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19)] 중국 최강 왕조 원나라가 오래가지 못한 까닭 

팽창과 정착 사이, 몽골 대제국 길을 잃다 

‘더 큰 천하’ 이루려 중국인보다 서방 출신 색목인(色目人) 중용
문명 간 벽 허물었지만 기반산업 발전 이어지지 않아 패권 상실


▎쿠빌라이 칸이 1266년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와 삼촌을 만나는 장면을 그린 그림. 더 큰 천하를 꿈꾼 쿠빌라이는 서방 출신 ‘색목인’을 환대하고 중용했다.
원나라는 중국의 역대 왕조 중 가장 강한 기세를 보여준 왕조였다. 중화 세계의 통일에 (또는 그 일부분의 통치에) 만족하던 다른 왕조들과 달리 몽골제국의 ‘대칸’으로서 서방에 대한 통제력을 지키려 했고, 일본과 자바 원정처럼 ‘더 큰 천하’를 만들려는 의지도 보였다. 경제와 학술, 문화에서도 서방, 특히 일-칸국과의 밀접한 교류를 통해 중국문명의 폭을 크게 넓히는 성과가 있었다.

그런데 수명은 길지 못했다. 천하통일을 이룬 왕조라면 최소한 150년 이상 지속되는 것이 보통인데 원나라는 1276년 남송 정복 후 90여년 만에 중원에서 쫓겨났다.

강성한 왕조가 오래가지 못한 까닭이 무엇일까? 황위 쟁탈전 등 권력투쟁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이상기후로 인한 자연재해를 들먹이기도 하는데, 그런 현상들은 왕조 쇠퇴의 원인이라기보다 그 결과다. 권력투쟁과 자연재해는 어느 인간 사회도 피할 수 없는 것인데 그 폐단과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원래 국가의 역할 아닌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인과관계를 추구한다. 역사 공부의 큰 목적이 ‘교훈’을 얻는 데 있는 이상, 어떠어떠한 조건에서 이러저러한 결과가 나온다는 관련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필요의 강박 때문에 조건과 결과가 어떤 것인지 충분히 파악하기도 전에 서둘러 인과관계를 재단하려는 추세가 흔히 나타난다. “그것이 진실로 어떠했는가”라는 랑케의 말은 이런 추세를 경계한 것으로 엄밀성을 추구하는 근대역사학의 기반이 되었다.

왕조의 흥망 같은 거대한 사건은 성급한 해석의 대상이 되기 쉽다. 중국의 경우 지나간 왕조의 흥망을 돌아보는 역사가들도 또 하나 왕조 아래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지금의 왕조와 지나간 왕조를 같은 평면 위에서 비교하는 ‘프레임’에 갇히기 쉬웠다. 왕조시대가 아닌 지금의 역사학도에게는 전통시대의 틀에 박힌 해석과 평가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왕조 하나하나는 서로 다른 여건 아래 서로 다른 특성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비슷해 보이는 하나의 조건, 예를 들어 상업의 발달이나 군벌의 강화가 왕조에 따라, 그리고 그 왕조가 처해 있던 단계에 따라 흥륭의 조건도 되고 쇠망의 조건도 되는 것이다.

원나라는 매우 특이한 여건과 특성을 가진 왕조였다. 일단 ‘정복왕조’의 개방성을 가진 왕조였는데, 개방성의 정도가 그에 앞선 요·금 왕조와 현격하게 달랐다. 요·금 체제에서는 지배종족과 한족 외에 제3세력의 역할이 아주 작았다. 예컨대 여진족의 금나라에서 거란족을 비롯한 여러 종족이 제3의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부수적인 역할에 그쳤다. 반면 원나라에서는 서방 출신의 여러 종족집단을 총칭하는 색목인(色目人)이 4대 계급 중 제2 계급으로 당당한 역할을 맡았다.

