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17)] 사도세자 생모 영빈 이씨의 사당 선희궁(宣禧宮)(上) 

아버지 살해하려는 아들 밀고해 죽게 만든 비정한 어머니? 

영조의 압박에 미쳐버린 사도, 칼 품고 왕궁 침입 시도
뒤주에 갇혀 죽는 아들,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한 서려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사도제사(유아인 분)은 부왕인 영조(송강호 분)와의 갈등 속에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갔다.
칠궁의 별묘 지역에는 네 채의 사당에 다섯 분의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다. 그중 세 채의 사당에는 각각 한 개씩의 편액만 걸려 있으나, 나머지 한 채의 사당에는 두 개의 편액이 안팎으로 걸려 있다. 두 개 편액의 주인은 누구일까?

안쪽 신실(神室)문 위 벽에 걸려있는 편액 선희궁(宣禧宮)의 주인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李氏: 1696~1764년)이며, 바깥쪽 추녀 밑 편액 경우궁(景祐宮)의 주인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비박씨(綏妃朴氏)의 편액이다. 신위는 할머니가 서쪽으로, 손녀가 동쪽으로 함께 봉안돼 있다.

영빈 이씨는 정빈 이씨에 이어 조선의 21대 임금인 영조의 두 번째 후궁이다. 본관은 전의(全義), 증(贈) 찬성(贊成: 의정부 종1품) 이유번(李楡蕃)과 부인 한양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조 2(1726)년 11월 16일 서른한 살의 늦은 나이에 승은을 입으면서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에 책봉됐으며, 영조 6(1730)년 11월 27일 내명부 정1품 빈(嬪)의 첩지를 받아 영빈(暎嬪)이 됐다. 두 살 연상인 영조와의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는데, 여섯 번째 자손이자 유일한 아들이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년) 이선(李愃)이다.

사도세자 죽음에 중요한 역할


▎선희궁과 경우궁 편액. 선희궁은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를 모신 사당이다. / 사진:이성우
사도세자의 죽음, 이는 조선왕조 518년 역사에 있어서 매우 쇼킹한 사건이었다. 병으로 죽었다거나 하는 그런 죽음이 아닌 차기 임금으로 정해져 14년간 대리청정까지 했던 세자가 한창의 나이인 28세에 한여름 뙤약볕 속에서 뒤주에 갇혀 죽었기 때문이다. 임오년인 영조 38(1762)년 윤5월 13일에 발생한 이 사건을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 한다. 임오화변이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세자를 둘러싸고 발생한 정치적 갈등과 음모설,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적 갈등으로 인한 광증설 등 다양한 설이 있으며, 현대 의학에서는 세자의 광증을 조증과 우울증이 반복되는 양극성 장애로 해석하기도 한다.

영조에서 사도세자를 건너뛰고 세손이었던 정조로 왕통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된 왕실 가족의 이 비극적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 또는 뮤지컬로 제작돼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어 우리에게도 꽤 익숙한 편이다.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비정하고 매정한 아버지 영조, 그 비극을 온몸으로 겪으며 눈물의 삶을 살아낸 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 그리고 효성 지극하고 영특하며 조선 후기의 문화융성을 이룬 아들 정조가 그려진다. 반면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는 임오화변과 관련해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실록이나 혜경궁이 지은 한중록 등을 살펴보면 사실 사도세자의 죽음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15년에 ‘사도’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송강호(영조)·유아인(사도세자)이 주연인 영화 사도는 영조가 보위에 오른 지 38년 되던 해인 1762년 차기 왕위 계승권자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9일 만에 죽게 만들었던 임오화변의 비극적 실화를 영화로 그려낸 작품이다. 당시 영조의 나이는 69세였다. 영화는 비가 오는 심야에 사도세자가 무덤에서 나와 칼을 든 채로 창덕궁 수구(水口)를 지나 영조가 머물고 있던 경희궁으로 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머니! 어머니! 지금 세자가 경희궁으로 칼을 들고 갔습니다. 어머니!”

“주상 전하께서 화를 당하실지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막지 않으면 세자와 세손까지도 다 죽습니다. 어머니!”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어머니를 찾는 사람은 혜경궁 홍씨, 어머니는 다름 아닌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다. 당시 영조는 경희궁에 머물고 있었고, 사도세자는 창덕궁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영빈 이씨가 영조를 찾아가 그동안의 사도세자와 관련된 일에 대해 고변(告變)을 하게 되고, 그 얘기를 들은 영조가 지체 없이 창덕궁으로 행차하면서 영화가 전개된다.

