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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이 쓰는 ‘생명의 비밀’] 설거지 끝판대장 수세미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
열매는 아주 거칠거칠한 억센 섬유성으로 목욕탕이나 부엌 행주로 제격…씨앗기름은 광택제, 자외선 차단제로 쓰이고 대상포진, 종기, 피부병에 효능

▎수세미 열매는 10월에 익으며, 커다란 오이처럼 생겼다.
늦 봄에 심은 수세미가 길길이 자라 밭가의 뽕나무 우듬지까지 슬금슬금 기어올라 지금은 팔뚝만한 수세미(열매) 대여섯 개를 뒤룽뒤룽 매달고 있다. 수세미는 호박·오이·여주·박과 함께 박과의 한해살이 덩굴식물로 세계적으로 7종이 있고, 수세미외·수세미오이라고도 불린다. 인도 원산으로 옛날에는 시골에서 설거지에 쓰려고 수세미를 애써 가꿨다.

필자가 소싯적엔 짚이나 수세미(sponge gourd) 열매를 행주로 썼다. 그러나 요새는 합성수지나 인조 스펀지, 쇠수세미 등 여러 가지를 대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바다에 나는 해면(海綿, sponge)을 행주로 많이 썼다. 아무튼 요샌 수세미나 해면이 죄다 한물간 구닥다리가 되었을망정 그래도 아주 귀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짚을 둘둘 말아서 만든 행주는 명절이나 제삿날에는 제기로 쓸 놋그릇을 닦는 데 쓸모가 있었다. 가는 모래와 짚을 태운 재나 기왓장을 곱게 부숴 나온 가루를 물과 섞어 짚수세미에 묻혀 싹싹 문지르면 반짝반짝 윤이 나면서 깨끗하게 잘 닦였다. 그런가 하면 수세미는 심하게 구겨지거나 더러운 물건을 이르는 말로 ‘수세미가 된 옷’ 따위로 쓰이고, “이리 떼 틀고 앉았던 수세미자리 같다”란 속담은 어수선한 자리를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수세미에는 탄수화물·단백질·지방·식이섬유 말고도 온갖 비타민과 칼륨, 칼슘 같은 무기염류에 레티놀·베타카로틴·엽산과 비타민 A·B·C등이 듬뿍 들어 있다. 인도나 아프리카와 필리핀, 베트남 등 동남아 지역에서는 열매섬유소가 딱딱하게 야물어지기 전, 12㎝ 이하의 어린 녹색열매를 채소로 먹을뿐더러 여린 잎도 볶음이나 수프 등으로 요리해서 먹는다고 한다. 특히 일본 규슈 지방에서는 행주·비누·샴푸·로손 용도로 대대적으로 재배할 뿐만 아니라 자연 햇볕가림으로 건물 바깥벽에 여주와 함께 많이 심는다고 한다.

수세미 잎은 손바닥 모양으로 가장자리가 얕게 5~7개로 갈라지고, 길이와 폭이 각각 13~30㎝로 갈라진 잎(열편, 裂片) 끝이 뾰족하다. 거친 줄기는 덩굴성으로 15m 넘게 뻗고, 여러 개의 모(각, 角)가 나며, 특유한 냄새가 나고, 줄기에서 덩굴손이 나와서 다른 물체를 칭칭 감아 거침없이 기어오른다. 암수 한 그루(자웅동주, 雌雄同株)이고, 7~9월에 샛노란 꽃이 아침에 일찍 피고, 꽃잎둘레가 5갈래로 갈라지는 통꽃(합판화, 合瓣花)으로 잎겨드랑이에 달린다.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니 수꽃에는 5개의 수술이 있고, 암꽃에는 1개의 암술이 있으며, 암술대는 세 갈래로 갈라진다.

곤충들이 꽃가루를 옮기는 충매화(蟲媒花)이고, 씨앗은 바람에 날려간다. 수세미 열매는 10월에 익는데 길쭉한 것이 커다란 오이처럼 생겼고, 길이 30∼60㎝로 겉에 얕은 골이 세로로 있고, 어릴 때는 녹색이나 익으면서 노랗게 변하며, 긴 자루가 있어서 밑으로 치렁치렁 축 늘어져 매달린다. 열매살(과육, 果肉) 안에는 그물 모양을 한 가늘고 단단한 섬유들이 주머니 꼴로 엉켜있고, 그 안에는 검게 익은 종자들이 들어 있다.