학생 시절 ‘색목’이란 말을 처음 보고 페르시아인의 푸른 눈을 떠올렸는데, 알고 보니 ‘여러 부류’라는 뜻의 ‘각색명목(各色名目)’을 줄인 말이었다. 그 범위를 놓고 여러 학설이 엇갈리지만, 대체로 서방에서 원나라로 유입된 거의 모든 인구집단이 포괄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색목인의 존재와 역할이 원나라가 중국의 다른 왕조들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북위나 요나라의 경우 지배종족과 한족이 제국의 기본 구성 요소였다. 그 외의 다른 종족들은 외부의 오랑캐로 취급되거나 지배 종족에게 기능적 도움을 주는 부차적 역할에 그쳤다. 금나라의 경우 거란족 귀족집단의 역할이 상당히 컸지만 여진족 귀족체계의 일부로 편입되었을 뿐이다. 그 차이를 바필드는 [The Perilous Frontier 위태로운 변경]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원나라의 중국 통치는 그에 앞선 여진인과 아주 달랐다. (…) 여진인은 행정기술을 가진 중국인 관리들을 처음부터 서둘러 채용하고 그에 의존했다. 몽골인은 반대로 애초에 중국인을 한꺼번에 받아들이지 않고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온 이방인들을 관리로 채용했다. 자기네 방식과 언어와 문자를 각자 가진 사람들을 통해 중국 지식인 관료와 그 문화적 자산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다른 길을 만들었다.”(219쪽)

원나라 호구의 3% 몽골색목인, 관직 30% 차지


▎명나라 때(왼쪽)와 청나라 때 그려진 쿠빌라이의 초상은 중국 황제와 몽골 대칸의 풍모를 각각 보여주는 것 같다. / 사진:바이두
색목인의 역할은 원나라 체제의 성격을 말해주는 중요한 지표다. 중국을 통치하는 왕조이지만 유라시아대륙을 휩쓴 몽골제국의 대칸으로서는 중국을 통치 영역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이 원나라였다. 원나라 흥망성쇠의 모든 원인이 이 특성만으로 명쾌하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설명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발판은 될 것이다.

1290년의 원나라 호구조사에는 대략 몽골인 100만 호, 색목인 100만 호, 한인(漢人; 북중국 주민) 1000만 호, 남인(南人; 남중국 주민) 6000만 호로 나타난다. (바필드, 같은 책 220쪽) 몽골인과 색목인은 각각 전 호구의 약 1.4%인데 모든 관직의 30%를 점하고, 특히 고위직의 점유율은 훨씬 더 높았다. 색목인도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피정복 집단인데 이렇게까지 우대받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몽골제국은 종족을 혈통이나 종교의 기준으로 차별하는 이념적 원리를 보이지 않았다. 먼저 항복하고 쉽게 복속한 세력을 상대적으로 우대하는 실용적 기준만 있었다. 금나라 백성이던 한인을 남송 지역의 남인보다 우대한 것도 이 기준에 따른 것이다.

원나라에서 색목인이 우대받은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중국에 들어와 방대한 인구를 통치하는 소수집단의 입장에서 중국인들에게 너무 큰 역할을 맡길 경우 체제 자체의 중국화를 피할 수 없는 것이 모든 정복 왕조의 경험이다. 세계제국을 지향하는 몽골제국은 다른 정복왕조에 비해 중국화에 대한 저항력이 강했다. 그래서 또 다른 소수집단인 색목인에게 가급적 큰 역할을 맡기게 되었다.

원나라의 색목인이 인구 규모에 비해 큰 활동력을 가진 집단이었으리라는 사실도 생각할 수 있다. 색목인 중에는 상인·기술자와 학자·군인이 많았다. 행정인력으로 동원하기에 적합한 직업군이다. 또한 지역사회의 평판에 얽매이는 현지 중국인에 비해 색목인은 좌고우면 없이 정책 집행에 전념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원나라의 지방관을 지낸 고려인의 흔적이 더러 화제가 되는데, 고려인도 색목인과 같은 기준으로 활용된 것 같다.

제국의 중국화 막으려 이방인 우대


▎산시성 시안 무덤에서 출토된 원나라 색목인 인형(俑). 깊은 눈과 높은 콧날, 구레나룻이 있는 서역인의 모습이다. / 사진:위키피디아
원나라만이 아니라 일-칸국을 비롯한 다른 칸국에서도 외래인을 중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세계제국의 성격을 보여주는 경향이다. 서로 다른 지역의 물자·기술·학술·사상을 옮겨가며 활용하는 세계제국 안에서는 인적 자원의 교류도 제국의 새로운 통합성을 지향하는 중요한 길이었다.

