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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8)] ‘메이지 유신 그늘 속 기획자’ 가쓰 가이슈의 명철(明哲) 

“나의 30년 고심이 조금이나마 관철됐구나” 

최치현 숭실대 교수
에도시대 말기부터 메이지시대에 활동한 정치가 겸 관료…사이고 다카모리와 담판 통해 에도성 ‘무혈개성’ 이끌어내

▎개성(開城) 담판을 벌이고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왼쪽)과 가쓰 가이슈. 에도 무혈개성은 일본 역사상 획기적이며 상징적인 사건으로 드라마나 영화 소재로도 자주 등장한다.
1860년 초 봄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한 일본 선박 간린마루(咸臨丸)에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도쿠가와가(家)의 접시꽃 문장(紋章)이 새겨진 쇼군의 깃발은 아니었다. 미일수호통상조약의 체결 비준을 위해 대표단 정사(正使) 일행을 태운 미국 선박 포하탄호(號)와는 별도의 배 한 척이 시나가와(品川) 항을 출항했다

호위 목적으로 증기선에 승선한 인물이 있다. 일본 화폐 1만엔 권의 인물로 등장하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부함장 격으로 승선한 가쓰 가이슈(勝海舟) 일행이다.

항해 40여 일 만에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하자 깃발 게양 문제가 대두된다. 논쟁 끝에 이 배의 군함 부교(副校)였던 기무라 기다카시(木村喜毅) 가문의 깃발이 올라간다. 만엔(万延) 원년(1860)부터 1868년 메이지 원년(1868)까지 9년은 요즘으로 따지면 매일 호외가 발행될 정도로 일본 근세의 여명이었다. 막부의 ‘접시꽃’은 시들고 있었다.

올해는 일본의 에도막부가 막을 내리고 메이지 정부(1868)가 들어선 지 150주년 되는 해다. 에도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돼 막부(幕府)를 개설한 1603년부터 15대 쇼군(將軍) 요시노부(慶喜)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한 1867년까지의 봉건시대다.

265년 동안 에도에는 막부를, 지방에는 번(藩)을 설치해 통치했기 때문에 막번(幕藩)체제라고도 한다. 강력하게 번을 다스리던 막부가 완전히 실권을 상실하게 된 것이 메이지 유신이다. 쇄국정책을 펴던 막부는 서구열강의 압력에 굴하는 등 무능력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자 조슈(長州)·사쓰마(薩摩) 등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뒤 소외됐던 여러번이 주동이 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기치를 들고 막부를 타도한다.

진영논리 버리고 상생의 발전적 미래 택해


▎도쿄 우에노 공원에 세워진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페리의 내항 이래 개국과 양이를 둘러싼 최악의 혼란기에 등장한다. 명석한 두뇌를 가졌지만 시대흐름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쓰마·조슈 등 유력 번은 교토의 천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에도의 막부를 압박하면서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막부는 1867년 10월 13일 막부정권을 반환하겠다는 대정봉환이라는 승부수를 띄운다. 막번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하려던 다양한 실험이 실패했음을 나타낸다. 막부 독재체제를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토막파와 막부의 국가 구상에는 여전히 차이가 있었고 시대의 흐름은 토막파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무력을 앞세운 사쓰마·조슈의 왕정복고 쿠데타를 다시 일으키고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는 황궁의 학문소에서 15세의 메이지 천황을 앞에 두고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읽는다.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통일정부가 탄생했다.

왕정복고의 대호령이라고 하는 쿠데타로 처분의 대상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오사카성에 있다 교토를 향해 거병했다. 도바·후시미(鳥羽·伏見)에서 이를 맞아 격퇴한 구 막부군의 군세는 신정부군 군세의 세 배였으나 패배하고 만다. 웅번 쪽이 신병기를 갖췄기 때문이다.

