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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62)] ‘소(小)퇴계’로 불린 영남학파 거목 대산(大山) 이상정 

동학까지 이어진 퇴계학 표준을 세우다 

과거 급제하고도 벼슬보다 고향서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써
퇴계의 길 따라, 방대한 저술로 조선 후기 성리학 심화·확장


▎대산의 9대 종손 이방수 씨가 고산서원의 모태가 된 고산정사를 찾았다. / 사진:이방수
지난해 11월 19일 경북 안동에선 ‘유명’ 서원 건물이 준공돼 사당에 위패를 모시는 행사가 열렸다. 영남 유림이면 한 번쯤 들었을 호계서원(虎溪書院)의 복설(復設, 없앤 위패를 다시 설치)이다. 그동안 안동 임하댐 아래 있던 호계서원은 습기가 차는 등 문제가 발생해 안동시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 오른쪽 언덕에 다시 지어졌다. 호계서원은 유림이 400여 년 논쟁을 벌인 이른바 ‘병호시비(屛虎是非)’가 일어난 곳이다. 이 서원은 본래 퇴계 이황 선생을 모신 여강서원이었다. 이후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을 추가 배향하면서 두 제자 중 누구를 더 높은 자리에 둘 것이냐는 위차(位次, 서열) 논쟁이 벌어졌다. 이후 정경세가 나서 영의정을 지낸 서애를 더 높은 자리에 두는 것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학봉의 후학들은 나이로나 학문으로나 학봉이 선배라고 보았다. 논쟁의 본질은 누가 퇴계의 적통(嫡統)이냐는 것이었다. 시비는 1676년(숙종 2) 여강서원이 사액을 받아 호계서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격화됐다. 그 뒤 대원군까지 중재에 나섰으나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호계서원은 결국 훼철되고 만다.

그 호계서원이 이날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된 것이다. 경상북도는 복설을 앞두고 논쟁을 종식해 화합을 이룰 방안을 유림과 함께 모색해 왔다. 그 결과가 처음 공개되는 행사였다.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초헌관으로 나섰다. 위패의 순서에 시선이 모아졌다. 위패는 가운데 퇴계를 모시고 양쪽에 제자를 배치하는 종향이 아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차례로 배치한 열향이었다. 순서는 ‘퇴계 선생-서애-학봉-대산(이상정)’이었다. 이전과 달리 학봉 오른쪽에 대산을 추가로 배향했다. 서애를 앞에 두는 대신 학봉의 학통을 이은 대산을 함께 배치해 비중을 조정한 것이다. 그 위패엔 ‘大山先生李公(대산선생이공)’이라 쓰여 있었다. 새로 모셔진 인물에 새삼 관심이 모아졌다.

3월 13일 안동시 남후면 고산서원(高山書院)을 찾았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 선생을 기리는 곳이다. 대산이 생전에 후진을 양성한 고산정사(高山精舍)가 함께 있었다. 기다리던 이방수 종손이 서원 동재(東齋)인 청림헌(淸臨軒)으로 안내했다. 널찍한 방 두 개에 가운데 마루가 있는 건물이다. 인사를 나누면서 호계서원 행사가 먼저 떠올랐다. 이번 호계서원 복설에서 조상이 추가 배향된 소감을 물었다. 종손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후손으로서 물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종손은 선조의 학문을 알리고 싶어 했다. “서원이 들어선 이 일대가 고산입니다. 생전 주변을 지나시다가 노년에 이 터를 발견했다고 전해져요. 57세에 강변에 띠집 3칸 고산정사를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가계와 학통이 겹치는 학문 바탕


물론 고산정사가 대산이 강학을 시작한 곳은 아니다. 그는 학문을 정립한 고산정사에 앞서 대산서당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대산은 학문 연원(淵源)이 깊고 두텁다. 대산은 1711년(숙종 37) 안동 일직현 소호리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이 그의 선대다. 조선 시대 들어 선대는 서울에서 살았다. 광해군 시기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어난다. 대산의 고조 이홍조는 외할아버지 서애 류성룡의 권유에 따라 안동으로 내려왔다. 일찌감치 퇴계 제자인 서애의 외손이 된 것이다. 퇴계 학맥과 이 집안은 대산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 관계가 더 굳건해진다. 혼맥을 통해서다. 대산의 어머니는 재령 이씨로 갈암 이현일의 손녀이자 밀암 이재의 딸이었다. 갈암은 이조판서를 지내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붕괴한 사회를 재정비하려는 [홍범연의]를 지었다. 또 율곡학파의 거세지는 비판에 맞서 퇴계학파를 옹호했다. 밀암은 갈암의 셋째 아들로 가학을 이어 퇴계의 주리설(主理說)을 정밀하게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갈암은 다시 위로 올라가면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학봉의 학통을 이은 경당 장흥효를 거쳐 퇴계학의 정맥(正脈)을 이어받는다. 경당은 또 갈암의 외할아버지였다. 갈암의 어머니는 현존 최고(最古)의 한글 고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안동 장씨다.