그런데 몽골제국의 ‘세계성’은 원나라의 출범과 함께 4 칸국의 분열로 한계에 부딪혔다. 원나라는 두 개 칸국과 적대 관계가 되었고, 유일하게 원 황제를 ‘대칸’으로 계속 받든 일-칸국과의 교통도 어려웠다. 쿠빌라이의 최측근이던 볼라드(Bolad, 孛羅, 1238?~1313)가 1285년 일-칸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결국 그곳에 눌러앉아 근 30년 여생을 지낸 데는 그럴 만한 정치적 이유도 있었겠지만 돌아오는 길이 막힌 것이 직접 원인이었다.

볼라드가 일-칸국에 있는 동안 원나라에 간 두 명의 일-칸국 사신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올슨의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 몽골시대 유라시아의 문화와 정복]에 보인다. (34, 49~50쪽) 1298년 해로로 일-칸국을 떠났다가 3년 후 중국 해안에서 표류 중인 사신들을 원나라 관리가 구조해서 대도(大都)로 보냈다. 사신들은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고 3년 동안 원나라에서 지낸 후 황제의 하사품과 함께 원나라 안에 있는 일-칸 영지에서 거둔 비단을 가지고 1304년 귀로에 올랐다가 한 사람은(Malik Fakr al-Din Ahmad) 이듬해 인도 어느 곳에서 죽고 한 사람이(Noghai Elchi) 1307년 돌아왔다는 것이다.

양측 자료가 남아있어서 약간의 내용이나마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행인데 흥미로운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오가는 길이 각각 3년씩이나 걸렸다는 사실이다. 마르코 폴로가 1292년 일-칸국 왕비로 가는 공주를 모시고 가는 사행에 편승했을 때 항해에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 데서 왕래가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육로가 원활할 때는 4~5개월 걸렸다.) 그럼에도 해로를 택해야 했다면 육로 사정이 얼마나 험악했는지도 비추어 알 수 있다.

둘째, 사행단이 폭넓은 교역활동을 벌인 사실이다. 일-칸 자신이 교역 자금으로 금화 10만 량을 맡겼고, 그 밖에 사신들이 주변사람들의 투자도 많이 맡았다고 한다. 두 나라 사이 교역 활동의 가치가 잘 인식되어 있는 반면 왕래가 어려웠던 사정 때문에 사행이 교역의 기회로 적극적으로 활용된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셋째, 일-칸의 영지가 원나라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250년대에 훌레구에게 그 영지가 주어질 당시에는 몽골 귀족이 아무 곳에나 영지를 받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일-칸국은 실질적인 독립국이 되어 있는데도 원나라 황제가 일-칸의 영유권을 존중한 것은 ‘대칸’으로서의 책임감에 따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몽골제국 대칸 겸했던 원나라 황제의 딜레마


▎티베트 라마교 고승 파스파. 쿠빌라이는 파스파를 현실 세계의 지도자인 자신과 대등한 정신세계의 지도자로 여겼다. / 사진:바이두
1250년대에 몽케-쿠빌라이-훌레구 3형제가 중국과 페르시아 문명권 공략을 전담하면서 몽골제국의 어느 정도 분화는 본인들도 예견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두 세대가 지난 1300년대에는 분화가 깊이 진행되어 있었다. 1303년 4칸국 사이에 평화협정이 맺어져 중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이 가라앉았지만 그 협정은 제국의 복원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고, 독립국들 사이의 평화협정일 뿐이었다. 싸움을 계속할 이유도 줄어들 만큼 서로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원나라 쇠퇴의 원인을 엄밀히 따지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지만, 문명사의 관점에서 하나의 측면을 짚어본다. 제국을 ‘열린 시스템(open system)’으로 보는가, ‘닫힌 시스템(closed system)’으로 보는가 하는 문제다.

중국사의 통일왕조들은 천하를 하나의 닫힌 시스템으로 보았다. 천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고 제국은 현실적으로는 완전하지 못하더라도 이념적으로는 천하를 품는 것이었다. 농업을 ‘천하의 큰 뿌리(天下之大本)’로 보는 관점도 여기에서 나온다.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1차 산업이다. 그 가치의 형태를 바꾸는 제조업이나 위치를 옮기는 상업은 가치의 근본적 창출이 되지 못한다. 실제 인민의 생활을 위해서는 제조업과 상업도 필요하지만 ‘체(體)’인 농업에 비해 ‘용(用)’으로서 부수적인 역할이다. ‘체’는 두터울수록 좋지만 ‘용’이 지나치면 ‘체’를 손상할 위험이 있다. 중국의 모든 왕조가 농업에 중점을 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프랑수아 케네(1694-1774) 등 18세기 유럽의 중농주의자들도 이 생각을 많이 받아들였다. 중상주의(mercantilism)가 국가 간의 경쟁 관계 속에서 경제정책을 고려한 것과 달리 중농주의(physiocracy)는 인간사회 전체를 단위로 경제의 득실을 논한 것이다. 당시 많은 유럽 지식인들이 ‘중국풍(chinoiserie)’을 흠모하던 분위기를 대표하는 사례의 하나다.

