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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4)] 인간 심연(深淵)의 여행자 가쓰시카 호쿠사이 

“이번 생은 꿈이야. 미쳐라” 

최치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서양인들의 일본 애호 현상인 ‘자포니즘’ 만들어낸 주인공…[라이프]지 선정 ‘지난 1000년 세계의 인물 100명’ 중 86위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서양인의 일본 문화 애호를 가리키는 ‘자포니즘’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빨간 후지](凱風快晴). / 사진:최치현
지난해 도쿄의 우에노 공원에 있는 서양미술관은 ‘호쿠사이와 자포니즘’이란 제목으로 미술품 전시회를 개최했다. 부제는 ‘호쿠사이가 서양에 준 충격’이다. 2017년 10월 21일부터 2018년 1월 28일까지 연인원 36만4149명이 관람했다.

19세기 후반 일본 미술은 ‘사고’를 친 적이 있다. 새로운 표현 양식을 찾고 있던 일단(一團)의 서양 예술가들을 매료시키고, 서양인의 일본 문화 애호를 가리키는 ‘자포니즘’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받은 작가는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 1760~1849)였다. 그 영향은 모네·드가 등 인상파 화가를 비롯해 구미(歐美) 전역에 걸쳐 회화·판화·조각·포스터·장식공예 등 모든 분야에 미쳤다. 강렬한 색채, 자유로운 상상력, 과감한 시점과 구성으로 속세의 순간을 포착하며 유럽 인상파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

지난해 전람회는 세계 10개국 이상에서 모은 명작을 호쿠사이의 그림과 비교·전시하면서 그 영향력을 살펴보는 자리였다. 호쿠사이의 우키요에(浮世繪)와 유럽 인상파, 아르누보 계열의 작품을 비교하는 첫 시도였다. 주최측의 홍보 문안은 압도적 스케일의 ‘꿈의 공연’이라고 자랑한다. 오디오 설명을 들으며 주요 작품을 천천히 둘러봐도 대략 3시간 이상이 걸리는 규모였다.

일본에 들어온 ‘문화 현상’들은 늘 그랬다. 스스로 심화하는 과정을 거쳐 거꾸로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식이다. 일본은 서양의 판화 기술과 원근법을 모방하고 배워서 심화·확대시켜 자신의 것으로 만든 뒤 유럽의 근대 미술에 다시 충격을 준다.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에도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화가다. 대표작으로 [후지산 삼십육경] [호쿠사이 만화] [동해도 오십삼 역참]이 있다. ‘북쪽 공방’이라는 뜻의 ‘호쿠사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에 서명하면서 ‘여름의 평원을 날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자신만의 길을 갔다. 예술가답게 늘 변화를 추구하며 인생의 새로운 국면마다 거듭 태어났다. 그때마다 서명을 바꾸다 보니 이름이 서른여섯 개에 이른다. ‘그림에 미친 노인’이라는 뜻으로 ‘가교로진 호쿠사이’라는 이름이 가장 즐겨 불린다. 그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평생 삼라만상을 그리며 3만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젊었을 때부터 의욕적이어서 판화 외에 육필 우키요에(浮世繪) 분야에도 뛰어났다. 화가로서의 위상은 [후지산 삼십육경] 발표로 부동의 지위를 확보한다. 풍경화에도 새 분야를 열었다. 호쿠사이의 업적은 뛰어난 묘사력에 있다. 속필은 ‘호쿠사이 만화’ 속에서 볼 수 있다.

게다가 독본(讀本)·삽화 예술에 신기원을 열었다. ‘호쿠사이 만화’를 비롯한 그림책을 다수 발표한 것이다. 붓으로 형태 그리는 일에서 큰 솜씨를 떨친 것 등은 회화 기술의 보급과 서민 교육에도 영향을 끼쳤다.

‘가쓰시카파(葛飾派)’의 비조(鼻祖)가 돼 나중엔 빈센트 반 고흐 등의 인상파 화단의 예술가를 비롯한 공예가와 음악가에도 영향을 줬다. 온갖 것들을 다 그렸던 호쿠사이는 말년에 동판화나 유리 그림도 시도했다고 여겨진다. 또 유화에 대해서도 관심이 강했지만, 비교적 장수했음에도 결국 이루지 못했다.

일생현명, 한 자리에 뼈를 묻을 각오로 일하라


▎83세 무렵의 가쓰시카 호쿠사이 초상.
“이번 생은 꿈이야. 미쳐라.”

