의 환영행사를 어느 날 신문에서 보았는데, 금방 리스튼과 알리라는 거물 스타가 등장했다. 뒷날 알게 되었지만 패터슨의 승리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표현이었다. 1930년대 미국의 흑인 영웅 조 루이스가 나치 독일의 막스 슈멜링을 KO시키며 챔피언 벨트를 다시 찾았던 감격 비슷한 것, 혹은 유럽 백인을 때려눕힌 흑인 선수를 스타로 만든 미국 민주주의의 자신감이 세계로 펴져나간 것이었다.

조 프레이저와 조지 포먼 격침시킨 알리


▎무하마드 알리(위)가 1974년 자이르에서 열린 WBA, WBC 통합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조지 포먼(미국)을 8회에 쓰러뜨리고 있다.
한국 복싱이 기지개를 켜는 60년대 중반은 무하마드 알리가 헤비급 챔피언에 올라 활약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한국의 언론은 늘 그의 시합에 큰 지면을 할애했다. 그가 1976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세계 최대의 환영인파’(경찰 추산 45만 명)가 몰려 그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나의 유년 시절은 그의 전성기와 일치했다. 그는 도박사들의 예상을 뒤엎고 리스튼을 두 번 KO시켰다. 리스튼은, 카톨릭 신자이자 유순한 이미지의 전 챔피언 패터슨을 두 번이나 1회에 KO시킨 인물이다. 리스튼은 문맹에다 소년원 출신으로 백인들에게 숫제 짐승 수준이었다. 알리는 이런 리스튼을 리턴 매치에서 가벼운 오른손 스트레이트로 1회에 KO시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우리 꼬마들은 등굣길에 알리의 일품 잽을 흉내 내곤 했다. 그는 월남전 참전을 반대해, 병역 기피로 챔피언을 박탈당할 때까지 미국, 캐나다, 서독의 강호들을 가볍게 눌렀다. 대한뉴스는 이 시합들을 모두 소개했다.

한국 TV들은 1970년 그가 복귀한 뒤의 시합들, 예컨대 아르헨티나의 거한 오스카 보나베나, 평생의 라이벌인 조 프레이저와의 승부들을 깡그리 비싼 생방송으로 보여주었다. 71년 챔피언 조 프레이저와의 타이틀전은 전형적인 아웃복서와 인파이터 간의 명승부였다. 또한 양 옆에 흰 줄을 넣은 붉은색 트렁크를 입은 알리와 수박색 트렁크를 입은 프레이저가 벌인 폭력의 미학이었다. 알리는 이 시합 막바지에 불의의 훅을 맞고 다운, 판정패를 당했으나 환상적인 잽과 원투, 양손을 옆구리에 붙여 올리는 정석 어퍼컷, 빠른 풋워크와 여전한 장난기를 과시했다. 74년 당시 최고의 KO율을 자랑하던 거의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거인 챔피언 조지 포먼과의 시합은 상대를 지치게 만든 뒤 8회에 전광석화의 원투로 잠재운 작전의 승리였다. 뒷날 유학시절인 1992년 미국에서 그의 50회 생일 축하쇼를 TV에서 보았는데, 그는 파킨슨병으로 어눌하고 행동이 부자유스러웠다. 나는 망연자실했다. 나의 영웅은 그렇게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6월 3일 사망소식을 들었을 때 내 유소년 시절의 한 페이지가 사라졌음을 느꼈다.

