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17)] 유교적 이상 정치 꿈꿨던 개혁가 조광조 

성군과 충신의 나라, 세종 시대에서 답을 찾다 

“어진 왕이 충직한 대신에게 실무 맡기고 전폭 신뢰해야”
황희 같은 정승 있는 조정 만들려다 좌절… 37세로 생 마감


▎정암 조광조는 세종대왕 시대를 이상적 모델로 삼고 그 시대의 회복을 꿈꿨다. SBS 사극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 역을 맡은 배우 한석규.
조광조는 중종 때 개혁정치를 꾀했다. 누구나 알고 있듯, 그는 유교적 이상 정치를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조광조와 그의 동지들이 세종의 시대를 모범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세종과 대신의 관계와 역할을 통해서 자신들의 미래를 열고자 했다.

오늘날에도 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높은데 공허한 이론에 매달린다는 비판이 있다. 500년 전 조광조와 그의 동지들처럼 자국의 역사에서 소중한 보물을 캐내려는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물론 역사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렇지만 가장 믿음직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광조는 세종 시대의 어떤 점을 가장 높이 평가했을까. 중종 13년(1518) 5월 20일의 ‘실록’에 그의 생각이 보인다. 그날 조강(朝講)에서 조광조는 세종과 대신인 황희·허조의 밀접한 관계에 주목했다. 조광조는 한국 역사에 대해서도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16세기 조선의 조정에서는 대신과 대간의 역할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믿음이 팽배했다. 대신은 임금을 보좌할 뿐이고, 간쟁은 오직 대간의 전유물이라고 봤다. 그러나 조광조는 세간의 이러한 통념을 부정하고, 대신이 임금의 잘못을 가장 먼저 비판해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선다고 생각했다.

“신이 듣건대 세종 때 황희나 허조는 만약 왕에게 작은 허물이라도 발견되면, 대간이 비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빈청으로 달려가서 아뢰었습니다. (세종의) 윤허를 얻지 못하면 그들은 물러가지 않고 계속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꼭 윤허를 얻은 다음에야 물러났습니다. 귀가한 뒤에도 그들은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잠도 편히 자지 못한 채 나랏일을 염려했다고 합니다.”

조광조는 세종 때는 훌륭한 임금과 유능한 대신들이 온 힘을 쏟아 정치에 매달렸기 때문에 나라가 두루 평안했다고 판단했다. 그는 비슷한 예를 송나라 태조의 조정에서 발견했다. 송 태조 조광윤은 명재상 조보를 등용해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고 한다. 대신 조보가 마음껏 포부를 펼 수 있게 송 태조가 도왔다는 것이다. 어진 왕이 충직한 대신에게 실무를 맡기고 전폭적으로 신뢰해야 유교적 이상 국가가 구현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판단력이 흐린 왕이 훌륭한 대신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언젠가 경연에서 조광조는 송나라의 옛일을 논의했는데, 중종은 깊이 감동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 “왕이 어두우면 소인들이 나타나 군자들을 모함하며, 그들이 당(黨)을 꾸몄다고 거짓 혐의를 씌워 일망타진하는구나.” 중종이 말이 끝나자 조광조는 송나라 인종 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며, 당대의 어진 신하 사마광을 ‘붕당(朋黨)’의 죄목으로 처벌한 사례를 설명했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3년 2월 2일).

밝은 왕이라야 신하들이 소신 펼 수 있어


▎유교적 이상 국가를 꿈꿨던 정암 조광조의 영정.
조선의 역사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며, 조광조는 연산군 때의 사화(史禍)를 손꼽았다. 연산군의 부왕(성종)은 세종을 모범 삼아서 어진 신하를 좋아했고 간언도 받아들였다고 했다. 성종의 신하들은 왕에게 허심탄회하게 자신들의 생각을 털어놓았다고, 조광조는 분석했다. 그 시절 음흉한 한두 명의 대신이 속으로 못마땅하게 여기다가, 연산군이 왕이 되자 어진 신하들을 모함해 사화가 일어났다고 했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조광조는 당대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근년에 조정이 맑아지자 기를 펴지 못하는 소인들이 있다고 했다. 그들이 장차 군자들을 모함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상(중종)께서 심지를 굳혀 신하들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중종은 타고난 자질이 세종과 많이 달라, 소인들이 참소하면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길 것으로 보고, 조광조는 근심했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3년 2월 2일)].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한 해 전이었다.