열린 시스템과 닫힌 시스템의 선택은 지금도 중요한 문제다. 생태계의 성격을 어느 쪽으로 보느냐에 환경정책의 방향이 달려있다. 캐나다 환경학자 바츨라프 스밀은 주간 [Noema ] 인터뷰에서(2021. 2. 27, ‘Want not, Waste not’) 이렇게 말했다.

“일런 머스크(스페이스-엑스 우주개발 사업의 추동자)가 아무리 열을 올려봤자 화성 식민지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생태계이고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잘 관리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의 생태계는 연약하면서도 다행히 저항력을 가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 생태계에게 회복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회복 능력이 사라지는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파괴해도 생태계는 원래 모습을 찾으려 들지만 무한정 계속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몽골제국 대칸과 원나라 황제. 한 사람이 겸하고 있지만 차이가 있는 입장이었다. ‘끝없는’ 듯한 팽창의 길을 수십 년 간 걸어온 몽골제국 입장에서는 4칸국의 분열도 더 큰 팽창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일시적이고 지엽적인 문제로 보일 수 있었다. 반면 중화제국 입장에서는 격동의 시대를 정리하고 안정된 상태로 돌아가려는 추세가 있었다. 몽골제국은 확장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열린 시스템’이고 중화제국의 ‘천하’는 그 안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닫힌 시스템’이었다.

원나라의 색목인 중용은 몽골제국의 원리에 따른 것이었다. 이방인에게 관리를 맡김으로써 현지의 관성을 극복하는 것이 동서 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길이었다. 1234년 금나라 정복 후 중국을 중국식으로 통치하는 정책이 채택되었지만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정책일 뿐, 기본 정책은 열린 시스템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조의 쇠퇴가 확연해진 1315년에야 과거제가 시행되었던 것이다.

정벌이냐 안정이냐, 원나라 조정 갈라져 대립

대표적인 색목인 관리 아흐마드(阿合馬, Ahmad Fanākatī)의 경우가 흥미롭다. 1282년 암살당할 때까지 20년간 쿠빌라이의 절대적 신임을 받은 재정 담당 관리였다. 그의 암살자들은 바로 처형당했지만 몇 달 후 그의 부정부패 행각을 확인한 쿠빌라이는 아흐마드에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비롯한 가혹한 처분을 내렸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도 (‘Bailo Acmat’라는 이름으로) 25명의 아들과 거대한 재산의 소유자로 등장하는 이 인물이 백설처럼 청렴한 관리였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떡고물은 묻히더라도 떡을 워낙 잘 주물렀기에 오랫동안 신임을 받지 않았겠는가.

[원사(元史)] 등 중국 자료에는 아흐마드를 ‘역대급 간신’으로 모는 악평이 가득하다. 그런데 라시드 알-딘의 [집사]에는 아흐마드가 ‘재상 자리를 근 25년간 명예롭게 지켰다’고 적혀 있다.(모리스 로사비의 [Khubilai Khan 쿠빌라이칸] 182쪽에서 재인용) [집사]의 원나라 관계 정보는 볼라드에 많이 의지한 것으로 보이는데, 볼라드는 아흐마드 사건의 조사 담당자였다. 아흐마드가 흉악한 간신이라고 볼라드가 단정했다면 이런 서술이 나올 수 없다.

아흐마드가 죽은 후 몇 달 사이에 그에 대한 쿠빌라이의 인식이 과연 그렇게 거꾸로 뒤집힌 것인지 의문스럽다. 보통 넘게 영명한 황제인 쿠빌라이가 20년간 중용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부패와 독직의 증거가 얼마간 나왔다고 해서 그렇게 빨리 바뀔 수 있을까?