그러다가 국산 스타가 나타났다. 초등 6학년 말 돌연 신문은 대문짝만한 크기로 도쿄에서 미들급 동양챔피언 카이즈 후미오를 때려눕힌 김기수를 소개했다. 그의 승리는 당시 중량급에서 한국이 일본을 처음 누른 사건이라 했다. 김기수는 리턴 매치에서도 이겨 동양챔피언 자리를 오래 지켰다. 그는 당시 마라톤의 강자 이창훈에 이어 한국의 새 스포츠 스타가 되었다. 이후 한일 라이벌전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합이 되었다. 권력자들은 일본인 킬러로 떠오른 그에게 도장을 지어주는 등 정권 차원에서 후원했다. 내가 다닌 한성체육관의 박성화 관장에 의하면, 김기수가 세계 챔피언에 도전하기 전 아래 체급인 웰터급 한국 챔피언 김득봉과의 논타이틀전에서 사실상 패배했는데 심판들은 이것을 무승부로 처리했다고 한다. 로마올림픽 대표이자 아시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김득봉은 애주가임에도 더러 강호들과 선전을 벌였던 한국 복싱의 풍운아였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일 때 김기수가 세계 챔피언에 도전했다. 시합 날짜가 하필이면 6월 25일에 잡혔다. 이날의 승리로 그는 민족의 스타가 되었다. 그의 소식은 당시 신문에 자주 등장하던 한일회담 반대 소식을 일거에 날려버렸다. 우리 학생들은 그의 시합을 편집한 국책영화를 의무적으로 관람했다. 배우 뺨치는 용모의 이탈리아인 세계 챔피언 니노 벤베누티는 로마올림픽 준준결승에서 김기수를 패배시켰던 금메달리스트 출신이었다. 그는 회전이 끝날 때마다 김기수의 머리를 쓰다듬고 자신의 코너로 돌아갔다. 이 오만한 백인은 귀국 후 편파적 판정에 의한 패배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영화를 보니 김기수가 실력으로 제압한 시합이었다. 영화는 오랜 연습의 결과로 보이는 김기수의 성공적인 연타 장면을 느린 화면으로 보여주었다. 노력 끝의 승리라는 교훈을 담고 있었다. 2년 뒤 그는 이탈리아에 가서 도전자 마징기와의 2차 방어전에서 패했다. 중고교생이었던 우리 3형제들 모두가 시무룩해졌다. 온 사회가 공허해진 느낌이었다.

복싱이 퇴조한 후 도장에 나가다


어느 날 마산의 유일한 복싱도장인 중앙권투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움직임과 시설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수련생들은 줄넘기, 새도우 복싱, 펀칭백 두드리기를 시작했다. 3분 뒤 다시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일제히 동작을 중단하고 30초간 휴식을 취했다. 모두가 같은 리듬으로 운동에 열중했다. 나에게 중량급 선수를 겸업한다는, 코가 찌부러진 코치는 저잣거리의 주먹패들을 포함, 온 수컷 위에 군림하는 진정한 남성으로 보였다.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아버님이 권투장갑을 사오신 일은 일대 사건이었다. 나는 마당에서 이것을 끼고 깡충깡충 뛰며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아주는’ 알리를 흉내 내었다. 일본식 가옥인 마산 고향집의 다다미 방은 나의 링이었다. 나는 알리가 되었다가 김기수가 되었다가 하며 다다미의 링에서 활약했다. 혼자의 놀이 속에서 나를 놀린 친구들을 모두 때려 눕혔다.

대학 시절인 70년대에 ‘4전5기의 파이터’ 홍수환, ‘제2의 일본인 킬러’ 유제두 등 새로운 스타들이 나타났다. 일본인들이 태평양전쟁에서 그들을 패배시킨 미국 선수들을 격파하는 거스 이시마스, 와지마 고이치 등에게 열광했듯, 우리는 일본 선수들을 때려눕히는 한국선수들에게 열광했다. 때마침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TV는 중남미의 세계적인 경량급 스타인 자모라, 자라테, 고메즈, 산체스 등의 시합도 빠짐없이 중계해주었다. 멕시코의 자모라와 고메즈는 한국의 세계챔피언인 홍수환, 염동균을 KO시킨 친숙한 인물이다. “누가 누구를 낳고”라는 구약 창세기편의 구절처럼 자모라를 자라테가, 자라테를 고메즈가, 고메즈를 산체스가 차례로 꺾었다. 중량급 스타인 안토니오 세르반테스, 로베르토 듀란의 시합도 금방 중계되었다.