그림에 미친 노인은 죽을 때까지 이렇게 되뇌며 그림만 그려댔다. 때로는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때로는 눈 덮인 후지산(富士山)을 그렸다. 매와 같은 눈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마음속에 죽순을 키우듯 이미지가 대나무로 자라면 화선지에 그림으로 나타냈다. 눈과 가슴과 손이 어우러져 나오는 광기는 예술로 승화했다.

아울러 그가 포착한 찰나의 순간은 영원한 시간으로 번졌다. 그가 바라본 세상은 어김없이 정지 화면으로 남아 사람들을 유혹했다. 그는 자신만의 프레임으로 세계를 가뒀다. 에도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였다. 일본에 원근법과 판화 기술을 전해준 유럽에 거꾸로 예술적 충격을 준 역사적 인물이기도 하다. 유럽 인상파의 스승이다.

“예술은 전적으로 쓸모 없는 것”이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은 전적으로 예술이 지향하고 추구해야 할 것이 아름다움이라는 말이다. 일본의 미의식은 헤이안(平安)시대에 완성됐다고 한다. 탐미주의 성향이 강한 일본의 예술은 사회와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오로지 인간 내면을 응시한다. 그것만 바라보기도 벅차다.

‘일생현명(一生懸命)’ ‘일기일회(一期一會)’는 일본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말들이다. 목숨 걸고 일을 하는 자세, 한 번뿐인 인생에서 역시 최선을 다하는 삶을 가리킨다. 앞의 ‘ 일생현명’은 비슷한 발음의 ‘일소현명(一所懸命)’에서 변한 말이라고 한다. 원래는 옛날에 하나의 영지(領地)를 사수(死守)하면서 살아갔던 데서 나왔다. 한 자리에 뼈를 묻을 각오로 목숨을 걸고 일하는 것이다.

뉴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 미국의 유명 잡지 [라이프]에서 발표한 ‘지난 1000년에서 가장 중요한 공적을 남긴 세계의 인물 100명’ 중 호쿠사이를 86위로 꼽았다. 유일한 일본인이다. 그는 생전에 늘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세상에는 자신에게밖에 걸을 수 없는 길이 있다. 그 길을 걷는 것이 인생이다.”

‘우키요에’는 일반 서민·대중의 삶을 소재로 한 당대의 풍속을 그린 목판화다. 일본인은 이 세상을 덧없는 세상으로 파악한다. 용어 자체가 미학적이다. 유한한 인간이 세상을 사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일본인은 괴로움과 덧없음의 세상을 이 단어로 표현했다. 따라서 이런 세상을 사는 방식으로 그들은 찰나의 인생을 즐기는 현세적 경향을 보인다.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양식인 예술이 발달한 이유다.

일본화의 한 유파의 흐름을 길어 종합적 회화 양식으로서의 문화적 배경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풍물 등을 그렸다. 연극·고전문학·와카(和歌)·풍속·지역의 전설과 기담(奇談)·초상·정물·풍경·문명·개화·황실·종교 등 다채로운 소재가 있다. 크게 나누면 판본의 삽화, 한 장 인쇄의 목판화, 육필 우키요에의 세 종류다.

당연히 목판화가 쏟아져 나오기 전에는 두루마리 등의 육필 우키요에를 포함한다. 육필 우키요에는 형식상 병풍·두루마기·화첩·족자, 부채 그림, 말 그림, 밑그림 판, 밑그림 8종류로 대별(大別)된다. 우키요에 화가는 책의 삽화 표지 그리는 일도 병행했다. 육필화는 한 점짜리이며 이름 있는 화공에 의한 것은 고가였다. 판화는 판화이기 때문에 같은 무늬의 것을 많이 찍어 올릴 수 있어 값싸고 에도시대의 일반 대중도 쉽게 구했다.

고흐·모네·드가 등 인상파에 큰 영향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대표작 [가나가와 앞 파도 속]. (神奈川沖浪裏).
우키요에 판화는 대중문화의 일부로 사람들이 휴대하고 다니며 즐길 정도였다. 손에 들고 바라보는 방식 외에 액자에 넣어 미술관이나 가정 등에 장식품으로 걸리는 일도 잦아졌다. 구사조시(草雙紙: 삽화가 든 통속 소설책의 총칭)나 두루마리 그림, 또 가와라반(瓦版: 신문·찰흙에 글씨나 그림 등을 새겨 기와처럼 구운 것을 판으로 해 인쇄한 속보 기사판)의 삽화 역할도 했다. 그림 달력으로 불리는 달력 제작도 하고 그림 속에 숫자를 숨기는 등 다양한 발전을 거듭하면서 만들어졌다.