임오화변이 일어나기 오래전부터 이미 영조와 세자와의 관계는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그 이전의 여러 사건이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봐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임오화변의 결정적 뇌관은 영조 38(1762)년 윤5월 11일과 12일 사이의 심야 시간에 칼을 소지한 채로 영조가 머물고 있던 경희궁으로 간 것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이틀 전의 일이다. 세자가 움직이면 세자의 호위를 맡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서도 호종하게 되니 인원도 제법 됐을 것이다. 한밤중에 무장한 인원들이 임금이 머무는 궁으로 간다는 것은 그게 누구라도 역모라고 볼 수 있는 심각한 사건이었다. 도중에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이것을 알게 된 영빈 이씨는 세자를 이렇게 방치했다가는 정말 큰 일이 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밤중의 일에 대하여 한중록은 이렇게 쓰고 있다.

“(세자께서) 수구를 통해 윗대궐로 가시는가 하다가 못 가시고 도로 오시니 이는 윤5월 11일과 12일 사이라. 그리고 정신을 잃고 인사불성이 됐을 때 홧김으로 하시는 말씀이 ‘칼을 차고 가서 아무렇게나 하고 오고 싶다’ 하시니 조금이나 온전한 정신이면 어찌 부왕을 죽이고 싶다는 극언까지 하시리오.”([정병설의 한중록] 122쪽)

이 기록에 따르면 윤5월 11일 밤 사도세자가 갑자기 영조가 머무르고 있던 경희궁으로 가겠다고 말을 하고 밤중에 창덕궁의 수구를 통해서 나갔지만, 경희궁까지는 가지 못하고 도중에 다시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했던 말이 ‘아버지인 영조를 죽이고 싶다’라는 것이었다. 사도세자가 28세 때의 일이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어렸을 때부터 정신이 이상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영조의 자랑이었던 총명한 늦둥이


▎칠궁의 별묘지역 사당의 모습. / 사진:이성우
사도세자는 영조 11(1735)년 1월 21일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7세 때 왕세자로 책봉된 이복형 효장세자(후일 진종으로 추존)가 있었으나, 영조 4(1728)년 11월 16일 사망했다. 사도세자는 그 후 7년 만에 태어난 귀한 자손이었다. 영조의 기쁨은 당연히 매우 컸다. 1694년 생인 영조는 당시 이미 마흔을 넘긴 나이로 조선 임금들의 평균 수명이 46세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다. 따라서 귀하디귀하게 태어난 후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준비가 시급했다. 그러다 보니 통상의 경우보다 훨씬 파격인 출생 당일 즉시 왕자를 중전인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양자로 들이면서 원자(元子)로 삼았다. 그리고 1년 후인 영조 12(1736)년 1월 4일 원자의 이름을 ‘선(愃)’자로 결정하고 3월 15일 왕세자로 책봉하면서 세자의 교육을 담당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스승들도 속속 임명했다.

“영빈 이씨(暎嬪李氏)가 원자를 집복헌에서 탄생하였다. 그때 나라에서 오랫동안 저사(儲嗣: 후계자)가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온 나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영조실록] 11(1735)년 1월 21일)

사도세자는 어렸을 때 매우 총명해 영조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세자의 나이 3살 때인 영조 13(1737)년에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천지왕춘(天地王春: 온 세상이 임금의 은택을 입은 봄이라는 뜻)이라는 글자를 썼다는 기록이 실록에 등장한다. 또 사치가 무엇이냐는 영조의 물음에 명주와 무명베를 가리키며 사치와 사치가 아닌 것을 구분하면서 무명옷 입기를 청했다는 같은 해 9월의 기록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다소 과장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총명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실제 2017년 8월, 경종의 계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 가문의 서고에 보관 중이던 서첩에서 사도세자의 4살 때 친필 글씨인 ‘왕(王), 하(下), 춘(春), 석(石), 사(士)’ 등이 발견돼 화제를 모은 적도 있다.

이렇듯 총명함을 보이던 세자가 10살 이후에는 학문보다 무예 쪽에 더 관심을 보이면서 학문을 중시하던 영조와 점차 갈등을 보이기 시작한다. 하루는 영조가 공부하는 게 좋은지 싫은지를 묻는 말에 세자는 싫을 때가 많다고 대답한다. 영조는 세자가 솔직하게 말해서 기쁘다고는 했지만, 내심 걱정하면서 동궁전의 관리들에게 세자가 글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당부하기에 이른다.

