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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물] 정치 역량 시험대 오른 우원식 신임 국회의장 

정치적 중립, 선명성 경계에서 본인도 국민도 ‘대략난감’ 

최은석 월간중앙 기자
“18개 상임위 싹쓸이” 野 vs “원 구성 백지화” 與 사이 ‘곤혹’ 역력
“인내력·뚝심, 끈질긴 협상력 장점… ‘강한 중재자’ 될지 지켜봐야”


▎우원식 국회의장이 6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안건을 상정하며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헌정 사상 처음 야권 단독으로 ‘반쪽’ 개원한 22대 국회가 상임위원회 위원장 배분 문제를 두고도 대치하는 등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이 6월 10일 단독 본회의를 열고 법제사법위원회 등 11곳의 핵심 상임위를 차지한 가운데, 여당인 국민의힘은 “잘못된 원 구성의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며 대립 중이다.

원내 다수당인 민주당이 원 구성에 이어 법안 처리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는 행태를 보이면서 국민의힘은 향후 국회 일정 전체를 보이콧하는 초강수를 예고하고 있다. ‘어의추(어차피 의장은 추미애)’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한 민주당 국회의장 경선에서 상대적으로 온건 성향이 부각되면서 이변을 연출한 우원식(67) 국회의장의 중재력이 주목을 받게 된 이유다.

우 의원은 여당이 불참한 가운데 6월 5일 열린 22대 국회 첫 본회의에서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중립은 국민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고 국민의 권리를 향상시켜나갈 때 가치가 있는 일”이라며 의장 중립 원칙에 대한 미묘한 반대 의사를 밝혔던 그였지만, 일단은 숨고르기에 들어간 모양새다.

민주당은 6월 13일 국회 본회의를 열어 나머지 7개 상임위원장 선출에 나설 예정이었지만, 우 의장은 ‘여당에 숙의의 시간을 줘야 한다’는 취지로 야당의 본회의 개회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민주당에 원 구성 협상 관련 공개 토론을 제안한 반면,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18개 상임위 싹쓸이’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보좌관서 시작해 의전 서열 2위 오른 뚝심


▎1988년 평화민주당에 입당하면서 현실 정치에 발을 들인 우원식 국회의장은 1991년 지방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하고 만다. 사진은 1991년 당시 김대중 총재에게 공천장을 받는 우 의장. / 사진:우원식 블로그
이와 관련해 여의도 사정에 밝은 한 정치평론가는 “‘국회의장이 민주당의 의원총회 대변인으로 전락했다’는 여당의 강한 비난에 직면한 우 의장이 여론을 의식해 속도 조절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며 “개인적으로는 ‘친정’의 강성 지지층 여론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굉장히 난감한 상황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에는 국회의장직을 수행하면 다음 총선에서 불출마하는 등 정계에서 은퇴하는 게 관례였는데, 최근엔 분위기가 바뀌면서 의장의 역할도 단순 ‘사회자’ 이상으로 확대되는 추세”라며 “5선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중앙정치 무대에서 존재감이 다소 부족했던 그의 정치 역량이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고 부연했다.

