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소중함을 절감하고 평화통일을 염원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반공'과 '통일'을 참으로 많이도 외치고 들었었다. 공산주의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척결해야 할 악(惡)이었고, 통일은 온 국민이 염원하고 갈망하는 꿈이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 절대적인 것은 없는 것 같다. 통일에 대한 지금의 국민 의식이 그렇다. 남과 북이 통일되면 가난한 북한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하고 사회적 갈등이 심해질 것이라는 이유로 국민 상당수가 통일에 대해 회의감을 갖는다고 한다. 요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세력 간에 벌어지는 전쟁, 그 와중에서 벌어지는 참극을 TV나 SNS로 시시각각 접하면서도 우리는 남의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여기며 평화와 안보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강서경찰서 안보자문협의회 회원들과 함께 DMZ 지역으로 안보체험을 떠난 것도 그 때문이다.
초겨울, 철원의 풍경은 한가롭고 고즈넉하고 평화로웠다. 솜처럼 무거워진 하늘의 뭉게구름은 북한 주민의 월동준비라도 하려고 떠나는 듯 DMZ 철조망을 바쁘게 넘고, 누런 벼이삭으로 출렁대던 황금물결 대신 텅 빈 논바닥 한가운데에서는 암수 재두루미들이 짝을 이루어 사랑을 확인하고 있었다. 사실 철원 땅은 철원 9경 경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명승지가 많다. 임꺽정의 활동 무대인 고석정을 비롯해 삼지연 폭포, 매월대 폭포에다 두루미와 고니 천연 서식지인 용암 늪, 송대소 주상절리 등이 특히 유명하다. 우리는 철원의 절경이라는 직탕폭포부터 찾았다. 눈앞에서 만난 직탕폭포는 한탄강의 맑은 물과 풍부한 유량이 어우려져 ‘대한민국의 나이아가라폭포’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비경을 이루고 있었다. 폭 80m, 높이 3m의 폭포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미니어처처럼 축소해 놓은 듯 장쾌했다.폭포를 감상한 뒤 우리 일행은 DMZ안내소에서 간단하게 신원조회를 한 뒤 그 유명한 제2땅굴을 견학했다. 단단한 암벽을 뚫어 만든 수백 개의 지하 계단을 내려가자 견학할 수 있는 거리가 500m 정도 된다는 제2땅굴을 만날 수 있었다. 땅굴 내부에는 대규모 병력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 있고, 출구는 세 개로 갈라져 있다고 했다.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는 것은 물론 탱크까지 통과 할 수 있다는 땅굴의 규모에 놀랐다. 만약에 우리 군이 이 땅굴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곳에서 100㎞ 남짓한 서울이 이번에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것처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아찔해졌다. 땅굴은 발견 이후 50여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평화를 밝히는 조명불빛으로 빛나고 있지만 평화로운 우리 땅을 향한 그들의 침략 야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땅굴 견학을 마치고 인근 평화전망대로 발길을 돌렸다. 50인승 규모의 모노레일이 설치돼 쉽게 전망대에 오를 수 있었다.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한 뒤 마음을 가다듬고 북녘 땅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북한 땅은 고요하고 평화롭게만 보인다. 그 누가 저 천연의 자연 깊숙한 곳에 지뢰가 묻혀 있고, 수만 발의 폭탄이 숨겨져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마음대로 남북을 오가는 저 자유스럽고 평화스러운 새들과 뭉게구름이 참으로 부럽다.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자 옛 궁예의 왕궁 터였다는 태봉이 아득하게 보였다. 태봉은 고려 초기 궁예가 왕건에게 쫒겨나기 전 도성이었다. 왕건은 궁예 정권을 무너뜨리고 1년 동안 태봉에 머물다 수도를 송악으로 옮겼다. 그 이후 1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태봉은 방치되었고, 우리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태봉 땅을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궁예가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긴 한이 너무 커서 궁예의 넋이 이 DMZ 비무장지대에 누워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있을 때 잘 해야 한다. 민심이 곧 천심이다. 폭정으로 민심을 잃은 왕은 쫓겨날 수 밖에 없다.눈앞의 태봉에서 다시 고개를 5도 정도 돌리자 저 멀리 백마고지가 아득하게 보였다. 백마고지전투(白馬高地戰鬪)는 6.25 전쟁 당시인 1952년 10월 6일~ 10월 15일 한국군과 미군이 중국인민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다. 철원 서북방에 위치한 395m의 백마고지는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였다. 10일 동안 무려 12차례의 공방전을 거치며 황폐화되었고, 중공군1만 명, 국군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국군 21만 9954발, 중공군 5만5000발, 합해서 27만4954발의 포탄을 백마고지에 쏟아 부었다고 하니 그 참혹함과 비극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내 아들은 이번에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DMZ 투어 글쓰기 공모전에서 ‘백마고지의 슬픔과 애환’을 주제로 대상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눈 앞에 보이는 백마고지에 더욱 애틋함이 느껴졌다.
