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리스트

Home>월간중앙>스페셜리스트

김희범의 등산미학 (43) 서울의 최고 명산, 북한산 

 

왜 외국인들은 북한산을 좋아할까?

어느 신문에서 요즘 외국인들이 서울에서 제일 감탄하고 주로 찾는 관광코스가 한강과 고궁, 북한산이라는 글을 읽었다. 명색이 산악인인 내가 등잔 밑이 어둡다고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북한산에 대해 정작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 한번 제대로 북한산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기로 했다. 산악회 친구들과 함께 불광역에 집결해 이북 5도청을 지나 북한산 비봉(碑峯)으로 가는 코스로 등반에 나섰다.

북한산을 안에서 보니 정말 가까이에 있어서 그 훌륭함을 잘 몰랐던 산이었다. 오랜 세월과 비바람에 의해 다양하게 형성된 크고 작은 암봉, 암벽, 암석들이 저마다의 특색을 뽐내고 있었다. 화강암대의 거대한 돔(dome) 모양의 저 암봉들. 아마도 오랜 세월에 걸친 풍화와 침식의 결과일 것이다. 곳곳에 솟은 기암괴석들은 설악산 공룡능선 뺨칠 정도로 아름다웠다.


절경을 감상하며 아슬아슬 좁은 등산로를 따라 힘들면 쉬어가면서 조심조심 오르다 보니 어느덧 비봉 정상의 진흥왕 순수비가 어서 오라는 듯 반겼다. 비석에 가까이 다가가 글씨를 읽어보았다. 자세히 보니 검은 것은 글자라기보다는 글자의 흔적이요, 하얀 것은 그저 돌덩이 비석이었다. 전문가가 아닌 내 지식으로는 난공불락이었다. 비봉(碑峯)이라는 봉우리 이름 자체가 진흥왕(재위 540∼576) 순수비가 세워진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신라 진흥왕은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자신이 다녀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조선조 후기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한 뒤 판독해서 세상에 알려졌는데, 비에 새겨진 내용이 당시 삼국시대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했다. 실제 북한산은 삼국시대 전략 요충지인 관계로 삼국 간에 서로 이를 차지하기 위한 여러 번의 격전이 있었다. 진흥왕은 북한산을 순행하면서 신라의 영토임을 밝히고자 비봉에 순수비를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기념비는 진본이 아니란다. 원본은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깎아지른 낭떠러지 바위 위에 비석을 세웠을까? 아마도 그 옛날에는 지금 같은 특수장비가 없었으니 여기까지 큰 바위를 끌어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 크기가 제격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1600여 년 전의 정복자 진흥왕이 되어 저 멀리 아득히 보이는 한양 땅과 기암괴석으로 수놓은 북한산을 구석구석 찬찬히 바라봤다. 정말 아름답고 멋진 풍경이다.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한북정맥은 추가령(586m)에서 남서 방향으로 굽이쳐 내려오다 양주군 서남쪽에 이르러 도봉산을 만든다. 이곳에서 우이령을 넘어 남서 방향으로 한강에 이르러 다시 솟구쳐 일어난 산이 바로 이 북한산이다.

북한산은 서울에 인접하여 우리나라의 2000년 역사와 함께했다. 원래 지명은 삼각산인데, 백운대(白雲臺,835.6m)와 인수봉(仁壽蜂,810m), 만경대(萬景臺, 779m) 세 봉우리를 일컬어 삼각산이라고 한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주요 암봉과 그 사이로 우이계곡, 정릉계곡, 세검정계곡, 진관사계곡, 구기계곡, 평창계곡, 산성계곡 등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그 깊은 계곡과 산 속에 식물 700여종, 동물 1400여 종 등 총 2500여 종이 넘는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북한산은 세계적으로 드문 도심 속의 자연공원이다. 산지 전체가 도시지역으로 둘러싸여 생태적으로는 고립된 ‘섬’과도 같지만 그만큼 도시인들에게 ‘녹색허파’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연평균 탐방객이 무려 500만 명이란다.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외국인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산이다.