이상정은 이런 집안에서 태어나 7세에 벌써 [십구사(十九史)]를 읽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린아이가 글공부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병이 날까 걱정해 밤이 깊어서는 책을 읽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이상정은 14세에 외할아버지인 밀암 이재에게 나아가 공부를 배웠다. 이때부터 매년 영양 외가를 찾아 4~5개월씩 머물렀다. 그곳에서 [시경] [서경] 등 경전과 [태극도설] [가례] 등 성리학과 예학을 다졌다.

낙동강 지류 미천에 고산 7곡 경영


▎대산 이상정을 기리는 고산서원의 강당. 강당 규모가 안동지역 서원 중 가장 크다. / 사진:송의호
1735년(영조 11) 이상정은 25세에 과거시험에 응시한다. 그는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다. 대산은 대과에 합격한 다음해 외교 문서를 다루는 승문원 권지부정자 벼슬을 받아 관직으로 나아갔다. 얼마 뒤 가주서(假注書)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27세에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는다. 지역 7개 문중이 그에게 자제들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서당 이름을 대산으로 한 것은 주변 산 이름이 대석산(大夕山)인 데서 따왔다. 대산은 이후 그의 호(號)가 된다.

이상정은 서당에서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28세에 다시 연원 찰방에 제수된다.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사직서를 낸다. 이후 32세에 승문원 정자, 41세에 예조 정랑, 43세에 연일현감, 52세에 사헌부 감찰, 67세에 사간원 정언, 70세에 병조 좌랑 등에 잇달아 임명된다. 1781년(정조 5) 71세 대산은 마지막 벼슬인 형조참의를 제수받는다. 그는 병으로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산은 다시 군왕이 갖춰야 할 덕을 논한 9개조 상소를 올리고 사직을 청한다. 정조는 상소문을 읽고 “말마다 참되고 절실하니 이를 좌우명으로 삼아 반성하는 자료로 삼으려 한다”며 “병이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 직무를 수행토록 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해 선생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돌아보면 대산은 43세를 전후해 고향에 내려와 신병(身病)을 이유로 수차례 벼슬을 사양한 뒤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했다. 그의 출처(出處)는 140여 회 벼슬을 권유받고 79차례 사직을 반복하며 도산에 머무른 퇴계 선생을 닮았다.

종손의 안내로 먼저 고산정사를 둘러봤다. 띠집 3칸은 이후 기와 건물이 됐다. 정사 앞에 서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미천(眉川)이 흐르고 그 뒤로 병풍처럼 둘러선 해발 300m 절벽이 펼쳐진다. 절벽에는 바위 틈에서 자란 측백나무 300여 그루가 숲을 이룬다. “천연기념물 측백나무는 조팝나무가 꽃필 무렵 장관을 이룹니다.” 대산이 노래한 고산7곡 중 4곡의 모습이다. 주변은 암산유원지로 지금은 안동의 명승지가 됐다.

대산은 많은 저술을 남겼다. 20세엔 공자 등을 모사한 뒤 글을 붙인 [성현유상권서(聖賢遺像卷序)]를 지었다. 29세엔 자신이 과거시험을 준비하면서 느낀 여러 모순을 지적하고 개선책을 제시하는 [과거사의(科擧私議)]를 집필했다. 그는 과거를 사장(詞章) 중심에서 의리(義理) 중심으로 바꿔 특정 가문의 급제 독점을 없애야 한다고 봤다. 31세엔 퇴계가 편찬한 [주자서절요]를 본따 퇴계가 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을 모아 [퇴계서절요]를 엮었다. 34세에는 성현들의 궁구한 뜻을 뽑아 자신의 견해를 밝힌 [이기휘편(理氣彙編)]을 쓰고, 39세엔 성정(性情)의 바름을 논한 [약중편(約中編)]을 펴냈다.