호쿠사이는 화가이자 디자이너이며,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애니메이터, 나아가 엔터테이너이기도 했다. 200년 이상 전에 그가 그린 ‘호쿠사이 만화’에 있는 ‘화면 분할, 개그, 의인화’라는 기법은 현대의 만화, 애니메이션의 원점인 것으로 일컬어지며 미즈키 시게루(水木しげる), 마쓰모토 레이지(松本零士),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 등의 저명한 만화가가 이 ‘호쿠사이 만화’의 팬임을 공언하고 있다.

시누아즈리(Chnoiserie)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던 중국풍 양식을 말한다. 청나라와의 활발한 교역으로 그림과 자기·병풍·차 등이 수입되면서 귀족들이 앞다퉈 중국식 물건들을 비싸게 구입했다.

당시 유행했던 화려하고 여성스러운 로코코 양식의 중국풍 장식이 모방되기도 했다. 프랑스의 로코코 양식을 대표한 프랑스와 부세는 철저히 유행을 따라 그림을 그렸다. 그에게 당시 유행했던 중국풍은 역시 매력적인 소재였다. 서양인이 가진 중국에 대한 판타지의 한 예다.

일본풍은 중국풍이 유행하던 18세기를 지나 19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해 일본 에도시대의 도자기와 차 부채, 우키요에 판화 등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유럽에서 유행했던 일본풍을 자포니즘이라고 한다. 이는 유럽인들이 일본의 것을 즐겼던 일종의 취미와 경향성을 일컫는다.

만국박람회 출품 등을 계기로 일본 미술이 주목을 받으며 서양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870년에는 프랑스 미술계에서 자포니즘의 영향은 현저해졌다. 1876년에는 ‘Japonisme’이라는 단어가 프랑스의 사전에 등장한다.

특히 일본의 목판화이자 풍속화인 우키요에는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우키요에는 명암이나 그림자 등 섬세한 색채 표현 없이 단순하고 평면적이면서 뚜렷한 윤곽선을 특징으로 한다. 이렇게 소박한 장식적인 그림은 기존의 사실적 회화와는 다른 길을 추구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표현방식에 대한 영감을 줬다.

그중에서도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일본을 사시사철 따듯하고 찬란한 햇살이 내리쬐는 낙원으로 생각했다. 일본을 동경했던 그는 자신의 작품 배경에 우키요에를 자주 그려 넣었다. [탕기 영감의 표상]도 그런 작품 중의 하나다.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등 강렬하고 단순한 원색을 사용한 이 그림에서 탕기는 마치 불상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있는데 그의 머리 위에 있는 후지산 그림이 마치 후광(後光)처럼 보인다. 이 밖에도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라든지 벚꽃을 배경으로 한 일본 풍경 그림도 볼 수 있다.

파문(破門)은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고


▎‘호쿠사이와 자포니즘’ 전시회 포스터. / 사진:최치현
자포니즘은 단순하며 일시적인 유행에 그치지 않았다. 14세기 이후 서구에서는 몇 차례 큰 변혁이 일어났다. 서양 근대를 알리는 르네상스에서 자연회귀 운동이 일어나고 사실성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점차 강해졌다. 19세기 중엽에 쿠르베 등에 의해서 명실상부한 사실주의가 정착했다.

19세기 후반 사실주의가 쇠퇴하고 인상주의를 거쳐서 모더니즘에 이르는 변혁이 일어났다. 이 큰 변혁의 단계에서 결정적으로 작용을 미친 것이 자포니즘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포니즘은 유행에 그치지 않고 이후 1세기 가까이 계속된 세계적 예술운동의 발단이다.

외로운 영혼의 예술가 호쿠사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 새로운 화풍을 시도함으로써 스승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상처를 그는 새로운 동기부여의 기회로 삼았다. 그 후 더 폭넓고 다양한 실험적인 시도를 한다. 현재의 일본 미술계와 세계 미술계는 그 점을 높이 평가한다.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화가들은 그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맑은 하늘과 바람으로 만든 삼라만상을 그리겠다며 풍경·인물·풍속·사물을 넘나들며 목판화를 비롯한 다채로운 소재를 다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30번 이상 자신의 호를 바꿨으며 90번 이상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이런 기록을 볼 때 그는 지속적으로 환경 변화를 시도하면서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한 예술가다. 결코 멈춰 서지 않으려 했던 인물이다. 그는 진정한 세 단계 예술 창조자의 길을 거친다.

