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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완의 뉴욕통신] 뉴욕의 가을, 박물관 탐방기 

맨해튼의 뿌리는 ‘세계다’ 

김해완 작가
인류를 탄생케 한 ‘동·서양 문화’, ‘자연 생태계 역사’를 일상으로 끌어들인 뉴요커의 ‘자아(自我) 찾기’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작품 <생명의 나무>. 생명의 진화를 추적하며 각 생물이 언제 어디서 갈라져 나왔는지 추적한 도표다. 이에 따르면 모든 것은 바닷속 미토콘드리아로부터 시작됐다는 결론에 이른다.
2006년 <박물관이 살아있다>라는 영화가 세계적으로 흥행했다.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에 경비원으로 취직한 주인공은 밤마다 전시물이 되살아 움직이는 걸 목격한다. 날이 밝기 전 전시물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한 경비원의 모험담을 담은 독특한 스토리 덕분에 큰 인기를 모았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뉴욕이라는 도시가 특별하니 별일 없는 박물관마저도 영화 소재로 쓰이는군”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훗날 뉴요커로 직접 살아보니 이 영화야말로 뉴욕의 박물관이 갖는 특별함을 제대로 간파하고 있었다.

실제로 뉴욕에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자연사박물관, 뉴욕 현대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등 자타 공인하는 다양한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들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 때문이다.

뉴욕의 박물관에서는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처럼 야밤에 공룡 전시물이 살아 움직이지는 않지만 그 소란과 맞먹는 활기가 늘 넘친다. 비단 관광객과 미술에 조예가 깊은 상류층만이 아니라 평범한 뉴요커도 데이트, 산책, 공부 등을 이유로 이곳을 찾는다.

뉴욕에서 박물관은 격의 없이 누구나 갈 수 있는 장소로 일상에 뿌리내렸다. 사람을 끊임없이 한 장소에 끌어들이는 것은 돈으로도 강제할 수 없는 일이다. 자발적으로 찾아온 사람이 박물관을 놀이공원처럼 떠들썩하게 만든다. 이미 수명을 다한 전시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뉴욕에서는 정말로 박물관이 살아 있다!

뉴욕에는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최신 시설이 널렸음에도 이곳에서 박물관은 당당히 ‘핫플레이스(hot place)’로서 사랑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도시에서 박물관은 엄숙한 공간으로 자리 잡아왔다. 나를 비롯해 혹자는 교양 없어 보일까 봐 감히 대놓고 말하지 못할 뿐이지만 박물관이 재미를 추구하는 공간은 아니지 않은가!

뜨거운 뉴욕 식혀주는 ‘차가운 오아시스’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던 그라운드제로에 9·11 추모박물관이 세워졌다. 야외 추모 공원에는 북미 최대 규모의 지하폭포가 조성됐다. 연평균 400만 명의 관람객이 이곳을 찾는다.
우선 알지 못하는 시대의 물건을 보는 일은 지루하다. 해당 분야를 자유자재로 꿰고 있는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관람을 즐기기 쉽지 않다. 때로는 과거를 무조건 기억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소화해내는 게 중요하다. 박물관이 지루한 까닭은 기억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뉴욕은, 기억력이 지나치게 짧다. 뉴요커의 대다수는 과거와 절연하고 새 삶을 시작할 각오로 본국을 떠나온 이주민이다. 게다가 뉴욕은 대표적인 자본주의 도시다. 자본주의는 과거를 지우는 운동이다. 소비 말고는 어떤 전통에도 가치를 두지 않는다. 한 상품이 유행하기 무섭게 다른 상품으로 그 흔적을 지우곤 한다.

덕분에 이 도시에서는 기억보다 망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새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 새 상품을 구입하는 행동으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과거와 결별하라, 새 상품으로 리셋(reset) 하라!” 뉴욕의 이런 활력은 일종의 병이다. 행동 과잉이자 조증 상태다. 뭔가를 기억하려면 새 경험을 충분히 체화하는 게 필요하다.