반면 여의도 일각에서는 과거 우 의장의 활약상이 다시금 재현될 수 있다는 시선도 있다. 우 의장과 가까운 한 여권 인사는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초대 여당 원내대표였던 우 의장은 특유의 협상력을 앞세워 여소야대 정국을 정면 돌파했다”며 “국회의장이 여야 간 난맥을 풀어낼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여론에 화답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 같은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은 우 의장의 성장과정과 경력 때문이다. 우원식 의장은 실향민 2세 출신 정치인이다. 부친은 황해도 연백 태생 실향민으로, 우 의장의 두 누나는 북한에 있다. 2010년 제18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북한의 첫째 누나와 만난 적이 있다. 우 의장의 외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 김한 선생이다. 연세대 공학도 출신인 우 의장은 강제 징집과 제적, 징역형을 선고받는 등 대학생활이 순탄하지 않았다. 1976년 연세대 기독학생회(SCA)에 가입하면서 ‘운동권’과 연을 맺었다. 연세대 76학번 동기인 노영민 전 문재인 정부 대통령 비서실장, 김거성 전 문재인 정부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등이 SCA 멤버였다. 군 전역 후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퇴진 운동을 벌이다 투옥되기도 했다. 옥살이 뒤에는 서울 구로동 등에서 ‘위장 취업’해 노동운동가로 변신한다. 이후 1986년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카센터를 열면서 그의 정치적 고향인 ‘노원’과 인연을 맺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눈도장을 찍은 것도 이 무렵이다. 1987년 대선 과정에서 자신의 카센터 차량을 지원하는 등 김 전 대통령에게 힘을 보탰다고 한다. 그 뒤 이해찬, 임채정 등 당시 재야인사들과 함께 1988년 평민당에 입당하면서 현실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된다.

우 의장은 1992년에는 임채정 의원 보좌관으로, 1995년에는 제1회 지방자치 선거에 뛰어들어 민주당 서울시의원이 됐다. 이후 다시 정체기를 거친다. 1998년과 2002년 노원구청장 선거에 뛰어들었지만 두 번 다 경선에서 탈락한다. 2000년 제16대 총선 공천에서도 낙천했다. 우 의장은 낙담하지 않았다. 끈질긴 도전 끝에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서울 노원구을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데 성공한다.

국회에 입성한 우 의장은 4년간 사회적 약자 보호, 차별과 불공정 시정, 민주적 권리와 경제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활동한다. 2006년 환노위 법안소위 위원장을 맡아 비정규직 보호법, 노사관계 로드맵법, 사회적 기업육성법, 공공기관의 장애인 2% 의무 고용법 등을 제·개정해 노동권 확보와 사회적 일자리 창출 등의 제도적 틀을 마련했다. 또한 임채정 전 국회의장과 ‘서울균형발전을 위한 국회의원 연구모임’을 만들어 강남·북 간 재정 불균형 해소를 위한 지방세법을 개정하는 등 강북지역 자치 재정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우 의장은 2008년 열린 제18대 총선에서 또 한 차례 쓴잔을 마신다. 대선 승리와 뉴타운 공약을 앞세워 당시 한나라당이 서울 지역구를 싹쓸이했다. 그 기세를 초선 의원이 꺾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낙담은 일렀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다. 그 뒤부터는 탄탄대로였다. 2020년 제21대 총선까지 노원구을에서 내리 4선을 한다. 그리고 지난 4월 총선에서 선거구 조정에 따라 지역구를 노원구갑으로 바꿔 5선 고지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지치지 않는 끈질김과 인내력에 낙담을 모르는 오뚝이 인생인 셈이다. 민주당 내 주류였던 ‘운동권 황태자’들과는 결이 다른 인생 역정이다. 민주당에서는 당 총재나 대표의 발탁이 아닌, 밑바닥부터 자력으로 올라온 뚝심과 열정이 사상 첫 국회의장 투표에서 끝내 승리한 원동력으로 보기도 한다. 우 의장은 2012년 민주통합당 원내대변인을 거쳐 같은 해 열린 제18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총무본부장으로 캠프 살림살이를 맡으며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낸다. 우 의원실 관계자는 “당시 대선 최초로 조성한 ‘국민펀드’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면서 18대 대선을 역대 가장 깨끗한 선거로 이끌었다”고 했다.

“내가 을 중의 을”… 與 원내대표 때 읍소하기도


▎우원식(가운데) 국회의장이 6월 10일 국회의장실에서 회동을 위해 모인 추경호(왼쪽) 국민의힘 원내대표,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2013년에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슬로건을 앞세워 민주당 최고위원이 된 우 의장은 같은 해 5월 터진 남양유업 갑질 사태를 계기로 ‘을지로위원회’ 결성을 주도하고 초대 위원장을 맡는다. 갑의 횡포를 막고 을의 눈물을 닦는 것을 목표로 한 을지로위원회는 더불어민주당의 대표 민생기구로 거듭나 2017년 전당대회에서 전국위원회로 승격했다. 우원식의 끈질김이 없었다면 해내기 어려웠다는 평가가 나온다.