퇴계를 통해 주자(朱子)로 들어가다


▎고산서원에서 6㎞쯤 떨어진 대산종택. 이곳에서 과거 급제자 4명이 나왔다. / 사진:송의호
대산의 학문에서 눈에 띄는 것은 퇴계가 간 길을 그대로 따르려 한 방법이다. 대산은 일찍이 벼슬에 뜻을 접고 학문에 전념했다. 퇴계가 [주자서절요]를 편찬해 성리학의 핵심을 제시한 방법을 빌어 대산은 [퇴계서절요]를 엮어 퇴계학의 핵심을 제시했다. 퇴계가 도산서당 주변 자연을 소재로 [도산잡영]을 지은 것을 본받아선 [고산잡영]을 남겼다. 퇴계 선생이 학봉에게 지어 준 [병명(屛銘)]에 주석과 풀이를 붙여 [병명발휘(屛銘發揮)]를 썼다. 대산이 꿈에 퇴계를 뵙고 깨어나 시를 지은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낙천(洛川)은 동쪽으로 흐르나 지난 일 공허한데/ 퇴계 고을 서당에는 서서히 바람이 부네/ 백년 지난 세상이라 미혹한 길 한이 되었는데/ 어젯밤 꿈속에서 어렴풋이 뵈었노라”

국역 [대산집]의 해제를 쓴 전성건 고려대 연구교수는 이를 두고 “퇴계 입장에 상반되는 견해의 한계를 규정하고 퇴계학파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해석도 폭넓게 검토해 퇴계학의 표준을 정리했다”고 적었다. 이(理)가 주(主)가 되고 기(氣)가 자(資)가 된다는 이른바 ‘이주기자설(理主氣資說)’을 통해 율곡학파와 퇴계 학파의 과도한 해석을 균형 있게 조화시키려 했다. 대산이 퇴계학맥의 적전(嫡傳)을 넘어 ‘소퇴계(小退溪)’로까지 불리는 까닭이다.

종손은 우연 하나를 소개했다. 퇴계 선생은 12월 8일 돌아가시고 대산은 하루 뒤인 12월 9일 세상을 떠났다. “한때는 퇴계 선생 불천위 제사를 마친 제관들이 바로 우리 집으로 오곤 했습니다.” 또 대산은 퇴계보다 1년 하고 하루를 더 살았다고 한다. 대산은 “문집을 낼 때는 퇴계문집을 넘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기도 했다. 대산 사후 아우 이광정과 아들 이완, 제자들은 대산의 유문(遺文)을 모아 1802년 52권 27책으로 [대산집]을 간행했다.

고산정사 뒤로 고산서원이 널찍하게 배치돼 있다. 고산서원은 1781년 대산이 세상을 떠난 3년 뒤 사림의 발의로 건립이 추진돼 1789년 모습을 드러냈다. 고산서원 서재(西齋)에는 백승각(百承閣)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대산집] 등 목판 2700여 점이 보관돼 있던 곳이다. 대산종가가 2002년 한국국학진흥원에 목판 등을 기탁하면서 지금은 비어 있다. 고산서원 편액이 걸린 강당은 이름이 호인당(好仁堂)이다. 호인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도산서원 전교당보다 규모가 컸다. 강당 앞뜰은 2011년 대산 탄신 300주년 행사를 치렀을 만큼 널찍하다.

방대한 저술과 함께 대산은 고산정사를 중심으로 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고산급문록]에는 제자 273명의 이름이 나온다. 그의 예학은 동암 류장원에게로 이어져 [상변통고]라는 조선 후기 기념비적 예서를 탄생시킨다. 대산의 학문은 남한조·류치명·정종로 등으로 계승돼 한말까지 이어져 꽃을 피운다. 또 사상의 한 가닥은 기와 이상원으로 전해진다.

제자들 이야기를 나누다가 동학(東學)을 창시한 최제우가 37세 득도 이전 대유(大儒)였던 아버지 최옥의 영향을 받았다는 글이 떠올랐다. 김용옥 교수의 [도올심득 동경대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최옥은 14세에 대산을 찾아뵙고 “주자와 퇴계의 양서(兩書)에 힘을 기울이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최옥의 [근암집]에는 그가 주렴계의 [태극도설]을 읽은 뒤 소감이 적혀 있다. “나는 주렴계의 [태극도설]을 접하고 퇴계의 학설에 더욱 신념을 갖게 되었다.” 김용옥 교수는 이 책에서 ‘퇴계 이황→학봉 김성일→경당 장흥효→갈암 이현일→밀암 이재→대산 이상정→기와 이상원→근암 최옥→수운 최제우’로 이어지는 학맥을 그림으로 그렸다. 종손에게 그 부분을 보내 주었다. 최제우의 중요한 사상적 바탕은 퇴계학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동학의 대척점에 있었던 서학(西學) 역시 퇴계를 사숙한 다산 정약용 등 근기(近畿) 남인이 중심이 돼 펼쳐졌다. 조선 말기 동학과 서학이라는 사상의 양대산맥이 퇴계학에 닿아 있는 셈이다.