“역사는 책에 기록된 형이상학이 아니다. 몸에 새겨져 있는 기록이다.” 철학자 니체의 말이다. 자신, 가족, 도시에서 이뤄진 모든 두뇌 활동, 신체적 경험은 뇌의 기억세포, 근육 등 각자의 몸에 기록돼 있다. 하지만 뉴욕에는 그럴 여유가 없다. 종종 생기는 여유는 쇼핑으로 소모되고 만다.

결국 ‘어떤 과거를 경험했느냐’와 상관없이 비슷한 방식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자기만의 기억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갈증 때문에 아마도 뉴요커는 세계의 기억이 집적돼 있는 박물관을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박물관의 기억을 체화하려는 뉴요커의 움직임은 나날이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박물관을 자주 찾아 전시품과 교감하고 일상을 공유한다. ‘시체’가 될 뻔한 과거의 물건은 생기를 얻고, ‘상품’이 될 뻔한 현재의 몸은 개성을 얻는다.

이것이 뉴욕과 박물관의 공생관계다. 동양철학의 음양오행에서 ‘수(水)’ 기운이 ‘화(火)’ 기운을 극하듯, 박물관은 뜨거운 뉴욕을 어루만지는 차가운 오아시스 역할을 한다. 게다가 그 오아시스는 무궁무진하기까지 한다. 어느덧 10월, 내리쬐는 가을 햇살 아래 뉴욕의 오아시스를 찾는다.

세계 정치의 축소판 ‘메트로폴리탄’ | 뉴요커 자신의 정신적 뿌리를 느낄 수 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전경. 세상에서 여섯째로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박물관이다. 1872년 지어질 당시보다 면적이 20배가량이나 넓어졌다.
첫 번째 탐방장소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미국에서 제일 거대한 박물관, 세상에서 여섯째로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박물관이라는 명성답게 엄청난 넓이를 자랑한다. 1872년 지어질 당시보다 면적이 20배가량 넓어졌다고 한다.

이 거대한 공간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바로 ‘세계’에 대한 집념이다. 이 집념은 로비에서부터 강렬하게 드러난다. 오대양과 육대륙의 유물로 꾸며진 로비에 들어서면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을 수집하고 말겠다’는 제국주의적 ‘수집’욕이 느껴진다.

실제로 16세기 이후 박물관은 ‘지배자’ 제국이 자신의 식민지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장소였다. 이와 관련 중남미 연구가 로버트 데이비드 아귀레는 “박물관은 전시품이 탄생된 ‘모국’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이 전시품을 갈취해온 제국주의적 주체도 함께 드러내야 한다”고 말했다.

제국주의적 수집욕으로 시작된 박물관이었으나 뉴욕의 박물관은 그 흐름을 달리한다. 이유인즉 박물관에 찾아온 대부분의 뉴요커는 식민지의 혈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프리카 노예, 남아메리카 원주민, 아시아 철도 농도자의 핏줄을 타고 이 ‘메트로폴리스(거대도시)’에 태어났다.

어떤 뉴요커에게 박물관은 정신적 뿌리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자 자신의 또 다른 역사인 것이다. 난 어디서 왔는가? 피부색, 입맛, 감각, 성격은 과거 어느 나라에서 시작해 오늘날의 나로 재탄생했는가? 아르헨티나 작가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소설 <드러누운 밤>의 주인공은 현실에서는 병실에 누워 있지만 꿈속에서는 아즈텍 전사로 태어난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박물관에서도 벌어진다. 전시품은 무의식의 기억을 소환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니체는 이런 현상을 ‘골동품적 역사’라고 설명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과거를 보존하고 싶어한다. 실존에 대한 해명을 본능적으로 찾는 습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서 부평초처럼 흘러 들어온 이들이 잡탕처럼 섞여 사는 도시가 뉴욕이다. 결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뉴욕 전체의 선언 같다. “맨해튼의 뿌리는 곧 ‘세계’다!” 제아무리 다양한 인간이 섞여 사는 뉴욕이지만 그들 사이서도 권력 차가 있다.


