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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46) 중국 화산(華山) 기암절벽에 올라 

 

세월 앞에는 모든 것이 일장춘몽이요 재롱잔치다

2023년 12월 절친한 벗들과 함께 중국 산시성의 시안(西安)을 다녀왔다. 중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안의 명승지를 방문하고, 중국 5악(五岳) 중 으뜸이라는 화산(華山)을 오르기 위해서였다. 시안은 젊었을 때부터 내 호기심을 자극한 도시였다. 군대 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초한지〉에서 유방과 항우가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던 주 무대가 바로 시안이었다. 시안은 또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옛 당나라의 수도이자 국제도시로, 당시에는 장안이라고 했다. 지금도 ‘장안의 화제’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장안은 요즘 말로 누구나 한번 가보고 싶었던 핫한 글로벌시티였다. 그 장안을 내가 두 발로 직접 찾아가게 되다니… 시안으로 떠나기 며칠 전부터 가슴이 설렜다. 오전 9시30분 공항을 출발한 대항항공 비행기는 3시간만인 12시30분 정확하게 시안 비행장에 도착했다. 한국 시간보다 1시간 늦지만, 위도가 부산 정도여서 겨울이어도 서울보다 춥지 않았다.

첫 일정으로 동서양을 이어주던 실크로드(Silk Road)의 출발지를 찾았다. 안내자에 따르면 이곳 시안에서 1년이면 5~10번씩 낙타를 타고 대규모 상단이 서역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실크로드의 기점에 들어서자 비단과 도자기를 가득 싣고 이제 막 길을 떠나려는 낙타 무리를 형상화한 대형 조형물이 확 눈에 띄었다. 실크로드는 고대 중국과 서역을 잇는 교통로를 일컫는다. 중국 중원(中原)지방에서 시작해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북 가장자리를 따라 파미르 고원, 중앙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의 동안과 북안에 이르는 장장 6400㎞ 도로다. 비단, 칠기, 도자기 같은 물품과 양잠, 화약 기술이 이곳 시안에서 서역으로 전해졌다. 특히 종이 만드는 기술이 서역에 전해지면서 인쇄술 발달과 지식 보급의 원동력이 됐다. 말로만 들었던 2200년 전 동서 문명의 고속도로 출발지를 비록 조형물이지만 눈으로 직접 만나니 감개무량했다. 시안의 첫날밤, 인간이 만든 거대한 건축물인 시안성벽(西安城墙)이 내 마음을 황홀하게 했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웅장한 시안성벽에서 현란하게 춤추는 빛의 향연이 아름다웠다. 시안성벽은 시안시 성구에 위치해 있는데,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고(古)성벽이다. 보면 볼수록 그 규모와 장엄함에 입이 쩍 벌어졌다.


여정 2일째, 시안에서 동쪽으로 35㎞ 떨어진 여산(酈山)을 찾아,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을 찾았다. 오늘날 중국 문화와 관광의 상징과도 같은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은 드넓은 초원의 끝에, 그다지 높지 않은 여산 아래에 잠들어 있었다. 병마용갱은 진시황릉 주변에 있는 흙으로 만든 호위무사들의 무덤이다. 지금까지도 발굴이 진행 중인데, 정작 황릉으로 추정되는 언덕은 아직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저우언라이가 말했듯 후손들을 위해 발굴기술이 완벽해질 때까지 무리하게 발굴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란다. 관람객들에게 공개된 병마용갱은 무덤 주변에 구덩이를 파고 병마용을 넣은 후 다시 묻은 것이라고 했다. 산산 조각난 병마용을 복원하는 작업도 볼 수 있었는데, 부서지고 흩어진 1~3호 병마용갱의 병마용들을 복원하는 데만 수십 년 이상이 소요될 예정이란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진시황본기에 진시황릉에 대해 이렇게 적혀있다.