다시 그 너머에 있는 '김일성 고지'를 바라봤다. 김일성 고지는 강원도 금강군 청두리의 동남쪽 이포리와의 경계에 있는 해발 1211m 산이다. 김일성이 1951년 9월 최전선을 찾아 1211고지전투를 지휘한 곳이다. 김일성이 그곳에서 드넓은 철원평야가 추풍낙엽처럼 한국군에 떨어진 것을 보고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울었다는 전설이 전한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왜 그는 수많은 동포들을 죽고 죽이게 만든 전쟁을 선택했을까? 전쟁통에 쓸쓸히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지금도 이중 삼중으로 철망을 두른 철책선과 붉은 깃발, 북한군 초소와 한국군 GP. 그리고 땅속 깊은 곳에 숨겨놓은 수천 수만 발의 살상용 폭탄과 지뢰들... 오늘의 안보 체험은 잠시 잊고 있었던 평화와 통일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됐다.
평화전망대를 내려와 가까이에 있는 월정리역으로 향했다. 월정리역(月井里驛)은 서울에서 원산까지 이어졌던 경원선의 간이역이다. 6·25전쟁 당시 월정리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렸던 객차의 잔해 일부분과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서진 인민군의 화물열차 골격이 보존되어 있다. 녹슬고 부서진 열차 앞에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푯말을 보면서 잠시 상념에 빠져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전과 휴전의 세월이 깊어져서 이렇게 세계 자연의 보고인 철원의 비무장지대가 잘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 세대가 이 DMZ를 잘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서 평양 땅 대동강변에서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고, 녹슨 기차를 반빡반짝 기름칠해서 저 넓은 만주벌판으로 마구 달리고 싶어졌다. 그래! 우리 함께 멋지게 달려볼 그날을 기다려보자. 그날이 꿈만은 아니리.
우리 일행은 6.25전쟁 때 수류탄을 가슴에 안고 전우를 구하다 순직한 공완택 병장님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 뒤 오늘 일정의 마지막 목적지인 철원 구 노동당사로 향했다. 구 노동당사가 있는 철원군은 6.25 전쟁 전에 북한이 통치할 당시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로 구철원이 철원군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이후 도청은 1946년 12월 원산시로 이전했고, 946년에 철원읍 관전리에 조선로동당에서 3층 당사를 건설했는데 한국 전쟁을 거치며 구철원이 한국에 귀속되면서 노동당사도 우리 수중에 들어왔다. 그러나 전쟁 때 폐허로 변한 탓에 이 건물도 2층짜리 건물이 쓸쓸하게 거의 골조만 남아있었다. 6.25전쟁 그 비극의 상흔을 보는 듯 가슴이 아파왔다. 오늘 하루 다시 한 번 전쟁의 참상을 깨닫고 느끼며 귀경길에 올랐다. 서울이 가까워지자 장대한 한강과 반짝이는 야간 조명으로 빛나는 서울이 너무나 황홀하고 멋지다. 이 소중한 우리의 안식처를 정말 잘 가꾸고 지켜야겠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1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