▎1.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소장 중인 이집트 덴더사원. 이집트 미이라와 파피루스에 적힌 상형문자와 함께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시품이다. / 2.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2층 전시실. 유럽의 중세·르네상스 미술이 소개돼 있다. 지중해 예술을 디딤돌삼아 유럽의 예술이 꽃피웠음을 알 수 있다. / 3. 메트로폴리탄의 아프리카·오세아니아·아메리카관. 잉카 문명과 아즈텍 문명이 창출해낸 장식품은 너무 화려해서 눈이 부실 지경이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역시 세계 정치의 축소판 같은 모습을 보인다. 이런 기조는 전시품의 공간 배치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단 이 박물관 1층에는 고대 그리스·로마관과 이집트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두 관은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다. 이집트 미이라와 파피루스에 적힌 상형문자를 보고 흥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스·로마관 역시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돈다. 그리스의 한 석상은 몇 천 년 작품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다. 그리스·로마와 이집트관이 인기 있는 이유는 또 있다.

이 두 관을 거쳐야만 다른 관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로마관의 뒤쪽에는 아프리카·오세아니아·아메리카관이, 위층에는 중동·중앙아시아관이 위치해 있다. 이집트관 뒤쪽에는 미국관이, 위층에는 아시아관이 있다.

이 배치가 의미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스·로마·이집트가 인류 예술의 ‘영원한 디딤돌’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인류의 4대 문명은 유럽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집트를 제외하면 모두 아시아 대륙에서 일어났다.

유럽 문화를 찬양하던 뉴요커도 미국관 앞에서는 이색적인 답을 내놓는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된 것 모두 인류의 뿌리 아니겠느냐”고. 미국답게 스케일도 크다. ‘전 세계가 다 자신의 뿌리’라는 식이다. 틀린 얘기는 아닌 것 같다. 뿌리에 위계를 정하는데 집착한다면 차라리 뿌리를 찾지 않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

이 박물관에서 가장 뉴욕다운 곳으로 5층에 있는 ‘지붕정원(Roof Garden)’을 꼽고 싶다. 이곳에서 바라본 센트럴파크와 맨해튼의 전경은 황홀할 지경이다. 누구나 찾아와 자유롭게 어울리는 모습은 뉴욕 그 자체다.

인류의 수천 년 역사가 담긴 건물 위에서 시끌벅적하게 놀다니 참 발칙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박물관을 탐방하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 같다. 뿌리를 느끼는 것은 그것에 집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제대로 알아서 ‘나’에 얽매이지 않고 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다.

가장 뉴욕다운… 현대미술관(MOMA) | 지적인 역사와 젊은 감각을 동시에 만나다


▎1. 모마 박물관 전경. 맨해튼 미드타운에 위치한 모마는 전시 스타일답게 외관도 굉장히 세련돼 젊은층에 인기가 많다. 2 모마의 로비. 안내데스크에 색깔 별로 꽂힌 팜플렛은 다양한 언어로 쓰여 있다. 코스모폴리탄을 위한 가장 현대적이며 모범적인 미술관이다. 3. 루빈 박물관. 티베트의 불교 사원의 모습을 그대로 전시해놓았다. 경건한 분위기에 관람객도 저절로 경의를 표하게 된다.
‘모마(MOMA)’는 미드타운의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을 부르는 애칭이다. 메트로폴리탄의 영원한 경쟁자로 불리는 미술관이다. 둘은 여러모로 대비된다. 일단 메트로폴리탄은 크고, 모마는 작다.

메트로폴리탄이 전 세계 고전 작품을 모두 취급한다면 모마는 (주로 유럽·북미의) 근현대 작품 중에서도 인기 있는 소수만 골라냈다. 메트로폴리탄이 기부제로 관람객을 최대한 많이 끌어들인다면 모마는 25달러라는 뉴욕에서 가장 비싼 입장료를 자랑한다.