조광조는 [주역]의 ‘태괘(泰卦)’를 근거로 군자는 자신의 동류를 조정으로 불러들이기 마련이라면서 소인들이 그 점을 왜곡하면 어두운 임금은 속아 넘어가기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세종처럼 밝은 왕이라야 어진 신하들이 마음 놓고 소신을 펼 수 있을 터인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걱정하는 표현이었다.

세종 때 임금과 대신이 서로를 얼마나 믿고 위했는지를 그는 예를 들어 설명했다. “불당을 건설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였습니다. 대신들이 반대했으나 (세종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집현전 학사들도 간언했는데 왕이 거절하므로, 학사들이 모두 사퇴했습니다. 세종이 (근심 끝에) 황희를 불러 ‘시종이 모두 물러났으니 내가 일을 어찌하랴’고 탄식했습니다. 황희가 ‘제가 그들을 다시 불러오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학사들을 일일이 방문해 그들을 다시 데려왔습니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3년 2월 2일)

그러고는 조광조가 자신의 소감을 덧붙였다. “만약 세종 임금이 아니고 황희 정승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요. 임금은 성을 내며 시종들이 나를 버리고 달아났다고 꾸짖었을 것입니다. 정승도 자신을 낮춰 학사들을 찾아가 조정으로 돌아오라고 부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중종 13년 2월 2일)

[세종실록]에는 자세한 설명은 보이지 않으나 역사적 맥락으로 보면 조광조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는 옛 선비들이 남긴 기록을 읽고, 사실관계를 철저히 검토했다. 경연에 참석한 다른 대신들도 묵묵히 듣고 있을 뿐 반론을 펴지 못했다.

특히 조광조는 황희의 자질과 역할에 주목했다. “태학(성균관) 유생이 길에서 황희를 만나 (내불당 건립을 막지 못하는 등) 임금에게 제대로 간언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황희는 그런 말을 듣자 노하기는커녕 도리어 기쁜 표정을 지었습니다. 대신의 도리는 마땅히 황희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3년 2월 2일)

성종도 훌륭한 왕이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광조는 그 시절 조정에 훌륭한 대신이 없었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그는 명나라 사신 동월이 대신 허종에게 했다는 말을 인용했다. “조선에는 임금은 있어도 신하가 없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3년 2월 2일) 성종의 인품과 학식에 어울리는 대신이 없어 성종 때는 치적이 드물었다는 평가였다.

그럼 중종 때는 어떠했을까. 세종 때와 달리 조정이 사분오열돼 있었다. “지금 조정은 협동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대신들은 주장하는 바가 제각각이고, 대간과 시종들도 서로 다릅니다. 동심(同心)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4년 3월 1일) 조광조는 이렇게 말하며 개혁정치의 미래를 걱정했다.

조광조는 세종 때의 군신 관계를 회복하는 데 개혁의 목표를 뒀다. 경연을 통해 그는 중종을 계몽하고, 황희와 허조 같은 정승이 나타나기를 바랐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4년 3월 1일). 그런 뜻에서 조광조는 황희가 김종서를 나무란 사건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임금이 머리라면 대신은 팔다리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던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정암 조광조 적려 유허비(謫廬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어느 날 김종서가 황희를 대접하려고 풍성한 음식상을 차렸단다. 황희는 정색하고 면박한 다음, 세종에게 그 일을 보고했다. 김종서는 공식적으로 사죄한 다음에야 겨우 용서를 받았다. 김종서는 과감하고 성격이 굳센 선비였는데, “내가 이렇게 황공하고 두려운 적이 없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 사건을 왕에게 아뢰면서, 조광조는 “그때 조정의 청렴한 기운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라며 감탄했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4년 3월 1일).

