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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18)] 인도 타르사막으로 가는 길 

‘죽음’의 자각(自覺)이 어찌 인간만의 것이랴! 

김미루 사진작가
죽음 앞에 초연했던 낙타에게서 깨달은 인간의 오만…인도 낙타를 찾아 떠난 길에서 발견한 빈민들의 희망가

▎인도 타르사막에서 만난 낙타들과 만든 나의 작품.
보싸의 병세가 심해지고 나의 불안감이 짙어갈 때, 나는 보싸에게 사과와 바나나 같은 과일을 먹게 하려고 애를 썼다. 내가 보싸와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며칠 남지 않은 듯했다. 보싸는 평소 사과와 바나나 같은 과일을 매우 좋아했다. 그러나 한편 그동안 안 먹던 과일을 먹어서 위장장애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항상 그러하듯이 나는 보싸 옆을 하루 종일 지키면서 그녀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은 만큼 먹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고 하마다가 수의사와 연락이 닿게 되기를 안타깝게 기다렸다.

그날 저녁 늦게 하마다가 드디어 수의사와 연락이 닿았다. 수의사는 왕진을 나올 수는 없다면서 하마다의 이야기를 듣고 진단을 내렸다. 그의 최종적인 진단은 보싸의 목구멍에 벌레가 기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마다에게 근처의 다른 마을로 가서 벌레를 죽이는 약을 사오라고 지시했다. 목구멍에 기생하는 벌레라는 개념은 나에게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지만 낙타의 기생충학적인 질환에 관해 아무런 리서치를 한 바 없기 때문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 돼서야 보싸는 그의 신비로운 처방약을 먹을 수 있었다. 낡은 플라스틱병에 담긴 누렇고 걸쭉한 액체였는데, 그것을 보싸의 목구멍으로 조금씩 쏟아 부었다. 이날 오후 보싸는 자기 입을 보다 크게 벌릴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좀 더 많이 먹을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하여튼 보싸가 기생충질환에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기실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었다.

내가 보싸의 병간호를 할 수 있었던 마지막 날의 체험은 내 생애에서 참으로 잊기 어려운 쓰라린 것이었다. 내가 보싸에게 짙은 애정을 느꼈다는 사실뿐 아니라, 보싸가 나에게만 모든 것을 기대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참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나는 진실로 나에게만, 나 이외의 모든 존재를 신뢰하지 않고 내게 기대려고 하는 아픈 동물을 떠나야만 한다는 그런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는지, 정말 난감할 뿐이다. 내가 그곳에 체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보싸가 나에 대해 느끼는 것을 기껏해야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때 ‘사랑’이라는 것도 낙타라는 동물종자가 느낄 수 있는 어떤 감정의 범위에 있는 것일 게다. 그녀의 행동방식을 관찰해보면 그녀가 나를 자신의 비참한 곤경으로부터 건져내 줄 수 있는 유일한 친구라고 믿고 있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병세 깊어진 보싸와의 이별


▎내가 목을 어루만져주자 보싸가 눈을 감고 기분이 좋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보싸의 상황이 악화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아주 간절히 원했다. 보싸는 내가 주는 풀잎을 반만 먹고 그 나머지는 입에서 흘렸다. 그리고 한번 떨어진 것은 다시 먹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긴 풀을 모두 반으로 잘라서 보싸의 입질에 맞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보싸는 입에 들어간 것조차 삼키는 것을 힘들어 했다. 나는 보싸의 입 안을 살펴보았다. 혹시 충치가 심해서 그 충치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녀의 이빨은 모두 브라운색깔이었고, 입안에 가득한 거품과 녹즙 때문에 아무것도 분별할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나는 보싸 곁에 붙어 있으면서 근심과 후회와 슬픔과 회복에 대한 간절한 소망으로 나의 감정을 물들였다. 제발! 제발! 내가 떠난 후에라도 다시 건강하게 되어라! 나는 그러한 소망을 담아 내가 몽골에서 가지고 온 푸른 카타목도리를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몽골에서는 사람들이 예식을 치르러 성황당에 갈 때 목에 이 푸른 스카프를 맨다. 그것이 지니는 상징적 기원의 의미도 있겠지만, 내가 그것을 평소 항상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체취가 충분히 배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나는 보싸가 나의 냄새를 맡으면서 회복하기를 기원했다.