한국의 산업화는 복싱 전사들과 함께 나아갔다. 한국 복싱의 전성기는 ‘수출 입국’, ‘조국중흥’의 구호와 함께 한국 호가 전진하던 시대였다. 고개를 수그려 앞을 응시하며 주먹을 쥔 깡마른 복싱선수는 고난을 뚫고 전진하는 한민족의 표상으로 보였다. 70년대에 매주 일요일 저녁 우리는 MBC TV의 ‘챔피언 스카웃’ 프로그램을 보며 박찬희, 김태식, 고생근, 구상모, 김태호, 김광민, 오영호, 김현, 이창길, 유제두 등의 KO승부에 환호했다. 복싱은 거의 국기 수준이었다. 대형 광고의 주인공들은 거의 복싱선수로서 ‘체력은 국력’을 연출했다. 나는 산업화 시대에 복서의 꿈을 꾸었고, 탈산업화 시대에 그 꿈을 실현했다. 그간 대학 입학, 박사학위, 교수직 등 범생으로서의 모든 의무사항을 마친 뒤였다. 전인교육, 문무겸비에 수십 년이 걸렸다. 40대에 복싱을 배운 것은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었다. 만약 어릴 때 복싱을 배워 학업을 소홀히 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도장에 나간 것은 복싱이 거의 퇴조한 1995년의 일이었다. 한국 복싱은 80년대에 들어와서 이미 추락해버렸다. 산업전사로서의 이미지도 바닥이 났다. 선수들은 적지에서 세계를 정복했던 60~70년대 스타들의 극적 요소가 부족했다. 내가 유학을 가기 수년 전인 1982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 해는 프로복싱 쇠퇴의 결정적인 해였다. 프로복싱의 모든 악재가 분출했다. 먼저 프로복싱 최대의 라이벌인 프로야구 시대가 개막됐다. 미끈한 신사 스포츠 선수들이 거액 연봉을 받고 시대의 총아로 등장했다. 때마침 컬러 TV의 보급으로 피투성이로 난타하는 복싱은 시각적으로도 어울리지 않았다. 언론도 스포츠 중계가 복싱에 편중된 것을 반성하며 다양한 종목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일본 언론은 프로복싱의 약물중독을 연일 폭로했고, 한국에도 그 여진이 미쳤다.

당시 신희섭과 싸운 필리핀 선수가 절명하고, 경량급 KO 왕 김태식이 머리 부상으로 수술한 뒤 은퇴하면서 복싱의 위험성이 줄기차게 제기되었다. 그 흐름의 절정에서 김득구가 미국의 시합에서 사망했다. 백인 강타자 레이 맨시니는 정신적으로 회복하지 못해 조기 은퇴했다. 그와 싸운 김득구가 사망하고 수개월 뒤 김득구의 모친과 그 시합의 심판이 자살하는 비극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아시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는 웰터급 이상의 복싱 글로브를 10온스로 늘이고, 세계권투위원회는 15회 경기를 12회로 변경했다. 전 세계의 언론이 복싱의 위험성을 규탄했다. 김득구 쇼크가 엄습한 것이다. 1982년은 잔인한 해였다. 그 후 한국 언론은 프로복싱을 외면했다. 고액 연봉과 광고의 주인공이 최동원과 이만기 등 프로야구와 씨름선수들로 대체되었고 복서들은 언론으로부터 희롱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선수들이 인기 없는 신설 세계복싱연맹(IBF)의 챔피언이 될 때 신문은 사진 한 장 내어주지 않았다.

도장을 다니느라 평생 ‘지하철맨’이 되다


▎1978년 2월 일본에서 열린 WBA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전에서 승리한 홍수환의 귀국 환영식.
내가 도장에 처음 발을 디디던 90년대에는 이종격투기라는 라이벌 경기가 나타났다. 오늘날 ‘국경 없는 세대와 가상공동체’에 의해 탄생된 이종격투기의 스타들은 민족적 영웅이라기보다 이미지의 공간에서 재구성된 개인적 영웅에 가깝다. 인터넷과 글로벌리즘과 함께 성장한 젊은세대에게 내셔널리즘과 결합된 복싱은 먼 옛날 이야기다. 몸짱, 얼짱, 웰빙이라는 유행어와 함께 몸매에 대한 생각이 강박관념 수준에 이르지만, 정작 본격적으로 복싱을 배우러 가는 이들은 별로 없다. 10회전 동안 얼굴에 주먹세례를 교환하는 국내 챔피언의 대전료가 100만원(실제 수중에는 그 절반)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대도시에서 번창했던 도장들은 거의 문을 닫았거나 영세 사업장으로 전락했다.

장정구 등 네 명의 세계 챔피언을 배출한 복싱도시 부산도 마찬가지였다. 미래의 챔피언을 꿈꾸는 프로복서는 드물다. 미국 버클리 대학 사회학과 교수 로이크 바캉은 90년대 초 시카고 대학 남부 슬럼을 연구하기 위해 그곳의 도장에 입문했다. 흑인들과의 친교와 참여관찰을 위해 도장을 다니며 일부 선수의 인내와 자기완성을 관찰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의 입문자 대부분은 몇 달 다니고 그만둔다. 내가 다닌 도장들에는 이들이 버리고 간 운동화가 산처럼 쌓여있다.