우 의장은 특출한 협상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18대 대선 패배 뒤인 2018년 그는 민주통합당 원내 수석부대표를 맡아 정부 조직 협상을 이끌었다. 이때 의회 정치에서 협상력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우 의장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진 것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시절이다. 그는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의 초대 여당 원내대표 자리에 올랐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 여파로 인수위 없이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여소야대 4당 체제라는 걸림돌에 직면해 있었다.

지금처럼 여야 대치가 극에 달한 때였지만, 우 의장은 특유의 협상력을 발휘하며 여소야대 정국을 헤쳐 나가는 데 앞장섰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우 의장은 당시 야3당 원내대표들을 찾아다니면서 ‘내가 을(乙) 중의 을(乙)이다. 새 정부에 힘을 실어달라’고 읍소했다”고 전했다. 우 의장은 당시 ‘국회 정상화 합의문’ 채택이 불발된 뒤 기자간담회에서 눈물을 훔치면서 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열정과 정성은 당시 야권 정치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우 의장은 역대 최단 기간 총리 인준안 국회 통과를 비롯해 내각 인선·정부 조직 개편, 일자리 추경·예산안까지 처리하며 문재인 정부의 안정적 출발을 뒷받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의도에서는 우 의장이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심정적 민주당원을 유지하더라도, 연말 예산 국회 등 민생 현안을 위한 표결 때는 정치적 중립과 중재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실제 우 의장은 여야가 극심한 대립각을 세운 21대 국회에서도 특히 민생 문제 해결을 위해 ‘지대한’ 공을 들였다. 자영업, 중소기업, 노동자 등 현장 전문가들과 현안을 논의하는 더불어민주당 민생연석회의 수석부의장으로서 택배 과로사 문제 해결 등 사회적 대화를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민생문제는 양보 안해… 대치국회 숨통 트일까?

정치적 타협과 중재 노력들은 우 의장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성과를 내기 힘들다. 그와 호흡하는 사무총장 등 참모진들이 궁금한 이유다. 우 의장은 6월 7일 장관급인 국회 사무총장에 민주당 의원 출신인 김민기(58) 전 의원을 내정했다. 민주당 사무총장과 국회 정보위원장, 국토교통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차관급인 국회의장 비서실장에는 조오섭(56) 전 민주당 의원이 임명됐다. 조 실장은 2020년 제21대 총선 광주 북구갑에서 당선해 21대 국회에서 국토위원으로 활동했다. 당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국회의장 비서실 정무수석에는 곽현(56) 전 우원식 의원실 보좌관이, 정책수석에는 이원정(59) 전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국장이, 공보수석에는 박태서(57) 전 KBS 보도본부 시사제작국장이, 메시지수석에는 조경숙(55) 전 문재인 정부 청와대 선임행정관이 각각 선임됐다. 곽 수석은 17대 국회 때부터 우 의장을 보좌해 온 최측근이다. 이 수석은 을지로위원회 발족부터 최근까지 10여 년간 우 의장과 민생의제 해결을 주도했다. 박 수석은 2022년 중앙선관위 주관 대선 후보 TV 토론 진행 경력 등을 지녔다. 조 수석은 대통령 비서실과 민주당 원내대표실에서 연설문 작성과 메시지 기획을 담당했다. 국회 측은 “비서실을 기존 정무·정책·공보 등 3수석에서 메시지수석을 더한 4수석 체계로 개편해 소통을 강화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우 의장이 이처럼 정치력과 소통을 강조한 참모들을 인선한 만큼 아직 기대를 접기에는 이르다는 시선도 나온다.

- 최은석 월간중앙 기자 choi.eunseok@joongang.co.kr

202407호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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