이른바 ‘슈하리(守破離)’다. 일본에서 다도·무도·예술 등에서 고루 쓰이는 단계적인 발전 방식이다. 개인의 스킬(작업 수행 능력)을 표현하는 3단계 수준으로도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스승이 하신 말씀에 따라 형태를 ‘지키다’(守)에서 수행을 시작한다. 그 뒤 그 형태를 자신에 비춰 연구함으로써 자신에게 맞는 더 좋다고 생각하는 형태를 만들어 기존의 틀을 ‘깨기’(破)에 이른다.

최종적으로는 스승이 부여한 형태, 그리고 자기 자신이 만든 형태로부터 ‘떨어지기’(離)에 도달한다. 이 마지막 떨어지는 단계가 결국은 자유자재, 누구 또는 어떤 형식에도 걸리지 않는 최고의 경계라고 본다. 이 세 단계에 비춰 호쿠사이의 일생을 풀어볼 수 있다.

그는 우선 6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어 19세 때 당시 배우 그림의 제1인자였던 가쓰카와 슌쇼(勝川春章) 문하에 입문한다. 틀에 얽매인 그림을 그리기 싫어해 카리노파(獵野派), 린파(琳派) 등 여러 유파에서 그림을 배웠다.

당시로서는 절대 금기였다. 엄연한 스승을 둔 문파(門派)의 일원이 다른 곳에 몸을 들여 배우고 익히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곧 가쓰카와 문하에서 파문당한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호쿠사이는 서양화·중국화 등 다양한 기법을 배우고 자신의 화필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50세를 넘긴 무렵에 호쿠사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누구로부터 배우는 것은 없다. 나의 선생님은 자연뿐이다.”

호쿠사이는 어느 유파(流派)에도 속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면 50세가 넘도록 다양한 기법을 계속 배운 것을 의미한다. 슈하리(守破離)의 수(守)에 해당하는 기초 토대를 철저하게 쌓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바로 모든 예술의 황금률이다.

“청소할 틈이 있다면 그림 그리겠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탕기영감의 초상].
호쿠사이는 아흔 살에 임종을 맞았다. 그때의 모습은 이렇게 적혀 있다. “노인은 죽음에 임해 장탄식하고 ‘하늘이 나에게 십 년의 목숨을 길게 해주신다면’이라고 했다가 잠시 뒤에 또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5년의 목숨을 유지해주면 진정한 화공이 되리라’고 말을 더듬으며 죽었다.” 그의 예술세계에 휴식은 없었다.

신장 1m80㎝의 장신으로 귀가 컸던 호쿠사이의 모든 일상생활은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 맞춰져 있었다. 생애 93번이나 이사를 하고 때로는 하루에 세 번이나 이사할 때도 있었다. 호쿠사이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청소를 할 틈이 있다면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만큼 그림 그리기에만 온 힘을 쏟았던 사람이었다. 밥 할 시간을 아끼느라 음식은 늘 배달시켜 먹었고 옷 또한 간소하게 갖춰 입었다.

예술가에게 다반사인 음주와 흡연도 멀리했다. 보통의 화공에 비해 배 이상의 작품 값을 받았음에도 그는 늘 가난했다. 금전 감각이 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직접 금전 관리를 하지 않았다. 결혼했다 돌아온 딸 오우에이와 둘이서 작업을 진행했다.

그림 값이 와도 보따리를 풀지 않았고 더구나 세어보지도 않았다. 돈은 그저 그의 그림 책상 밑에서 방치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쌀가게나 땔감나무 집에서 청구가 오면 꾸러미째 던지고 건넸다. 그와 거래했던 가게들은 의외의 돈이 오면 그대로 착복하고, 적으면 거꾸로 재촉했다. 이런 무책임한 금전 취급이 그가 초래했던 가난의 진짜 원인이다.

호쿠사이는 만년에 이르렀어도 화법의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계속해 나갔다. 그는 “인물을 그릴 때 골격을 모르면 진실을 묘사할 없다”며 접골(接骨) 전문가 나구라 야지베(名倉弥次兵衛) 문하에 입문하고, 접골 기술이나 근골의 해부학을 깊게 연구한다. 이로써 그는 겨우 사람의 몸을 그리는 진정한 방법을 이해했다고 말했다.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학습의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작업장 풍경은 대개 이랬다. 지저분한 옷이 널려 있고, 책상 근처에는 먹거나 아예 손을 대지 않았던 음식 보따리가 어지러이 쓰러져 있었다. 딸도 그 쓰레기 더미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만년의 호쿠사이가 제자 츠유키 이이츠에게 한 말이 유명하다.

