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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24)]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로 본 기후변화와 전쟁사 

러시아 동장군(冬將軍)은 어떻게 나폴레옹을 패퇴시켰을까 

7년 동안 다섯 차례 화산 폭발, 지구 꽁꽁 얼렸다
조선에도 기록적인 흉년 들어, 홍경래의 난 일어나


▎19세기 아돌프 노르텐의 그림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나폴레옹〉.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의 신화는 러시아의 추위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 사진:퍼블릭 도메인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점령한 직후에서 절정을 이룬다. 나폴레옹은 수도를 점령한 순간 제국 러시아의 항복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폴레옹의 착각이었다.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꿈쩍도 안 했다.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그는 항복 종용에도 그저 버텼다. 그리고 러시아의 겨울이 시작됐다. 식량 공급이 어려워진 프랑스군은 모스크바를 약탈하며 근근이 버텼지만, 그것도 며칠뿐이었다. 모스크바 약탈도 불가능해졌을 때 나폴레옹은 철수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혹독한 겨울의 공세가 프랑스군을 괴롭혔다. 제대로 먹지 못한 프랑스군은 정작 전투보다 퇴각 과정에서 다수가 희생됐다. 훗날 프랑스 군인들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동료들과 죽은 말의 사체를 놓고 싸움을 벌이고, 동료가 쓰러지면 죽기도 전에 그의 옷을 빼앗아 입고, 식인도 벌어졌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호기롭게 데려간 61만 명의 대군 중 무사히 돌아온 것은 10분의 1인 6만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의 신화는 러시아의 추위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추위는 ‘동장군(冬將軍)’이라고 불리게 됐다. 동장군의 위력은 훗날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유럽 대륙을 점령한 나치 독일군을 패퇴시키면서 다시 한번 확인됐다. 히틀러 역시 이곳에서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고 결국 전쟁에서 패배했다.

나폴레옹 무릎 꿇린 추위의 정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는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점령한 뒤 혹독한 겨울 추위로 고통을 겪는 내용이 나온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당시 기록적 추위는 화산 폭발에 의한 기후 변화 때문이라고 한다. 사진은 1908년 러시아 최초의 컬러 초상화인 [야스나야 폴랴나에서의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 in Yasnay Polyana)]. / 사진:퍼블릭 도메인
그런데 러시아로 전쟁을 벌인 나폴레옹은 추위 변수를 감안하지 않았을까? 물론 전격적인 승리와 수도 점령을 통해 겨울이 본격적으로 닥치기 전에 종결짓겠다는 구상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어쨌든 동토로 떠나는 원정길이고, 프랑스에서 러시아까지는 먼 여정이다. 추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감안을 했을 것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당시 나폴레옹과 프랑스 군대가 경험한 추위는 이상 한파에 가까웠다고 한다.

김성우 대구한의대 교수가 2023년 1월 세계적 기후학 학회지인 ‘Climatic Change(SCI 급 국제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1810년대의 기후는 1809년 동남아시아의 ‘미지의 화산’(화산 폭발 지수 5)의 폭발 이후 1812년 카리브해 세인트빈센트 섬(Saint Vincent Island)의 수프리에르 화산(La Soufriere Volcano), 1813년 일본 류큐 제도의 스와노세지마 화산(Suwanose-jima Volcano), 1814년 필리핀의 마욘 화산(Mayon Volcano), 1815년 탐보라 화산에 이르기까지 7년 동안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화산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했다고 한다. 화산이 폭발하면 화산재 등의 영향으로 지구 대기가 햇빛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면서 기온이 크게 내려가게 된다. 이렇게 화산들이 7년 동안 무려 다섯 차례나 연속해서 폭발하는 가운데 1811년 이후 지구 기온은 급락하기 시작했고, 러시아 원정을 떠났던 나폴레옹의 군대는 그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으로서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자연재해였으나, 그로서는 이를 알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1809년의 화산 폭발은 지금도 동남아시아 어디쯤으로 짐작될 뿐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폴레옹 원정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줬을 1812년의 화산 폭발은 카리브해 세인트빈센트 섬이었다. 유럽 대륙에서 수백㎞는 떨어졌을 섬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에 관해 관심을 기울일 유럽의 지도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하필 1812년을 선택한 나폴레옹으로서는 불운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원정을 1~2년 더 연기했다고 해서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다시피 1812년 이후에도 1813년 일본, 1814년 필리핀, 1815년 인도네시아 등에서 연이어 화산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특히 1815년 탐보라 화산의 폭발은 지구 역사상 가장 거대한 화산 폭발 중 하나로 꼽힌다. 이듬해 1816년은 ‘여름이 사라진 해’로 불릴 만큼 유럽에 이상 추위를 몰고 왔다. 그러니 나폴레옹이 만약 원정을 더 미뤘으면 더 참혹한 결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원정 자체를 중단했을지도 모르겠다.