메트로폴리탄은 화려한 디스플레이 덕분에 박물관을 돌아다니기만 해도 충분히 재미있는 반면 모마는 디스플레이는 간소화하고 작품으로만 승부하려 한다. 그래서 모마의 관람객 중에는 청년이 두드러지게 많이 보인다. 모마의 정기 회원도 20대~30대 비율이 가장 높다.

이들에게는 어려운 작품도 공부하겠다는 의지가 불타고 있다. 작품 앞에 서서 오디오를 끼고 메모를 하거나 난해한 특별전에서는 꼼꼼하게 팜플렛을 읽기도 한다.

모마는 아담한 6층짜리 건물이다. 다 돌아보는 데 두 시간이면 적당하다. 4~5층에는 상시적인 모마 컬렉션이 있다. 가장 대중적으로 유명한 19~20세기 유럽 회화가 전시되고 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마티스의 <춤>, 루소의 <춤추는 집시>, 앤디 워홀의 <캠벨의 스프 캔>, 마그리트의 <연인> 등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작품이다.


▎오늘날 티베트의 한 도시를 촬영한 사진. 도시를 둘러싼 웅장한 히말라야 산맥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루빈 박물관은 히말라야 문명에 경외를 표하는 전시를 주로 하고 있다.
시간이 없는 관광객은 주로 이곳에서 명작만 골라본 후 떠난다. 모마를 정말 특별하게 만드는 힘은 바로 이 특별전을 기획하는 힘에 있다. 6층에는 모마가 가장 주목하는 전시, 2층에는 실험적이고 현대적인 전시가 진행된다.

모마의 특별전은 미술관 바깥까지 회자되기도 한다. 한 번은 세르비안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빅(Marina Abramovic)이 관람객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는 퍼포먼스 아트를 하다가 과거에 헤어진 연인과 마주 앉고 눈물을 흘린 영상이 크게 감동을 불러일으킨 적도 있었다.

더 아트 뉴스페이퍼(The Art Newspaer)의 ‘가장 인기 많은 특별전 20’ 차트를 봐도 모마가 두 번이나 나온다. 메트로폴리탄은 아예 없는데 말이다. 그 저력은 바로 19세기와 20세기 미술의 조류를 집약하는 동시에 그 흐름이 지금 21세기에 어떻게 꽃피우고 있는지 놓치지 않는 힘에서 나온다.

모마는 지적인 역사와 젊은 동시대적 감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다. 그런데 이 세련미는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1층에 위치한 미술관 숍에는 명화가 프린트된 상품이 불티나게 팔린다. 과거의 유산을 오늘의 이윤으로 바꿔내는 전략을 알고 있는 모마다. 참으로 뉴욕다운 미술관이다.

불교 미술 숨쉬는 루빈 박물관 | 오래된 미래를 향한 경배


▎9·11 추모박물관은 정신 없이 돌아가는 뉴욕의 일상에서 잊어버리기 쉬운 ‘전쟁’의 존재가 드러나는 곳이다. 일상과 전쟁의 교차로인 이곳에서 뉴요커는 여전히 ‘그날’을 간직하고 있다.
뉴욕의 관광객이 찾는 필수 코스인 첼시 마켓 근처에는 한 박물관이 있다. 바로 루빈 박물관이다. 이곳을 뉴욕 토박이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규모가 작은 데다가 다루는 분야도 서양에서는 낯선 히말라야(네팔·티베트·인도·방글라데시·파키스탄)의 불교 미술이기 때문이다.

이 박물관의 특징은 관람객 수에 목매지 않고 티베트 음악 연주회 같은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는 것에 있다. 매주 금요일 밤에는 다른 박물관처럼 무료 개방을 하고, 티베트 음악 연주회 같은 이색 이벤트도 꾸준히 열린다.