아흐마드와 함께 ‘쿠빌라이 조정의 3대 간신’으로 꼽히는 상가(桑哥, Sangha)와 노세영(盧世榮)이 있었는데, 이 3인을 ‘이재파(理財派)’라 하여 ‘한법파(漢法派)’와의 충돌로 보는 시각이 있다. 두 사람은 아흐마드가 죽은 후 재정 부문에 중용되어 몇 해씩 열심히 일하다가 결국 탄핵과 사형을 당했다. 한편 한법파의 중심에 있던 황태자 진금(眞金)의 1286년 죽음에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선양(禪讓)을 주청한 관리가 있어서 (71세 나이의) 쿠빌라이가 진노한 상황에서 난처한 입장에 빠진 진금이 (43세 나이에) 병을 얻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아흐마드의 암살자들이 쿠빌라이와 태자가 상도(上都)에 가 있을 때 태자 일행을 가장하고 대도(大都)에 들어가 아흐마드를 격살했기 때문에 태자의 개입이 의심되는 정황이었다. 쿠빌라이가 사후에 ‘아흐마드 일당’을 단죄한 데는 태자에 대한 배려도 있었을 것 같다.)

남송 정복(1279) 후 원나라 조정에서 재정 확장을 주도하는 이재파와 이에 반대하는 한법파 사이의 치열한 갈등을 읽을 수 있다. 적극적 조세·전매 정책과 교역의 확대로 국내외의 재부(財富)를 최대한 국고에 수용하려는 이재파는 몽골제국의 경영을 바라보는 입장이었고, 중화제국의 조속한 안정을 바라는 한법파가 이에 반대한 것이다. 쿠빌라이는 어느 쪽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서 여러 해 동안 오락가락한 것으로 보인다.

왜 쿠빌라이는 재정 정책을 놓고 그렇게 오락가락했을까? ‘열린 제국’의 길에는 재정 확장이 필요했다. 군사비가 많이 드는데 정복 지역의 약탈에 한계가 있었다. 정복 지역을 제국에 편입시키려면 그 경제를 무너뜨리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남송을 정복할 때 남송 지폐 회자(會子)를 논란 끝에 원나라 지폐로 바꿔주기로 결정한 것이 단적인 예다.(독일의 마르크화 통합과 같은 성격의 문제였다) 대운하의 회복과 확장에도 많은 비용이 들었다.

쿠빌라이, 열린 몽골과 닫힌 중화 사이서 오락가락


▎1450년경 베네치아 수도사 프라 마우로가 그린 세계지도. / 사진:위키피디아
약탈을 억제하고 정복 지역의 안정을 지키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유리한 정책이더라도 당장은 재정의 병목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 남송 병합 직후 일본과 참파·자바 등지의 정벌 시도는 키워놓은 군사력을 활용해서 좀 수지맞는 사업, 약탈을 비교적 마음껏 할 수 있는 정복을 꾀한 것 같다. 원나라 사절을 죽인 것이 번번이 정벌의 명분이었지만, 여러 곳에서 사절이 죽임을 당한 것은 원나라의 요구가 지나치게 고압적인 것이기 때문이었으니 원나라의 도발로 봐야 할 것 같다. (쿠빌라이의 대칸 즉위 직전인 1258년 투항한 고려는 쿠빌라이 조정의 특별한 우대와 보호를 받았지만 일본 정벌 기간에는 예외적으로 심한 착취를 당했다.)

정복 사업은 칭기즈칸 이래 몽골제국 확장의 동력이었다. 그런데 쿠빌라이에 이르러서는 서방 칸국들과의 적대관계로 인해 서북방 내륙의 확장이 막혔으니 동남방 해양 방면의 확장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아리크 보케와의 쟁패에서 중국의 경제력으로 우위를 확보한 경험이 있는 쿠빌라이는 동남방에서 기반을 확장하여 서북방을 압도하려는 전략을 택한 셈이다.

그런데 동남방의 확장이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면 중화제국의 ‘닫힌 시스템’의 완성으로 방향을 돌려야 할 텐데, ‘열린 시스템’의 관성을 쉽게 되돌릴 수도 없었다. 쿠빌라이는 열린 시스템을 지향하는 몽골 대칸과 닫힌 시스템을 지향하는 원나라 황제 입장 사이에서 오락가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칸과 황제 사이의 방황이 재정을 담당한 ‘3대 간신’의 운명에도 투영된 것이다. 3인 가운데 특히 상가의 경우에 쿠빌라이의 곤경이 여실히 비쳐 보인다.