사촌지간인 여주는 잘 쓰면 약, 못 쓰면 독


▎경주시 동부사적지를 찾은 관광객들이 조롱박과 수세미가 매달린 생태터널을 거닐고 있다. / 사진·공정식
열대·아열대 지방에서는 가꾸기도 하지만 자생도 하는데 야생종은 한 그루에 보통 6개의 과일(수세미)이 달린다고 한다. 잘 영근 열매를 따서 물에 2~3일 담가 두면 겉껍질과 열매 속살이 흐물흐물해지면서 육질 씨앗을 쉽게 없앨 수 있다. 물을 빨아들여 끈적끈적하게 된 속살을 설렁설렁 흔들어 씻어내면 그물섬유만이 남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아염소산나트륨(sodium hypochlorite)으로 표백하고, 물로 말끔히 씻어 볕에 말린다. 까칠까칠한 수세미 섬유는 행주는 물론이고 신바닥의 깔개나 여성용 모자의 속심을 만드는 데도 쓰인다. 특히 씨앗기름은 광택제로 쓰지만 대상포진, 종기, 나환자 피부병과 피부 노화 방지, 보습, 자외선 차단 등에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아르기닌(arginine) 아미노산이 많아 세포 분열을 촉진하여 피부 상처 치료에 좋다고 한다. 또한 가을철에 원줄기를 지상 30㎝쯤 잘라 덩굴 끝을 커다란 병아가리에 욱여 넣어두면 밤새도록 수액이 흘러나온다. 진득한 그 수액을 피부 미용, 화장수로 또 화장품용으로 쓴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수세미 열매는 아주 거칠거칠한 억센 섬유성으로 목욕탕이나 부엌 설거지에 쓰는 일종의 행주다. 수세미 섬유는 다름 아닌 열매 속의 물관섬유(xylem fiber)로 질기면서도 수분을 잘 빨아드리고, 50~62%의 알파-섬유(α-cellulose), 20~28%의 헤미셀룰로오스(hemicellulose), 10~12%의 리그닌(lignin)으로 돼 있다고 한다.

다음은 수세미와 유사한 종으로, 열매는 모양이 다르지만 얼핏 보면 식물체가 여러모로 수세미와 흡사한 여주 이야기를 덧붙인다. 혈당 조절에 으뜸이라는 박과의 여주는 잎은 어긋나기하고, 손바닥 모양으로 끝자락이 5~7갈래로 갈라지며, 갈래는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에는 대개 톱니가 있다.

여주(bitter gourd, bitter melon)의 어린 녹색 열매는 식용하고, 익어 노랗게 변한 열매껍질도 먹는다. 속살은 빨갛게 변하고, 달달해 생으로 먹으며, 완전히 여물면 껍데기가 쩍 벌어지면서 주렁주렁 씨앗이 드러난다.

여주 또한 동남아 지역의 여러 나라에서 요리 재료로 다양하게 쓰이고, 필자도 이른바 ‘평화공원’에 각명(刻銘)되어 있는 선친을 뵈러 가는 길에 자주 보았지만 오키나와에서는 여주를 고야(ゴ―ヤ)라 하여 나름대로 즐겨 먹는다. 아마도 오키나와인들의 장수한 까닭이 되는 것으로 여긴다. 또 당뇨(糖尿)약으로 이를 데 없이 좋은 것으로 치고, 기침·피부병·피부상처·위궤양·관절염에도 좋다 한다. 부작용이 없는 약은 없어서 이 또한 넘치면 설사·복통·고열 등등의 뒤탈이 생긴다고 한다. 또 임산부는 유산이 될 수도 있다 하니 절대 삼가야 한다.

※ 권오길 - 1940년 경남 산청 출생. 진주고, 서울대 생물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수도여중고·경기고·서울사대부고 교사를 거쳐 강원대 생물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05년 정년 퇴임했다. 현재 강원대 명예교수로 있다. 한국간행물윤리상 저작상, 대한민국 과학문화상 등을 받았으며, 주요 저서로는 <꿈꾸는 달팽이> <인체기행> <달과 팽이> <흙에도 뭇 생명이> 등이 있다.

201711호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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