나는 네 개의 도장을 전전했다. 도장을 다니느라 평생 ‘지하철맨’이 되었다. 오랫동안 사범과의 의리를 지키느라 먼 길을 다니다 도장이 도산하거나 도저히 버틸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새 도장을 찾았다. 유학을 다녀온 직후 망설임 끝에 충무동의 한성체육관에 찾아갔다. 첫날 세 달치를 내고 등록했다. 박성화 관장님은 부산 복싱의 산 역사요, 쇠락한 장르의 상징이었다. 그는 입구 사무실에서 줄담배를 태우며 혼자 TV를 보다가 간혹 마루에 나와 “레프트를”, “움직여”, “고개 숙여” 라며 고함을 빽 지르곤 했다. 코가 찌부러져 있고 뚱한 성격의, 만화 주인공 같은 분이었다.

수강생이 아무도 오지 않는 날 혼자 펀칭백을 두드리고 있으면 옆에 쭈그리고 앉아 교수 제자에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건네곤 했다. 간혹 둘이서 운동 후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분야가 다르나 둘은 유망한 제자들의 노력 부족과 조기 중단을 안타까워하는 스승의 고민을 공유했다. 도장은 경영 실패로 영도 구석으로 이전했다. 나는 그를 따라 수년간 퇴근 후 집과 한참 다른 방향인 영도로 갔다가 운동 후 다양한 코스를 택해 귀가하곤 했다. 너무 외진 곳에 있었던 탓에 도장은 결국 문을 닫았다.

세 번째 다닌 거북체육관은 구포의 좀 깨끗한 빌딩 4층에 있었다. 세계 플라이급 1위에 올랐던 젊은 임정근 관장 밑에서 소수의 프로 복서들이 수련을 하는 데라 진짜 도장 냄새가 났다. 집과 정반대 방향인 도장에 한 시간 걸려 도착했다가, 운동 후 부산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귀가하는 대장정이었다. 수년 뒤 결국 현재의 동부체육관으로 옮겼다. 집 방향으로 직진, 운동 후 귀가하는 결정적인 장점이 있다. 이곳은 지금 거북체육관과 더불어 최후의 도장으로 버티고 있다. 세계 챔피언 최점환을 길러낸 김인겸 관장은 내가 오래간만에 도장에 나타나면 반색을 하며 링 위에 올라 직접 펀칭 미트를 대어준다.

나는 1996년 나이를 속이고 두 개의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했다. 봄철 부산 신인대회 출전을 위해 난생 처음으로 몇 킬로그램의 감량과 실전 스파링을 거쳤다. 첫 스파링이 시작되자 맥박이 최대치에 육박하고 오랜 연습은 온데간데없이 정신이 혼미해진 채 상대와 엉겼다. 보름쯤 절식이 계속되어 체중과 기운이 동시에 빠졌다. 일과 후 파리한 얼굴로 연습을 이어갔다. 복싱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연습 중에도 늘 출전을 주저했다. 엄청난 용기로 시합장인 구덕체육관에 나갔는데 웬걸 중량급인 나의 웰터급에 아무도 출전하질 않았다. 부전승 우승이었다. 복싱 인구의 절멸을 알 만했다. 살았다 하는 안도감도 들었다. 안 싸우고 이기는 것이 최상이라고 했던 손자병법을 되뇌며 승리(?)를 자축했다.