북한산에는 삼국시대 이래 2000년의 역사를 담은 수많은 역사·문화유적과 100여 개의 사찰, 그리고 암자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 신라시대 명승 원효대사는 상운사와 삼천사를 창건했고, 뒤이어 승가사와 도선사, 망월사가 창건되었다. 고려시대 태조 왕건은 중흥사를 창건했고, 진관사는 고려 현종이 북한산에서 승려 생활을 할 때 진관스님의 은공을 기려 그를 국사로 봉하고 1011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 한창 KBS에서 방송 중인 ‘고려거란전쟁’에 나오는 그 현종이다. 조선 건국 초에는 무학대사가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삼기 위해 답사하기도 했고, 수양대군을 비롯한 쟁쟁한 인물과 관료, 선비, 승려들이 풍수지리, 학문 정진, 수도를 위해 입산한 산이기도 하다.


북한산에 조성된 ‘북한산성’은 약 8.5㎞에 이르는데, 조선 숙종 때인 1711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수도 한양이 점령당하고 왕이 멀리 피신하는 사태가 발생한 뒤로 수도 방비를 위해 쌓은 것이다. 남쪽의 남한산성과 대비해 ‘한강 북쪽의 큰 산' 이란 의미로 1900년대 초부터 북한산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옛 문헌과 교과서에 나오는 북한산에 대해 인터넷과 모바일로 즉석에서 공부한 후 내 눈앞에 펼쳐진 생생한 북한산을 다시 천천히 바라봤다. 신의 손길이 빚은 듯 장엄하고 멋진 풍광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고 하더니 내 발로 힘들게 올라와서 찬찬히 음미해야 진짜 그 맛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왜 외국인들이 그토록 북한산을 열망하는지를,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북한산은 말없이 웅변하고 있었다. 그렇다. 저 많은 바위와 돌과 나무들은 저렇게 포개지고 밟히고 짓눌린 채 온갖 풍상에 시달리면서도 저렇게 귀티를 뽐내며 멋들어지게 서있지 않은가! 나도 저 바위와 나무들처럼 이웃과 인류를 위해 저렇게 멋들어지게 살다 갈 수는 없을까?


내가 배운 지식을 활용해 북한산을 지질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봤다. 우주에 떠돌던 최초의 원자와 수소가 결합되어 밀도가 높아졌고, 결국 폭발 과정에서 핵융합과 핵분열 작용으로 여러 다른 원소와 우주 물질들이 만들어진다. 그 수많은 물질들이 음과 양의 여러 형태로 자유분방하게 결합했다가 흩어지는 생로병사의 반복과 순환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47억 년 전에 우주에 떠돌던 그 우주 물질, 먼지가 결합하여 불덩어리 지구가 만들어졌고, 그 지표면이 차츰 식어 오늘날의 땅 형태가 되었지만 땅속 깊은 곳은 아직도 불덩어리 마그마 형태로 남아있다. 그것들이 어떤 충격이나 밀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폭발하는데, 그것이 바로 화산이다. 북한산도 그 화산과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이 만들어낸 조각품이다. 수도 서울의 시민이 딱 오르기 좋은 크기로, 마음껏 힐링할 수 있도록 잘 빚어 놓은 최고의 걸작, 명품인 것이다.

북한산 비봉에서 절경을 감상한 뒤 우리는 마치 피사의 사탑처럼 삐딱한 사모바위를 바라보며 각자 싸가지고 온 도시락을 펼쳐서 나눠 먹었다. 요즘 핫한 시사 이슈인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 이야기로 시작해 한 뿌리에서 시작했지만 서로 원수같이 싸우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에 대한 열띤 토론 수업이 힌두교와 불교 이야기로 이어졌다. 역시 등산의 묘미는 이렇게 한바탕 자연을 감상하고 어울려서 철학과 역사와 가십거리를 논하는 재미가 아니던가!

산을 내려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등산은 참으로 인내의 꿀맛을 맛보게 하는 마술이 아닌가!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그저 높은 산을 올려다보며 묵묵히 걸음을 옮겨야 한다. 천근만근 발걸음이 무거워도 정상에 오를 그 기쁨을 생각하며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산의 정상에 서면 이제는 아래를 내려다보게 된다. 오를 때의 마음은 간 데 없고 정상에 올랐다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 즐거움도 잠깐이다. 눈앞에 펼쳐진 대자연과 그 대자연 속에 기대어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세상은 나 혼자 뽐내고 살 것이 아니라 협력하고 의지하며 조화롭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나 역시 저 대자연 속 하나의 생명체로서 조화롭게, 아름답게 살고 싶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가까이에 있어 너무 몰랐던 소중한 보석을 발견한 듯, 가슴 뿌듯하고 행복한 북한산 산행이었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1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