동학 최제우의 부친, 대산 가르침 받아


▎이상정 증직 교지. 1882년 이상정에게 이조판서 증직을 내리면서 발급됐다.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서원의 강당 뒤로 사당인 경행사(景行祠)가 있다. 위패에는 ‘大山李先生(대산이선생)’이라 쓰여 있다. 그 오른편에 위패 하나가 더 있다. 대산의 세 살 아래 아우 소산 이광정이다. 소산은 형이 대산으로 호를 붙이자 자신을 ‘소산(小山)’이라 부르며 형을 존경했다고 한다. 고산서원을 돌아본 뒤 6㎞ 떨어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대산종가에 들렀다. 이 집에선 대산을 비롯해 아들 이완, 외손 류치명, 현손 이돈우 등 4명이 태어나 잇따라 문과에 급제했다. 종가 건너편에 대산이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한 서당 건물이 보였다.

대산은 퇴계 선생에서 발원해 학봉 김성일→경당 장흥효→갈암 이현일→밀암 이재로 이어진 학통을 이어받아 이를 다시 정재 류치명→서산 김흥락으로 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대산은 퇴계학을 정밀하게 재해석하고 표준을 만들어 학파 안팎의 편견을 없애는 일을 해냈다. 퇴계학의 계승이자 심화·확장이다. 지역 사회가 퇴계를 기리는 호계서원에 서애·학봉과 함께 대산을 추가 배향하며 다시 자리매김한 이유일 터다.

[박스기사] 임종 직전까지 선비의 존엄함 잃지 않은 大山 - 제자들에게 죽기 직전 57일 동안의 기록 남기게 해

“선생이 옆에서 시중드는 아이에게 ‘내가 잠을 자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셨다. 미음을 가져오게 하고 몸을 일으키자 앉아 조금 드셨다. 다시 물을 가져오게 했다. 양치하고 수염을 씻은 후 자리를 바르게 하고 누웠다. 류범휴가 들어가 병세를 살피고 탄식해 말하기를 ‘선생의 병세가 위독해 기력을 회복할 여지가 없습니다. 사람으로서 아주 어려운 지경인데도 선생의 마음은 안정돼 있고 기운은 여유가 있으며, 몸은 바르고 얼굴빛은 부드러웠습니다.’”

대산 이상정이 병석에 누운 지 54일째 되던 12월 8일 저녁이다.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날 고종일기(考終日記)는 이렇게 자연의 이치에 따라 죽음을 받아들이는 선비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다음 날 아침 대산은 자리에 누워 자신의 삶을 정리한 뒤 제자와 가족 등 7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연한 모습으로 잠을 자듯 눈을 감았다. 묘소는 안동 학가산 광흥사 동쪽에 있다.

대산은 병석에 누워 죽음을 직감해서인지 자신의 일상을 세세히 기록할 것을 종용했다. 대산의 고종일기는 1781년 10월 16일부터 12월 12일까지 57일간이며 기록한 일수는 42일 치다. 기록은 제자인 김종섭과 류범휴가 맡은 것으로 보인다. 대산의 일기에는 자신이 병석에 있지만 배우기를 청하는 문도와 그들에 대한 배려가 많이 등장한다. 17일 을묘엔 이렇게 적혀 있다. “혈변 증세가 악화돼 붉은 설사 횟수가 점점 잦아졌다. 김윤수가 찾아와 배우기를 청했으나 환후 때문에 들어 줄 수 없었다. (…) 병의 초기에는 오히려 힘껏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옆 사람이 선생의 몸이 손상될까 걱정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대산은 자력으로 움직일 힘조차 없어지자 문도들이 오면 아우인 소산 이광정에게 나아가 묻고 배울 것을 종용했다. 대산은 병석을 지키던 소산의 요청으로 유계(遺誡)를 남긴다. 제자들에게는 열심히 공부하기를 권면했다. 후손들에겐 유가의 기풍을 강조하며 본분에 따라 실행하고 나아갈 것을 당부했다. 고종일기를 분석한 오용원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정책 팀장은 “대산은 천리에 따라 죽음을 받아들이며 생을 마무리하는 순천자(順天者)의 모습을 보였다”고 정리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105호 (202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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