“9월 시황제를 여산에 매장했다. 시황제가 처음 즉위했을 때 여산을 공사했고, 천하를 통일하자 전국의 죄수 70만여 명에게 지하수가 3번 돌 정도로 구덩이를 깊게 파게 하고 구리를 부어 외곽을 만들었다. 궁궐과 여러 진기한 보물을 가득 매장했다. 장인에게 기계 쇠뇌를 만들게 해 묘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쏘게 했다. 수은으로 여러 개울, 강과 바다를 만들고, 기계로 수은을 주입했다. 위로는 하늘의 모습을, 아래로는 땅의 형상을 갖췄다. 인어(人魚)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영구히 꺼지지 않게 했다. 2세 황제(호해)가 말하기를 ‘자식이 없는, 선제의 후궁을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명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하니,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매장을 끝내자 누군가 말하기를 ‘장인이 기계를 만들었고, 모든 노예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노예가 많아 사실이 누설될 것입니다.’ 장례가 끝나고 보물 등을 이미 다 감추어 놓자 묘의 가운데 통로를 폐쇄하고 바깥문도 폐쇄해 장인과 노예들이 나오지 못하게 하니, 다시는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없었으며, 능에 풀과 나무를 심으니 그 모습이 마치 산과 같았다.”


진시황릉은 전 세계에서 부장품이 가장 많은 무덤이다. 특히 토용(土俑, 사람 모양 흙인형)을 많이 만들었는데, 병용(병사 인형)이 가장 유명하다. 완성된 토용은 계급과 역할에 맞춰서 당시 진나라 군사 진형(陣形)을 정확하게 따른 형태로 구덩이 속에 배치됐다. 키가 184㎝에서 197㎝로 큰 편인데, 장군을 병사보다 크게 만들었다. 병마용은 경무장 보병, 중무장 보병, 궁병, 전차병, 기병, 말, 장교 등 다양한 병과 군인들을 표현했다. 얼굴은 약 8가지 복제 틀을 사용해 제작했는데, 기본형에 수염 등 세부적인 변형을 가해 하나하나가 전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고 한다. 발굴된 갱도 4곳 중 3곳에 병용 8000여 점, 전차 130기, 말 520점이 있다고 하는데, 발굴된 것보다 더 많은 수가 아직 흙 속에 묻혀있다고 한다. 원래는 실제 사람과 말을 모델로 채색됐지만 수천 년이 지나 발굴될 때 외부 공기와 접촉하자 순식간에 옻칠한 코팅 층이 바스러지거나 탈색됐다. 병용 외에도 신하들이나 궁중 광대 등 다양한 사람을 실제 사람 크기로 잘 만들어 묻었는데, 학자들은 실제 진나라 궁정에 일하던 사람 수만큼 넣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병마용갱 전체를 발굴하면 이집트 투탕카멘 무덤 발견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고고학적 발견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거대한 산 전체가 무덤이었다. 왠지 모를 회한이 몰려왔다. 아! 아무리 중국을 통일한 힘 있는 황제였지만 그도 태어날 때는 순진무구하고 여린 아기였을 텐데, 인간의 욕심은 참으로 끝이 없는가보다. 분서갱유로 서책을 불사르고, 죽어서도 영원한 제왕이 되기 위해 수많은 병마용갱을 만들고, 도굴을 염려해 그 무덤을 위해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던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새파랗게 살아있는 사람을 순장이란 이름으로 생매장했건만 그 역시 죽음만은 피하지 못했다. 진시황제도 뛰어봐야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허우적대는 그저 연약하고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가 죽은 지 불과 10년도 안 돼 진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도 후세 사람들은 이 ‘탐욕의 끝판왕’을 보기 위해 오늘도 그의 무덤 앞에 문전성시다. 그 탐욕의 광경을 직접 본 사람들이 교훈을 얻어 탐욕을 조금이라도 내려놓을까? 아니면 본인도 그 탐욕의 끝판왕이 되고 싶어 할까?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그 탐욕의 끝판왕이 되고 싶은 한 사람은 아니었던가!