2013년 5월 4일 아침, 나는 모든 풀을 반으로 자르고 보싸가 잘 먹을 수 있도록 해놓았다. 보싸의 목에 매어져 있는 카타 스카프를 다시 단정하게 묶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굿바이를 하면서 그녀를 꼭 껴안아 주었다. 카이로로 돌아오는 미니버스에서 나는 보싸가 왜 바하리야로 와야만 했는지를 회상했다. 보싸가 회복될 수 있었다면, 나는 어느 날 보싸를 데리고 사진촬영을 위해 화이트데저트를 유유히 걷고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물로 얻어진 사진작품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객관적인 관객들은 그 내면의 이야기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작품들에 담긴 보이지 않는 기나긴 사연들은 그 작품들에게 모종의 서광을 던져 주리라고 나는 믿는다. 작품은 작가의 주관적 체험의 소산이지만 그것은 관객과 소통될 때 한층 더 빛을 발한다. 그리고 작가의 삶의 투영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그 작품은 그 무엇을 관객에게 던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걸작은 탄생될 길이 없었다.

보싸는 내가 떠난 후로 4개월을 더 버텼다. 그녀는 그녀의 삶에 절실하게 집착했다. 아마도 그녀가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강렬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보싸에게 돌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두 존재가 다시 연합되지 못하는 비극은 당시 이집트의 정치적 분규의 결과였다.

그해 7월 나는 요르단에 다시 와서, 보싸에게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공교롭게도 제5대 대통령인 모하메드 모르시(Mohamed Morsi)를 제거하는 2013년 군사쿠데타가 발발하고 말았다. 모르시는 국방장관을 포함한 쿠데타세력에 의해 7월 3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모르시는 이공계 학자 출신인데 오히려 온건한 인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반미적 발언으로 미국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하여튼 장기집권자였던 무바라크가 축출된 이후로 이집트정국은 계속 소란했다.

이집트 쿠데타로 물거품이 된 재회


▎타르사막으로 가는 기차의 특실 내부. 의자는 널찍하지만 낡았다.
군사쿠데타에 반대하는 친모르시 항의자들은 무자비하게 학살되었다. 8월의 대학살에서 817명의 민간인이 사살되는 비극이 전개된다. 폭동이 카이로 길거리를 메웠다. 자동차는 불탔고 기자들에 대한 무시무시한 폭력이 자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카이로공항에 착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질 못했다. 더구나 나의 모든 카메라장비와 눈에 띄는 외국인 외모를 지니고 있는 내가 바하리야까지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했다. 보싸에게 가는 것은 나로서는 나 자신의 무덤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내가 8월 내내 폭동과 학살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보싸는 홀로, 외롭게 죽었다. 나는 생각한다. 보싸는 그의 친구 사피나가 죽었을 때 이러한 자신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었을까? 그것이 과연 그녀가 단식을 하게 된 진정한 이유였을까? 그리고는 나를 만남으로써 그녀는 그녀의 삶을 지속하려 했을까? 그러다가 내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운명을 의식하고 사는 유일한 존재가 사람이라는 전제는 틀렸을지도 모른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에로의 존재(Sein zum Tode)’는 인간만의 자각적 특질이 아닐지도 모른다. 인간은 너무도 자의적으로 자신의 세계 내 존재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보싸는 하이데거가 말한 ‘실존(Exitenz)’의 모든 가능성을 자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012년 후반 두 번의 이집트 여행과 2013년 요르단으로 이사해 보싸를 만난 그 시점들 사이에 나는 내 삶에서 처음으로 인도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인도로의 첫 여행은 기실 보싸와의 만남 이전의 사건이다. 2013년 1월, 나는 아시아에 있었다. 대만의 까오시옹(高雄)에서 열리는 나의 단독전시회를 준비해야만 했고, 또 그 참에 서울에 있는 나의 가족을 방문할 수 있었다. 까오시옹의 솔로전시 오프닝 후에, 나는 인도의 타르사막(the Thar desert)을 방문할 생각을 했다. 그것은 내가 고비사막에서 작업을 한 후였기에 너무도 정당한 발상이었다.

