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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사랑학 개론(10)] ‘여자 카사노바’ 조르주 상드의 '내 인생 이야기' 

“나에게 사랑 없는 섹스는 죽을죄다” 

김환영 중앙일보 지식전문기자
보헤미안 스타일의 자유분방함 한껏 즐겼던 쇼팽의 연인…격변기 속 ‘고품격 막장 연속극’ 같은 삶 살며 인습에 저항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조르주 상드가 세상을 떠나자 “내게는 지금 그를 떠나 보내는 눈물과 슬픔이 있지만, 불멸의 인물이 된 그에게 인사하는 기쁨도 있다”며 애도했다.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에서 주연 배우들이 사랑을 나누고 있다.
'사랑이 제일 쉽다’고 말할 수 있는 행운아도 있겠지만, 사랑은 대부분의 사람, 아니 모든 사람에게 힘들고 어렵다. 왜? 우선 시공을 초월하는, 사랑에 내재한 고유 메커니즘 자체가 만만치 않다.

사람은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이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둘 다 어느 정도 누려야 만족한다. 게다가 석기시대건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건, 사랑은 사회와 상호작용한다. 특히 사회의 혁명적 전환기에 사람들이 사랑하는 방식은 지진의 파동처럼 흔들린다.

사회 변화의 진원지에서 본인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해 사랑의 새로운 모델을 개발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좀 과장한다면…, 프랑스 낭만파 소설가 조르주 상드(1804~1876)가 그런 경우다. 상드가 살았던 프랑스는 공화정과 군주정이 어지럽게 오가는 가운데 사회가 급변했다.

상드가 별세하자 [레 미제라블](1862)로 유명한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지금 그를 떠나 보내는 눈물과 슬픔이 있지만, 불멸의 인물이 된 그에게 인사하는 기쁨도 있다.”

음악·미술에 두루 조예 깊었던 예술가


▎‘피아노의 시인’ 쇼팽. 세상을 떠나기 수 개월 전에 찍은 사진이다.
상드의 장례식 추도사에서는 위고가 이렇게 말했다. “이번 세기의 지상과제는 프랑스혁명을 완성하고 인류혁명을 시작하는 것이다. 혁명이 요구하는 평등에 포함되는 남녀평등을 위해 조르주 상드라는 강한 여자가 필요했다.”

상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다음과 같은 상드 자신의 말이 그의 삶을 요약한다. “인생을 닮은 소설보다는, 소설을 닮은 인생이 더 흔하다.” 그의 삶은 진정 드라마였다. 그의 인생을 ‘고품격 막장 연속극’으로 볼 수 있다. 상드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는 본인이 직접 체험한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상드는 강한 사람, 아니 강한 여자였다. 그의 강함은 자유를 향한 전진에서 나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롭게 되는 게 내 직업이다.” 상드는 당시로써는 사람들의 반은 이해할 수 있으나 나머지 반은 수긍할 수 없는 자유분방한 보헤미안 스타일의 삶을 살았다. 인텔리들은 대체로 그의 손을 들어줬다. 샤를 보들레르(1821~1867)는 예외였다. 상드에 대해 이런 악평을 남겼다. “이런 잡년에게 매혹되는 남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이 세대 남자들이 추락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근대 프랑스의 탄생·성장통을 겪어야 했던 일반 국민은 상드 때문에 둘로 쪼개졌다. 그를 극단적으로 사랑하거나 혐오했다. 중간 지대의 세력은 미미했다.

반대파는 상드가 ‘결혼과 도덕의 가치를 흔드는 공공의 적’이라고 공격했다. 왜? 그는 남편을 ‘버리고’ 이혼을 감행했다. 남장(男裝)했다. 코르셋을 벗어 던졌으며 치마를 입지 않고 바지를 입었다. 공공장소에서 줄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연하게 시가를 즐겼다(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눈총을 피해 몰래 담배를 피워야 하는 여성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이다. 아직 많은 사람에게 중학교 남학생의 흡연보다 여성의 흡연이 더 불편하지 않은가).

‘사랑의 완성=결혼’이라는 통념이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했다. 이 등식을 잣대로 삼으면, 상드는 낙제점을 받았다. 남작의 혼외자로 태어난 남편은 너무 평범했다. 상드는 남편과 하고 싶은 게 아주 많았다.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고 싶었다. 뜨거운 육체적인 사랑도 나누고 싶었다.

상드는 베토벤 소나타를 즐겨 치는 수준급 연주자였으며 초상화·풍경화도 잘 그렸다. 남편은 그런 쪽에 별 조예가 없었다. 남편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상드를 만족하게 하지 못했다. 남편은 옹졸한 데다가 바람까지 피웠다.

‘팔자 도망은 못한다’는 우리 속담이 있지 않은가. 세간은 상드가, 그가 쓴 작품 수만큼(소설 80여 편, 희곡 35편) 염문을 뿌렸지만, 육체적인 만족을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상드를 만족시킨 사람은 그와 동성애 관계였던 마리 도르발이라는 여배우라는 설이 있다). 아니면 반대로, 상드는 항상 새로운 체험을 추구하는 사랑과 섹스밖에 모르는 ‘여자 카사노바’였는지도 모른다.

