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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현대 건국운동사 | 근·현대 건국 담론(5)] 동학 ‘진보회’ 이끌고 일제 손잡은 이용구 

국권 없는 민권 국가 구상, 신기루를 좇다 

나라보다 백성 생존·문명화 우선, 동학교도 무장봉기 막아
대한제국을 타도 대상으로 간주, 일제 침략 정책에 호응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제물포 상륙을 보도한 영국 주간지 [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의 1904년 4월 9일 자 화보. ‘보기 드물게 잘 조직된 군대 상륙: 조선에서 일본의 군사작전 시작’이란 제목을 달았다. / 사진:명지대 LG연암문고
동학의 3대 염원은 보국안민·포덕천하·광제창생이다. 이 중에서 국가를 보좌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보국안민’은 국권 수호의 염원을 상징한다. 반면 널리 창생을 구제한다는 ‘광제창생’은 민권 수호의 염원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보국안민·포덕천하·광제창생이라는 3대 염원은 동학으로서 국권과 민권을 수호하겠다는 염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동학의 3대 염원은 상호 간 우호적일 수도 있고 적대적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국권을 수호하려는 보국안민과 민권을 수호하려는 광제창생은 관점에 따라 상생 관계일 수도 있고 반대로 상극관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권이 있어야 민권도 있다는 입장은 양자를 상생 관계로 본다. 이런 관점에 선다면 국권과 민권 공히 중요하기에 국권을 위해서도 궐기하게 되고 또 민권을 위해서도 궐기하게 된다. 이럴 경우 국권과 민권 공히 선순환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국권은 민권을 착취하는 압제 권력이라는 입장이라면 양자를 상극관계로 보게 된다. 이런 입장에서는 민권을 위해서는 궐기할 수도 있지만, 국권을 위해서는 궐기하기 쉽지 않다. 민권을 착취하는 압제 권력을 위해 어떻게 궐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뿐만 아니라 국권과 민권을 상극관계로 보는 입장이라면 국권 약화는 곧 민권 강화라고 생각할 수 있기에 거꾸로 국권 약화를 위해 궐기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국권과 민권은 악순환으로 약화할 수도 있다.

손병희는 동학의 3대 염원을 상생 관계로 이해하고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손병희는 국권이 있어야 민권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즉 국권이 없다면 민권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입장이었기에 손병희가 러일전쟁 발발 직후 동학 간부 40여 명을 도쿄로 불러 국권 수호대책을 논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논의 결과 동학교도 수십만으로 민회(民會)를 조직해 러일전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그 기회에 손병희가 일본당국과 밀약을 맺어 국권을 잡은 후 국정을 혁신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 합의는 동학 지도부 내부의 합의일 뿐이었다. 당장 일본당국이 동학교도의 민회를 인정할지부터 불분명했다. 일본당국은 동학을 철저한 반일단체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본당국이 동학 교주 손병희를 믿고 대한제국의 국권을 맡길지는 더더욱 불분명했다. 당시 손병희가 믿는 것은 전시라는 비상 상황뿐이었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일본당국은 대한제국 최대의 대중조직인 동학의 협조가 필요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그 판단은 기대로 끝나고 말았다.

한반도에 출정한 일본 군부는 동학이 전국적으로 민회를 조직하려 하자 무력진압에 나섰다. 동학을 철저한 반일조직으로 의심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몇 달이 지나도록 민회는 조직되지도 못한 채 수많은 동학교도가 살해당하거나 체포당했다. 이와 관련해 [시천교종역사(侍天敎宗繹史)]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정은 폭동이 일어날까 우려해 동학교도들을 사방에서 남김없이 체포했다. 일본 군대 또한 갑오년의 일 때문에 동학을 배일(排日)이라 의심해 눈에 띄는 대로 총살했다. 이 결과 각지의 동학교도가 난을 피해 한양에 온 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당시 손병희는 일본 도쿄에 있으면서 박인호·이종구·홍병기 등에게 지시해 중립회(中立會)를 조직하게 했는데, 갑오년의 거동과 비슷했다.”([시천교종역사] 제3편, 제5장 밀의혁명[密議革命])

일제 야욕 막으려 무장봉기 계획한 손병희


▎동학·천도교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 교육사업가였던 손병희.
손병희가 중립회를 조직하라 지시한 시점은 1904년 7월이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지 이미 5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 당시 손병희가 중립회 조직을 지시한 목적에 대해 [시천교종역사]에서는 ‘갑오년의 거동과 비슷했다’고 기록했는데, 그 의미는 1894년 동학운동처럼 중립회가 무장봉기를 추진했다는 뜻이다. 이 부분은 심각한 내용이라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선전포고한 일본은 2월 23일 대한제국과 총 6조의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했다. 그중 제1조는 ‘한일 양 제국(帝國) 간에 항구적이고 변함없는 친교를 유지하고 동양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제국 정부를 확실히 믿고 시정개선(施政改善)에 관한 충고를 수용한다’였다. 즉 시정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 내정에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이 한일의정서의 핵심이었다.