전국체육대회 부산 대표 선발전에 출전


▎1982년 11월 13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호텔 특설링에서 열린 WBA 라이트급 타이틀매치 14회전. 김득구 선수는 맨시니의 펀치를 맞고 쓰러져 나흘 뒤 숨졌다.
내쳐 가을에 전국체육대회 부산 대표 선발을 겸하는 선수권 전에 나갔다. 한국 최초의 금메달리스트를 기념하는 양정모 체육관에서 시합이 개최됐다. 박 관장은 무리라며 만류했다. 결승전에 오른 상대 선수가 중학교 시절 소년체전 우승자 출신의 유망주임을 알게 되어 포기를 적극 종용했다. 그럼에도 우기고 감행했다. 짧은 상하의 경기복 차림으로 링 앞에 갔는데 바로 앞 경기를 치르는 선수가 KO로 쭉 널브러졌다. 바로 앞에서 이것을 보니 TV 장면과 판이했다. 끙 하는 비명과 함께 팽팽한 청년이 쭉 뻗어버렸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선수들을 따라온 코치와 친구들이 큰 목소리로 “쳐라, 뻗어라, 보내라”하고 고함을 질렀다. 여기는 동물의 왕국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링 위에 올라갔다. 그건 죽음의 계단, 도살장에 오르는 길이었다. 상대는 젊디젊었다. 1975년 마닐라의 주니어 라이트급 세계 타이틀전에서 서른 살의 노장 김현치 앞에 서 있던 20대 초의 젊은 챔피언 벤 빌라폴로 같았다. 혹은 1976년 불세출의 웰터급 강자 안토니오 세르반테스를 눌렀던 17세의 윌프레드 베니테즈 같았다. 어리다는 것은 힘이 좋다는 것을 뜻한다. 신체조건도 좋았다. 늘씬한 것이 70년대 말 동양 라이트급을 석권했던 김태호같았다. 시합이 시작되니 그를 꺾지 않으면 내가 죽는 한계상 황의 인간, 혹은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초식동물, 혹은 살기위해 그를 먹어야 하는 육식동물로 변했다. 숨을 헉헉거린 채 주먹을 휘둘렀으나 한 방도 맞히지 못했다. 계속 밀렸다.

상대의 펀치는 강력했다. 2회전 말미에 내 허술한 수비가 뚫리며 상대의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허용했다. 순간적으로 눈앞에서 별이 반짝하며 어질어질했다. 고통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뒤이어 본격 원투나 훅이 들어오면 쓰러질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나는 웬일인지 노련한 뒷골목의 파이터처럼 침몰 직전의 상황을 은폐하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죽을힘으로 만든 미소였다. 그러자 상대가 멈칫했다. 나는 그 순간 본능적으로 왼발을 약 10센티 이동하며 수비자세로 옮아갔다. 몇 센티 차라도 비껴서 맞는다면 KO를 면할 것이므로. 이때 공이 울려 나를 살렸다. 운이 좋았다.

박 관장은 시합 내내 포기하자며 수건을 던질 태세였고 나는 절대로 던지지 말라고 대꾸하는 등 우리 코너에서도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마지막 3회전이 시작될 때 상대의 코치가 내 귀에 들릴 정도로 “이제 끝내라”고 주문했다. 이 말에 오기가 났다. 어차피 이판사판이었다. 예상외로 내가 먼저 달려드니 상대가 또 멈칫했다. 과장하면 1974년 킨샤샤에서의 헤비급 타이틀전이 시작되자 무하마드 알리가 예상을 뒤엎고 철권 챔피언 조지 포먼에게 달려들어 기선을 제압하듯 했다. 실력보다는 정신력으로 계속 그를 쫓았으나 헛방의 연속이었다. 어쨌든 다운 한 번 없는 판정패였다.

시합을 끝내고 같이 출전한 도장의 젊은 동료들과 낮술을 마셨다. 복서들 사이에도 위계가 있었다. 출전해서 KO승이냐, 판정승이냐, 패배 중에서도 판정패냐, 다운을 당한 패배냐, KO패냐 등의 등급이 있었다. 꼭 그런 순서로 떠들었다. 일부선수, 즉 다운을 당한 패자와 KO패로 진 사람들은 조용했다. 나는 다소 떠들었다. 눈가에 피멍이 들어 며칠간 집에서 쇠고기를 눈가에 붙이고 수업에 선글라스를 끼고 들어갔으나 매년 가을만 되면 이 선수권대회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현실과 상상이 뒤엉켰다. 감량을 시도하고 스파링을 소화했다. 늘 감량은 실패하고, 젊은이들과의 스파링에서 눈언저리, 명치, 옆구리를 심하게 맞거나 어깨 부상으로 좌절했다.