영조는 왕세제로 있다가 이복형인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사망하자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임금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또 보위에 오른 이후에도 경종 독살설과 생모의 미천한 신분, 신료들의 견제 등으로 꾸준히 힘들어했었다. 이를 헤쳐 나가는 것은 신료들보다 더 높은 학문적 경지를 이루기 위한 자기 노력과 당파 사이의 적절한 통제를 통한 치세술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러나 무인적 기질이 풍부했던 세자에게는 영조 자신이 실천했던 엄격한 규율은 무거운 규제였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영조는 세자를 많이 질책했고, 세자는 차츰 아버지인 영조를 꺼리고 멀리한다. 세자가 13살 때인 영조 23(1747)년 10월 3일 실록의 기록에는 세자에게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독하게 했는데, 서연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컸지만, 아버지인 영조 앞에서는 점점 낮아지고 작아졌다고 한다. 이에 영조는 “내 앞에 있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동궁(東宮)에게 시강(侍講)을 명하니 동궁의 글 읽는 소리가 점점 낮아 적어졌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元良)의 소리가 작은 것은 내 앞에 있는 것을 꺼려서이다. 서연(書筵)에서는 글을 읽는 소리가 어떠하였는가?’ 하니 보덕(輔德) 김상철(金尙喆)이 대답하기를 ‘서연에서는 예음(睿音)이 홍대(弘大)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영조실록] 23(1747)년 10월 3일)

영조 23(1747)년 10월 25일 창덕궁에 불이 나 10월 27일 왕실 가족 모두 경덕궁(慶德宮: 지금의 경희궁)으로 이어(移御)했다. 한중록에는 경희궁으로 옮기면서 각 처소 간의 거리가 멀어져 만날 일이 드물게 되다 보니 세자가 더 놀이에 열중하게 됐다고 한다. 그 놀이라는 것이 활쏘기, 칼 쓰기, 기예(技藝), 그림 그리기, 경문(經文: 기도나 주문) 외우기 같은 것으로 영조의 입장에서 보면 잡일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그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영조는 인원왕후와 옹주들, 부마들이 모인 자리에서 세자의 놀이도구를 가져오게 해 다들 보는 앞에서 무안을 주는가 하면, 여러 대신 앞에서 대답을 잘하지 못한다고 꾸중을 하거나 흉을 봤다. 벌써 세자와 영조 사이에는 조금씩 간극이 생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 25(1749)년 1월 23일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하도록 명했다. 당시 영조는 56세, 세자는 15세였다. 처음에는 선위(禪位)하겠다고 했으나, 신료들뿐 아니라 세자까지도 반대해 대리청정으로 타협한 셈이다. 기본적으로 선위, 즉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양위(讓位)는 임금이 신하들을 통제하거나, 정국을 전환하는 방법의 하나로 사용됐다. 영조의 경우 이때가 벌써 다섯 번째였다. 세자는 이때부터 뒤주에 갇힐 때까지 14년간 대리청정을 했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한 이후 중요한 일이기에 보고하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고 질책하고, 보고하지 않고 처리하면 멋대로 결정한다고 질책하는 등 세자의 일 처리를 맘에 들어 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질책하고 비난했다. 심지어 가뭄 같은 천재지변조차도 세자가 덕이 없기 때문이라고 질책했다. 그러다 보니 날이 조금 흐리거나 겨울에 천둥이라도 치면 또 질책이라도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세자의 마음은 점점 병들고 있었다. 세자에 대한 영조의 불만은 그 후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에서 나타났다. 그때마다 세자와 신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양위를 만류해야 했고, 영조는 의사를 관철하겠다고 고집하며 몇 차례씩 실랑이를 거친 뒤에야 마지못해 전교를 거두는 식이었다.