주중 오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나를 포함해 박물관에는 총 10명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루빈 박물관은 고정 팬층과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정식 회원층이 튼튼하다고 한다. 나 역시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는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다가 점차 이 고요한 박물관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뉴욕에서 보기 드물게 ‘한적하고 고급스러운’ 장소라서 그렇다.

루빈 박물관의 최대 매력은 경건함이다. 진열대에 상품을 늘어놓듯이 최대한 스펙타클하게 작품을 전시하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는 달리 루빈 박물관은 각 작품의 특이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전시한다. 작품을 진열하는 경건한 분위기는 종교를 떠나 영성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미국 문화로서는 드물게 이런 타문화에 이토록 존경을 표시하다니! 이런 외부성이야말로 뉴욕 지성의 외연이 얼마나 넓은지 보여주는 지표가 아닐까?


▎자연사박물관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활기다. 식물·동물·화석이 당장이라도 숨쉴 것처럼 생생하게 조형돼 있다.
오늘날 히말라야 지역은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위기에 놓인 지역이다. 그러면서도 불교가 여전히 일상 속에서 깊게 뿌리내린 곳이기도 하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 문명은 인간의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웠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안다. ‘이성’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힘인지. 지난 수백 년간, 얼마나 비이성적인 행동이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 저질러졌는지.

루빈 박물관 외벽에 쓰여 있는 문구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존재한다’처럼 우리는 그간 착각에 빠져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문명의 비전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마저도 덧없는 상(想)으로 이해하는 불교의 수행은 왜 비전이 될 수 없는가? 뉴욕이라는 최고의 근대 도시에서, 루빈 박물관은 이렇듯 오래된 미래에 대한 근사한 상상력을 제시한다.

작은 규모, 적은 관객, 트렌드에서 벗어난 테마. 루빈 박물관은 박물관이 망하기(!)에 딱 좋은 삼박자를 두루 갖췄다. 그러나 이 박물관은 아무 문제 없이 운영되고 있다. 마니아층 사이에서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시즌 별로 특별전까지 한다. 뉴욕의 박물관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만하지 않은가?

9·11 추모박물관 | 전쟁과 일상의 교차로를 걷다


▎자연사박물관은 뉴욕 한복판에서 ‘생명체로서의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화두를 던진다.
재작년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던 그라운드제로에서 한 박물관이 오픈했다. 이곳에는 연 평균 400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다. 9·11 추모 박물관의 얘기다.

이곳의 공식 방문록에는 하나같이 ‘감정’을 나타낸 후기가 작성돼 있다. “참으로 대단하다. 내 감정을 움직였다.” “그날의 감정이 떠오른다. 끔찍했었지만 기억해야만 하는 사건.”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은 다 다르겠지만, 이런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원인은 대략 하나다. 전쟁이 일상에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진실 때문이다. 처음 이 박물관이 개장됐을 당시 뉴욕 시민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한쪽은 테러를 당한 장소가 관광 장소가 된 것이 불편하다고 했고, 또 다른 쪽은 끔찍했던 과거의 산물이 오늘의 활기와 뒤섞일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결국 한쪽은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전쟁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다른 쪽은 테러의 상처를 일상의 힘으로 치유하자고 말하고 있다. 9·11 박물관은 양쪽의 요구를 적절하게 절충했다.

이 박물관은 크게 두 장소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는 야외 추모공원이다. 쌍둥이 빌딩이 원래 있었던 자리를 그대로 본떠 지금은 지하폭포가 들어섰다. 이 폭포는 북미 대륙에 있는 인공폭포 중에서 가장 크다. 난간에는 희생자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이 아름다운 공원은 만인에게 개방돼 있다. 이곳에서 누구나 휴식을 취하면서 자연스레 3000명의 사상자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 편안한 분위기는 어두컴컴한 박물관에 입장하는 순간 전환된다. 관람을 시작하는 입구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있다. 여기에는 테러에 희생당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계속 지나간다. 전시는 1층에서 시작해 점점 깊은 지하로 내려가는데 지하로 내려갈수록 감정도 점점 고조를 더해간다. 순직한 소방수의 장갑에서 시작해 건물의 잔해까지.