인도의 타르사막은 아시아대륙에서 매우 별난 향취를 발하는 곳이며, 그곳의 유목민은 아직도 전적으로 낙타에 의존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매우 뜨거운 기후를 가지고 있고 또 중동에 근접해 있기 때문인지, 타르사막에는 단지 단봉의 드로메다리(Dromedary)만 살고 있다. 그러나 사진상으로 판단컨대, 이 단봉낙타들은 내가 요르단이나 이집트에서 본 것들과는 좀 달리 보였다. 나는 이 색다른 낙타들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풍경과 문화(풍물)를 직접 체험해 보고 싶었다.

그 여행을 기획하기 위해 우선 서울에 있는 인도대사관에서 관광비자를 얻어야 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꾸앙저우를 경유하는 델리 왕복표를 샀다. 1월 23일 델리에 도착해 2월 20일 떠나는 여정이었다. 이 여정은 그냥 사막을 방문하는 목적이라면 너무 긴 기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도달하기 매우 힘든 타르사막의 심장부에 들어가기 위해서 또 하나의 타운을 경유해야만 했다. 델리에서 나는 비카너(Bikaner)까지 기차로 여행해야만 했다. 그리고 비카너에서 제이살머(Jaisalmer)까지 버스로 가야만 한다. 그리고 다시 제이살머에서 버스로 비카너로, 비카너에서 기차로 델리까지, 델리에서 비행기로 서울까지! 이 모든 여행은 실로 매우 지루하고 힘든 노력을 필요로 하는 여정이었다.

나는 델리공항에 밤늦게 도착했다. 밤 10시경이었다. 비카너로 가는 기차는 델리의 사라이 로힐라(Sarai Rohilla)역에서 다음날 1월 24일, 아침 7시에 떠난다. 그러니까 델리에서 머무는 시간은 매우 짧다. 그래서 나는 온라인으로 기차역에서 가까운 곳으로, 잠깐 눈 붙일 수 있는 여관 같은 데를 하나 찾아야 했다. 마침 호텔 피트라쉬시 그랜드라고 불리는 곳이 눈에 띄어 예약을 했다. 그 호텔은 등급도 없었고 리뷰도 없었다. 그러나 결국 몇 시간 눈 붙일 목적이라면 허름한 방이면 족했다. 사막에서 그냥 맨몸으로 지낸 수많은 날을 생각하면 호텔을 가릴 것은 없었다.

인도 낙타를 만나러 간 여정


▎열차의 차창 밖으로 보이는 판자촌의 풍경. 판자촌을 벗어나 사막 지역에 들어서면 쓰레기가 뒹구는 황량한 땅이 펼쳐진다.
택시를 잡아 타고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한밤중이었다. ‘그랜드’라는 웅장한 이름과는 딴판으로 호텔은 먼지만 휘날리는 곳에 있었다. 우선 길이 어두웠다. 그리고 작은 로비는 아주 희미한 형광등이 몇 개 켜져 있을 뿐이었다. 담배 냄새가 가득했고, 싸구려 타일바닥에 낡은 비닐 소파가 하나 놓여 있다. 리셉셔니스트가 나와 나의 짐을 도와 주었고, 나의 온라인 예약을 확인했다. 그리고 작고 짙은 피부색의 30대 중반이나 40세 정도의 남자가 나를 호텔방으로 안내했다. 방은 1층에 있었으며 작고 습했고 창문이 없었다. 그 남자는 영어를 할 줄 몰랐다. 그리고 방에 딸린 때투성이의 욕실을 보여 주면서 벽에 달린 스위치를 껐다 켰다 했다. 나에게 스위치를 소개하려는 것이었겠지만 불이 꺼지는 순간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나를 덮쳤다. 그는 호텔 방문을 닫고 들어왔고 또 방 안쪽에 서서 나를 째려보고 있는 것이다. 객지에서는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무의식적인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다.