학문보다 무예에 관심, 부자 갈등 시작


▎사도세자 부인 혜경궁 홍씨의 회고록인 한중록.
영조 28(1752)년 12월 14일의 양위 파동을 극력 만류하는 세자에게 영조는 “내가 시를 읽을 것인데 네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 효성이 있는 것이기에 너를 위해 전교(傳敎)를 거두겠다”고 하면서 육아시(蓼莪詩)를 읽었다. 육아시의 내용은 ‘부모가 자신을 낳고 기르는 데 수고하면서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해 부모에게 죄스럽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자는 그 시의 끝부분에 이르자 부왕인 영조 앞에 엎드려 눈물을 줄줄 흘렸고 약속대로 전교는 철회됐다. 그때가 3경(밤 11시~1시)이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영조 30(1754)년 12월 2일의 양위 파동에서는 세자가 관(冠)을 벗은 것이 두 번이고, 뜰에 내려가서 석고대죄(席藁待罪)한 것이 두 번이며, 관을 벗고 고두(叩頭: 머리를 조아리며 땅에 짓찧은 것)한 것이 한 번이었다. 실록은 이 소동이 전부 파한 시각을 여명(黎明: 어둑새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영조와의 갈등 수위가 점점 높아졌고, 영조 33(1757)년 11월 11일 한밤중에는 세자를 강하게 질책하는 과정에서 세자가 결국 기절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동궁이 물러 나와 뜰에 내려가다가 까무러쳐서 일어나지 못하니, 유척기가 급히 의관(醫官)을 불러 진맥(診脈)하도록 청하였다.”([영조실록] 33(1757)년 11월 11일)

이 세 사건 모두 추운 겨울밤 늦게 벌어진 사건들이다. 특히 세자가 기절했다가 한참 만에야 깨어난 마지막 양위 파동 사건은 당시 23세였던 세자가 영조와의 악화된 관계로 얼마나 극한 감정의 충격을 받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렇게 계속 누적된 문제들이 세자를 정신적으로 옥죄는 원인이 됐다.

한밤중에 질책받고 까무러친 사도


▎전남 무안군 남동리에 있는 사도세자의 사당. 민간에서 세운 유일한 사당으로 마을 사람들의 꿈에 사도세자가 나타나 세웠다고 전해진다.
세자의 정신적 질환은 대리청정 7년째인 영조 31(1755)년 경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4월 28일의 실록 기록에 의하면 당시 약방 도제조 이천보(李天輔)가 영조에게 “삼가 의관의 말을 듣건대, 동궁이 근래에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후가 있어 발소리만 들어도 이런 증세가 일어난다고 합니다”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영조는 “그게 뭐 이상한 일이냐”며 대수롭지 않아 했다.

영조는 치세 52년간 탕평책 등 많은 치적을 남겼지만, 실록이나 한중록을 살펴보면 편집증적 성격도 많이 드러난다. 외부 일을 볼 때 입었던 옷은 들어오기 전에 갈아입어야 했고, 불길한 말을 하거나 들으면 양치질과 귀부터 씻고 사람을 불러 말 한마디라도 건넨 후 안으로 들어갔다. 특히 영빈 이씨 소생의 첫째 딸인 화평옹주(和平翁主)는 지극히 편애했지만, 다섯째 딸인 화협옹주(和協翁主)는 미워했다. 화평옹주 방에 들어갈 때는 밖에서 입었던 옷부터 갈아입고 들어갔다고 한다.

