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Home>월간중앙>사람과 사람

[JOA의 핫피플 & 아트(25)] 가장 한국적인 서예가 무림(霧林) 김영기 

“신(神)을 접해야 一劃으로부터 萬가지 필법이 나옵니다” 

“서예는 인성교육의 뿌리, 초·중등 정규 교과에 서예 교육 부활해야”
한국 서단의 원로… ‘한국서총(한국서예단체총연합회)’ 결성하고 서예진흥법 제정에 기여


▎무림 김영기 선생은 가장 한국적인 서예가로 평가받는 한국 서단의 대표 원로다. 1960년대 젊은 나이에 국전에 입선해 이름을 알린 이래 60여 년에 걸쳐 한국 서단 발전과 화합에 일생을 바쳐왔다. / 사진:조정화
"서예는 국격(國格)입니다. 국가의 품격을 드러낸 것이 서예인데, 학교에서 서예교육 폐지로 인성교육의 뿌리가 사라진 것 같아 오늘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혼자 쉽게 공부할 수 있는 서예교본을 편찬했습니다. 서예의 중요성 인식과 더불어 바른 서예 교육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랄 뿐입니다.” 서예가 무림(霧林) 김영기(78) 선생의 일침이었다.

우리나라는 500만 서예 인구가 있지만 ‘서예인’을 제외하면 서예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은 낮은 편이다. 60여 년 서예 인생을 살아온 무림 선생에 따르면, 서예는 단순히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담아 전달하는 것이다. 때문에 무림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좀 더 서예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 서예는 전통의 계승 발전이라는 범주를 뛰어넘어 중국, 일본 등과 비교해도 예술성 면에서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는 게 무림의 생각이다. 한국 서예는 곧 K-아트로, 세계 예술시장에 큰 동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서예 발전 위해 평생을 바친 서예 대가


▎“귀신이 쓴 글씨”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주저함 없이 써내려가는 게 무림의 특기다. ‘일획만법’의 비결은 ‘접신(接神)’에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 사진:김영기
충남 부여 출신인 무림은 1967년 제16회 국전에 입선한 이후 원곡 김기승(金基昇, 1909~2000)을 만나 20대 약관에 서예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국전에 17차례 도전해 여덟 번 입선하고 해서(楷書)로 두 번 특선을 하면서 1980년대 최연소 국전 초대작가가 되었다. 무림은 한국 서단에서 가장 한국적인 서예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특히 명망 높은 서예가들도 쉽지 않다는 ‘접신(接神)’을 통한 ‘일획만법(一劃萬法)’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특출한 능력 외에 한국 서단에서 그가 특히 존경받게 된 것은, 혼이 담긴 예술성 높은 우리 고유 서체를 개발해낸 것도 한몫 차지한다.

1990년대는 한국 서예의 중요한 변화기였다. 여러 단체가 결성돼 활발히 활동했다. 무림은 당시 그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1980년대 민간으로 주도권이 넘어온 한국미술협회에서 서예분과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된 서예 단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일부 서예인들이 한국서예협회를 발족해 서예 독립을 외치고 있던 때였다. 무림도 이런 흐름에 부응해 한국서예문화후원회와 한국서가협회를 결성했다. 이후 한국서도협회 창립을 주도해 지금까지 20여 년을 이어오고 있다. 비록 지금은 서예 단체가 4개로 나뉘어 있지만, 당시 개혁적인 흐름을 주도했다는 자부심이 크다.