그러나 중종을 세종처럼 만들고, 대신들을 황희와 허조처럼 바꾸는 일은 불가능했다. 선비는 나랏일을 집안일처럼 여겨야 한다고 조광조는 늘 강조했으나, 결국은 자신이 염려했던 대로 붕당을 만들었다는 혐의를 쓰고 사약을 마셨다. 그는 ‘절명시’에서 자신이 임금을 어버이로 생각했고, 나랏 일을 집안일로 여겨 노력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조광조의 생애는 알면 알수록 안타깝기만 하다.. 개혁정치가로서 그는 자신과 동료들에게 닥쳐오는 비운을 예감하며 심중의 걱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비록 올바른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대신이라도 (군자들의 행동에) 유감을 느껴, 은연중 불평을 털어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럼 무슨 일이 생길까요. 나쁜(不善) 무리가 그 틈을 노려 정치적 선동을 하고야 말 것입니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4년 3월 1일)

조광조의 이런 걱정은 불과 몇 달 뒤에 사실로 드러났다. 세종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나약한 임금이 중종이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한 달쯤 전, 정승 신용개가 세상을 떠났으나 임금은 직접 조문하지 않았다. 조광조는 세종 때 일을 다시 떠올리며 중종을 채근했다. 정승 허조가 작고했을 때 세종은 슬피 통곡했단다. 왕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바깥에 들릴 정도였다고 했다.

조광조의 결론은 이랬다. “허조는 어진 재상이었습니다. 잠시도 나랏일을 잊지 않았으므로, 세종께서 우대했습니다. 임금과 재상이 서로 돕는 것을 옛사람은 머리와 팔다리에 견주었지요.” 임금이 머리라면 대신은 팔다리라, 한시도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중종은 죽은 재상 신용개의 영전에 조문하지 않은 일을 궁색하게 변명했다. 애도를 표할 만한 별도의 공간(別殿)도 없다고 들었고, 그날은 비까지 왔다고 말했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4년 10월 6일).

조광조는 세종 때 시행했거나 고안한 여러 정책도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가령 지방관이 담당 지역에 오래 재직하는 것도 통치에 도움이 클 것이라고 믿었다. 또, 세종 때처럼 [소학]을 널리 보급하면 풍속이 바뀔 것이라고 봤다. 아래에서는 이런 점을 조금 더 알아보겠다.

중종 14년(1519) 4월 29일, 실록에는 관찰사의 임기를 늘리자는 주장이 나온다. 그날 경연에서 조광조는 그보다 하루 전날 조정에서 김안국을 전라도 관찰사(감사)에 임명한 사실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김안국의 능력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임지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면 그를 발탁한 효과를 얻기 어렵다는 주장이었다.

“세종 때처럼 [소학] 가르쳐 풍속 바꿔야”


▎창경궁에 있는 성종 태실비. 조선시대에는 왕자의 탯줄을 도자기에 담아 전국 명당 자리에 묻었다.
앞서 김안국은 경상도 감사로도 재직했는데 겨우 1년 만에 이임했다. 임기가 짧아서 그가 시행한 사업은 하나도 본궤도에 오르지 못했다. 조광조는 그 점을 안타까워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백성들은 일단 거부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성과가 드러날 때까지 책임자가 정책을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가야 한다고 조광조는 강조했다. 세종의 구임법(久任法)을 염두에 두고 그는 이런 주장을 펼쳤다.

그러자 정승 신용개가 즉각적으로 반론을 꺼냈다. 감사를 임지에 오랫동안 머물게 하는 것(구임법)은 세종 때 만든 법이지만, 그때도 오래 시행하지 못하고 혁파했다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양법(良法)이라 해도 폐단은 있기 마련이다. 구임법에 따라서 감사가 가족을 동반할 경우 생기는 폐단은 더더욱 크다.” 이런 말로 어두운 미래를 전망하며 신용개는 기왕에 하던 대로 감사의 임기는 1년으로 제한하는 편이 좋겠다고 했다.

조광조와 신용개의 주장이 팽팽히 대립하자 특진관 윤은보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임기를 늘리기 어렵다면 관할 지역이 넓은 경상도는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감사를 2명으로 정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어느 쪽으로든 당장에는 개혁을 단행할 수 없다고 봤다.