뒤이어 일본 정부는 1904년 5월 ‘대한방침(對韓方針)’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세목(細目)’ 등을 의결했는데 여기에는 대한제국의 식민지화 방안이 명시됐다. 일본당국은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대한제국을 보호국화 또는 식민지화하려는 공작을 본격 추진했다.

일본 도쿄에 머물던 손병희는 이런 상황을 알게 되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보국안민이라는 동학의 염원으로 볼 때 국권 수호를 위해 궐기하는 것이 당연했다. 손병희는 1894년처럼 동학이 대거 무장봉기함으로써 일본의 보호국화 또는 식민지화 공작을 막고자 했다.

비록 일본이 초반 승기를 잡았다고는 해도 아직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운 시점에서 동학이 대규모 무장봉기를 일으킨다면 일본당국이 협력하자고 제안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 기회를 잘 활용한다면 일본 공작을 막고 나아가 최초의 계획대로 일본과 밀약해 국권을 잡을 가능성도 있었다.

국권과 민권, 상극관계로 본 이용구


▎손병희와 결을 달리했던 또 다른 동학 지도자 이용구.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일본 군부가 협력 제안 대신 무력진압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될 경우 일본군과 동학은 서로 싸우다가 양패구상(兩敗具傷)하거나 아니면 동학이 전멸할 가능성도 있었다. 따라서 손병희가 1904년 7월 중립회를 조직해 대규모 무장봉기를 일으키려던 계획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지키느냐 잃느냐 하는 시점에서 100만 동학교도의 목숨을 담보로 벌인 일대 도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모든 동학교도가 국권을 100만 동학교도의 목숨만큼 중요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용구가 그랬다. 그는 국권 수호보다는 100만 동학교도 보호를 우선시했다. 이용구는 국권보다는 민권을 우선시했던 것인데, 동학의 3대 염원으로 말하면 보국안민보다 광제창생을 우선시했다. 이런 점에서 이용구는 손병희와 달리 국권과 민권을 상극관계로 이해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당시 이용구는 일본군과 동학이 싸운다면 동학이 전멸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 예상에서 이용구는 100만 동학교도들을 살리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우선 손병희의 무장봉기 계획을 저지하고자 했다. 이용구는 급하게 일본 도쿄로 손병희를 찾아갔다. 1904년 7월 말쯤이었다.

[시천주종역사]에 의하면 손병희를 만난 이용구는 중립회의 무장봉기가 불가능한 이유를 자세히 진술했다고 한다. 반대 이유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다. 하지만 핵심 논리는 광제창생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용구는 동학의 3대 염원 중 광제창생이 가장 중요한 염원이라 주장하며 무장봉기를 반대했을 것이다. 반면 손병희는 보국안민의 염원을 들어 무장봉기가 불가피하다 주장했을 것이다. 결국 손병희와 이용구의 대립은 보국안민과 광제창생 중 어느 것을 우선시할 것이냐의 논쟁이었다.

그런데 당시 손병희의 보국안민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국권을 지키기 위해 100만 동학교도가 무장봉기했다가 실패하면 사후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손병희의 보국안민 주장은 국권을 지키기 위해 100만 동학교도 모두가 장렬하게 산화하자는 주장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론상으로는 근사하지만 당사자인 동학교도들이 수용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주장이었다. 악의적으로 해석하면 손병희는 안전한 도쿄에 있으면서 본국에 있는 100만 동학교도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보국안민을 들어 결사 항전을 주장하는 손병희에게 이용구는 광제창생을 들어 일단 100만 동학교도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이런 이용구의 주장에 동학교도들이 경도되는 것도 당연했다. 나아가 당시 이용구는 자신이 앞장서서 평화적으로 동학의 민회를 조직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고 이해된다. 손병희는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손병희는 민회 설립의 전권을 이용구에게 위임하게 됐다.

다만 손병희는 민회 이름을 진보회(進步會)로 결정하고, 4개 강령을 제정해 이용구 마음대로 운영하지 못하게 했다. 4개 강령은 첫째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 기초를 공고히 할 것, 둘째 정부를 개선할 것, 셋째 군정(軍政)과 재정을 정리할 것, 넷째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이다. 이 중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기초를 공고히 할 것’이라는 첫째 강령은 보국안민에, 나머지 세 개는 광제창생에 관련됐다. 하지만 이용구가 정말로 진보회 강령 4개를 존중할지 아닐지는 전적으로 본인 판단에 달린 문제였다.