선글라스 끼고 출강하기도


▎한석정 교수에게 복싱은 사지의 벼랑에서 살아남는 단련과 끈질김, 그리고 지적 도전으로 이어졌다. 도장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일본어와 중국어를 연마할 정도로 복싱은 연구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나의 열망이 통했는지 10년 뒤 한국프로복싱협회가 40, 50대 프로대회란 깜짝쇼를 개최했다. 헤드기어를 쓰고 민소매 경기복을 입은 중년들의 잔치였다. 나는 53세 나이에 처음으로 합법적으로 참가했다. 그간 매일 아침 100회의 왼손 잽(오늘날에도 계속하는)을 뻗고 2~3㎞를 달려 약간 자신감이 있었다. 문제는 감량이었다. 단기간에 6~7㎏을 줄이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약 한 달간 아침과 점심을 내리 굶고 집중적인 연습했는데 어느 점심식사 자리에서 코피가 쏟아졌다. 시합 전날 KTX로 상경하여 협회로 가는 길에 혈당이 급격히 떨어져 식은땀이 나고 어질어질했다. 위험한 지경이었다. 협회의 체중계에 올라 보니 평소의 체중에서 무려 10㎏이 줄어 있었다. 무리한 감량이었다. 계체량 뒤 먹은 음식을 소화하지 못해 밤새 설사했다.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지인 한 분이 격려차 일찍 숙소를 방문하여 산통을 다 깨어버렸다. 초주검이 된 채 링에 올랐다.

여섯 명이 출전했던 웰터급의 우승자를 1차전에 만났던 것도 불운이었다. 나의 코치는 그가 김현치가 왕년에 구사했던 오른손 카운터 훅을 잘 치는 것으로 보아 프로복서 출신 같다고 했다. 1회전이 시작하자 나는 불문곡직하고 왼손 잽으로 기선을 제압하며 공세적으로 나갔다. 둘은 11월의 싸늘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치고 받았다. 상대의 옆구리와 턱에 내 왼손 연타가 작렬했으나 다운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맷집이 좋았다. 그런데 2회에서 힘에 부쳐 다리가 꼬이며 작은 충격에 다운되는 바람에 판정패를 당했다. 상대는 준결승, 결승전에서 낙승,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 후 나와의 시합이 명승부였다며 자신의 명함을 전했다. 그는 산악 가이드였다. 시합이 TV 뉴스에 소개되어 코피로 얼룩진 내 얼굴을 알아본 친구들이 “아직도 그런 짓을 하느냐”고 전화를 걸어왔다. 시합 중에 입은 옆구리 부상으로 한 달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지만 나는 다음 해의 시합을 기약했다. 그런데 협회는 이런 대회를 다시는 열지 않았다. 퇴락한 한국 복싱의 복구에 도움이 될 것인데. 나는 이 대회의 재개를 기다린다.

상대의 머리를 공격하는 복싱은 현대판 검투사, 혹은 문명의 순화 과정에서 허용된 수성(獸性) 같은 것이다. 미국에서는 거리의 청년들을 백인 신부나 YMCA 지도자가 지도하여 스타로 만드는 교화의 드라마가 있다. 거리의 청년에게는 인생역전의 수단이다.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은 강간 사건으로 구금될 때까지 1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알리는 탁월한 기량, 용모와 언변으로 명사의 반열에 올랐다. 복싱은 나에게 일종의 연금술이었다. 이것은 비현실적인 꿈이었으되 사지의 벼랑에서 살아남는 단련과 끈질김, 그리고 지적 도전으로 이어졌다. 연구실에 펀칭백을 두고 책을 읽다가 가끔 가볍게 두드릴 정도로 복싱은 연구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 4~5년간 대학의 중요 보직을 맡은 동안에도 저서 집필을 이어나갔다. 시합에 출전하던 시절의 고적한 아침 조깅처럼 묵묵히 주말을 반납하고 연구실로 향했다. 그 정신으로 은퇴 후의 저술 계획도 서 있다. 그간 도장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박사학위 시절에 시작했던 중국어와 일본어를 악착같이 붙들어 현재도 문헌을 읽고 기본 대화를 하는 편이다. 근래 부산의 남녀 러시아인들과의 간단한 대화를 위해, 그리고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이슬람권에 대한 관심으로 러시아어와 꼬부랑 아랍어를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한 10년 익히면 되지 않을까? 나는 계속 도전한다. 복싱이 그 도전정신의 바탕을 이루고 있으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석정 - 동아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차기 총장 내정자.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를 받았다. 풀브라이트 펠로우로서 미국 캘리포니아주립 어바인 대학의 강의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자문위원,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영문저널 의 편집고문이다. <만주 모던> <만주국 건국의 재해석> 등 다수의 저서와 <화려한 군주> 등의 역서를 냈다.

201607호 (201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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