요시노부는 몰래 퇴각하고 오사카 만(灣)에 정박해 있던 군함 가이요마루(開陽丸)를 타고 에도로 퇴각한다. 정부군은 동쪽으로 진격한다. 에도 총공격은 피할 수 없는 형세가 된다. 가쓰 가이슈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회담이 실현된다. 이로써 에도는 파멸적 전화를 면하게 됐고 에도성은 평화롭게 열린다. 이에 불복한 창의대(彰義隊)는 우에노(上野)에서 농성했지만 하루 만에 진압당한다.

아이즈(會津)와 동북제번의 저항도 평정됐다. 에노모토다케아키( 本武揚) 등은 홋카이도의 고리료가꾸(五稜郭)를 점령하고 독립정권을 수립했다. 하지만 반년 뒤에 항복하고 일련의 보신전쟁(戊辰戰爭)은 종결됐다.

1840년 아편전쟁이 중국에서 발발하자 일본도 위기감을 느낀다. 흑선의 도래와 서구열강의 압력에 개국과 쇄국의 선택의 기로에 선 일본은 막부의 무능력을 목도하면서 정권교체를 단행한다. 그리고 일본은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메이지 유신 주역들을 일컬어 ‘유신 3걸’이라고 한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 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가 그들이다.

최강의 흑막 속에 이와쿠라 도모미도 있다. 물론 그 배후에는 또 조슈번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있었고, 그의 제자들이 에도막부를 타도하고 개국을 추진하게 되니 가장 큰 공로자는 요시다 쇼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들 인물 외에 또 한 명의 비중 있는 배우가 있는데 바로 가쓰 가이슈다.

가쓰 가이슈의 최대 공적은 막부의 마지막 신하로서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대신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담판을 벌여 100만 명이 거주하던 당시 세계 최대 도시의 시민을 전화(戰禍)로부터 구한 것이다. 이른바 에도성무혈개성(江城無血開城)이다.

가쓰 가이슈는 ‘메이지 유신의 그늘 속 기획자’로 불린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연합을 성사시킨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스승이다. 에도성을 압박하며 총공격을 감행하는 신정부군 사이고 다카모리의 공세를 무마해 에도성을 평화적으로 건네준다. 서로 적으로 만났어도 그들은 국가 전체의 미래를 걱정했다. 진영논리가 아닌 상생의 발전적 미래를 택했다.

메이지 유신은 200만 명의 이르는 지배계급인 사무라이의 특권이 사라진 혁명으로 이 과정에서 약 3만 명이 사망했다. 프랑스 혁명에서 30만~50만 명의 희생자, 러시아 혁명의 사망자 1000만 명과 비교해 보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무혈혁명에 가깝다. 가쓰 가이슈라는 숨은 공로자를 조명해보자.

“정치가의 비결은 ‘성심성의’ 네 글자뿐”


▎왼쪽은 일본 도쿄 스기나미구에 있는 사찰 다이엔지에 세워진 요코야마 야스타케의 묘비, 오른쪽은 대한제국 병탄과 식민통치를 비판한 일본인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요코야마 야스타케, 야마자키 게사야, 요시노 사쿠조, 후세 다쓰지, 기노시타 나오에, 가쓰 가이슈.
혼란한 시대를 살아온 가쓰 가이슈는 어떤 인물보다도 선견지명이 뛰어났다. 그가 예측한 대로 세상은 변해갔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을 꿰뚫어보고 에도 무혈개성을 실현한다. 시류를 읽고 내란의 위기를 방지하고 일본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휘봉을 잡은 인물이다.

권력은 막부에서 천황가로 이전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검술과 선(禪)을 익히면서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무념무욕의 멸사봉공 자세는 바로 이런 마음가짐에서 나왔다. 미국의 대표적인 일본 학자였고 주일대사까지 지낸 에드윈 라이샤워(1910~1990) 하버드대 교수는 [일본 제국주의 흥망사]에서 근대 일본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일본 젊은이들의 꿈을 들었다. 서구열강에 지지 않기 위해 그들은 그 시절 큰 꿈을 향해 나아갔다. 가쓰 가이슈에게 발견할 수 있는 단어는 성심성의(誠心誠意)다. 그는 실제로 “정치가의 (생존) 비결은 아무것도 없다. ‘성심성의’ 네 글자뿐”이라고 강조했다.