진보회 제1강령 ‘보국안민’ 사문화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전 이용구와 함께 일본으로 외교권 이양을 주장하는 ‘보호청원선언서’를 발표한 송병준.
한양으로 돌아온 이용구는 동학 간부들을 소집하고 “우리동학은 본래 포덕천하와 광제창생을 종지(宗旨)로 합니다. 지금 100만의 동학교도로서 이렇게 경거망동한다면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무릇 성사재천(成事在天)이고 모사재인(謀事在人)이라고 합니다만, 우리의 계획을 보건대 일이 만약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나를 따를 자는 모두 손을 드십시오”라고 연설했다.

이 연설에서 나타나듯 이용구는 손병희의 무장봉기 계획을 ‘죽음만이 있을 뿐’인 경거망동이라고 강력하게 성토했다. 그 성토는 사실상 보국안민에 대한 성토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유에서 이용구는 동학의 3대 염원 중에서 보국안민을 생략하고 포덕천하와 광제창생 두 가지만 동학 종지라고 연설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연설 끝에 이용구가 “나를 따를 자는 모두 손을 드십시오”라고 하자 동학 간부 모두가 손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그 시점부터 동학의 대세가 보국안민에서 광제창생으로 바뀌었음을 상징한다. 요컨대 동학 간부들 모두가 손을 들었을 때부터 진보회의 4개 강령 중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기초를 공고히 할 것’이라는 첫째 강령은 사실상 사문화됐다.

이용구는 동학 간부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면서 광제창생 위주의 진보회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방법은 송병준과 일본군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용구가 평화적으로 동학의 민회를 조직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던 것은 바로 송병준을 믿고 그런 것이었다.

송병준은 1858년생으로 이용구보다 10세 연상이었다. 함경도 장진 출신인 송병준은 관기(官妓) 아들로 알려졌는데, 8세 때부터 민태호 집에서 일하게 됐다. 민태호는 민영익의 생부이자 민영환의 양부로 민씨 척족의 중심인물이었다. 이에 따라 송병준은 어려서부터 민씨 척족의 일원으로 간주됐고, 실제로 민씨 척족의 후원으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송병준은 1882년 임오군란 때 구식군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송병준은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돌아왔다. 이후 1884년 갑신정변에서 민태호가 살해되자 송병준은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일본까지 갔다가 거꾸로 감화돼 개화파가 됐다.

그 후 송병준은 위기 상황에 몰릴 때마다 일본으로 도피하곤 하면서 일본 전문가로 성장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송병준은 제12사단 병참감 오타니 기쿠조(大谷喜久藏)의 통역 자격으로 3월 14일 귀국했다. 그때부터 송병준은 오타니의 측근으로 일본 군부에 큰 영향력을 갖게 됐다. 이용구는 바로 그 송병준을 이용해 일본 군부로부터 진보회 설립을 공인받고자 했다.

[시천교종역사]에 의하면 이용구는 8차례나 사람을 보낸 후에야 송병준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 송병준은 이용구를 반일단체 동학의 두령이라 생각해 만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용구는 일본 군부로부터 진보회 설립을 공인받기 위해 반드시 송병준을 만나야 했다. 이용구는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송병준에게 사람을 보내기 시작했고, 결국 8월 초순쯤 송병준을 만날 수 있었다.

송병준은 자신을 만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시천교종역사]에 따르면 몸을 굽힌 이용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갑오년 동학의 두령입니다. 무릇 만물은 살아있으면 소리를 내고, 사람은 지극히 원통하면 울부짖습니다. 동학의 최제우 선사(先師)와 최시형 선사는 하늘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아 창생을 무위화계(無爲化界)로 구제하고자 했는데, 억울하게 사형을 당해 아직도 그 죄명이 죄적(罪籍)에 있으니, 이것이 첫 번째 지극한 원통함입니다. 현재 100만의 동학교도가 일본과 대한제국 두 나라의 혐의 속에 끼여 생명이 있어도 보존하지 못하고, 처자식이 있어도 보호하지 못하니, 이것이 두 번째 지극한 원통함입니다. 국정은 나날이 잘못되는데 세신(世臣)이 권력을 휘둘러 전국의 생령(生靈)이 도탄에 빠져도 누구 하나 구제하지 않으니, 이것이 세 번째 큰 원통함입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동아시아 온대지역에 치우쳐 있어 시국의 평화를 보존하기 어렵습니다. 이럴 때 구습을 혁파하고 신문명을 따라 세계 문명의 경지로 함께 달려가는 것이 저의 큰 소원입니다.”