조광조의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소학]의 보급을 떠올린다. 그만큼 그 책과 중종 때의 개혁정치는 관계가 밀접했다. 조광조는 실제로 경연에서 [소학]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소학]을 궁벽한 시골 마을까지 보급한다면 사람마다 효도로 어버이를 섬기고 충성으로 임금을 섬길 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일의 선후와 차례가 분명히 갖춰질 것입니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2년 9월 13일)

조광조가 이 책의 역할과 의미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배경에는 놀랍게도 세종이 자리했다. 조광조는 그 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종 때는 오직 [소학]의 도(道)에 집중해 이 책을 서울과 지방에 널리 반포했습니다. 하지만 근래에는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아 [소학]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뜻이 있다는 선비들도 (소학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습니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2년 9월 13일) 이것은 평생 [소학]을 강조하던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이 사약을 마시고 죽은 것과도 관계가 깊었다.

조광조가 등용되자 대사성 유운이 [소학]의 보급에 앞장섰다. 김안국도 경상도 관찰사로서 이 책의 보급을 위해 노력했다. 심지어 그는 [소학]을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했다. 한때 중종은 조광조에게 설득돼 경연에서 [소학]을 학습하기도 했다.

“소격서 혁파하지 않은 건 세종의 큰 잘못”


▎TV 사극에서 사약(賜藥)을 마시는 장면. 사약은 왕족 또는 조정의 신하로서 죄를 범했을 때 적용되는 사형 방법이었다.
조광조의 동료 김정은 이 책의 효과를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했다. “세종 때부터 선비의 풍습(士習)이 개선돼 성삼문과 같은 이들은 국가가 위태로움을 목격하자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의 절의(節義)는 후세가 기리는 바입니다마는 그와 같은 학문과 의기가 배양된 것은 모두 세종 때였습니다. 임금은 한 시대가 나아갈 방향을 좌우하는 존재입니다. 진실로 우연히 될 일이 아닙니다.”[중종 13년(1518) 5월 20일]

이렇게 주장하면서 김정은 중종이 [소학]을 정성을 다해서 공부하고 실천에 힘쓰기를 촉구했다. 역시 조광조와 사상적 동지인 경연관 최명창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세종과 성종의 노력으로 선비들이 절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됐다며, 이렇게 주장했다.

“세종조에 사기(士氣)를 배양한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효과가 잇따랐습니다. 그리고 성종조에는 임금님의 성명(聖明)하심을 믿고 선비들의 언론이 격렬했습니다. 성종께서 일찍이 말씀하기를 ‘이는 나를 믿고 그러는 것인데 나중에 너희가 반드시 나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폐조(廢朝, 연산군)가 선비들을 죽여서 거의 다 없애버리자 선비들의 기운이 사라져 버렸습니다(갑자사화와 무오사화로 선비들이 큰 화를 입었다는 뜻).”([조선왕조실록], 중종 13년 11월 4일)

김정과 최명창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세종과 성종을 본받아 중종도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조광조는 그 문제를 중종에게 건의한 적이 있었다. 그는 선비의 풍습이 무너진 점을 비판하고, 천거 제도를 이용해 인재를 등용하자고 말했다. 나중에 천거제 과거시험인 현량과를 시행한 배경이었다.

중종을 설득하려고 조광조는 숨은 일화를 어전에서 소개했다. 집현전 학사 박팽년에 관한 것이었다. 박팽년은 광주(경기도)에 대엿 마지기의 밭을 소유했는데 그의 벗이 이렇게 물었단다. “옛사람은 녹봉이 있으면 밭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했는데, 그대가 그 밭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무엇인가?” 이 말을 듣고 박팽년은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 밭을 곧 팔았다. 조광조는 일화에 덧붙여 “그 당시는 사습이 지극히 발라서 이와 같은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고 했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3년 3월 25일).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광조와 그 동료들은 ‘사유’(師儒 선비의 스승)가 있어야 한다고 봤다. 일찍이 조광조를 중종에게 추천한 적이 있었던 안당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조광조와 김식을 사유로 염두에 뒀다. 안당도 중종 시대가 모범으로 삼을 것은 세종의 치세라고 여겼다. “사표에 적합한 선비는 과거에도 드물었습니다. 세종 때도 김구와 김말뿐이었습니다.” 그만큼 선비의 모범을 찾기가 어렵다는 뜻이었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4년 5월 27일).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 조광조 일파는 세종을 깊이 존경했으나, 두어 가지 점에서는 비판적이었다. 소격서와 문소전 등 제례 문제 때문이었다. 특히 세종이 소격서를 그대로 둔 점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조광조는 이렇게 말했다.