가쓰 가이슈는 1823년 에도에서 아버지 가쓰 코키치와 어머니 노부코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린타로(麟太)이며 그의 호인 가이슈는 사쿠마 쇼잔 자필 글씨인 해주서옥(海舟書屋)에서 취했다. 어린 시절부터 검술을 익혔고 선을 병행한다. 호기심이 많았던지 병학까지 겸한다.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당시 첨단학문이었던 난학(蘭學, 네덜란드학)이었다. 난학을 배경으로 막부에 발탁돼 포술(砲術)과 항해술을 익히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다녀왔다. 일본 해군을 양성한 인물이며 근왕파와 막부의 대결에서 막부의 편에 서서 음지에서 메이지 유신을 기획하고 막부의 뒷정리를 책임진 인물이다.

7세 때 12대 쇼군이 되는 이에요시(家慶)의 아들인 쓰노조(初之丞)의 놀이 동무 겸 학우에 선발된다. 그러나 9세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맹견에게 급소를 물려 치료를 포기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한다. 아버지의 필사적인 간병으로 회복했으나 이번에는 믿었던 쓰노조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어렸을 때 신분이 다른 계층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진취적 호기심과 탐구정신을 갖게 된다. 실의와 정말 속에서 린타로는 토라노스케(虎之助) 도장에서 검술을 배우고 스승의 권유로 선도 배운다. 병학은 구보타 스가네(窪田音)의 문하생인 와카야마 부쓰도(若山勿堂)에서 야마가류(山鹿流)를 습득한다. 22세에 시키신가게류(直心影流)의 면허를 취득하고 사범 역할을 하게 된다.

검술과 병학 수업에 매진하는 가운데 린타로는 난학에 뜻을 두고 당시 가장 유명한 난학자 미쓰쿠리 겐포(箕作阮甫)의 문을 두드렸다. 홍화 원년(1844)에 유학자 출신의 난학자인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과도 첫 대면을 한다. 미쓰쿠리는 쓰야마번(津山藩) 출신으로 네덜란드 의학을 배운 의사인 우다가와 겐신(宇田川玄)에게 난학을 배운 쓰야마번의 번의였다. 그러나 린타로의 입문은 미쓰쿠리에게 거절당했다. 이미 린타로는 스무 살을 넘어 난학을 배우려면 너무 늦었다고 판단했다는 ‘설’이 있다.

스스로 인생의 운을 열어젖힌 개척자

미쓰쿠리에게 입문을 거절당하자 홍화 2년(1845), 나가이세이가이(永井崖)의 제자로 입문한다. 나가이는 후쿠오카번의 어용 난학자로 아카사카타초(赤坂田町)의 후쿠오카번 에도 저택에 살고 있었다. 나가이는 유명한 난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후쿠오카번은 영주의 의향으로 난학 관계서를 많이 갖추고 있어 최적의 환경이었다. 나가이는 지리학을 도맡았고, 난학자이긴 했지만 당시 주류인 네덜란드에서 전해진 의술의 의사는 아니었다.

린타로는 네덜란드에서 전해진 의술을 지향했던 것이 아니라 외국의 병학·군사 기술을 원했다. 때문에 나가이는 린타로에게 미쓰쿠리보다 훨씬 유익한 스승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난학 수행 중에 난화사전(蘭和辭典)인 [도후·하루마사전(ドゥフ·ハルマ, Doeff-Halma Dictionary)]을 1년에 걸쳐서 2부 필사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1부는 자신을 위해서, 1부는 팔아서 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같은 해 스물세 살의 린타로는 막부 신하의 양녀와 결혼했고 이듬해 장녀가 태어난다. 린타로는 난학 수업 때문에 아카사카타초로 주거를 이전했다. 그는 일심불란의 자세로 난학 수업에 힘쓰며 놀라운 속도로 난학을 습득했다. 외국의 병학·군사 기술을 배울 때 야마가류(山鹿流) 병학의 기초를 배워둔 것이 차이는 있었어도 도움이 됐다.