조선 순조 전반기는 전 세계적 한랭기


▎1943년 2월 러시아 하리코프 근처에서 정비하고 있는 독일 제1SS기갑사단 LSSAH 병사의 모습. 제2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 ‘동장군(冬將軍)’은 유럽 대륙을 점령한 나치 독일군을 패퇴시켰다. / 사진:위키백과 캡처
위에서 인용한 김성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화산의 연쇄 폭발로 인한 기온 저하, 혹한, 단기적인 가뭄과 홍수와 장마, 이른 서리와 추운 겨울 등이 1809년 이후 1819년까지 11년 동안 지속되면서 지구촌 곳곳에는 다양한 형태의 자연적, 사회적 재난이 발생했다고 한다. 조선 역시 이런 파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 조선은 정조가 급사한 뒤 순조가 1800년부터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어받은 상황이었다. 그의 치세 전반기는 각종 재난이 이어졌다. 1809년과 1814년에는 기록적인 흉년이 들어 전국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리고 1812년 1월에는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벌어졌다. 기온이 낮아지면 따뜻한 지역보다는 서늘한 지역이 보다 치명타를 입는다. 식물 생장이 어려워지면 곡물 생산 환경이 취약한 쪽이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상 한랭기가 되면 게르만족의 이동처럼 이민족들의 남하가 이어지곤 했다. 이때도 조선에서는 전라도나 경상도 같은 남부 지역보다 평안도나 함경도 같은 북부가 더욱 열악한 상황에 놓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금 수탈 등이 멈추지 않자 결국 낫 대신 칼을 드는 쪽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홍경래의 난을 서북 지역 차별론의 연장선에서 해석하기도 하지만, 서북 지역에 대한 차별이 수백 년간 이어졌는데 굳이 이 시기에 이처럼 들고 일어난 데는 역시 먹고사는 문제가 팍팍해졌기 때문에 불만이 임계점을 넘어 폭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서도 1816~17년 기록적인 흉작이 이어지면서 농민들과 도시민들의 시위와 저항이 분출했다.

그동안 순조 시대에 대해서는 정치적 무능을 지적한 의견이 많았다. 정조가 50세로 급사하고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정순왕후가 대리청정하고, 안동 김씨 등의 세도 정치로 인해 나라가 기울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데이터들은 이 시대를 바라볼 때보다 입체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순조 치세 전반기가 전 세계적인 한랭기와 기후 불안의 한복판이었다는 점이다. 사회 동요는 조선뿐만 아니라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하필 19세기 초반에 동양과 서양에서 무능한 정치인들이 쏟아져 나왔다고만 보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순조 시대보다 앞선 영·정조 시대는 어땠을까. 영·정조 시대는 흔히 조선의 르네상스로 꼽히는 시기다. 그런데 박재정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교수에 따르면, 공교롭게도 이 시기 조선은 온난기에 속했다. 정치적 수완도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기후적으로 혜택을 본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모든 것을 다 기후 때문이라고 돌리는 것 역시 무리한 주장이다. 하지만 기후만큼 인간의 생태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도 없다. 특히 농업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때문에 어느 시대를 이해할 때는 ‘OO 때문에 망했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인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때 추위에 고생한 일본군

앞서 러시아가 기후 덕분에 각종 전쟁에서 톡톡히 재미를 본 사례를 소개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과 히틀러의 소련 침공은 번번이 가혹한 추위 앞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러시아가 주요 전쟁에서 늘 기후의 혜택을 본 것만은 아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다. 당시 나는 연수 기회를 얻어 영국 런던에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연일 이 전쟁의 여파에 대한 분석 기사가 쏟아졌다. 그중 가장 큰 이슈는 에너지 비용이었다. 러시아와 큰 경제적 연결점이 없는 한국은 전쟁의 여파가 크지 않았지만, 유럽은 매일같이 치솟는 에너지 비용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은 여전히 가스로 난방을 하는 집이 많다. 러시아가 그간 싼값으로 공급하던 가스관을 잠그자 가스비가 폭등했다. 그 피해자는 대부분 서민층이었다. 두어 달 만에 가스비가 40% 가까이 오르자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렀다. 영국 정부는 긴급 조치로 9월부터 모든 가구에 가스비 보조금을 줬다. 사실 푸틴의 노림수도 이것이었다. 겨울이 되면 더 버티기 어려운 유럽 국가들이 백기를 들고, 우크라이나 전쟁은 푸틴의 업적으로 남기겠다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가을부터 매일같이 이를 염려하는 뉴스들이 나왔다.

그런데 이해 겨울은 유럽 역사상 손에 꼽을 만큼 따뜻했다. 스페인 남부에서는 일광욕을 즐기는 기사까지 나왔다. 이런 대반전이 벌어지자 푸틴의 계획은 엉켜버렸고 유럽은 일치단결해 계속해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했다. 그간 전쟁마다 기후의 축복을 누렸던 러시아가 이번만큼은 실패했던 것이다.

드물긴 하지만 한국 역사에서도 전쟁과 기후가 연관된 경우가 있었다.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에 참여한 일본 장수들의 출신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 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해 이 전쟁에서 활약했던 일본의 주요 장수들은 대부분 규슈 출신이다. 규슈는 일본의 주요 4개 섬 중 가장 남쪽에 있다. 즉, 더위에는 익숙하지만, 추위는 별로 경험한 적이 없는 장수들이었다. 그가 이끌고 온 부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들은 이때까지 경험한 적 없는 한반도의 혹독한 겨울 추위에 몸서리를 쳤다. 결국 이들은 한겨울에 치러진 평양성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이후 따뜻한 남쪽으로 후퇴해 남해안 일대에 머물며 전쟁을 이어갔다.

특히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은 동아시아에 이상 한파가 몰아닥친 해였다. 중국에서도 한여름에 추위로 동사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정도다. 농작물의 작황 역시 좋지 않았다. 1593~1594년에 걸친 동아시아의 기근은 일본군에 치명적이었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제해권을 상실한 일본군은 조선에서 식량을 자급자족해야 했지만, 이때의 한파와 기근은 이를 어렵게 했던 것이다. 조선으로 넘어온 일본군 15만 명 중 5만 명이 사망했는데 대부분 굶주림과 추위, 질병으로 사망했다.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407호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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