자코모 카사노바(1725~1798)와 상드의 공통점은 둘 다 세상이 알아주는 문필가였고, 바람둥이로 소문났다는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상드가 당대의 ‘국보급’ 명사들, 특히 쟁쟁한 문인만 상대했다는 것이다. 당대 문화·예술계 셀러브리티는 상드의 친구 아니면 애인이었다. 애인 중에서는 알프레드 드 뮈세(1810~1857)와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이 가장 유명하다.

20~21세기는 상드를 주로 ‘쇼팽의 연인’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생전에는 사랑에 탐닉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감동을 주는 글쟁이로 유명했다. 당시 비평가들은 그를 ‘여류 작가’라는 범주 내에서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수식어가 필요 없는, 그냥 ‘작가’였다.

상드 옆에 서면 스탕달(1783~1842), 발자크(1799~1850)나 프로베르(1821~1880)도 빛을 잃었다. 상드의 책이 더 많이 팔렸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 특히 러시아에서 상드의 ‘센티멘털’한 이야기가 인기를 끌었다.

“모든 것이 역사로 수렴된다”는 관점에서 집필


▎만년(晩年)의 조르주 상드. 젊었을 때와 달리 평범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상드 최고의 작품 중 하나는 [내 인생 이야기(Histoire de ma vie, Story of My Life)]이다(우리말 번역본은 없다). 세상이 그를 잊었기에 [내 인생 이야기]는 프랑스에서도 1876년 이후 절판됐다가 1970년에 복간됐다. 영문판 완역본이 처음 나온 것은 1991년이다.

상드는 “모든 것이 역사로 수렴된다. 모든 것이 역사다”는 관점에서 [내 인생 이야기]를 썼다. 나름 솔직한 자서전이다. 17세부터 느꼈던 자살 충동의 여러 순간을 술회했다(악평·‘악플’ 앞에 장사 없다. 21세기에도 남자 카사노바건 여자 카사노바건 죽고 싶을 때가 여러 번일 것이다).

사랑에 대한 상드의 생각도 나와 있다. 결론은? 상드에게 사랑 없는 섹스는 죽을죄다. 상드는 이렇게 말한다. “남성이 건 여성이건 한 인간이 완벽한 사랑을 이해하게 되면, 오로지 동물적인 행위로 회귀하는 것은 더는 가능하지 않다.”

카사노바가 쓴 동명의 자서전 [내 인생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을 상드의 [내 인생 이야기]에서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애정 문제 이전에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가족사와 자신의 성장 과정을 우선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로크 같은 철학자, 셰익스피어·단테와 같은 작가의 저작을 섭렵하며 어떻게 자신이 지적·정신적으로 성장했는지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방중술(房中術), 체위, 유혹의 기술 같은 것도 중요하겠지만, 사랑과 섹스의 지적·정신적 차원에 대해서는 조르주 상드가 힌트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내 인생 이야기]는 자신이 남장하고 다닌 이유도 밝히고 있다. 어떤 페미니즘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경제적·실용적 고려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드는 어렸을 때부터 남자 옷을 입었다. 남편으로부터 탈출해 무작정 상경하다시피 했을 때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또 남자 옷이 편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종교 이야기도 나온다. 가만히 살펴보면 상드의 애정 ‘행각’과 그의 종교관이 밀접하다. 상드는 어린이 시절, ‘코랑베’라는 이름의 신(神)을 창조했다. 여성이기도 남성이기도 한 신, 남성도 여성도 아닌 신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신과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들 양쪽을 닮은 신이기도 했다.

‘페미니즘의 어머니들’ 중 한 사람


▎조르주 상드의 저서 [내 인생 이야기]의 영문판 표지.
상드는 14세에 수녀원으로 들어가 2년 반 동안 교육받았다. 수녀가 될 뻔했다. 신비체험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와 마찬가지로 “톨레 레게(Tolle, lege)” 즉, “(성경을) 집어서 읽어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해 상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의와 평등을 고집하는 신 외에는 다른 신을 믿지 않는다.”

이런 식의 논리를 펼 수 있다. 종교는 초월적이다. 인간은 종교를 통해 자신을 초월하는 이상을 꿈꾼다. 상드는 종교적인 인물이었다. 사실 상드는 일부일처제 결혼이 최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꿈꾸는 사랑은 기대치가 너무 높았다. 그를 만족하게 할 수 있는 남자는 세상 속에 없었다. 상드는 자신보다 어린 남성들과 사귀었는데 관계가 모자지간처럼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페미니스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성애’의 화신처럼 됐다.

페미니즘과 상드의 관계는 논란거리다. 남성복이 더 편했던 그는, 또한 여자보다 남자를 대할 때 더 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나는 여자들과 오래 함께 있는 게 힘들다.”