하이라이트는 맨 아래층에 위치한 방이다. 여기에는 2001년 9월 11일에 관한 정보로 빼곡히 집중돼 있다. 사건의 경위가 분 단위로 설명되어 있고, 그 순간에 방송되었던 세계 각국의 뉴스를 모아놨다. 희생자의 프로필도 차곡차곡 정리돼 있다. 물밀듯이 범람하는 정보에 숨이 막히고, 전쟁의 영향력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전쟁은 앞으로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아니, 우리는 이미 전쟁에 돌입한 세계 한복판에 살고 있다. 이것이 9·11 추모박물관이 감정을 넘어서 전하는 메시지다. 이 박물관은 정신 없는 뉴욕 일상에서 잊어버리기 쉬운 ‘전쟁’의 존재가 드러나는 곳, 일상과 전쟁의 교차로다.

생명 만나 약동하는 자연사박물관 | 인간의 뿌리는 바닷속의 단세포다


▎2014년에 발견된 거대한 공룡화석 모형. 최근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돼 화제가 됐다. 크기가 너무 커서 홀 하나에 다 전시하지 못할 정도다.
추모의 물결을 지나 생명이 태동하는 전시장으로 가보자. 뉴욕에서 가장 경이롭고 또 가장 사랑받는 박물관, 바로 자연사 박물관이다. 이곳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처럼 입장료를 내고 싶은 만큼 내는 기부금 제도로 운영되는 점이 매력적이다.

이 박물관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활기다. 전시품부터가 그렇다. 식물·동물·화석이 당장이라도 숨쉴 것처럼 생생하게 조형돼 있다. 이 생생함에 더욱 생생히 열광하는 관람객도 활기를 더하고 있다. 바로 아이들이다. 박물관의 1층부터 4층까지, 온 복도를 즐거워하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생명에게 다른 생명만큼 경이로운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사박물관의 또 다른 강점은 재미있다는 것에 있다. ‘재미’는 나와 다른 생명체와 마주칠 때마다 몸에서 가장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반응이기도 하다.

가령 눈앞에 100배로 확대된 모기가 있다고 해보자. 평소 쉽게 때려죽이던 모기와는 너무 다르게 생겼다. 다리에는 털이 많고 엉덩이는 토실하며 피를 빨아먹는 침은 본업에 최적화되어 있다. 찬찬히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니 문득 모기라는 생명체가 그 어떤 비싼 세공품보다도 더 정교하게 보인다. 이런 존재와 매일 여름밤을 같이 보냈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연사박물관은 지구의 탄생부터 인간의 문화까지의 역사를 모두 다 아우른다. 전시실은 총 다섯 곳으로 분류돼 있다. 지구(광석), 화석, 동물, 환경(식물), 그리고 인간이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가 뜨거운 곳은 바로 화석 전시실이다. 이 전시실에는 현재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생물의 화석이 있다. 특히 공룡 화석이 인기가 좋다. 남자아이들이 티라노 사우르스 ‘렉스’의 사진을 찍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2014년에 발견된 거대한 공룡의 화석 모형이 최근 이 전시실에 들어왔다. 크기가 너무 커서 홀 하나에 다 전시하지 못할 정도다. 이 화석 전시실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곳은 바로 ‘생명의 나무’다. 생명의 진화를 추적하면서 각 생물이 언제 어디서 갈라져 나왔는지 추적한 도표다. 이 도표를 보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이 나무가 몇 십만 년 갈라지고 또 갈라진 끝에 인간이 탄생했던 것이다.

결국 공룡 화석도 세포 차원에서는 나와 연결돼 있다는 소리다. 인간과 초파리의 DNA가 80% 같다고 하니 내 존재의 8할은 ‘초파리’다. 이 생명의 나무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것은 바닷속 미토콘드리아로부터 시작됐다는 결론에 이른다.