“9월 하순부터 4월 상순까지는 고타츠(炬燵: 일본식 난방기구)에 들어가 어떤 사람이 찾아도 그림을 그릴 때면 고타츠를 나올 수 없었다. 피곤하면 옆의 베개에서 자고 깨어나면 그림을 그렸다. 낮과 밤 이를 계속했다. 잠옷은 낭비로 여겨져 입지 않았다. 고다츠에 들어가 계속 앉아 있으면 숯불이 타오르기 때문에 조개탄을 사용한다. 이불에는 이가 많이 발생했다.”

고흐도 극찬 아끼지 않았던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작품 [구린내 나는 풍경].
우키요에 이외에도 이른바 삽화가로도 활약한 일면이 있다. 노란빛 표지, 화류계를 제재로 한 소설과 교재 등 수많은 통속소설의 삽화를 다뤘다. 작자가 제시한 밑그림대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자주 작가와 충돌을 반복했다.

통속문학 작가 교쿠테이 바킨(曲亭馬琴)과 콤비를 이뤘던 한 시기 그는 [新編水滸畵傳(신편수호화전)] [近世怪談霜夜之星(근세괴담상야지성)] [椿說弓張月(춘설궁장월)]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바킨과 함께 큰 이름을 날린다. 읽을거리의 덤 정도의 취급에 불과했던 삽화의 평가를 현격하게 올린 인물이다. 또한 호쿠사이는 한때 바킨 집에 식객으로 기거한 바도 있다.

호쿠사이는 저세상에 가면 영혼이 돼 여름 들판에 산책하러 가자면서 마음의 여유를 표현했다, 그가 남긴 사세구(辭世句)는 다음과 같다.

“人魂で 行く気散じや 夏野原 (영혼으로/ 가는 편안한 마음/ 여름의 푸른 평원)”

호쿠사이의 대표작은 [빨간 후지](凱風快晴, 통칭 赤富士)와 [가나가와 앞 파도 속](神奈川沖浪裏)이다. 이를 본 고흐가 화가 동료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극찬을 멈추지 못한다. 역시 그로부터 커다란 영감을 받은 드뷔시는 교향시 [바다]를 작곡하고 그 후 서구의 다른 예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물마루가 무너지는 모습의 이 [가나가와 앞 파도 속]은 보통 사람이 보면 추상 표현밖에 나오지 않지만 하이 스피드 카메라 등에서 촬영된 파도와 비교하면 그것이 사실적으로 뛰어난 정지 화면임을 알 수 있다.

호쿠사이가 그린 ‘큰 파도’는 당시 사람들에게 “파도가 이런 모양을 할 수가 없다”는 야유와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현대에 실재하는 ‘5000분의 1초’의 초고속 카메라로 물결을 촬영한 사진들은 이 ‘큰 파도’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호쿠사이는 ‘천재적 관찰력의 소유자’뿐만 아니라 어쩌면 ‘순간기억 능력’의 소유자였다.

호쿠사이는 일본보다 해외에서 평가가 매우 드높다. 예술은 예술끼리 통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유럽의 찬란한 예술계 별들, 즉 고흐·모네·드가·에밀·갈레 등은 호쿠사이에게 아주 커다란 감명을 받고 그를 자신들의 예술 영역에 끌어들였다.

또 2017년 2월에 열린 미국의 옥션에서는 판화 입찰상 세계 최고액인 1억 엔으로 호쿠사이 그림이 낙찰됐다. 아울러 세계적인 박물관인 대영박물관에서는 ‘호쿠사이-큰 파도 저 편으로’라는 특별전이 열렸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인간만이 도달할 수 있는 압도적인 예술의 혼과 역량이 빛을 본 것이다.

호쿠사이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자재의 삶을 온 생애에 투입함으로써 삶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일본인은 조선이 관념과 추상에 젖어 쇄국과 구안(苟安)의 경지에 머물고 있을 때 드넓은 바다를 건너갔고, 인간의 내면에 드리운 아주 깊은 심연으로 예술 여행을 떠났다. 세계는 그런 일본을 늘 동경과 찬탄으로 지켜봤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독서회 [고전만독]을 이끌고 있으며,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주요 관심 사항은 대항해시대 문명의 소통 양상이다. 독서와 여행으로 문명과 바다가 펼쳐진 세계를 일주할 기획하고 있다.

201804호 (20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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