상가는 파스파(八思巴, Drogön Chogyal Phagpa)의 측근이었다가 파스파가 티베트로 돌아간 후 쿠빌라이가 중용한 인물이다. 쿠빌라이가 제사(帝師)로 공경하여 모시던 라마 고승 파스파는 몽골어의 공식 표기법으로(다른 몇 가지 중앙아시아 언어에도 적용되는) ‘파스파 문자’를 만든 것으로 보아 종교지도자만이 아니라 문화지도자로서도 큰 역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문자는 한글 창제에도 중요한 참고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쿠빌라이는 그를 자신과 대등한 지도자로 대접해서 문화와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그를 상석에 모셨다고 한다.

티베트가 원나라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게 된 것도 파스파 때문이었다고 한다. 쿠빌라이는 총제원(總制院)이라는 독립기관을 만들어 종교와 티베트 관계 업무를 전담하게 했고, 상가는 이 총제원의 관리로서 쿠빌라이의 신하 노릇을 시작했다. 1282년 아흐마드가 죽은 뒤 재정 담당자로 노세영을 그가 천거한 사실이 반대파가 그를 비난하는 큰 구실이 되었다. 상가 자신은 일반 정사에 관여하지 않고 총제원 업무에만 전념했는데도 쿠빌라이가 그의 천거를 받아들일 만큼 깊이 신뢰한 것으로 보인다.

1285년 노세영마저 실각한 뒤 쿠빌라이는 상가가 직접 나서서 정사를 맡아주기를 간절히 바란 모양이다. 1287년 초 상서성(尙書省)을 새로 만들어 종래 정무를 총괄하던 중서성(中書省)과 대등한 권한을 부여하면서 상가를 상서우승상에 앉혔다.

[원사(元史)]의 기록에는 상가가 4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실각하고 처형당한 후 그 반대파(한법파)가 남긴 기록이므로 그에게 불리한 기록일 텐데도 그리 흉한 모습은 아니다. ‘지독한’ 사람이었다는 인상은 분명하다. 재정 확보를 위해서는 ‘살아있는 권력’이라도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패고 짜냈다. 지주층은 물론이고 귀족, 황족과 심지어 황제의 친위대(keshig)까지도 그의 ‘비리 척결’에 시달려야 했다. 모든 사람의 미움을 사면서 4년씩이나 버틴 것이 신기한 일이고, 쿠빌라이의 절대적 신임을 알아볼 수 있다.

‘3대 간신’ 중 노세영은 관직에 있은 기간이 짧지만, 아흐마드와 상가는 쿠빌라이의 더할 수 없는 신뢰를(상가 경우는 존경까지도) 받던 사람들이다. 로사비는 이들의 실각을 서술하면서 쿠빌라이가 제정신이었는지까지 의심한다. ([Khubilai Khan ] 199쪽, “Was Khubilai, in fact, in charge?”) 그리고 실각 후 가택수색에서 그들의 부패를 입증하는 증거물이 나온 것도 조작된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같은 책 193쪽)

일본·동남아 정벌 실패로 재정 압박


▎중국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실용적 형태의 선박을 서양인들은 ‘junk’라고 불렀는데, ‘船’의 남방 발음에서 나온 말로 추정된다. / 사진:위키피디아
1279년 남송 병합에는 몽골제국 확장의 의미와 중화제국 복원의 의미가 겹쳐져 있었다. 쿠빌라이는 두 가지 의미를 합쳐서 살려 나가고 싶었고, 1280년대 일본과 동남아시아 정벌 시도는 그런 목적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그 시도가 실패하면서 원나라 재정은 대책 없는 곤경에 빠졌고, 어떻게든 돌파해 나가려는 의지를 아흐마드와 상가를 통해 나타냈지만 결국 장벽을 뚫지 못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 과정에서 황태자 진금까지 희생되었다.

12세기까지 유라시아대륙의 중세문명은 동경 90도 언저리를 경계로 두 개 영역으로 나뉘어 전개되었다고 나는 보고, 이것을 ‘동양’과 ‘서양’의 구획으로 삼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동양에서는 중화 문명이 오랫동안 확고한 주축으로 자리 잡은 반면 서양에서는 서아시아 대륙세력과 지중해 해양세력의 각축이 이어지다가 8세기에야 이슬람 문명이 중심축으로 떠올랐고, 그나마 11세기 이후 이슬람제국의 쇠퇴에 따라 서양 전체가 ‘전국(戰國)’시대에 빠져들었다. 이 시점까지 넓고 큰 서양에 비해 좁고 작은 동양이 경제적·문화적으로 앞서나가고 있었던 것은 장기간의 정치적 안정 덕분이었다.