실상 그 남자는 내게 팁을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이지만 외지에서 자정이 넘은 시각에 아주 저급한 호텔방에 두 사람이 서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나에게 무의식적인 공포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무식했으면 좋겠는데, 때마침 2012년 12월 젊은 여인이 성폭행 당한 사태로 여권·인권을 부르짖는 항의데모가 인도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소요는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진행 중에 있었던 것이다. 나중 일이지만 영국의 BBC방송은 이 케이스를 [인도의 딸(India’s Daughter)]이라는 다큐영화로 만들어 방영했다(2015. 3. 4).

이 사건은 ‘2012년 델리 갱 레이프(2012 Delhi gang rape)’라 불린다. 사건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012년 12월 16일, 사우스 델리의 무니르카(Munirka)라 불리는 외곽 지역에 죠티(Jyoti Singh Pandey)라는 23세의 인턴 물리치료사가 그의 남자친구 아빈드라(Awindra)와 함께 영화를 본 후 밤 9시30분경 버스를 타고 귀가 중이었다. 그런데 이 버스는 정규적으로 운행되는 버스가 아니라 폭주족들이 재미로 운행하는 전세버스였다. 이 버스 안에는 2명의 연인 외에 운전사 포함 6명의 젊은 남성이 있었다. 버스의 문이 닫히고 지정된 노선을 벗어나 질주하자 아빈드라는 그 6명 갱의 일원이었던 운전사에게 항의를 했다. 그들이 아빈드라를 쇠몽둥이로 심하게 때리는 바람에 그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갱들은 죠티를 뒷좌석으로 끌고 가 심하게 쇠몽둥이로 구타하고 윤간한다. 어찌나 거칠게 다루었는지 그녀의 질구가 파열된 것은 고사하고 내장까지 다 파열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움직이는 차에서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들은 그날 밤 11시경 행인에 의해 발견돼 사프다르중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죠티는 12월 29일(13일 만에) 사망한다. 인도의 미디어는 강간당한 여성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이 여인은 ‘무서움을 모르는’이라는 뜻의 ‘니르바야(Nirbhaya)’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죠티는 강간당하는 중에도 끝까지 저항하고 물어뜯어 범인들에게 확실한 증거를 남겼다.

결국 강간을 한 갱들 6명은 모두 검거되었지만 사법부는 이들의 처벌에 관해 매우 미온적이었다. 그리고 인도의 일반적 풍습은 강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분위기였다. “계집애가 주책없이 나돌아 다니니깐 그렇지”라는 식으로 일축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죠티 케이스는 이러한 인도의 고질화된 여성차별 문화를 근원적으로 각성시키고 새로운 입법을 강행케 하는 거대한 문화운동, 시민운동, 사법투쟁운동으로 발전했다. 우리나라는 여권운동에 있어서는 매우 앞서있는 나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여성의 안전이 보장되기가 힘든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문제에 정부나 사법부가 개입하기를 꺼려했다.

낯선 호텔에서의 하룻밤


▎타르사막의 유목민들은 흙으로 벽을 세우고 건초를 얹은 초가집에서 생활한다.
이러한 최근의 소요를 생각할 때, 낯선 사람이 내 방 안쪽에 서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무의식적 공포를 조장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재빨리 방문을 열고 그 남자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그는 끌끌거리는 듯한 느낌으로 문밖으로 나가서는 아직도 복도에서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곧 그의 면전에서 문을 꽝 닫고 걸어 잠가 버렸다.

생각해 보면 그는 순진한 사람이었고 나에게 팁 한 장 얻기 위해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내 지식의 폭력이 그를 불순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관념적 공포 때문에 팁 주는 것도 새까맣게 잊어 버렸던 것이다. 그의 발자국소리가 문에서 멀어지자 나는 드디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침대의 시트를 벗기고 빈대가 있는지를 잘 살펴보았다. 역 의자에서 빈대가 우글거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빈대가 보이지 않자, 나는 시트를 다시 씌우고 몇 시간 눈을 붙였다.