가에이 3년(1850), 나가이는 린타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하고 린타로의 저택에 난학·병학의 사숙(私塾)을 열게 했다. 린타로 나이 이십팔 세였다. 여러 영주 중에는 네덜란드에서 전해진 의술이 아니라 서양 병학을 습득한 린타로의 사숙에서 배우게 하기도 하고, 대포·소총의 제작을 의뢰하기도 했다.

시대는 난학이 의술 때문이 아니라 병학을 위한 학문으로 바뀌어 난학자로서의 명성은 높아졌다. 린타로는 스스로 난학의 사숙을 열면서 그해 사쿠마 쇼잔의 제자로 입문한다. 사쿠마의 난학 학원에서는 린타로 외에 요시다 쇼인,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 가와이 쓰기노스케(河井之助) 등에도막부 말기의 역사를 장식한 쟁쟁한 인물들이 배출됐다.

가에이 5년(1852) 장남이 태어났다. 그해 린타로의 여동생 준코가 사쿠마와 결혼한다. 마흔두 살의 사쿠마와 열여섯 살의 가쓰 준코(勝順子)의 스물여섯 살 차이가 나는 결혼이었다. 이듬해 가에이 6년(1853) 일본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국인 페리가 이끄는 흑선( 船)이 내항한다. 일본은 에도 막부 말기에 돌입하게 된다.

페리 함대가 개국을 요구하자 막부의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는 막부의 결정만으로 해상 방비에 관한 의견서를 널리 모집했다. 이에 가쓰 가이슈도 해방(海防)의견서를 제출한다. 의견서는 아베의 눈에 띄게 됐고, 가쓰는 해안 방비 책임자가 된다. 오쿠보 이치오(大久保一翁)의 인정을 받아서 안세이 2년(1855) 1월 18일 외국인 접대와 네덜란드 서적 번역 업무에 임명되고, 염원하던 역할을 맡게 됐다. 가쓰는 스스로 인생의 운을 열어젖힌 것이다.

페리의 내항이 발단이 된 막말의 동란기가 아니었다면 문벌 제일주의 도쿠가와 막부에서 햇빛을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855년 33세에 가쓰는 나가사키전습소(長崎海軍傳習所)에 간다. 이곳은 일본 최초의 근대 해군 사관과 하사관을 양성하는 막부의 학교였다. 사실상 교감으로 선발돼 전습생(傳習生)을 돌보고 네덜란드 교사단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교사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뽑아서 에도에 보고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가쓰는 해군 전문가로서 에도 내각에서 주목받게 된다. 나가사키에 체재하고 있었지만 포술 교수 자리에 올랐다. 출세만 생각하면 에도로 돌아오는 편이 유리했겠지만 가쓰는 해군의 실무를 모조리 익히고 그를 통해서 구열강을 알고자 했다. 햇수로 5년 나가사키에서 항해술을 익힌 가쓰는 막부의 각료들에게 해군 기술관료로 인정받게 된다.

만엔 원년(1860) 막부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 교환 때문에 사절을 미국에 파견한다. 미국 출국 계획을 세운 것은 이와세 타다나리(岩忠震)등 히토쓰바시파 막부의 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안세이 대옥에서 은퇴를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정사 신미 마사오키(新見正興), 부사 무라카미노리마사(村垣範正), 감찰 오구리 다다요리(小栗忠順) 등이 선택돼 미국 해군의 포하탄호로 태평양을 횡단했다. 이때 호위라는 명목으로 군함을 내놓기로 하고 간린마루호가 샌프란시스코에 파견됐다. 시나가와 출발은 1월 13일, 미국 도착은 2월 26일이었다. 3월 19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났고, 시나가와 귀착은 5월 6일이었다. 여정은 37일, 총 140일이었다.

간린마루에는 군함 부교로 기무라 키다카시(木村喜毅)가 함장격, 가쓰 가이슈가 부함장 격이었다. 그 외 사사쿠라 도다이로(佐佐倉桐太), 스즈후지 유지로(鈴藤勇次), 오노 토모고로(小野友五) 등이 승선하고 미 해군으로부터 측량선 헤니모아 쿠퍼호 함장이었던 존 부르크 대위도 동승했다. 통역은 존 만지로, 기무라의 종자로 후쿠자와 유키치도 탔다.