또한 서예의 역사성 고취를 위해 무림은 서예가로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역할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장을 지냈고, 현재까지 한국서도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충북 영동군 황간면에 서도탑지공원을 조성해 삼국시대 서체 집자비를 건립한 금석문 단지를 만들었다. 그 외에도 전 국민 ‘붓 잡기’ 운동을 펼치며 문방사우(文房四友)가 들어 있는 ‘사보함’ 세트를 배부하거나 [서예교본]을 만들어 서예 교육 활성화를 위해 힘써왔다. 이런 활약상들에 비춰보면 무림은 서예가로서 한국 서예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림은 현재도 쉬지 않고 정진한다. 예로부터 후손에게 서체를 물려주는 주된 방법이었던 금석문 연구에 여념이 없다. 실제 그의 작품은 전국 곳곳에 금석문으로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천안 유관순 사우(祠宇)와 초혼묘 글씨, 윤봉길 의사 사적비문, 김수로왕릉중수비문 외에도 국립묘지의 김대중 대통령 묘비와 추모비문원곡체 등이 무림의 혼이 서린 작품이다. 그의 글씨는 일획만법의 절제와 조화로움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름의 초입에 서울 서초동에 있는 한국서도협회에서 무림을 만났다.

서예, 곧 글씨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60여 년 서예 글씨를 쓰면서 보고 느낀 것이, 글씨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정신을 종이 위에 접목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가 말했지요. ‘인간이 사는 100년은 풀잎의 이슬처럼 찰나에 불과하지만, 서예는 손을 통해 종이 위에 썼을 때 종이 위에 그 사람의 정신과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마음이 영원히 살아 있게 된다’고 말입니다. 서예는 단순히 문자만 형성한 것이 아니라 쓰는 사람의 정신이 글씨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격과 도덕을 두루 갖춰야 획이 제대로 나와 쓸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모양만 예쁘게 잘 쓴다고 해서 서예가 아니죠.”

서예가 길을 걷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초등학교 때 시골에서 한문 글방을 다녔습니다. 그때는 서예라기보다 붓글씨를 썼지요. 한문을 배우면서 ‘입춘대길(立春大吉)’이나 천자문, 명심보감을 쓰다가 서울에 와서 정식으로 붓글씨를 쓰게 됐습니다. 1967년 제16회 국전 때 입선하면서 글씨를 좀 열심히 하려고 당시 최고 대가인 원곡 선생 문하생으로 들어가 글씨를 쓰기 시작했지요. 이후 17년 동안 국전에 출품했는데 여덟 번 입선하고 두 번 특선했습니다. 국전이 참 어려운 시절이라 낙선도 일곱 번이나 했지요. 1980년대에 일찍 초대작가가 되었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80명 국전 초대작가 전시에 참여했는데, 제가 최연소자였지요.”

“인격과 도덕 두루 갖춰야 제대로 된 획 나와”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 있는 유관순 열사의 어록비는 무림의 글씨다. 유관순 열사가 3·1 운동 직전에 쓴 기도문이다. 무림의 글씨에서 열사의 굳센 기개와 다짐이 느껴진다. / 사진:김영기
우리 서단의 원로이십니다. 지금 우리나라 서예 현실은 어떠한가요?

“서예 종주국을 자부하는 중국도 우리나라의 서예가 이렇게 빨리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우리 서예를 좀 더 발전시키기 위해 제가 중심이 돼서 사단법인 서총(한국서예단체총연합회)을 만들었는데,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김성재 전 문화부 장관이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초대 회장을 권창륜 씨가 맡았고, 제가 회장 대행을 한 번 했지요. 앞으로 서총을 잘 발전시켜서 우리나라 서예를 최고로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술의전당에서 우리나라의 최고 서예가 23명을 초청해 전시회를 열기도 했고요. 국내 서예 단체가 몇 개 되지만 이제는 한국서예단체총연합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하면 한국 서단 전체 500만 서예 인구의 뜻이 될 수밖에 없어요. 예술이 예총을 떠나선 안 되는 것처럼 서예도 서총을 떠날 수가 없다고 봅니다.”