아침 6시 정각에 일어나 즉각 호텔을 체크아웃했고, 15분가량 걸어 사라이 로힐라역에 도착했다. 매우 큰 백팩을 등에 지고 바퀴 달린 카메라 장비백을 질질 끌면서. 역은 이미 지역 상인과 여행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매우 서늘한 아침이었다. 남자들은 단조로운 색깔의 재킷을 입었고, 여자들은 다채로운 문양의 긴 천으로 몸을 휘감았다. 인도에서는 어디를 걸어도 짜이 냄새가 콧잔등에 어른거린다. 결코 나쁘지 않다. 톡 쏘는 싱그러운 생강과 소두구씨 카르다몸, 그리고 감미로운 생우유 냄새는 기분 좋게 자극적이다.

예상했던 대로, 나는 군중 속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전자예약영수증에 써있는 열차를 정확히 찾아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컴퓨터화면을 아이폰으로 다시 찍어 그것을 승무원들에게 보여주었다. 열차는 어떻게 찾았지만 정확한 객실을 찾는 것 또한 문제였다. 나의 기차표에 적힌 클래스는 ‘2A’였다. 아마도 1등칸 다음의 특실일 것 같다. 그러나 정확한 표시가 없어 나로서는 등급을 분별하기 어려웠다.

혼잡스러운 객실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니 텅 비었고 의자가 길쭉길쭉해서 잠을 잘 수도 있는 그런 칸에 도착했다. 그러나 좌석의 쿠션이 얇고 또 낡아빠진 비닐커버였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 간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객실 내부는 전체적으로 낡아빠졌고, 구식이었으며, 색이 바랬다. 그렇지만 나는 창가의 긴 의자에 앉아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광경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느 곳을 가든지 차간에 설치된 디지털광고판에 끊임없이 눈길을 강요당하는 KTX류의 비주체적 여행보다는 훨씬 더 여유롭고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무지개색 빈민가’


▎비카네르 정크션 역과 시내 풍경.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문을 장식하는 장면들이 활동사진처럼 바뀌기 시작했다. 역을 떠나자마자 나의 눈길을 자극한 것은 슬럼(slum)의 광경이었다. 수천 개의 임시변통으로 만들어진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철길 주변을 휘덮고 있다. 어떤 것은 벽돌담으로 된 것도 있다. 여기저기서 주워 온 베니어판이나 비닐방수포나 코르타르를 칠한 판자 등으로 잇대기는 했지만. 지붕만 해도 물결모양으로 홈이 나있는 플라스틱판이나 양철판, 나무합판이나 천 모두 가릴 것 없이 잡탕으로 이어져 있지만, 그 광경은 묘한 색깔의 심포니를 그려낸다.

이 작은 가정 단위들은 다닥다닥 연접돼 있어 대부분 지붕을 공유한다. 어떤 것은 2층으로 돼 있는데 그것은 꼭 큰 박스 두 개를 포개놓은 것 같다. 단지 2층 방문 밑으로 사다리가 놓여있을 뿐이니까, 2층에 사는 사람은 그 사다리를 통해서만 바깥세상과 연결이 된다. 그러니까 2층에 사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서커스 곡예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다리를 올라가고 난 후에는 땅바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문을 연다는 것은 오직 사다리 위에서만 가능하다. 사다리 위에서 방으로 기어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 판자촌은 지저분하고 먼지로 뒤덮인 단갈색의 건조물로 보인다. 우선 지붕이 모두 회색이고 쓰레기더미를 여기저기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주변에는 항상 쓰레기와 깡통들이 너저분하게 깔려 있지만, 주민들은 이 쓰레기들을 활용하여 항상 모닥불을 피울 수 있다. 불 주변으로 모여들어 몸을 녹이고 짜이를 마시곤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곳은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최빈곤층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안전한 물 공급도 없다, 전기도 없다, 적절한 위생시설도 없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많은 집이 아주 어여쁜 밝은 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푸른색이나 아쿠아 그린을 원하지만, 노란색, 자줏빛, 핑크빛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색깔의 변화는 그들의 삶을 보다 유쾌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최빈층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집을 깨끗하게 꾸미려고 노력하는 그들의 심미적 감성의 발로는 인간의 위대함을 입증하고 있다.