13세기 중엽 몽골제국의 흥기는 동·서양 통합의 길을 처음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은 문명 통합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은 동-서양 문명에서 쓸 만한 것을 배워 왔고, 그 학습 수준이 점점 높아졌다. 6세기 이후 돌궐제국과 위구르제국 경영을 통해 중국으로부터의 학습이 활발했고, 8세기 이후 이슬람 문명권에 편입되면서 서방으로부터의 학습도 활발해졌다.

13세기의 중앙아시아는 기원전 2세기에 사마천(司馬遷)이 그리던 ‘수초(水草)를 따라 헤매는’ 유목민의 세상과는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13세기 중앙아시아 주민들은 동·서양 문명의 이점을 섭취하는 데 익숙했고, 특히 교역의 이점에 밝았다. 몽골제국 흥기에 초창기부터 이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제국의 정복 사업이 ‘수지맞는’ 사업이 될 수 있었고, 원나라의 제국 경영에도 ‘색목인’으로 대거 참여하게 된 것이다. 정복의 명목상 주체는 몽골인이었지만, 방대한 정복사업의 동력을 확보하는 데는 색목인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13세기 몽골제국 흥기, 동·서양 통합의 신호탄

몽골제국 팽창의 동력은 약탈의 이득에서 교역의 발전으로 이어졌으나 기반산업의 발전에는 이르지 못했다. 물론 농작물 품종과 제조업 기술의 교환과 전파를 통한 기반산업의 발전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비중은 크지 않았다. 교역의 확장은 사회 상층부의 재부를 늘려주었을 뿐, 생산력의 발전은 그만큼 빠르고 크지 못했다. 16세기 이후 유럽의 팽창이 약탈로 시작해서 교역으로 이어졌다가 생산력의 급격한 발전에까지 이른 과정과 대비된다.

몽골제국의 ‘세계화’가 교역의 세계화에 그치고 기반산업의 세계화에까지 이르지 못한 까닭이 무엇일까? 그 주체가 동·서 문명의 중심부가 아니라 경계 지역 주민들이었다는 사실이 우선 눈에 띈다. 나아가 그 사실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기반산업의 세계화를 통해 바라볼 만한 이득이 양쪽 문명의 중심부를 움직일 만큼 아직 커지지 못한 단계였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과연 기반산업의 전면적 변화를 가져올 만한 조건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18세기 이후 산업혁명을 통한 유럽의 세계화와 비교해서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몽골제국의 기세가 4칸국의 분화를 계기로 꺾인 것은 겉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그 현상의 밑바닥에는 세계화 동력의 한계가 있었다. 동력이 충분했다면 4칸국 사이에서 누가 패권을 차지하더라도 더 넓고 깊은 세계화를 추진했을 것이다. 4칸국 사이에 반세기 동안 패권경쟁이 진행되기는 했지만, 더 크게 바라볼 이득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 정도 분화된 상태로 각자 만족하고 제국의 재통합을 포기한 것으로 이해해야겠다.

‘대칸’의 타이틀과 함께 가장 큰 경제력을 확보한 원나라는 제국의 재통합을 위한 제1 후보였다. 쿠빌라이는 말년까지 그를 향한 의지를 지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280년대 해양 방면의 연이은 군사적 실패, 그리고 그로 인한 재정적 난관 앞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열린 시스템을 지향하는 ‘몽골제국 회복’의 꿈 때문에 닫힌 시스템을 지켜내는 ‘중화제국 경영’의 과제에 집중하지 못한 것을 원나라가 단명했던 큰 이유로 생각한다.

명나라는 원나라 천하를 넘겨받으면서 열린 시스템의 꿈과 닫힌 시스템의 과제도 함께 이어받았다. 영락제(永樂帝, 1402-1424) 치하의 ‘대항해시대’가 거창하게 펼쳐졌다가 갑자기 닫혀버리는 상황, 그 뒤에 왕조를 관통하게 될 해금(海禁)정책의 의미도 원나라에서 넘겨받은 이 유산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김기협 -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9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 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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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호 (202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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