서예의 본질은 접신(接神)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것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대개 사람들이 신기론, 접신론을 잘 모릅니다. 저도 20년 전 글씨를 쓰다가 어떤 기운에서 글씨의 신(神)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고 나서 서예에 접신이 있다는 걸 알았지요. 접신은 오래 믿는다고 되는 게 아니고 깨달아야 되는 것처럼, 글을 오래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저도 직접 접신을 받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지요. 일반인은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 얘기해도 잘 모를 겁니다. 다행히 20년을 얘기하는 동안 중국 이론서를 놓고 보니 이게 맞아들어가니까 이제야 접신, 즉 신기론에 대해 사람들이 이해하기 시작했지요.”

피를 토하도록 공부해 얻은 서예법, 접신(接神)


▎충북 영동군 황간면에 조성된 소암서도탑지공원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옛 서체를 집대성한 집 자비(전해 내려오는 서예가의 글씨를 새긴 비)들을 세워 영구 보전되도록 했다. 무림이 공원 조성을 주도했다. / 사진:김영기
접신 경험은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제가 한국서가협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중·일 3국의 700명이, 그중에서 초서(草書)를 제일 잘 쓰는 분들이 예술의전당에서 전시를 했어요. 제가 4개월 동안 글을 쓰는데 계속 초서가 안 써지는 겁니다. 명색이 회장인데 잘못하면 망신당하겠다 싶어 계속 썼더니 나중에는 붓을 손에 들 기운마저 없게 되더군요. 이제 전시회 접수 마지막 날인데, 기진맥진해가지고 붓을 들 힘도 없이 쓰는데 갑자기 글씨가 확 나왔어요. 아시아 최고로 꼽히는 초서의 신 300명이 전시회에 저마다 글씨를 냈고, 내가 봐도 잘썼다 싶었는데, 원로 중 누군가 내 글을 보더니 ‘어? 귀신이 쓴 글씨가 왔다’고 감탄했지요. 그 일을 겪은 뒤로는 제가 글을 안 쓰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종이를 하나 갖고 다니면서 길거리에서도 쓰고, 화장실에서도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어요. 글을 쓰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1년 정도 어디서나 신들려서 썼어요. 그렇게 하루 한 작품씩 365장을 써서 예술의전당에서 전시회를 했습니다. 그 작품이 나로서는 일생의 최고작이었지요.”

접신을 하면 어떤 점이 좋은가요?

“마치 신 내리는 것처럼 어떤 기운이 내 몸을 통해서 붓 끄트머리에 닿아 나오는 느낌이지요. 어떤 기운이 몸을 통해서 종이 위에 획으로 나타나요. 글자는 획 하나만 나오면 끝나는 것이고요. 그림 그릴 때도 ‘일점만법’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점 하나 찍는 것에 만 가지 법이 들어 있다는 뜻이죠. 점 하나에서 깨달음을 얻으면 그 그림은 다 그린 거나 다름없어요. 서예에서는 이를 ‘일자만법’, ‘일획만법’이라고 합니다. 한 획 속에 만 가지 필법이 들어 있다는 말이지요. 이런 글씨는 접신하지 않으면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일획만법’은 어떻게 익힐 수 있나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글씨를 쓰는 순간에 깨달아야 하는데, 그 깨달음이 언제 오느냐?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그야말로 도인의 경지처럼 모든 잡념이 없고 오장육부가 자연과 합일이 되어 붓을 잡았을 때 ‘일획만법’이 나옵니다. 저도 하루아침에 했다고는 말을 못 합니다. 60년을 썼으니까… 40년 동안은 많이 쓰고 많이 읽고, 정말 피를 토하도록 공부했어요. 거기에 더해 자기 인격과 마음이 하나가 되면 더 좋습니다. 자기라는 존재 자체를 없애고 마음을 비우면 가능합니다. 오래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고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그게 내 것이 됩니다. 마음을 깨끗하고 순박하게 갖고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평생 서예가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서예교육은 어떤 상황인가요?