지나치는 장면들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그 내면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면 그 판자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발랄한 삶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지역의 땅 면적에 그 인구밀도를 계산하면 그곳에 아무리 높은 고층아파트를 짓는다 한들 도저히 그들이 향유하고 있는 삶의 질을 보장할 길이 없을 것이다. 여인들은 빨래한 다채로운 문양의 긴 천들을 빨랫줄에 걸고 있고, 남자들은 장작불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 짜이를 마시고 있다. 붉은 사리를 휘감은 여인들이 늘씬한 허리를 돌려가며 머리 위에 항아리를 이고 가고, 꼬마들은 깔깔거리며 뛰어가고 철길을 밟으며 놀이를 하고 있다. 낡은 자전거가 문밖에 세워져 있고, 판자촌 사이 모퉁이에는 구멍가게들이 일용품을 진열해놓고 있다.

삶의 조건이 아무리 가난하고 불결하다 한들 판자촌의 가족들은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면서 주어진 환경 속에서 가능한 최상의 삶의 기쁨을 창조해낸다. 삶의 가장 기초적인 편의시설이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속에서도 페인트를 사다가 자기 집을 칠하는 이곳 주민들의 마음씨가 나는 인간에 대한 위로처럼 느껴졌다.

대한민국은 빨갱이를 때려잡듯이 판자촌을 때려 부쉈다. 마치 판자촌이 문명의 최대 적이라도 되는 듯이. 그러나 판자촌이 사라진 서울은, 아니 지방도시까지, 아니 시골구석까지, 아니 대한민국 전체가 진정한 공동체가 사라진 ‘체제종속’의 공허한 빈곤의 장이 되어 버렸다. 판자촌을 살리면서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단지 우리에게는 그러한 안목이 없었다. 모든 ‘발전’의 기준은 맨해튼이 되어야 했고, 파리의 개선문거리가 돼야 했다. 이러한 외재적 사유를 이제 본질적으로 벗어 버릴 때도 되지 않았을까?

기차가 산업지구와 농촌의 들판을 지나게 되자, 전날의 누적된 피로가 몰려왔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기 때문에 깜박 깊게 곯아떨어진 것 같다. 눈을 떴을 때, 시골풍경이 전개되어 있었고, 밭과 쓰레기, 그리고 관목더미들, 그리고 빈둥거리는 소들이 눈에 띄었다.

라자스탄의 대(大) 사막에 발을 들이다


▎인도의 낙타 페스티벌. 낙타의 털을 깎아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고 알록달록하게 치장을 한다.
정오쯤, 나는 이미 라자스탄(Rajasthan)주의 대(大)사막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색깔이 단조로워졌고, 풀들이 사라진 황금빛 모래의 대지, 꼭 사슴의 뿔처럼 생긴 이파리 없는 작은 나무들, 둥근 원통형의 흙집 위에 지푸라기 지붕을 고깔처럼 얹어놓은 매우 간략한 집들이 시선을 끌었다.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쓰레기가 보이지 않아 행복했다. 풍경이 보다 자연스러워지고 진정한 사막 같이 느껴졌다. 이국땅에 있는 고독한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사라지고 나의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오후 3시 반경에 나는 드디어 비카너 정크션 기차역에 도착했다. 내가 4일 숙박으로 예약해놓은 게스트하우스는 비제이 게스트하우스(Vijay Guest House)라 불리는 곳이었다. 한 가족이 운영하는, 침실과 아침을 제공하는 이곳은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은 곳이었다. 널찍한 방과 목욕탕이 딸린 방이 1박에 10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이 장소를 숙소로 선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집 주인, 비제이(Vijay) 때문이다. 비제이는 비카너 지역의 오리지날 ‘카멜맨’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그것은 그가 관광객을 위해 다양한 낙타 관련 액티비티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막에 낙타를 타고 나가는 여행을 조직할 뿐 아니라, 그는 매년 열리는 대규모의 비카너 낙타축제를 주관하곤 했다. 내가 이곳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바로 그가 주관하는 비카너 낙타축제가 열리는 것이다. 나는 애초에 나의 여행일정을 그 축제에 맞추어 세심하게 조정해 놓았던 것이다. 나는 이 기회를 통하여 라자스탄 지역의 낙타문화와 낙타생리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811호 (20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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