상드를 ‘원조 페미니스트들’ ‘페미니즘의 어머니들’ 중 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게 맞다. 그는 소설을 통해 여성이 마음껏 사랑할 자유를 저해하는 사회와 인습에 저항했다. 현실에는 자신이 소설에서 제시한 이상적인 사랑을 몸으로 실천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한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는 상드를 이렇게 평가했다. “조르주 상드는 글을 잘 쓰지 못했다. 그는 여성과의 그 어떤 연대도 거부했다.” 상드가 페미니스트인 프로라 트리스탕(1803~1844)의 여성 참정권 운동에 가담하지 않은 것도 ‘오점’으로 남았다.

이러한 평가는 일면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드는 여권(女權)보다는 인권 자체에 관심을 기울였다. 남녀 성별에 대해 상드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에는 성별이 없다.” “단 하나의 성(性)만 있을 뿐이다. 남성과 여성은 전적으로 같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채우고 있는 성을 구별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다.”

상드의 부계는 귀족, 모계는 평민 집안이었는데 상드는 저택을 상속받았다. 1848년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전역을 휩쓴 혁명 당시에는 공화주의자·사회주의자였다. 사랑 때문에 힘든 여성뿐만 아니라, 사는 게 힘든 노동자·농민이 그의 소설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보수화됐다. 고향 노앙으로 낙향한 다음에 발생한 1871년 파리코뮌(파리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을 비난했다.

상드는 엄청난 속도로 소설을 완성했다. 한 해에 여러 권을 출간하는 경우도 많았다. 알프레드 드 뮈세도 부러워한 상드의 비결은? 밤 12시부터 아침까지 6시간 동안 무조건 썼다. 매일 20쪽 정도는 술술 쓸 수 있었다.

평범한 어머니·할머니로 살았던 노년


▎조르주 상드와 쇼팽의 사랑을 그린 연극 [사랑이 없으면 여자도 없다]의 한 장면.
걸출한 인물이었지만, 상드 또한 ‘평범한’ 여성이었다. 위로가 필요할 때 바느질을 했으며 정원 가꾸기 잼 만들기를 좋아했다. 평범한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는 아들 모리스(1823~1889)를 얻었을 때 기쁨을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고 표현했다. 또 노년에는 집필을 계속하는 가운데 자연과 신과 손주들과 함께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할머니였다.

상드는 1845년 한 지인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란 해묵은 상처다. 좀처럼 가시지 않으며, 절대 아무는 법이 없는 상처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상처에는 아픔·슬픔뿐만 아니라 기쁨도 있다. 인생이라는 상처에는 영면(永眠)이라는 최종 해결책이 있다. 빅토르 위고의 말처럼 조르주 상드는 지금 불멸의 세계 속에 있다.

조르주 상드는 필명이다. 조르주(George)는 남자 이름이다. 상드(Sand)는 결혼 전 성(姓)도 아니고, 이혼한 남편 성도 아니다. 한때 사랑했던 쥘 상도(Jules Sandeau)라는 남자의 성에서 ‘오(eau)’를 뺀 성이다.

격변기 속에서 살아야 했던 상드는 평생 이러한 ‘창의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소위 제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AI)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 또한 그러한 선택이 필요하다.

※ 조르주 상드의 인생 여정


▎고품격 막장 드라마 같은 삶을 살다 간 조르주 상드.
1804 프랑스 중부 노앙에서 출생

1817~1820 수녀원 기숙학교 생활

1822 결혼

1831 파리로 이주하며 남편과 별거

1832 데뷔작이자 출세작 [앵디아나] 출간

1833~1835 알프레드 드 뮈세와 연인 관계

1835 남편과 공식 이혼

1837~1847 쇼팽과 연인 관계

1847~1855 [내 인생 이야기] 집필

1876 고향에서 별세

※ 상드의 말말말

-인생에서는 단 한 가지 행복이 있을 뿐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그 어떤 인간도 사랑에 명령할 수 없다.

-산(山)을 움직이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이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단 한 페이지도 찢어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인생이라는 책 전체를 불 속으로 던질 수 있다.

-행복에 꼭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난 다음에는, 우리는 노력의 결과로 행복하게 된다. 행복의 요소는 소박한 취향, 어느 정도의 용기와 극기, 일에 대한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확고한 양심이다.

-사람들이 사악하지 않다면, 나는 그들의 멍청함에 개의치 않을 것이다. 불행히도 사람들은 둘 다다.

-예술을 그 자체를 위한 예술은 빈말이다. 진선미(眞善美)를 위한 예술,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신앙이다.

-진리는 너무나 간단하다. 우리는 항상 복잡한 경로를 통해 진리에 도달한다.

-내 앞에서 걷지 말라. 내가 당신을 뒤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내 뒤에서 걷지 말라. 내가 당신을 이끌지 않을 수도 있다.

※ 김환영 - 중앙일보 지식전문기자. 지은 책으로 [따뜻한 종교 이야기] [CEO를 위한 인문학] [대한민국을 말하다: 세계적 석학들과의 인터뷰 33선] [마음고전] [아포리즘 행복 수업] [하루 10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말하다] 등이 있다. 서울대 외교학과와 스탠퍼드대(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에서 공부했다.

201809호 (2018.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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