“세상 보는 눈에서 필적할 이가 없다”


▎1. ‘메이지 유신 그늘 속 기획자’로 불린 가쓰 가이슈. 그의 지모 덕분에 메이지 유신은 사실상 무혈혁명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 / 2.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 3.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 접시꽃 문양.
간린마루 항해를 후쿠자와는 ‘일본인의 손으로 이룬 장거’라고 자찬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인 선원들은 배 멀미 때문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부르크 등이 없었다면 도미하지 못했을 거란 설도 있다.

예로부터 가쓰는 간린마루 함장으로 도미했다고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유키치의 [복옹자전(福翁自傳)]에는 기무라가 ‘함장’, 가쓰는 ‘지휘관’이라고 씌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직책은 없고 위와 같이 그는 ‘군함 부교’, 가쓰는 ‘군함 훈련소 교수 부장’이었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귀국할 때는 가쓰 등 일본인의 손으로만 귀국할 수 있었다. 미국 체류 중에는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것도 일본과 다른 문명에 충격을 받았으며 견문을 넓히게 된다.

귀국 후 막부와 유신 정부의 요직을 거치면서 주로 해군의 기초를 닦는 일을 한다. 양서를 번역하던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의 소장 보조로 이동했고, 이듬해인 분큐 원년(1861년)에는 강무소 포술 사범이 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병부성(兵部省) 대신을 거쳐 원로원 의관(議官), 추밀원 고문관 등을 역임했다. 그러한 경험 덕에 가쓰는 막부의 내각에서 출세하게 했다. 그렇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하는 스타일인 가쓰는 이후 영달과 좌천을 거듭하게 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신정부군을 이끌고 에도성을 공격하는, 가쓰는 구 막부군의 편에서 에도성 방어를 책임지는 입장이었다. 이전에 나라를 걱정하던 두 사람이 이제는 적대관계가 됐다. 공격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만남이었다. 참혹한 내전이냐 평화적 해결이냐 두 사람의 만남에서 결정된다.

두 사람은 항복 조건을 놓고 의견을 교환했다. 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처우에 관한 문제였다. 석고의 감축과 다이묘로서의 지위 설정 협상은 양자의 상호신뢰가 기반이었다. 신정부군은 권력을 차지했고 구 막부군은 품위 있는 항복과 권리 보장을 얻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금문의 전투(1864) 직후다. 사쓰마의 사이고는 조슈를 무력으로 정벌할 의향을 갖고 있었다. 가쓰는 사이고에게 막부는 인재도 없으니 제후들이 연맹해 강력한 군사력을 키워 서양 국가들과 독자 교섭할 것을 조언한다. 사이고는 이때 가쓰의 탁월한 정세 분석과 식견에 탄복한다. 가쓰는 사이고에 대해 일본이란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인물로 평가한다.

가쓰의 제자인 사카모토 료마가 전하는 사이고에 대한 인물평이 시바 료타료(司馬遼太)의 소설 [료마가 간다]에 나온다. “마치 큰 종을 대하는 것 같다고 한다. 살짝 두드리면 작은 소리가 나고 세게 두드리면 큰 소리가 난다고 했다. 평하는 사람이나 평가받는 사람이나 모두 놀라울 따름이다.”

또한 사이고가 가쓰를 처음 만나보고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보낸 편지에 가쓰에 대한 인물평을 쓴다. “가쓰는 학문에 있어서나 세상을 보는 눈에 있어서는 아무도 필적할 사람이 없다. 나는 가쓰에게 완전히 매료됐다.” 그들의 지인지감(知人之鑑)과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로 서로를 타진하면서 국난을 타개한다.

나라를 구한 우정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가쓰는 유신의 최대 공로자이면서도 사무라이 무리의 수장으로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입장을 이해했고, 기울어져가는 막부의 운명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켜주는 가쓰의 입장을 사이고는 충분히 존경했다. 마음이 통한 두 인물은 세게 치면 큰소리를 내주고 작게 치면 작은 소리로 화답했다.