친일파 송병준 통해 진보회 공인받아


▎일본 시모노세키 청수산 동행암에 세워진 러일전쟁 승전비. ‘일로전역개선기념비’ 라고 씌어 있다.
이용구가 언급한 세 가지 원통함은 사실 동학이 추구하는 광제창생을 부연설명 한 것이었다. 본래 최제우는 동학의 종교적 힘으로 광제창생을 실현하고자 동학을 창도했었다. 그런데 이용구는 동학 자체의 힘으로 광제창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송병준의 협조를 구한 것이었다.

나아가 이용구는 개화파 송병준을 설득하기 위해 동학의 광제창생은 궁극적으로 개화파의 문명개화와 같다고 역설했다. “구습을 혁파하고 신문명을 따라 세계 문명의 경지로 함께 달려가는 것이 저의 큰 소원”이라는 언급이 바로 그것이었다. 요컨대 100만 동학교도의 민회를 공인해주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때 송병준은 “동학은 나라에서 금지하는 바이고, 또 갑오 난 때 일본을 배척한 것도 분명합니다. 지금 러일전쟁을 맞이해 또 경거망동해 죽을 계책을 내니 누가 허락하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동학은 믿을 수 없어 공인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송병준과의 첫만남에서 이용구는 진보회 공인을 약속받지 못했다. 그 대신 다시 만나 더 논의하기로 약속했고, 10여일쯤 후 다시 만나 진보회 공인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아마도 그 10여 일 사이에 송병준은 일본 군부와 진보회 공인 여부를 논의했을 것이다. 논의 결과 공인하는 쪽이 더 유리하다 판단했을 것이 분명하다. 만약 공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학이 진보회 조직을 강행하고 무장봉기한다면 아주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본 군부는 일단 진보회를 공인하고, 송병준을 통해 서서히 친일단체로 변화시키자는 것으로 결정했을 듯하다.

일제 선전 도구가 된 진보회와 일진회


▎전남 장성군 황룡면에 건립된 동학농민혁명 승전기념탑.
이런 결정에 따라 송병준은 이용구와 두 번째 만남에서 진보회 공인을 약속하게 됐다. 그 대신 진보회가 일본을 배척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단발(斷髮)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단발은 이미 손병희가 지시한 사항이었기에 이용구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송병준의 약속을 받은 후 이용구는 8월 16일 공식적으로 진보회를 조직했다. 이렇게 평화적으로 진보회를 조직한 이용구는 자신의 행위를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100만 동학교도의 생명을 보장받았을 뿐만 아니라진보회를 통해 민권도 향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용구가 진보회를 조직할 즈음, 구 독립협회 인물들에 의해 유신회(維新會)가 조직됐다. 유신회를 조직한 구 독립협회 인물들은 윤시병·유학주 등이었다. 유신회 역시 송병준의 협조하에 8월 18일 조직됐다. 진보회보다 2일 후였다. 유신회의 강령은 첫째 황실 안녕, 둘째 생령 보호, 셋째 외교 충실이었다. 큰 맥락에서 보면 진보회 4개 강령과 유사했다. 유신회는 조직된 지 2일 후 즉 8월 20일 일진회(一進會)로 바뀌었다. 일진회란 ‘일심진보(一心進步)’란 뜻으로 동학 진보회와 마찬가지로 문명진보를 기치로 내세웠다.

이렇게 1904년 8월 조직된 동학의 진보회나 구 독립협회의 일진회는 공히 국권 수호와 민권 수호를 강령으로 내세웠다. 그러면 이런 진보회와 일진회를 일본 군부는 왜 공인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진보회 주도자 이용구와 일진회 주도자 윤시병은 국권 의식이 약했고, 일본 군부는 그들의 국권 의식을 무력화시킬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진보회와 일진회가 조직되고 며칠 후인 1904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은 한일협정서(韓日協定書)를 체결했다.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재정 고문과 외교 고문을 대한제국이 고용한다는 것으로서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탈취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협정이었다. 그런데도 진보회와 일진회는 한일협정을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정개선을 통해 민권을 향상한다는 일제 선전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이용구는 일제의 시정개선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 위해 일진회와의 통합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1904년 11월 25일 자로 일진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용구는 양 조직이 통합해 “안으로 정부에 실시할 것을 권고하고, 밖으로 관리의 탐학을 탄핵한다면 선악이 분명해지고, 기초가 점차 성립할 것”이라 했다. 이 제안 역시 송병준과의 합의하에 진행돼 1904년 12월 2일 통합 일진회가 출범했다. 통합 일진회 회장은 처음 윤시병이 맡고 이용구는 지부 총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후에는 이용구가 통합 일진회 회장을 맡았다. 통합 일진회 회장 이용구는 일진회를 이용해 일제의 시정개선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것은 국권 없는 민권 국가 즉 보호국이나 식민 국가를 추구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도 이용구는 자신을 민권론자라 생각할 뿐이었다. 국권 없는 민권 향상이란 것이 허상임을 깨닫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105호 (202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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