“공교육에서 서예 교과목이 없어졌어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서예는 도덕과 인격을 형성하는 데 가장 근본이 됩니다. 학생들이 서예 정신을 어려서부터 익히면 사회에 나가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국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일찍 글씨를 가르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고, 서예 교육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서예와 관련된 많은 일을 해오셨습니다. 특히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으신가요?

“충북 영동 황간 1500평 땅에 우리 선조들의 글씨를 한 자 한 자 집자해서 금석문 단지 ‘소암서도탑지공원’을 조성하고 집자비를 세웠습니다. 중국은 벌써 1500년 전에 금석문 단지를 만들었는데,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금석문 단지 하나가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우리나라 최초로 금석문단지를 만들었기에 보람을 느낍니다. 제가 후원회를 처음 조직했는데, 미협에 있으면서 서단 개혁을 위해서 초창기 후원회를 만들 때부터 고(故) 소암 박희택 범양건영 회장께서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서예 발전을 위해 서울 서초동에 약 200평 넘는 한국서도협회 공간을 만들었는데, 역시 박희택 회장님이 도움을 주셨어요.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최초 금석문 단지 조성에 보람 느껴


▎1985년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무림 김영기의 개인전 개막식 기념사진. 왼쪽부터 김영기, 장예준 전 상공부 장관의 부인, 원곡 김기승 선생, 차상원 전 서울대 교수. / 사진:김영기
우리나라 서예가 전통을 계승하고 전 세계로 나가려면 어떤 점들이 필요할까요?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 우리 서예인들이 서예의 깊은 본질을 먼저 공부하고 깨달아서 서예의 겉모습만 좋다고 내세우지 말고, 서예의 본질인 ‘접신’이라는 정말 위대한 정신을 서예인들이 이어받아 지도해 나가야 합니다. 둘째,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6년 전에 우리 서예인들이 뭉쳐 국회를 찾아가서 서예진흥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제는 서예를 얼마든지 국가에서 보장해줄 수 있는 법이 만들어졌지요. 그런데 그 혜택을 서예인들이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어서 매우 안타깝습니다.”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사진 한 장을 꼽는다면요?

“1985년 출판문화회관에서 개인전을 할 때, 당시 한국 서단의 양대 산맥이신 제 스승 원곡 김기승 선생과 일중 김충현(1921~2006) 선생이 오셔서 격려해 주셨어요. 원곡 선생은 제게 늘 ‘글씨는 재주로 쓰기보다 마음으로 써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인격적인 약속을 꼭 지켜라’ ‘시간, 돈, 말 약속을 지켜라’ 하시면서 도산 안창호 선생이 원곡 선생에게 전수하신 말씀을 제게 다시 전수해 주셨어요. 일중 선생도 제 개인전 때 전시장에 있던 한 작품을 보시고는 ‘전시장에 한 작품만 좋은 작품이 있어도 된다’고 격려해 주신 게 생각납니다. 현재 일중 선생이 남기신 인사동의 백악동부에 서예미술관이 건립돼서 후학들의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지요. 그리고 1980년 출판문화회관에서 가진 제1회 개인전 개막식 사진을 볼 때마다 제가 감개가 무량합니다.”

끝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저는 평생 서예의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가야 합니다. 소원이 있다면 한국 서예가 중국의 격을 뛰어넘는 좋은 작품을 많이 쓰는 것입니다. 또 한국 서단이 발전하길 바라고, 무엇보다 서총이 발족되어 있으니까 정부와 상의해서 서예 진흥이 이 시대에 꽃을 피웠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 JOA(조정화) -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순수사진으로 석사 학위를, 조형예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몇 차례 개인전을 열고, 광주비엔날레 등 다수 국내외 그룹전에 참여했다. 단국대, 상명대 등에서 20여 년간 강의하면서 [포토닷], [디지털카메라매거진], [미술세계], [월간중앙] 등에 예술 관련 연재와 기고 글을 써오고 있다. 저서로는 [그래서 특별한 사진 읽기](2020년)가 있다.

202407호 (2024.06.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