여산 아래에 당나라 6대 황제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눴다는 화청지(華淸池)가 있었다. 양귀비(719~756)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 사람이다. 가무에 능하고 미모가 출중해 17세에 당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의 비가 됐다. 아마도 당 현종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수왕과 천수를 다하며 해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치명적 아름다움을 타고난 이의 운명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6년간 수왕 이모의 아내로 살던 23세 양옥환에게 현종 처소의 환관 고력사가 찾아와 현종의 술자리로 불러낸다. 양옥환이 춤을 추자 나이 예순을 바라보던 현종의 마음에 사랑의 불길이 당겨졌다. 이후 이야기는 불문가지. 양옥환은 그의 연인이 됐고, 27세가 되던 해 귀비 책봉을 받았다. 귀비였지만 사실상 황후였다. 초기에는 ‘개원(開元)의 치(治)’라는 칭송을 받으며 태평성세를 구가한 현종이었지만, 양귀비를 만나면서 정치를 멀리하자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하지만 현종은 누대로 유명한 온천인 화청지에 궁을 짓고 양귀비와 사랑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양귀비를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꽃, 해어화(解語花)로 부르며, 그녀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꽃조차도 부끄러워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양귀비는 현종의 사랑을 영원히 붙잡아 두려고 매번 새로운 화장법을 개발했고, 목욕을 즐겨해 늘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었다. 양귀비의 6촌 오빠 양국충과 안록산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안록산은 변방에서 난을 일으켜 장안까지 쳐들어 왔다. 바로 ‘안사의 난’이다.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급히 서쪽으로 피난을 떠난다.


지금의 쓰촨으로 도망가던 현종의 가마가 마외파에 이르렀을 때였다. 호위하던 병사들이 나라를 망친 양귀비와 그 일족을 죽이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주저앉았다. 현종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하다고 했던 양귀비가 환관 고력사의 손에 이끌려 죽으러 가는 것을 그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756년 6월 15일 양귀비는 마외파 인근 불당 앞 배나무에 비단 천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렇게 자결 아닌 자결로 비극적 종말을 맞이한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던 양귀비의 10여 년 권세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녀의 나이 38세였다. 지금도 따뜻한 온천물이 365일 흘러나오는 화청지에는 현종과 양귀비의 얼굴이 조각돼 있다. 화려한 목욕탕과 침실도 있었다. 어찌 보면 처절하고 애틋한 사랑이다. 남녀 간 사랑은 신분과 국경, 나이도 뛰어넘는 오묘한 것이지만, 또 그렇게 쉽게 깨어질 수 있는 것이 사랑이란 것이다.

여정 3일째. 당나라의 황궁으로 쓰였다는 대명궁(大明宮)터를 찾았다. 220년 동안 당나라 황제들의 거주지로 사용된 대명궁은 1957년에야 발견됐다. 2000여 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진나라,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은 당시 세계인이 가장 가보고 싶고 살고 싶어 한 도시였다. 그 장안의 한복판에 있는 대명궁은 정말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대궐이었을 것이다. 실제 내 눈으로 본 전각 함원전만 해도 규모가 대단했다. 높이 15m, 가로 약 200m나 되는 거대한 규모로, 외국 대사의 접견, 황제의 즉위식과 같은 국가의 중대한 행사들이 열렸다고 한다. 수많은 전각과 건물이 있는 대명궁이 완전히 복원되면 베이징에 있는 자금성보다 훨씬 규모가 클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화려했던 왕궁도 지금은 한 줌의 흙이 돼 땅속에 묻혀있다. 세월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작은 먼지에 불과한 것이다.

대명궁을 돌아본 후 이슬람을 믿는 소수 부족이 운영하는 회족거리를 방문한 뒤 각양각색의 만두로 저녁 식사를 하고 오페라를 감상했다. 회족은 중국의 소수 민족 중 하나로, 중국 최대 이슬람교도 집단이다. 회족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이곳 음식점에서는 그 흔한 돼지고기 요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슬람교의 상징인 모스크와 하얀 모자를 쓴 회족의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어 인상적이었다.