영조 31(1755)년 2월 4일 윤지(尹志) 등 소론 일파가 조정을 비방하고 모반을 위해 세력을 규합하려고 나주 객사에 벽서를 붙인 일명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이 발생했다. 친국은 5월까지 진행됐는데 체포된 관련자들을 처형할 때마다 영조는 세자를 보내 이를 보게 했다. 친국을 마치면 하루도 빠짐없이 세자를 불러 밥 먹었냐고 물어본 후 대답하면 즉시 가버리곤 했다. 나쁜 말을 들었던 귀를 씻기 위한 대상이 세자였던 것이다. 씻은 물은 화협옹주 집 방향으로 버렸다. 그래서 세자가 두 살 누나인 화협옹주에게 “우리 남매는 귀 씻은 물이다”라고 하며 웃었다고 한중록은 기록하고 있다. 영화 사도에서도 이 기록을 바탕으로 물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세자의 병증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으나, 그것을 아는 이는 혜경궁뿐이었다. 영조 31(1755)년 11월 어머니 영빈 이씨의 병문안을 하려다 동궁 밖을 벗어나지 말고 법도나 닦고 있으라는 영조의 엄명으로 병문안조차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자살 시도를 하는가 하면 이듬해 5월 1일 촛대가 넘어져 발생한 낙선당 화재를 세자가 불 지른 것으로 오해한 영조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자 우물에 투신하려는 소동까지 일어난다. 영조 33(1757)년 2월 15일에도 영조의 꾸지람을 들은 세자가 우물에 투신한 것을 하인이 구해 오기도 했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을 영조 33(1757)년부터 생기기 시작한 의대증(衣帶症)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의대증이란 옷을 입기를 어려워하는 일종의 강박증인데 세자가 영조를 만나기 싫어 옷을 입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부터였다. 영조 33(1757)년 6월 동궁 내의 일이 영조에게 알려졌다는 이유로 내관 김한채의 목을 베어들고 다니면서 나인들에게 보여줬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내 그때 사람의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으니 흉하고 놀랍기 이를 것이 있으리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다른 내관들도 여럿 죽임을 당했다. 영빈 이씨는 이 무렵 혜경궁으로부터 세자의 이런 행동을 처음 듣고 놀란 나머지 영조에게 고하자고 했으나, 후환을 두려워한 혜경궁의 극구 만류로 고하지 못했다. 실록에서도 세자가 “정축년(1757년)·무인년(1758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한중록에서도 영조 36(1760)년 이후 내관·내인들 중 다치거나 죽은 이가 모두 기억하지 못할 정도라고 적고 있다. 이런 사실을 영조도 알았으나, 정작 영조는 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옷 제대로 입지 못하는 ‘의대증(衣帶症)’ 악화


▎경남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사도세자의 편지. 일본 야마구치 현립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가 1996년 그중 일부가 경남대 박물관으로 환수됐다.
영조 36(1760)년 7월 초에는 영조를 경희궁으로 옮기도록 말해주지 않는다며 혜경궁에게 바둑판을 던져 눈이 실명할뻔했는가 하면, 영조 37(1761)년 5월에 들어서는 아예 무덤 같은 거처를 만들어 지내는 등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기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혜경궁조차 세자를 두려워해 세자가 온양온천을 다녀오느라 창덕궁을 비운 약 보름간만이라도 세자 얼굴을 보지 않음을 다행으로 생각했다고 한중록은 전한다.

영조 36(1760)년 7월 8일 영조가 경희궁으로 이어하자 대면할 기회는 더욱 줄어든다. 세자는 신하들의 대면 촉구 채근에도 불구하고 5개월이나 지나서야 대면했다는 영조 36(1760)년 12월 15일 실록의 기록도 발견할 수 있다. 부자 사이의 간격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영조 37(1761)년, 세자는 4월 2일부터 22일까지 20일간이나 영조 몰래 서행(西行: 평안도행)하고 왔다. 영조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도 5개월이나 지난 9월 21일이었다. 이에 영조는 “도성(都城) 10리의 땅을 그가 출입하는 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지만, 어찌 천리(千里)나 멀리 가리라고 생각하였겠는가?”라며 관련 내용을 확인한 후 동궁전에 근무하는 관리들 수십명을 문책했다. 이렇게 몰래 움직인 것은 영조와 세자와의 단절된 관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단순히 유람을 목적으로 다녀온 것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영조 37(1761)년 12월 22일은 세손(후일의 정조)의 삼간택 날이었다. 삼간택 때에는 부모가 참석하지만, 세자가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영조의 질책으로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물론 이 일도 의대증으로 인해 옷과 망건을 여러 번 바꾸다 세자의 격에 맞지 않는 망건을 착용한 것이 문제였다. 영조 38(1762)년 2월 2일 세손이 가례를 올렸다. 3일간의 가례 기간 영조가 혜경궁에게는 3일을 다 보고 가라고 했으나, 세자에게는 세손 빈의 인사만 받게 한 후 창덕궁으로 돌려보냈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인해 세자의 영조에 대한 불만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에 대해 실록에서는 “왕세자와 세자빈이 창덕궁으로 돌아갔다”라고만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2월 중 어느 날 세손빈도 볼 겸 창덕궁을 찾은 영빈 이씨에게 세자는 과중할 정도로 대접하고 영빈 이씨의 가마도 임금이 타는 큰 가마처럼 만들어 억지로 태운 후 풍악을 울리며 후원으로 이동했다. 세자는 봉양의 의미로 모셨는지 모르겠으나, 영빈 이씨는 세자의 병이 도져서 그렇다고 생각하며 가슴 아파했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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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호 (202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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