인간의 뿌리는 단세포인 것이다. 이것이 자연사박물관이 뉴요커에게 주는 최고의 통찰 아닐까? 인간이 제 아무리 잘난 척한다고 해도 이 생명의 ‘인드라망’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박물관을 재미있게 만드는 사람들

자연사박물관에는 ‘뉴욕 주(州)의 환경’이라는 전시실이 있다. 유럽인이 이곳으로 건너오기 전 뉴욕이 얼마나 풍요로운 생태계였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미국이 원래 ‘주인’이었던 아메리카 인디언은 이 천국 같은 섬을 ‘마하나타’라고 불렀다.

이 섬이 뉴욕 맨해튼으로 변모하기까지 400년이 걸렸다. 그리고 오늘날 뉴욕은 무려 우주적인 모순을 품게 됐다. 원래 자연 생태계는 다양할수록 살기 좋아진다. 다양성은 생명의 원리다. 다양한 생명 사이에서 살고 싶은 것은 생명체로서 당연한 욕구다.

그런데 도시 생태계는 다양해질수록 삶의 진액을 바싹 말려버린다. 뉴욕이 번창할수록 물가는 비싸지고 뉴요커는 이런 다양성을 즐길 새도 없이 일에 몰두해야 했다. 자유를 찾아온 젊은이는 뉴욕의 밑바닥 노동력으로 전락했다. 왜 인간은 이렇게 전도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자연사박물관은 뉴욕 한복판에서 이런 화두를 일깨운다. 생명체로서의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시와 자연 사이의 간극을 가로질러야 생명의 자유도 누릴 수 있다. 이렇든 저렇든, 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이다.

맨해튼의 뉴요커가 자본주의의 급류에 휩쓸려 노숙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마하나타의 인디언도 해일에 휩쓸려 비명횡사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은 최소한 ‘자본과 스펙이 너의 삶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의 힘을 빌려 태어났다. 그러니 그 힘으로 고통 받고, 휘청대고, 스러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 항상 배부르고 즐거울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하루하루 살아가는 자신이 경이로워진다. 자연사박물관에서 다른 생명과 만나며 느꼈던 즐거움을 스스로에게도 느끼게 된다.

맨해튼에서 살면서도 마하나타 섬의 자유를 구사하기! 이것이 자연사박물관이 뉴요커에게 주는 미션 아닐까?

뉴욕 박물관 탐방기라는 제목을 보고 혹자는 이런 상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가을 햇볕을 받으며 우아하게 센트럴파크를 지나 고즈넉하게 박물관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말이다. 그랬다면 유감이다.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덜 우아하다.

인파가 북적거리는 통에 박물관마다 발 디딜 틈이 없다. 관람을 하기도 전에 박물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에 압도당한다. 하지만 초점을 바꾸면 이런 상황도 흥미로워진다. 뉴욕의 박물관이 ‘얼마나 재미있고 특별한지’가 아니라 뉴요커가 박물관을 ‘어떻게 재미있게 만들어내는가’로.

재미는 홀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재미있다는 것은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타자와 연결될 때에만 느낄 수 있다. 나와 다른 존재만이 현재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에 나들이 가는 마음은 바로 이래야 한다.

지금 여기와는 다른 시공간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이 연결을 통해서 내 몸에 역사를 생생히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가? 그렇다면 뉴욕의 박물관이 온통 시끄럽다고 해도 참을 만할 것이다. 원래 새로운 것과 만나는 일은 정신없고 소란스러운 법이니.

김해완 - 고등학교 재학 중 학교를 나와 공부공동체인 남산강 학원에서 생활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가방끈은 짧지만 공부복은 많다. 2년 전에는 예상치 못하게 ‘세계의 수도’ 뉴욕 한복판에 떨어졌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사람, 새로운 배움을 누리며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보내는 중이다. 쓴 책으로는 <다른 십대의 탄생>(그린비), <리좀, 나의 삶 나의 글>(북드라망), <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작은길)이 있다.

201611호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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