여정 4일째, 드디어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화산(華山)을 만나는 날이다. 화산은 시안과 뤄양(洛陽)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시안에서 약 140㎞ 거리에 있다. 조물주가 입이 쩍 벌어지게 기암괴석 절벽을 깎고 다듬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장엄하고 화려함의 극치를 수놓고 있는 명산이다. 우리는 긴 케이블카를 타고 뾰족뾰족하고 깎아내린 듯한 바위를 아슬아슬하게 수없이 넘고 또 넘었다. 저렇게 큰 바위에 올라타 무서움도 모르고 독야청청하는 저 나무들은 무슨 베짱이 저리도 좋단 말인가! 보면 볼수록 장관이었다.

산동성에 있는 타이산(泰山)은 평야에 우뚝 솟아 있어서 높게 느껴지지만, 산시성의 이 화산도 그에 못지않게 웅장한 느낌이 있다. 친링(秦嶺)산맥의 동단에 최고 2437m까지 솟아 있는데, 옆으로는 위수(渭水)강이 흘러 더 웅장하게 느껴졌다. 화산은 서악(西岳)으로도 불린다. 오악(五岳) 가운데 가장 높고 산 전체가 바위산의 분위기여서 험준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화산 등산로는 딱 한 가닥으로, 상당한 난코스에 속한다. 산을 대표하는 조양봉(朝陽峰), 낙안봉(落雁蜂), 연화봉(蓮花峰), 운대봉(雲臺峰), 옥녀봉(玉女峰) 등 다섯 봉우리가 마치 선인(仙人)의 손가락처럼 우뚝 솟아 있다. 화산은 1년 사계절 다양한 풍경이 펼쳐지고 기후도 특이하다고 한다. 봄철의 산정은 비가 많고 안개가 짙어 항상 구름바다를 이루고 있다. 여름은 기온이 높아 때로는 섭씨 38~39도지만 숲과 산간 폭포를 볼 수 있다. 가을은 온도가 적당해 등산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겨울은 산에 눈이 많고 산세가 험해 오르기 곤란하다고 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40분, 그리고 다시 30분을 걸어서 드디어 2086.6m 화산 정상에 다다랐다. 화산의 꼭대기에서 저 멀리 펼쳐진 옛 중국의 수도 시안(장안)을 바라봤다. 그렇게나 요란하게 당현종과 양귀비가 연분을 뿌렸던 화청지도,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며 불로장생을 꿈꿨던 진시황의 무덤도, 여러 나라의 조공을 받으며 쥐락펴락했던 황제의 대명궁도, 다 이곳 화산 정상에서 보면 한 줌의 흙이요, 흘러가는 구름이며, 스쳐 지나가는 영화일 뿐이다. 그렇구나! 세월 앞에서는 모든 것이 일장춘몽이요, 작은 먼지가 빚어낸 재롱에 불과하구나! 그러니 우리는 모든 근심 걱정을 놓아 버리고 소중한 이들과 더불어 더욱 멋지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남의 눈에 피눈물 안 나게, 더 겸허하게 살다 가는 것이 이 작고 작은 인간의 소명이고 행복이 아니겠는가! 나는 장대한 화산 정상에서 그만 넋을 잃고 말을 잃었다.


오랜 벗들과 함께 한 이번 화산 여행은 참으로 느낀 것이 많은 행복한 여정이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내게는 고향이 같은 친구 7명이 서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술 한 잔 나누고, 월 회비 5만원씩을 옴팡지게 모아 어느 정도 돈이 쌓이면 여행을 다니는 모임이 있다. 알토란같은 기업을 일군 회장 친구가 그 모임 밥값을 대부분 낸다. 행사 때마다 통 크게 후원을 해줘 지금까지 울릉도와 독도 등 국내뿐만 아니라 수차례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이 글을 빌려 화산 여행에 동행해준 벗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2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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