센조쿠연못(洗足池)은 도쿄의 오타구(大田區)에 있는 연못이다. 이곳에 가면 막말과 메이지 시대를 살다간 이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연못가에 가쓰 만년의 저택 센조쿠겐(千束軒)이 있었지만 전쟁으로 소실됐다.

현재는 가쓰 부부의 무덤이 남아 오타구의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가쓰는 사이고와 담판하기 위해 관군인 사쓰마 군단이 본진을 둔 이케가미 혼몬지(池上本門寺)로 가다가 센조쿠 연못 근처 찻집에서 잠시 휴식한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연못 풍광을 사랑한 가쓰가 이주했고, 사이고가 이곳을 찾아 가쓰와 환담했다. 가쓰 부부의 무덤 옆에 ‘사이고 다카모리 유혼비’(西隆盛留魂碑)가 있다. 이는 사이고가 세이난 전쟁(西南役)에서 패배하고 자결한 뒤 당시 도쿄부 미나미 가쓰시카(南葛飾)군의 조코인(光院) 경내에 가쓰가 자비로 세웠다. 다이쇼 2년(1913)에 이곳에 이전했다.

떠나면서 남기고 간 두 글자 ‘海舟’

가이슈가 유혼비에 고른 다카모리의 한시는 분큐 3년(1864), 사쓰마번 국부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의 분노를 사서 오키노에라부섬(沖永良部島)에 유배된 때의 작품으로 ‘옥중에 느낌이 있어’(獄中有感)란 칠언율시다.

그 비석의 뒷면에 새긴 가쓰가 쓴 글에는 다카모리를 그리는 마음이 절절히 담겨 있다. 일본이 서양열강의 식민지 상태에 빠질 수 있었던 시기의 만남을 묘사한 문장이다. 가쓰는 생사를 초월해 말한다. 에도성 무혈개성(無血開城)의 평화적 정권교체 순간을 읊으며 사이고를 그리워하고 있다.

게이오 보신(慶戊辰), 메이지 원년(1968)의 봄, 그대는 대군을 이끌고 동해도(東海道)로 내려가고 에도에 다가왔다네. 그래서 민심은 동요하고 시민들은 짐을 메고 달아나는 모습을 보였지. 나는 이러한 인민을 걱정해 그대가 있는 군영에 편지를 보냈다네. 그대는 내 편지의 취지를 받아줬을 뿐만 아니라 다시 명령을 내려서 병사들에게 행패를 부리지 않도록 계고했네. 이건 무슨 넓은 마음일까? 무슨 도타운 신의인가? 가끔 나는 그대가 이 옛날에 썼던 곳의 시를 봤는데 높고 싱그러운 기운이 있고 산뜻하고 기세가 있는 필묵의 흔적이 있어 평소의 그대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네. 때문에 그대를 경모하고 스스로 뽑아 이 시를 돌에 새겨 기념비를 만든다네. 아아, 그대는 나에 대해 잘 알고 그리고 그대를 알기로는 나를 필적할 자는 없을 것일세. 지하에서 그대가 이 기념비를 알아볼 수 있다면 반드시 그대는 구레나룻 쓸어 올리며 일소(一笑)할 텐가.

메이지 31년(1898) 3월 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메이지 천황과 황후를 만나 화해한다. 그날의 일기에 가쓰는 “나의 30년 고심(苦心)이 조금이나마 관철됐구나”라고 짧게 감회를 적었다. 세이난 전쟁에서 역적으로 몰려 죽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명예회복을 위해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한다.

사이고 사후 20여 년이 지난 1898년 12월 우에노 공원에 동상이 건립된다. 그 후 1개월 뒤인 1899년 1월 가쓰도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이 세상을 떠난다. 향년 77세. 유언에 의해 묘비에는 ‘가이슈(海舟)’라고 단 두 글자만 새겨졌을 뿐이었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1808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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