“세종과 성종은 대성(大聖)이시지만 소격서를 혁파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만약에 세종과 성종이 혁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끝내 없애지 못하면, 후대의 임금들도 성상(중종)을 핑계로 삼을 것입니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3년 8월 28일) 나라의 제사를 유교식으로 결정한 지 오래인데 무슨 이유로 도교식 제사를 지내느냐는 항변이었다. 논리적으로 보면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유교적 가치 내면화하는 일에 매달려


▎종묘 정전에서 거행된 2016 종묘대제(宗廟大祭). 서울 종로구에 있는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이다.
조광조 등은 문소전과 연은전의 제사도 수긍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폐지하기를 주장했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4년 6월 7일). 문소전은 태조의 왕비 신의왕후 한씨를 위해 건립한 사당이었는데, 예법상 용납하기 어려운 시설이라고 봤다. 아울러 성종이 부왕(덕종)을 위해 세운 연은전도 동일한 하자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미 국가에는 종묘가 있으므로, 그곳에 모실 수 없는 신위라면 법외의 사당이라, 신(神)을 섬기는 법도에 맞지도 않고 민생에도 폐를 끼친다고 이유를 댔다.

“문소전은 세종이 창건한 것이었다.” 조광조는 그렇게 말하고, 세종이 예법에 밝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중종 때 국가에서는 조상의 능(陵)과 묘(廟)에서 초하루와 보름마다 제사를 지냈고, 문소전과 연은전에서는 하루 세 번씩 음식을 올렸다. 조광조는 이런 행사는 예법에 어긋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종이 만일 지금 생존하신다면 (문소전을) 굳이 창건하지 않으실 것으로 믿습니다.” 조광조는 문소전의 건립이 왕의 일시적 생각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추론했다. 참찬관 김구도 그 의견에 찬동하며, 조종(祖宗, 세종과 성종)이 우연히 결정한 일이므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정승 안당은 춘추관에 부탁해 ‘실록’을 검토한 결과 문소전은 창건한 것은 태종이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과연 사실이었을까. 사실 그것은 태조 5년에 건립해 인소전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태종 8년에 문소전으로 개칭했고, 세종 15년에는 태조와 태종의 위패도 함께 봉안했다.

이처럼 조광조 등 개혁파는 소격서와 문소전의 철폐를 주장했으나 중종은 반대했다. 왕은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며 구습을 옹호했다([조선왕조실록], 중종 14년 6월 7일). 중종의 특기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조광조와 그의 동지들은 세종 때의 제도적 결함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정작 그들이 역설한 것은 세종의 모범을 따르자는 점이었다. 세종처럼 군주는 덕과 지혜를 쌓기에 힘쓰고, 실무는 대신의 몫으로 돌리자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들은 왕과 대신이 오직 나라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세상을 꿈꿨다.

나아가 세종 시대의 정책을 되살리자고도 주장했다. 선비의 염치를 북돋우고, 유교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일에 조광조 일파는 매달렸다. 그들 개혁파가 세종 시대의 치적을 재발견한 것은 후세를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역사적 조건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얼마 안 가서 기묘사화(1519년)가 일어났다. 조광조 등이 염려한 일이 그대로 일어나는 바람에 그들이 애써 얻은 역사적 통찰은 당대의 현실을 바로잡는 데 쓰이지 못하고 말았다.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의 지레짐작과는 달리, 조광조 등은 조선의 역사를 깊이 검토한 끝에 세종 시대에서 교훈을 발견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실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백승종 -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images/sph164x220.jpg
202105호 (2021.04.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